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김재홍목사

거룩, 모두의 고향 / 김재홍목사

새벽지기1 2024. 9. 23. 06:40

밭에서 난 곡식을 거두어들일 때에는, 밭 구석구석까지 다 거두어들여서는 안 된다. 거두어들인 다음에, 떨어진 이삭을 주워서도 안 된다. 포도를 딸 때에도 모조리 따서는 안 된다. 포도밭에 떨어진 포도도 주워서는 안 된다. 가난한 사람들과 나그네 신세인 외국 사람들이 줍게, 그것들을 남겨 두어야 한다. 내가 주 너희의 하나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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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으신 주님께서 주시는 위로와 평안과 새롭게 하시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 위에 함께하시기를 빕니다. 추석 명절을 앞두고 있습니다. 고향 다녀오실 때 모두 안전하게 다녀오시길 바라고, 부모님 형제자매 친지들과 평안하고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오시길 바랍니다.

1. 에덴을 파괴하는 사람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 말하는 추석명절이 코앞이지만 요즘 우리 사회 분위기는 여유롭지도 너그럽지도 못합니다. 이곳저곳에서 싸움과 갈등과 긴장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여야 갈등도 심각하지만 정부와 의료계의 갈등 또한 심각합니다. 지난주에 행해진 여론조사에서 국민의 약 55%는 정부와 의료계의 갈등으로 인한 의료대란 사태를 걱정하고 있다고 답했습니다. 의대증원수와 시기를 재논의해야 한다는 의견은 약 67%였습니다. 응급 환자가 이 병원 저 병원을 떠도는 소위 응급실 뺑뺑이가 전년 대비 57%나 늘어났습니다. 응급상황에서 제대로 된 진료와 치료를 받지 못하고 죽어가는 환자가 더 이상 발생하면 안 됩니다. 정부와 의료계가 너무 오랫동안 팽팽히 맞서고 있습니다. 자기만 맞고 상대는 틀렸다 생각합니다. 그래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서로 양보해야 합니다. 그 어떤 명분도 국민의 생명과 안전한 일상보다 중요할 수는 없습니다. 국민의 생명과 안전한 일상이야말로 모두가 지켜야 할 가장 큰 가치이며 모두의 터전입니다.

에덴동산에서는 모든 것이 조화로웠습니다. 하나님은 자연만물을 지으시고 보시기에 ‘참 좋다’고 하셨습니다. 인간과 하나님의 관계, 인간과 인간의 관계, 인간과 자연의 관계, 모든 관계가 조화로웠습니다. 모든 관계가 평화롭고 조화로웠던 에덴은 인류의 첫 사람 아담과 하와만의 고향이 아니라 모든 인류가 마음속에서 그리워하는 고향, 본향입니다. 그러나 에덴의 평화와 조화는 아담과 하와에 의해 깨어집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처럼 되고 싶었습니다. 선악을 판단하는 절대성을 갖고 싶었습니다. 그들은 선악과를 먹고 선악을 판단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판단은 올바른 판단이 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를 중심에 둔 판단이었기 때문입니다. 아담은 하와 때문에 자기가 잘못을 저지르게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하와는 뱀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둘 모두 자기가 볼 때는 맞는 판단 같았겠지만, 틀린 판단이었습니다. 아담 하와 둘 모두 다른 존재 때문에 죄를 지은 것이 아니라 자기의 욕심 때문에 죄를 지은 것입니다. 자신 때문이 아니라 너 때문이라 판단하니 너를 정죄하게 되었습니다. 그릇된 판단에서 그릇된 정죄가 나왔습니다. 하와에게 ‘내 살 중의 살이요 뼈 중의 뼈로다’, 사랑의 노래를 불렀던 아담은 화와를 가리키며 ‘하나님께서 만드신 저 여자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릇된 판단과 정죄에서 그릇된 관계, 갈등이 발생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를 에덴에서 쫓아내셨습니다. 그들은 에덴의 동쪽에 가서 살게 되었습니다. 에덴은 풍요로운 곳이었습니다. 풍요로웠기에 여유로운 곳이었습니다. 살기에 좋았습니다. 그러나 에덴의 동쪽은 황폐한 곳이었습니다. 황폐했기에 고된 곳이었습니다. 종일토록 수고해야 먹거리를 간신히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에덴이 따로 있고 에덴의 동쪽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 그 둘은 같은 장소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순리를 따라 살아갈 때 경험하는 세계가 에덴이고, 하나님의 순리에서 벗어나 살아갈 때 경험하는 세계가 에덴의 동쪽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실향, 고향을 잃은 것이 아니라 파향, 고향을 자기 손으로 파괴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아담과 하와의 후손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만든 ‘그릇된 절대화 - 그릇된 판단 - 그릇된 정죄 – 그릇된 관계’의 패턴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그랬듯 우리는 고향 에덴을 파괴하여 에덴의 동쪽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의 후손인 우리는 과연 에덴을 회복할 수 있을까요?

2. 에덴을 회복하는 방법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에 광야에 나가 악마에게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이 겪으신 시험은 세 가지였습니다.

첫째 시험. 사십 일 금식 후 배가 고픈 예수님께 악마가 와서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이 돌들로 빵이 되라고 말해보아라.”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이에 대해 “사람이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다.”라는 신명기의 말씀으로 답하셨습니다. “내 삶의 동력은 인간의 욕망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이다.”라는 뜻으로 새길 수 있겠습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4:34에서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행하는 것이다.” 말씀하시기도 하셨습니다. 그런데 돌로 빵을 만들어보라는 악마의 요구를 예수님께서 거절하신 이유를 이렇게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오병이어의 기적도 일으키셨던 분이기에 충분히 돌로 빵을 만드실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나의 욕구 충족을 위해 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써야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위대함은 하기 어려운 일을 해냄으로써 발휘되기도 하지만, 때로는 할 수도 있는 일을 의를 위해서 하지 않음으로써 발휘되기도 합니다.

둘째 시험. 악마는 예수님을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여기에서 뛰어내려 보아라. 하나님의 천사들이 손으로 너를 떠받쳐서, 너의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할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명예욕 또한 식욕만큼 강력한 인간의 욕구 중 하나입니다. 성전 꼭대기에서 떨어졌는데 하나도 다치지 않을 뿐 아니라 사뿐히 땅위에 내려앉는다면, 그는 사람들로부터 많은 영광을 받을 것이요, 하나님이 보내신 분이다,라는 말을 듣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악마의 제안을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는 신명기의 말씀으로 거절하셨습니다. 불가능한 일을 내게 큰 영광과 명예가 돌아온다고 하여 하나님께 간청하는 것은 올바른 간청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크게 믿는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을 크게 이용하려는 속셈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 순종할 뿐 자기의 욕망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을 이용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뿐 아니라 그 어떤 사람도 이용하지 않으셨습니다.

셋째 시험. 악마는 예수님을 매우 높은 산으로 데리고 가서, 세상의 모든 나라와 그 영광을 보여주며 말했습니다. “네가 나에게 엎드려서 절을 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겠다.” 예수님은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라는 신명기의 말씀으로 답하셨습니다. 권력욕 또한 식욕 명예욕만큼이나 강력한 인간의 욕망 중 하나입니다. 악마가 보기에는 예수님이 하시려는 일과 자신이 이룬 일이 같은 일로 보였기에 그런 제안을 한 것입니다. 세상을 통치하는 일. 그런데, 악마의 통치와 예수님의 통치는 본질적으로 다른 통치였습니다. 악마의 통치는 권력과 힘으로 사람들을 억압해 사람들로 하여금 억지로 악마를 경배하게 만드는 통치였지만, 예수님의 통치는 헌신과 사랑으로 사람들을 섬겨 사람들로 하여금 기꺼이 하나님을 경배하게 하는 통치였습니다. 시인 반칠환은 <때>라는 시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무릎이 구부러지는 건 / 세상의 아름다움을 보았을 때 / 굽히며 경배하라는 것이고 / 세상의 올곧지 못함을 보았을 때 / 솟구쳐 일어나라는 뜻이다. 예수님은 하나님께는 무릎을 굽혀 경배하였지만, 그릇된 권력에게는 무릎을 굽히지 않으셨습니다.

저는 이 세 가지 시험이 공생애를 앞두고 예수님의 메시아 됨을 시험하기 위한 통과의례였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여기에는 더 큰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공생애의 목적이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은 무엇을 위해 공생애 활동을 하셨습니까?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이루기 위해서였습니다. 앞서 드린 말씀과 연관지어 말하면 예수님은 에덴의 동쪽을 에덴으로 다시 바꾸기 위해, 인간의 손에 의해 파괴된 에덴을 회복하기 위해서 공생애 활동을 하신 것입니다. 욕망을 삶의 동력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삶의 동력으로 삼는 것, 나를 위해서 할 수도 있는 일을 하나님과 너를 위해 하지 않는 것, 나의 과도한 욕망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과 사람을 이용하지 않는 것, 힘과 권력으로 사람을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섬기는 것, 나의 욕망을 이룰 수 있다고 하여 불의하고 부정한 것에 무릎 꿇지 않는 것. 그것이 에덴의 동쪽을 에덴으로 회복하는 방법이요,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방법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내내 그렇게 사셨습니다. 레위기 19장에 나온 가을 풍경은 그런 예수님을 닮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출애굽하여 약속의 땅에 들어가 살게 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거룩하게 살라고 명하셨습니다. “내가 거룩함 같이 너희도 거룩하여라.” 레위기 19장에는 이스라엘 백성이 거룩하게 살아갈 수 있는 방법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부모를 공경하라. 안식일을 지켜라. 우상을 만들지도 말고 섬기지도 말라. 십계명과 비슷한 말씀들이 나오다가 9절 10절에는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밭에서 난 곡식을 거두어들일 때에는, 밭 구석구석까지 다 거두어 들여서는 안 된다. 거두어들인 다음에, 떨어진 이삭을 주워서도 안 된다. 포도를 딸 때에도 모조리 따서는 안 된다. 가난한 사람들과 나그네 신세인 외국 사람들이 줍게, 그것들을 남겨 두어야 한다.” 가을 추수가 끝난 밭에 거두어들이지 않고 남겨둔 한 모퉁이의 곡식이 거룩입니다. 나를 내 욕심으로 가득 채우지 않고 너를 위해 밭에 한 모퉁이를 남겨 두는 마음이 거룩이며, 그것이 무너진 고향, 에덴을 회복하는 방법입니다.

3. 거룩, 모두의 고향


명절이 다가오니 고향도 생각나지만, 돌아가신 할머니 권사님들이 생각납니다. 명절이 다가오면 교회 가까이 사시던 할머니 권사님이 평일에 교회를 방문하셨습니다. 사무실에서 일을 하고 있는데 누군가 밖에서 들릴 듯 말 듯 문을 살짝 노크합니다. 나가보면 할머니 권사님께서 수줍게 웃으며 서계셨습니다. 작은 선물과 직접 만드신 명절음식을 전해 주고 가셨습니다. ‘목사님, 명절 잘 보내세요. 감사합니다.’라는 인사와 함께. 명절마다 이루어지는 일이었지만, 그때마다 마음이 찡했습니다. 그 권사님들은 연세가 많으셨지만 교회의 숨은 일꾼들이셨습니다. 매일 새벽, 기도의 자리를 지키셨고, 평일 저녁에 부교역자들이 진행하는 성경공부자리에도 나와 앉아계셨습니다. 또 토요일 오후나 주일 아침에는 교회 주방에 나와 교인들이 먹을 반찬을 만드시고, 두부를 부치기도 하시고, 여름에는 콩국을 만들기 위해 콩을 직접 갈기도 하셨습니다. 어느 일 하나 쉬운 일이 아니지요. 그 어르신들의 헌신과 사랑 덕에 청파교회는 좀 더 고향 같은 공간이 될 수 있었습니다.

미국 뉴욕 브로드웨이에 한국인이 운영하던 샌드위치 가게가 있었습니다. 김민 선생님은 무려 한 자리에서 39년간 가게를 운영하셨습니다. 80년대 미국으로 건너가 맨땅에 헤딩하듯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힘겹게 돈을 모아 연 가게였습니다. 1년이면 1월 1일 하루 빼고 364일을 아침 6시부터 8시까지 매일 14시간을 일했습니다. 브로드웨이라 공연 극장이 많아, 일반 직장인뿐 아니라 극장 배우와 관계자, 관람객들이 주 고객이었습니다. 그가 나이가 많아져 가게 운영을 더 이상 할 수 없게 되어 폐업하던 날, 브로드웨이의 극장의 배우들과 관계자와 단골손님들이 가게 앞길을 가득 메우고 그의 은퇴식을 해 주었습니다. 300여 명이 은퇴축하금으로 이천사백만원을 모아 전달했습니다. 그 샌드위치 가게는 그냥 샌드위치 가게가 아니었습니다. 지역 언론도 그 가게의 폐업을 보도했는데 인터뷰에서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는 우리를 먹여 살린 형제이자 친구다.” “여긴 점심 이상의 것이 있다. 마치 가족, 친구 집을 방문하는 것 같다.” 김민 선생님은 사람들을 손님이라기보다는 사람으로 맞아 주었고 정성과 친절을 다했던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그는 브로드웨이 케어라는 단체를 통해 어려운 많은 이를 후원하기도 했습니다. 늘 잠이 부족했던 그는 저녁에 차를 몰고 퇴근할 때 쏟아지는 잠을 쫓기 위해 노래를 불렀습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고향을 찾아가네 / 나는 지금 홀로 남아서 / 빌딩 속을 헤매이다 초라한 골목에서 뜨거운 눈물을 먹는다 / 저기 저 별은 나의 마음을 알까 나의 꿈을 알까 / 괴로울 땐 슬픈 노래를 부른다 / 슬퍼질 땐 차라리 나 홀로 눈을 감고 싶어 / 고향의 향기 들으면서” 조용필의 <꿈>입니다. 김민 선생님은 눈물 나는 타향, 거친 도시와 사람들 속에서 고향을 그리워하지만 않았습니다. 성실과 정성과 친절로 타향살이에 지친 이들의 고향이 되어 주었습니다. 그는 삭막한 도시 한복판에 작은 에덴을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는 샌드위치 가게의 주인이었지만 그에게는 등대지기의 거룩한 마음 같은 것이 있었습니다.

모두의 고향인 에덴이 무너지고 있습니다. 에덴의 동쪽을 다시 에덴으로 세워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거룩을 회복해야 합니다. 거룩은 나를 나로 가득 채우지 않는 것입니다. 나를 절대화하지 않는 것입니다. 쉽게 판단하지 않고 쉽게 정죄하지 않는 것입니다. 관계를 조화롭게 유지하는 것입니다. 욕망에 이끌려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이끌려 사는 것입니다. 나의 욕망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과 사람을 이용하지 않는 것입니다. 나의 욕망을 이루기 위해 불의하고 부정한 권력에 무릎 꿇지 않는 것입니다. 너를 위해 마음 밭의 한 모퉁이를 남겨 두는 것입니다. 고향을 잃은 채 살아가는 이를 위해 고향이 되어 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거룩입니다. 거룩은 모두가 조화롭고 평안하게 살아갈 수 있는 모두의 고향입니다. 우리 청파공동체가 그렇게 거룩하게 살아갈 수 있길, 서로의 고향이 되어줄 수 있길, 무너진 에덴의 동쪽을 다시 에덴으로 만들어갈 수 있길 간절히 기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