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므로 누구든지, 합당하지 않게 주님의 빵을 먹거나 주님의 잔을 마시는 사람은, 주님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를 짓는 것입니다. 그러니 각 사람은 자기를 살펴야 합니다. 그런 다음에 그 빵을 먹고, 그 잔을 마셔야 합니다. 몸을 분별함이 없이 먹고 마시는 사람은, 자기에게 내릴 심판을 먹고 마시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여러분 가운데는 몸이 약한 사람과 병든 사람이 많고, 죽은 사람도 적지 않습니다. 우리가 스스로 살피면, 심판을 받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우리를 심판하시고 징계하시는 것은, 우리가 세상과 함께 정죄를 받지 않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이 먹으려고 모일 때에는 서로 기다리십시오. 배가 고픈 사람은 집에서 먹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모이는 일로 심판받는 일이 없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그밖에 남은 문제들은 내가 가서 바로잡겠습니다. -고전 11:27~34
1. 신뢰를 잃은 한국교회
좋으신 주님께서 주시는 위로와 평안과 새롭게 하시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 위에 함께하시길 빕니다. 그리고 전쟁이 계속되고 있는 중동과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위에도 주님께서 주시는 위로와 평화가 함께하시길 빕니다.
오늘은 세계성찬주일입니다. 세계의 모든 교회가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함께 나누며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됨을 기념하고,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살아가길 재다짐하는 날입니다. 저는 이 날을 좋아합니다. 자꾸만 작은 차이를 이유로 분열하고 그리스도의 정신을 잃은 채 그릇된 길로 가는 세계의 교회를 향해 주님께서 해마다 다시 한 번 기회를 주시는 것 같은 기분이 들기 때문입니다. 가톨릭과 동방정교회와 개신교회의 모든 교회가 함께 성찬에 참여하는 이 날, 우리도 성찬에 참여함으로 모든 기독교인과 더불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뒤를 따라갈 수 있길 소망합니다.
2023년 2월 한국 ‘기독교윤리실천운동’이란 단체가 한국의 각 종교에 대한 신뢰도를 조사했습니다. 개신교회의 신뢰도는 21%였습니다. ‘신뢰하지 않는다’는 74%였습니다. 무종교인들이 가장 신뢰하는 종교는 가톨릭으로 18%. 그 다음은 불교로 12%. 개신교회는 3%로 가장 낮았습니다. 3%. 가톨릭의 1/6, 불교의 1/4밖에 안 되었습니다. 인구 대비 개신교인 비율은 거의 20%입니다. 개신교회에 대한 신뢰도가 21% 정도 나왔다는 것은 교회 다니는 이들만 교회를 신뢰할 뿐 교회를 다니지 않는 사람들은 교회를 거의 신뢰하지 않고 있다는 말로 볼 수 있습니다. ‘한국교회가 교회 밖 비판을 수용하는가?’에 대해서는 ‘수용적이다’가 15%, ‘비수용적이다’가 80%였습니다. ‘개신교회가 사회에 기여하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기여한다’가 24%, ‘기여하지 못하고 있다’가 71%였습니다. 참담합니다. 한국교회는 신뢰할 수 없는 집단, 잘못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도 자신의 잘못을 고치려 하지 않는 집단, 사회에도 크게 기여하는 바가 없는 집단이 되어 버렸습니다.
교회 밖 사람들에게 어떻게 하면 개신교회의 신뢰도를 높일 수 있겠느냐 물었습니다. 몇 가지 답이 나왔는데 가장 많은 비율인 34%의 사람들의 답은 이것이었습니다. ‘교회의 이기적인 태도를 바꾸어야 한다.’ ‘이기적인 사람들’, 그것이 한국 사회가 바라보는 개신교회의 모습입니다. 저는 그 34% 사람들의 답이 주님께서 오늘의 한국 개신교회에게 주시는 답이라고 생각합니다. 무감어수 감어인無鑑於水 鑑於人, 물에 자신을 비추어 보지 말고 사람에게 자신을 비추어 보라는 말입니다.(묵자) 우리가 보는 우리의 모습보다 다른 사람들이 보는 우리의 모습이 실제 우리의 모습에 가까울 때가 많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많이 비반성적이고 비사회적이며 이기적으로 살아왔음을 아프지만 받아들여야 합니다. 잘못된 점을 고치고 사회적인 책임을 더욱 열심히 감당하고 무엇보다 이기적인 태도를 바꾸어야 합니다. 이기적인 예수. 어두운 빛, 차가운 뜨거움처럼 이상하고 있을 수 없는 예수가 아닙니까?
2. 고린도 교회의 문제적 애찬
바울은 여러 곳에 교회를 세웠고 그 교회의 교인들을 위해 많은 수고를 했습니다. 그런데 고린도교회만큼 바울이 애를 태우며 마음을 많이 쓴 교회는 없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바울의 아픈 손가락이었습니다. 아시아를 넘어 유럽 대륙으로 넘어가 선교하는 곳곳마다 실패를 거듭했습니다. 빌립보, 데살로니가, 베뢰아, 아테네. 힘껏 복음을 전했지만 많은 열매를 맺지는 못했습니다. 가는 곳마다 사람들의 강한 반대에 부딪혀 도망치듯 다른 도시로 떠나야 했습니다. 그러다가 그리스 남부의 고린도에 이르러 바울은 마치 배수의 진을 치듯 그곳에 오래 머물며 공을 들여 교회 공동체를 세웠고 교인들을 열심히 가르쳤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에서의 오랜 체류기간을 끝내고 오늘의 튀르키예 서부해안지역에 있는 에페소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지도자가 떠난 고린도교회에서는 곧 여러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계파를 나누어 서로 싸웠습니다. 영적 은사를 가지고도 누가 더 높은지 싸웠습니다. 바울에 대해 적대적인 사람들까지 등장해 바울을 험담했습니다.
고린도교회의 교인들 그들은 비록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여 교회를 이루었지만 여전히 고린도 도시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고린도, 그 도시는 한 마디로 말하면 욕망의 도시였습니다. 도시 양 옆으로 겐그레아와 레이온이라는 두 개의 큰 항구를 가지고 있어서 물자의 교류가 많았고, 그만큼 돈과 사람의 교류도 많았습니다. 보통 돈과 사람이 많은 곳이 그러하듯 고린도도 술과 음란한 문화가 넘쳤습니다. 그 당시 지중해 사람들은 ‘고린도’ 하면 돈만 있다면 한바탕 질펀하게 즐길 수 있는 도시로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바울을 통해 복음을 받아들이기는 했지만 고린도교회 교인들은 고린도 도시의 습성을 그대로 가지고 살았습니다. 탐욕적이고 경쟁적이었습니다. 그들은 심지어 애찬까지도 그런 태도로 대했습니다.
초대교회의 애찬식은 오늘의 성찬식과는 좀 달랐습니다. 공동식사였습니다. 각자 형편껏 빵과 포도주를 가지고 와서, 함께 모여 그것을 나누어 먹었습니다. 빵을 그리스도의 몸으로 고백하고 포도주를 그리스도의 피로 고백하고, 가난한 자와 부자가 계급의 차이를 뛰어넘어 그것을 함께 먹고 마심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됨을 몸으로 체험하는 은총과 친교의 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고린도교인들은 애찬을 나눌 때에 먼저 모인 사람들이 각자 자기가 가지고온 빵과 포도주를 배불리 먹고 취하도록 마셨습니다. 그들은 대부분 물질과 시간에 여유가 있던 부자 교인들이었습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힘주어 경고했습니다. “여러분에게 먹고 마실 집이 없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여러분이 하나님의 교회를 멸시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부끄럽게 하려는 것입니까?” 그리고 거기서 더 나아가 그런 행동은 “주님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를 짓는 것이며, 주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라 심판을 먹고 마시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3. 심판을 먹고 마시지 말길
바울의 그런 꾸짖음은 고린도교회의 부자 교인들에게는 엄청나게 충격적인 발언이었을 겁니다. 내가 내 돈으로 사 온 것을 내가 먹은 것이 교회에 문제를 일으키고 가난한 사람을 부끄럽게 만든 것까지는 알겠는데 그뿐 아니라, 주님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이며, 주님의 살과 피를 먹는 것이 아니라 심판을 먹을 것이라니. 인정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단연코 바울의 말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바울의 말 속에는 약자들을 보살피라는 성서의 정신이 담겨 있습니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예수님의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자기의 빵과 포도주이지만 그것을 배고픈 형제자매와 나누어 먹을 때 그 빵과 포도주는 주님의 살과 피가 되며 교회 공동체를 세우는 평화의 도구가 됩니다. 그러나 자기의 빵과 포도주를 자기 것이라고 해서 배고픈 형제자매와 나누어 먹지 않고 혼자 먹을 때 그 빵과 포도주는 주님께 심판받을 이유가 되며 교회 공동체를 깨는 파괴의 도구가 됩니다.
화천에 가면 시골교회가 있습니다. 교회 이름이 시골교회입니다. 임락경 목사님이 목회를 하시는 교회입니다. 목사님은 그곳에서 지체장애인과 노약자 2,30여 명과 오랜 세월 살아오고 계십니다. 모든 먹거리를 유기농으로 직접 농사를 지어 마련하십니다. 십여 년 전 우리 청파교회에도 오셔서 민간요법으로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는 방법들을 일러주신 적이 있으시지요. 임 목사님께서는 성찬식에 대해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빵을 당신의 살이라 하고 포도주를 당신의 피라고 말씀하시고는 그것을 제자들에게 주시며 그것을 먹고 마실 때마다 나를 기억하라 하셨는데, 그것을 우리 한국식으로 말하면, 빵은 밥이고 포도주는 국이다. 곧 우리는 식사를 할 때마다 그것을 주님의 살과 피로 여기며 예수님을 기억하며 먹어야 한다.’ 옳은 말씀입니다. 우리가 먹고 마시는 모든 것은 주님의 살과 피이며 모든 식탁이 성찬상입니다. 저는 신학생 시절에 그 교회에 가서 하루를 자고 온 적이 있습니다. 별도의 예배당이 없었고 거실이 식당이자 예배당이었습니다. 거실 한 쪽 벽에는 십자가 대신 이런 글귀가 자수로 새겨져 있었습니다. “이 밥이 우리에게 먹혀 생명을 살리듯 우리도 세상의 밥이 되어 세상을 살리게 하소서.”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거대한 고린도입니다. 어디를 가나 사람들은 탐욕적이고 경쟁적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고린도교회의 부자 교인과 같은 모습으로 살아왔습니다. 다른 교우와 이웃과 다른 생명들의 배고픔과 아픔을 헤아리지 못하고 나의 배고픔과 아픔만을 생각하며 살아왔습니다. 그것이 하나님 나라를 파괴하는 일이며, 가난하고 연약한 이들을 부끄럽게 만드는 일이며, 주님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를 짓는 일이며, 심판을 먹고 마시는 것인 줄 모르고 살아왔습니다. 그 결과 주님의 심판이 오늘 우리에게 임했습니다. 세계는 계속 전쟁을 벌이고, 자연은 기후재앙으로 무너지고 있으며, 주님의 몸되신 교회는 사람들에게 신뢰받지 못하는 이기적인 집단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이제 우리는 새로운 마음으로 성찬에 임해야 합니다. 새로운 마음으로 음식을, 자연을, 사람을 대해야 합니다. 바울은 가난한 교인이 오기 전에 혼자 배부르게 빵을 먹고 취하도록 포도주를 마신 부자 교인을 향해 말했습니다. ‘기다려라.’ 약자를 배려한 절제야말로 신앙 공동체뿐 아니라 생명 공동체를 지키는 길이며 하나님의 심판을 막을 수 있는 길입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꿈꾸었던 하나님의 나라는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새끼 염소와 함께 누우며, 사자가 송아지와 함께 풀을 뜯는 세상’이었습니다. 그런 세상은 이리와 표범과 사자가 자기의 욕망을 절제할 때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자신을 위해서 ‘당연히 먹을 수 있는 것’을 어린 양과 새끼 염소와 송아지를 생각하여 먹지 않을 때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세계성찬주일마다 세계의 교회들은 성찬의 뜻을 살리기 위해 어려운 단체를 후원해왔습니다. 우리 청파교회도 교회 이름으로 매달 수십 개의 단체들을 후원하고 있지만, 각자 세계 성찬주일을 맞아 주님의 살과 피를 나눈다는 의미로 어느 단체를 정해 후원하는 것도 뜻 깊은 일이 될 것입니다. 고린도 같은 세상을 살며 탐욕과 경쟁심에 이끌려 주님의 심판을 먹고 마시는 사람이 되지 맙시다. 주님의 마음에 이끌려 기꺼이 너의 밥이 되어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길 간절히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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