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김재홍목사

산 사람 (삼상 19:19~24) / 김재홍목사

새벽지기1 2024. 10. 1. 04:37

'다윗이 라마의 나욧에 있다는 소식이 곧 사울에게 들어갔다. 사울은 다윗을 잡아 오라고 부하들을 보냈다. 그들이 가서 보니, 예언자들 한 무리가 사무엘 앞에서 춤추고 소리치며, 예언을 하고 있었다. 그 순간 그 부하들에게도 하나님의 영이 내리니, 그들도 춤추고 소리치며, 예언을 하였다. 사람들이 사울에게 이 소식을 알리니, 사울이 다른 부하들을 보냈으나, 그들도 춤추고 소리치면서, 예언을 하는 것이었다. 사울이 다시 세 번째로 부하들을 보내니, 그들도, 마찬가지로 춤추고 소리치면서, 예언을 하였다. 드디어 사울이 직접 라마로 갔다. 그는 세구에 있는 큰 우물에 이르러, 사무엘과 다윗이 어디에 있는지를 물었다. 사람들은, 그 두 사람이 라마의 나욧에 있다고 대답하였다. 사울이 거기에서 라마의 나욧으로 가는데, 그에게도 하나님의 영이 내려서, 그는 라마의 나욧에 이를 때까지 계속하여 춤추고 소리치며, 열광 상태에서 예언을 하며 걸어갔다. 사무엘 앞에 이르러서는, 옷까지 벗어 버리고 춤추고 소리치면서 예언을 하고 나서, 그 날 하루 밤낮을 벗은 몸으로 쓰러져 있었다.'


좋으신 주님께서 주시는 위로와 평안과 새롭게 하시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 위에 함께하시기를 빕니다. 저희는 이렇게 좋은 가을날 이렇게 좋은 곳에 와서 하나님을 예배하니 참 좋습니다만, 지금 이 시간에도 레바논에서는 이스라엘이 쏜 미사일에 곳곳이 무너지고 수많은 사람들이 죽고 있습니다. 폭격으로 700여 명이 죽었고, 20만 명의 사람들이 집과 고향을 버리고 피난길에 올랐습니다. 가자지구처럼 희생자 다수가 민간인이었습니다. 미국과 프랑스 등 서방국가들은 이스라엘에게 21일간의 휴전을 제안했지만 이스라엘은 이를 거절하고 지상군 투입을 준비 중에 있습니다. 계속 싸우겠다는 의지를 피력한 것입니다. 부디 생명과 평화의 주님께서 그 참혹한 땅에 포성이 멎게 하시고 더 이상의 피해가 없게 해 주시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1. 산, 하나님을 만나는 곳


청파, 푸른언덕교회가 오래간만에 북한산 자락 밑, 푸른언덕 아래에 모여 하나님을 예배합니다. 산에 왔으니 ‘산’에 대한 말씀을 나누어볼까 합니다. 산 좋아하시는 분들 많이 있으시죠? 저도 산에 가는 것을 좋아하는 편입니다. 연암 박지원은 사신으로 청나라에 가게 되었는데 산길을 가다가 눈앞에 광활한 요동벌판이 펼쳐진 것을 보고는 이렇게 소리쳤습니다. “아, 참 좋은 울음터로다. 한바탕 울만하구나” <열하일기>의 ‘호곡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왜, 높은 곳에서 광활한 벌판을 보았는데 눈물이 난다고 했을까요? 독일의 신학자 루돌프 오토는 박지원이 느꼈던 것과 같은 감정을 ‘누미노제’라고 표현했습니다. 거룩에 대한 감정이라고 번역할 수 있는 누미노제는 크고 거대한 존재 앞에 섰을 때 인간이 느끼게 되는 일종의 종교적인 감정을 말합니다. 저도 그와 같은 경험을 몇 번 산에 올랐다가 한 적이 있습니다. 제주도에 있는 다랑쉬 오름을 오를 때였습니다. 다랑쉬 오름은 오름 중에 크고 높은 오름으로 오름의 여왕이라 일컬어지는 오름입니다. 거의 정상부근에서 뒤를 돌아보았는데 신비로우면서 넓고 시원한 풍경이 펼쳐져 있었습니다. 그 풍경을 보면서 저도 모르게 눈물이 났습니다. 그리고 산티아고 순례 중 용서의 언덕이라는 산에 올라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끝없이 광활하게 펼쳐진 스페인의 대지를 보면서 그런 경험을 했던 적이 있습니다. 코끝이 찡하고, 내가 정말 작은 존재로 느껴지는 동시에 내가 하나님 앞에서 안에서 살아가는 존재임이 온몸으로 느껴지는 경험을 했습니다.

산은 여러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자연의 차원에서 보자면, 산은 많은 생명의 터전입니다. 온갖 동식물들이 산에 기대어 살아갑니다. 산에서 여러 먹거리들도 나오지만 모든 생명에게 필수적인 신선한 공기와 물도 산에서 나옵니다. 사회의 차원에서 보면, 산은 사회적 약자들 터전입니다. 옛날에는 가난한 사람들은 산에 들어가 화전을 일구고 살았지요. 그뿐 아니라 새로운 사회를 꿈꾸다가 사회에서 쫓겨난 이들 또한 산에 들어가 살았습니다. 산은 그런 자들을 모두 품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영성의 차원에서 보면 산은 신을 만나는 장소입니다. 산은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각 나라의 명산에는 신께 제사를 드리는 제단이 있습니다. 성서에서도 산은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로 등장합니다. 모세 시대의 시내산뿐 아니라, 북 이스라엘의 수도 사마리아와 남 유다의 수도 예루살렘도 산이었습니다. 복음서에도 산 이야기가 많이 등장합니다. 산상수훈, 예수님께서는 공생애를 시작하시며 산에서 복음을 선포하셨습니다. 그리고 산상변화, 예수님께서는 산에 올라가셔서 당신이 율법과 예언의 완성자이심을 제자들에게 드러내셨습니다.

2. 라마산의 엘리야


오늘 설교의 성경본문인 사무엘상 19장에도 산이 나옵니다. 사울과 다윗은 장인과 사위관계였습니다. 그러나 둘 사이는 좋지 못했습니다. 다윗은 한 번도 왕위에 대해 욕심을 낸 적이 없었는데 사울은 다윗이 사울 왕가의 왕위를 빼앗을 것으로 여겨 그를 자주 죽이려 했습니다. 수금을 타고 있던 다윗에게 창을 던져 죽이려 했고, 다윗의 집으로 부하들을 보내 그를 죽이라 명령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사울의 딸이자 다윗의 아내였던 미갈은 다윗에게 사울의 계획을 알려주며 도망가라 하였습니다. 다윗은 라마로 도망갔습니다. 라마는 사무엘 선지자가 있던 곳으로 그리 높지 않은 산지였습니다. 사무엘은 사울에게 실망하여 일선에서 물러나 고향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사무엘은 사울을 왕으로 기름 부어 세웠지만, 사울은 계속해서 사무엘을 실망시켰습니다. 사울은 전쟁 시작 전에 전쟁을 해도 될지 말지를 하나님께 여쭙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사울은 사무엘을 기다리지 않고 직접 제사를 드리기도 했습니다. 사무엘은 라마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사무엘은 그곳에서 선지자들을 모아 양성했습니다. 나욧은 지역의 이름이었다기보다는 ‘거처’를 뜻하는 말로, 라마 나욧이라고 하면 사무엘이 라마에 세운 선지자 학교로 보면 되겠습니다.

이 때 사울은 정상적인 왕이 아니었습니다. 독재자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율법을 어기고, 자기를 왕으로 세워준 사무엘도 무시하고, 오로지 권력욕에 불타 다윗 제거에 온 열과 성을 쏟을 뿐, 국가를 제대로 돌보지 않던 무능한 왕이었습니다. 나라를 더욱 굳건하게 만들라고 세운 사람이 나라를 더욱 위태롭게 만들었습니다. 사울과 사울이 만든 세상에 실망한 이들이 사무엘에게로 모여들어 그의 문하생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운영되는 바른 나라, 새로운 나라를 꿈꾸며 준비하던 이들이었습니다. 다윗이 그런 자들과 함께 만난다는 것은 사울에게 큰 위협이었습니다. 사울은 어떻게 해서든 그 둘을 찢어놓아야 했습니다. 사울은 부하들을 라마로 보내 다윗을 잡아오라고 명령했습니다. 사울의 부하들이 라마에 도착해서 보니, 사무엘의 제자들이 사무엘 앞에서 춤을 추고 소리를 지르고 예언을 하고 있었습니다. 사무엘의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영이 임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을 잡으러 왔던 사울의 부하들에게까지 하나님의 영이 임해 그들도 춤을 추고 소리를 지르고 예언을 하게 되었습니다. 부하들은 사울에게 빈손으로 돌아가 그대로 보고했습니다. 사울은 다른 부하들을 두 번 더 보냈으나 보낼 때마다 같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하는 수 없이 사울이 직접 라마로 갔습니다. 그런데 사울에게도 하나님의 영이 임했습니다. 사울도 춤을 추고 소리치며 예언까지 했습니다.

여러분도 하나님의 영을 체험하고 싶다면 이스라엘의 라마산에 가보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그곳에 가셔도 하나님의 영을 체험하지는 못하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때 내린 하나님의 영은 라마라는 산에 내린 것이라기보다는 사무엘이라는 사람 위에 내린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 사람, 모든 것이 끝난 것 같은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새로운 시작을 소망하는 사람, 세상에서 거할 곳이 없는 이들의 품이 되어 주는 사람, 하나님의 뜻이 무너진 땅의 사람들과 하늘을 다시 이어주려는 사람 위에 임합니다. 마가의 다락방에 있던 제자들이 그러하였고, 라마에 있던 사무엘이 그러했습니다. 사무엘은 산 같은 사람, 하나님의 영이 임한 산과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사람들을 품어주었고 그들을 하늘과 연결시켜 주었습니다. 그런 사람 앞에 서게 되면 우리 안에 있던 미움과 분노와 같은 악하고 바르지 않은 감정들을 내려놓게 됩니다. 잊게 됩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서 안에서 살아가는 존재임을 깨닫게 됩니다. 잃었던 삶의 기쁨도 느낄 수 있고, 하나님 자녀로서의 본래 모습도 회복하게 됩니다. 사울의 부하들과 사울이 사무엘에게 왔다가 다윗을 죽이려는 악한 마음도 잊고 춤을 추게 되고 예언을 하게 되었다는 것은 그런 뜻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3. 산 사람, 예수


갈릴리 호숫가 언덕에서 예수님이 선포하시던 산상수훈의 말씀을 듣던 사람들도 그랬을 것입니다. 사람을 만났는데 하나님을 만난 것 같은 느낌, 사람이 말을 하는데 하나님이 직접 말씀하시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으로부터 산상수훈을 들은 사람들의 반응을 마태복음은 ‘그들은 다 놀랐다’고, ‘그 권위 있는 말씀에 놀랐다’고 기록했던 것입니다. 변화산에서 제자들은 예수님이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는 예수 한 사람의 인격 안에서 율법과 예언이 온전히 구현된 것을 제자들이 본 것입니다. 제자들은 하늘의 음성도 들었지요.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제자들은 예수님에게서 하나님의 모습을 본 것입니다. 어디 갈릴리 호숫가 언덕과 변화산뿐이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만나는 공간이 되어주셨던 것이. 예수님은 존재 자체가 산과 같은 분이셨습니다. 언제 어디서 누구를 만나든 그가 당신과의 만남을 통해 하나님을 만날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복음서에는 예수라는 산에 올라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로 넘쳐납니다.

레오나드도 보프 신부는 <성사란 무엇인가?>라는 책의 서문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산은 마치 하나님과 같습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깡그리 거저 내어줍니다. 모든 것을 떠받치며 온갖 것을 겪어냅니다. 무엇이나 가리지 않고 품 안에 안아 들입니다.”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거저 내어주고, 우리를 떠받쳐 주며, 우리의 허물을 견뎌내는 산과 같은 주님이 계셔서 우리가 지금까지 살아올 수 있었습니다. 부족함이 많은 우리를 싫다 내치지 않고 품어주는 산과 같은 사람들이 있어서 우리가 오늘까지 살아올 수 있었습니다. 참으로 감사하고 고마운 일입니다.

그런 주님의 은혜와 사람들의 고마움을 마음에 고이 간직해야 합니다. 그리고 거기서 더나아가 우리 또한 다른 사람들에게 산과 같은 사람이 되어 주어야 합니다. 우리 청파교회는 교회 이름부터가 푸른언덕입니다. 어느 복음성가의 가사처럼 우리가 우리의 이웃들에게 오름직한 동산이 되면 좋겠습니다. 우리와의 만남을 통해 절망 속에 있던 이가 희망을 갖게 되길, 모든 것이 끝났다 생각했던 이가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길, 마음 둘 곳 없던 이가 품을 느낄 수 있길, 하나님을 느낄 수 없던 이가 하나님을 느낄 수 있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우리 모두가 서로에게 그런 산이, 그런 산과 같은 사람이 될 수 있길 간절히 기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