좋은 말씀/김재홍목사

창조의 일꾼 (롬 6:12~18) / 김재홍목사

새벽지기1 2024. 9. 21. 07:05

'그러므로 여러분은 죄가 여러분의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해서, 여러분이 몸의 정욕에 굴복하는 일이 없도록 하십시오. 그러므로 여러분은 여러분의 지체를 죄에 내맡겨서 불의의 연장이 되게 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여러분은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난 사람답게, 여러분을 하나님께 바치고, 여러분의 지체를 의의 연장으로 하나님께 바치십시오. 여러분은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으므로, 죄가 여러분을 다스릴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우리가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에 있다고 해서, 마음 놓고 죄를 짓자는 말입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아무에게나 자기를 종으로 내맡겨서 복종하게 하면, 여러분은, 여러분이 복종하는 그 사람의 종이 되는 것임을 알지 못합니까? 여러분은 죄의 종이 되어 죽음에 이르거나, 아니면 순종의 종이 되어 의에 이르거나,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은, 여러분이 전에는 죄의 종이었으나, 이제 여러분은 전해 받은 교훈의 본에 마음으로부터 순종함으로써, 죄에서 해방을 받아서 의의 종이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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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으신 주님께서 주시는 위로와 평안과 새롭게 하시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 위에 함께하시기를 빕니다. 오늘은 9월의 둘째 주일이며 창조절 제 2주이기도 합니다. 우리를 고치시고 새롭게 창조해 주시는 주님의 손길이 점점 황폐해지는 이 세상과 점점 혼란스러워지는 이 사회 위에 함께하시기를 빕니다.

1. 나쁜 인간 뒤에는 나쁜 사회가


여러분, 딥 페이크 Deep Fake라는 말을 들어보셨지요? 컴퓨터의 인공지능을 이용해 어떤 사람의 사진이나 영상에 다른 사람의 얼굴을 붙여 가짜 사진이나 영상을 만드는 합성 기술을 말합니다. 작년에 프란체스코 교황이 명품 롱패딩을 입은 사진이 화제가 되었습니다. 검소하게 사시는 분이라 ‘이상하다’ 생각했는데, 그 사진은 인공지능이 딥페이크로 만든 가짜 사진이었습니다. 그런데 정말 진짜처럼 감쪽같았습니다. 요즘 10대 20대 남성들 사이에서 이 기술을 이용해 음란물을 만들고 유포하는 범죄 행위가 크게 번지고 있다고 합니다. 피해자들은 대부분 여성인데 정신적인 충격이 커서 정신과 치료를 받거나 다니던 직장을 그만 두는 경우들도 생기고 있습니다. 그런데 피해자가 크게 늘어나고 있는 것에 비해 범인 검거율이 낮고 검거가 되더라도 집행유예가 많아 그러한 범죄가 줄어들지 않고 있다고 합니다.

딥 페이크는 분명한 범죄행위입니다. 사람을 도구화하고 수단화하고, 인격을 모독하고 관계를 깨뜨리는 범죄행위입니다. 그런 이미지나 영상을 제작하고 유포하고 시청하는 행위는 근절되어야 하고, 그런 행위를 한 사람에 대한 엄한 처벌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런데 그와 관련된 뉴스를 보면서 이런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런 불법적 행위를 한 10,20대들도 잘못한 것이지만, 오늘 우리사회 곳곳에 스며든 그릇된 습성이 그들에게 영향을 끼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람이 타자를 존중하지 못하고 나의 욕망을 위해 쉽게 타자를 도구화하고 수단화하는 분위기가 우리 사회에 만연해 있습니다. 남자가 여자를, 회사가 노동자를, 정치인이 국민을, 힘 있는 자가 약한 자를, 인간이 자연을 도구화하고 수단화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우리 사회에 서로를 존중하고 귀히 여기는 문화가 가득했다면 그들이 그렇게 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나쁜 인간 뒤에는 나쁜 사회가 있습니다. 누군가 ‘나쁜’의 어원을 ‘나뿐’으로 푸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게 정확한 것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그럴듯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자기만의 욕망, 자기만의 만족, 자기만의 이득을 앞세우는 사람이 나쁜 사람입니다. 나의 욕망과 만족과 이득을 위해 너의 고통과 슬픔과 눈물을 외면하는 사람이 나쁜 사람입니다. 그런 나쁜 사람들이 모여 이루어진 사회가 나쁜 사회이고 나쁜 사회에서는 새로운 나쁜 사람이 만들어지기 쉽습니다. 나쁜 사람 하나를 처벌하기에 앞서 우리 사회가 나쁜 사회가 되어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사회를 이끌어가는 지도자들이 힘써야 할 대목이 바로 이 대목입니다. 경제, 외교, 발전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존중입니다. 사람이 사람을 귀하고 중하게 여기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딥 페이크는 존중이 빠진 기술발전이 얼마나 폭력적이고 파괴적일 수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사람 존중이 빠진 경제, 사람 존중이 빠진 외교 또한 얼마든지 폭력적이고 파괴적일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2. 의의 도구와 불의의 도구


바울은 로마서 5장과 6장에서 죄와 은혜에 대해 말했습니다. 5:20을 읽어보겠습니다. “그러나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더욱 넘치게 되었습니다.” 6:1도 읽어보겠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무엇이라고 말을 해야 하겠습니까?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여전히 죄 가운데 머물러 있어야 하겠습니까?”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더욱 넘치게 되었다는 말은 죄를 많이 지을수록 많은 은혜를 받는다는 말이 아니라, 죄로 인해 아파하고 깊이 반성하는 만큼 은혜를 받는다는 말입니다. 바울은 죄로 인해 아파하고 깊이 반성하여 은혜를 경험한 사람은 죄에 대해 죽은 자가 되어 더 이상 죄 가운데 살아서는 안 된다고 말했습니다. 6:2말씀입니다. “우리는 죄에는 죽은 사람인데, 어떻게 죄 가운데서 그대로 살 수 있겠습니까?”

‘죄에 대해 죽은 사람’, 어려운 말입니다. 비현실적인 말처럼 들리기까지 합니다. 어찌 인간이 죄인과 의인으로 딱 구분될 수 있습니까? 죄와 의 이 둘 사이를 오가는 것이 인간이지 않습니까? 바울 자신도 로마서 7:22~24에서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한탄하지 않았습니까? 바울은 6장에서 ‘그리스도와 함께’와 ‘그리스도와 연합하여’라는 단어를 반복해서 사용했습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보면서 사람이 ‘죄에 대하여 죽은 사람’으로, 죄의 지배를 받지 않고 온전히 하나님의 지배를 받는 사람으로 사는 것이 가능하다고 보았습니다. 그리스도께서 하셨으니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한 사람이 되면 우리도 그렇게 살 수 있지 않겠냐, 말한 것입니다.

바울은 로마서 6:13에서 중요한 말을 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여러분의 지체를 죄에 내맡겨서 불의의 연장이 되게 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여러분은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난 사람답게, 여러분을 하나님께 바치고, 여러분의 지체를 의의 연장으로 하나님께 바치십시오.” 바울이 ‘죄에 대해서 죽은 자가 되어야 한다’, ‘죄에게 우리의 지체를 맡겨서는 안 된다’ 말하며 죄에서 벗어남을 강조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통해 죄에서 구원 받았다고, 은혜 받았다고 말하고, 새로운 생명을 얻었다고 말은 하지만 실제로는 죄의 도구, 불의의 도구가 되어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그래서는 안 된다고, 예수님으로 인해 구원 받고 은혜 받고 새생명을 얻었다면 죄와 불의의 도구가 아니라 하나님과 의의 도구가 되어 살아야 한다고 힘주어 말한 것입니다. 죄는 헬라어로 ‘하마르티아’라고 말합니다. 과녁을 벗어났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나뿐’이 될 때, 나의 욕망, 나의 만족, 나의 이득만을 바라보며 살아갈 때 하나님의 과녁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하나님의 과녁은 너의 고통, 너의 아픔, 너의 눈물입니다. 하나님의 과녁을 벗어나 살아갈 때 우리는 죄와 불의의 도구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와 반대로 우리가 하나님의 과녁을 맞추며 살아갈 때 우리는 하나님과 의의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3.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


바울은 갈라디아서 5:13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부르셔서, 자유를 누리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그 자유를 육체의 욕망을 만족시키는 구실로 삼지 말고, 사랑으로 서로 섬기십시오.” 로마서 6장의 말씀과 같은 말씀입니다. 인간은 의의 도구와 불의의 도구, 둘 중 어느 하나의 도구가 될 수 있는 선택의 자유가 있습니다. 바울은 우리가 자유하다고 해서 불의의 도구가 되어 육체의 욕망을 따라 살지 말고, 의의 도구가 되어 사랑하고 섬기며 살아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바울은 우리가 불의의 도구가 될 때 일으키는 많은 폐해를 나열합니다. 음행, 더러움, 방탕, 우상숭배, 술수쓰기, 원수맺음, 다툼, 시기, 분냄, 분쟁, 분열, 파당, 질투, 술취함, 흥청망청 먹고 마심, 놀음 등입니다. 그런데 그뿐이겠습니까. 더 많겠지요. 바울은 우리가 불의의 도구가 되어 육체의 욕망을 따르게 될 때 결국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지 못한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상속 받지 못한다는 말은 죽어서 천국에 가지 못한다는 말일 수도 있지만, 그렇게 사는 자를 통해서는 이 땅에 하나님 나라는, 나라다운 나라는 결코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말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5장에서 우리가 의의 도구가 되어 살 수 있는 방법도 소개합니다. 그것은 성령의 열매를 맺으며 사는 것입니다.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는 다음과 같습니다. 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들은 공통점이 있습니다. 이들은 모두 관계를 기반으로 한 덕목입니다. 나와 너 사이에 그것이 있을 때 그 사이는 하나님 나라가 됩니다. 나와 너 사이에 사랑 희락 화평 오래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가 있다면 그 사이는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공간이 됩니다.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는 모두 의의 도구입니다. 그런데 당연한 말이지만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먼저 성령의 아홉 가지 씨앗을 심어야 합니다.

예전에 우리 청파교회도 한 달에 한 번 수요저녁 기도회를 했습니다. 그때 교우들과 한 동안 ‘성령의 아홉 가지 씨앗 심기 기도’를 드린 적이 있습니다. 기도의 방법은 이렇습니다. 먼저, 우리의 마음 밭에 구멍을 파고 성령의 씨를 하나씩 심는 이미지를 떠올립니다. 이후 다음과 같이 기도합니다. “주님, 사랑의 씨앗을 심었습니다. 사랑의 열매를 맺게 하소서.” 그런 후 손으로 흙을 덮고 다독여 주는 이미지를 떠올립니다. 동일한 방식으로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 아홉 개의 씨앗을 차례대로 천천히 심습니다. 몇 분 걸리지 않습니다. 그렇게 기도하고 나면 좋은 것으로 내면을 가득 채워서 그런지 마음이 든든해지고 따스해지고 밝아지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성령의 아홉 가지 씨앗 심기 기도’는 어떤 책에서 영감을 받아 만든 기도였습니다.

4. 창조의 일꾼


장 지오노의 <나무를 심은 사람>이란 책 이야기를 잠깐 해 드리겠습니다. 1910년대 프랑스의 남동부 프로방스 고산지대로 한 청년이 여행을 떠납니다. 고산지대였지만 나무가 거의 없는 황량한 곳이었습니다. 사흘만에 마을을 만났는데 버려진 마을이었습니다. 집들은 허물어졌고 마실 물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 마을은 숯을 만들어 도시에 내다 파는 나무꾼들이 살던 마을이었습니다. 그들은 서로 경쟁했고 자주 다투었고 나무가 사라지자 나중에는 모두 마을을 떠났습니다. 여행자는 다행히 한 양치기를 만났습니다. 양치기는 산 속에서 혼자 살면서 양을 쳤습니다. 양치기는 이 땅이 황량해진 것은 나무가 없어졌기 때문이라 여기고 매일 나무를 심었습니다. 그 양치기는 매일 밤 도토리 자루에서 튼실하고 흠 없는 도토리 100개를 정성껏 골랐고, 그 다음 날이면 그 100개의 도토리를 산 이곳저곳에 심었습니다. 그러게 하기를 3년, 황량했던 산의 한 귀퉁이에 만 그루의 떡갈나무 숲이 생겼습니다. 10만 개의 도토리를 심었는데 그 중 2만 개가 싹을 틔웠고, 그 중 만 그루는 들쥐나 산토끼들이 갉아먹고 만 그루만 남았습니다.

그 양치기의 이름은 엘제아르 부피에였고 55세였습니다. 부인과 아들이 있었으나 둘 다 병으로 죽고 혼자 고독하게 살아가게 되었는데, 이 죽어가는 땅을 숲으로 바꾸어 보기로 결심했던 것입니다.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고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났지만 양치기는 꾸준히 묵묵히 계속 나무를 심었습니다. 중간에 위기가 있었지만, 숲은 십 킬로미터 이상의 크기로 커져갔습니다. 산 아래 마을 사람들은 숲이 저절로 생겨났다며 의아해했습니다. 숲이 생기자, 골짜기에 개울물이 흐르기 시작했고, 숲이 생기고 물이 흐르자 새들이 날아왔습니다. 그리고 도시의 삶에 지친 사람들이 들어와 마을을 이루어 살기 시작했습니다.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축제 소리가 마을에서 끊이지 않았습니다.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만 명이 넘었습니다. 35년간 한 사람의 영혼이 담긴 묵묵한 노동이 황량했던 땅을 약속의 땅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양치기의 삶을 옆에서 지켜보았던 주인공은 그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일꾼이었다.” 그리고 이런 말도 했습니다. “파괴의 영역이 아닌 다른 영역에서는 인간이 하나님처럼 유능해질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참으로 감동적인 삶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인간은 창조의 영역에서만이 아니라 파괴의 영역에서도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는 것을. 인간은 엄청나게 창조적인 일을 할 수도 있는 존재이지만 엄청나게 파괴적인 일도 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 불의의 도구가 되어 살아가는 이들이 있습니다. 물론 그들도 겉으로는 정의를 말하고, 자유를 말하고, 평화를 말하지만 실상 그것이 불의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가 말한 정의와 자유와 평화가 결국 파괴를 일으킨다면 그가 말한 정의 자유 평화는 의의 탈을 쓴 불의인 것입니다. 러시아의 푸틴, 이스라엘의 네타냐후와 같은 이들이 불의의 도구요 파괴의 일꾼입니다. 그러나 그들뿐 아니라 우리도 ‘나뿐의 세계’에 빠져 나의 욕망과 이득과 만족만을 바라보며 다른 이의 고통과 아픔과 눈물을 보지 못한다면 우리 또한 불의의 도구요 파괴의 일꾼입니다.

우리의 주 예수 그리스도는 의의 도구요 창조의 일꾼으로 사셨습니다. 자기의 욕망과 이득과 만족을 비우고 다른 이의 고통과 아픔과 눈물을 당신의 고통과 아픔과 눈물로 받아들이며 사셨습니다. 병든 자, 귀신 들린 자, 소외된 자를 귀히 여겨 그들을 하나님의 자녀로 재창조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뛰어난 창조의 일꾼이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손을 내미시며 그 일을 함께하자고 하십니다. 기쁨으로 그 초대에 응합시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모든 생명을 귀히 여기며 묵묵하고 꾸준하게 매일 매일 하나님 나라의 씨앗을 심읍시다. 그렇게 3년, 10년, 20년 하나님 나라의 씨앗을 심어간다면 사람과 생명을 도구화하고 수단화하는 이 황폐한 땅도 언젠가 푸른 빛 넘실거리는 생명과 평화의 숲으로 변할 것입니다. 우리 청파 믿음의 공동체가 주님과 함께 기쁨으로 그 일을 감당해 나가길 간절히 기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