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주님 앞에 나아갈 때에, 높으신 하나님께 예배드릴 때에, 무엇을 가지고 가야 합니까? 번제물로 바칠 일 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가면 됩니까? 수천 마리의 양이나, 수만의 강 줄기를 채울 올리브 기름을 드리면, 주님께서 기뻐하시겠습니까? 내 허물을 벗겨 주시기를 빌면서, 내 맏아들이라도 주님께 바쳐야 합니까? 내가 지은 죄를 용서하여 주시기를 빌면서, 이 몸의 열매를 주님께 바쳐야 합니까? 너 사람아, 무엇이 착한 일인지를 주님께서 이미 말씀하셨다. 주님께서 너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도 이미 말씀하셨다. 오로지 공의를 실천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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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루터의 종교개혁
좋으신 주님께서 주시는 평안과 위로와 새롭게 하시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 위에 함께하시기를 빕니다. 오늘은 종교개혁기념주일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 모두가 올바른 신앙의 개혁을 이루는 사람들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1517년 10월 31일, 마틴 루터가 독일의 비텐베르그 성당 문 앞에 95개 조항의 반박문을 붙이며 유럽 전역에 종교개혁의 바람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루터가 반박문에서 펼친 주장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교황과 사제에게 면죄권이 없으며, 죄에 대한 용서는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다. 하나님의 용서는 진실한 회개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지 면죄부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고로 면죄부는 효과가 없다.’ 그 당시 교황은 성 베드로 성당 건축을 명목 삼아 면죄부를 판매했지만 이미 교황청에는 성당을 짓고도 남을 돈이 있었습니다. 사실 면죄부는 사람들의 죄를 용서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채워도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탐욕을 채우기 위한 수단이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은 그 말도 안 되는 면죄부 판매에 왜 대중이 쉽게 넘어갔는가? 입니다. 그 당시 교황은 단지 베드로 사도로부터 사도성을 이어받은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의 구원과 관련된 전권을 하나님으로부터 전해 받은 신적 대리자였습니다. 곧 교황의 결정은 하나님의 결정과 같은 힘을 발휘했습니다. 중세 유럽에서 가장 막강한 권력, 각 나라의 왕들보다 훨씬 큰 권력, 아니 최고의 권력자가 교황이었습니다. 1077년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하인리히 4세가 이탈리아의 카노사 성에 있던 교황 그레고리오 7세에게 찾아가 파문을 취소해 달라고 3일 동안 무릎을 꿇은 사건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교황은 결코 하나님이나 예수님을 대신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이 해와 달이라면 교황은 그 해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에 지나지 않는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교황은 자기 자신을 하나님처럼 높였습니다. 교황과 교황을 지지하던 무리들은 교황의 자리를 신격화하면 할수록 더 많은 권력과 부를 누렸습니다.
루터는 신격화된 교황권에 대해 저항했습니다. 루터가 강력한 권한을 지닌 교황에게 저항할 수 있었던 것은 루터에게는 다른 기준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합리적 이성과 성서와 믿음이었습니다. 루터는 르네상스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르네상스를 통해 유럽은 아랍이 보전하고 있던 헬라철학을 재발견하게 되었고 루터 또한 그 영향으로 불합리한 교황에게 합리적 이성으로 맞설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루터는 기독교의 기준은 교황이 아니라 성서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루터는 라틴어로 되어 있던 성서를 독일어로 번역하였습니다. 그리고 루터는 구원은 면죄부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구원하여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믿는 믿음을 통해 이루어진다고 말했습니다. 교황과 루터의 차이점이 중요합니다. 교황은 자신을 절대적 기준과 진리로 삼았기에 자신을 개혁할 수 없었을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 의해 개혁의 대상이 되었다면, 루터는 진리를 기준으로 삼았기에 자신을 개혁할 뿐 아니라 그릇된 것을 기준 삼아 살아가는 시대를 개혁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의 믿음과 신앙은 교황에 가깝습니까? 루터에 가깝습니까?
2. 하나님의 율례와 오므리의 율례
주전 8세기에 팔레스타인 북동쪽에서 앗시리아 제국이 등장하면서 팔레스타인의 여러 나라는 큰 위기를 맞게 됩니다. 앗시리아는 강력한 군대를 앞세워 점차 팔레스타인을 압박했습니다. 위협을 느끼던 시리아와 북이스라엘은 동맹을 맺고 앗시리아에 맞서기로 했습니다. 시리아와 북이스라엘은 남유다에게도 동맹을 요구했지만, 남유다는 동맹을 거절했습니다. 시리아와 북이스라엘은 남유다를 공격했습니다. 미가 선지자는 북이스라엘과 남유다 모두가 멸망할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미가가 멸망을 예언한 이유는 세 가지였습니다. 첫째, 사람들이 하나님이 아니라 우상을 섬겼기 때문이고, 둘째, 그 사회가 힘과 권력이 있다고 해서 힘없는 자들의 재산을 마음대로 빼앗는 불의한 사회였기 때문이고, 셋째, 정치지도자들과 종교지도자들이 백성을 섬기지 않고 백성을 통해 자기 배만 불렸기 때문이었습니다. 멸망의 세 가지 이유를 관통하는 것은 욕망입니다. 하나님이 아니라 우상을 섬겼다는 것은 하나님보다 욕망을 따랐다는 말이고, 남의 재산을 힘으로 빼앗았다는 것도 정의보다 욕망을 따랐다는 말이고, 지도자들이 자기 배만 불리며 살았다는 말도 공의보다 욕망을 따랐다는 말입니다. 나라가 멸망하는 마당에도 자기 욕망만을 따르는 존재, 그것이 인간입니다. 욕망은 힘이 셉니다. 욕망은 항상 우리 삶의 제1기준, 절대적 기준이 되려고 합니다.
미가는 6:6,7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주님 앞에 나아갈 때에, 높으신 하나님께 예배드릴 때에, 무엇을 가지고 가야 합니까? 번제물로 바칠 일 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가면 됩니까? 수천 마리의 양이나, 수만의 강줄기를 채울 올리브기름을 드리면, 주님께서 기뻐하시겠습니까? 내 허물을 벗겨 주시기를 빌면서, 내 맏아들이라도 주님께 바쳐야 합니까? 내가 지은 죄를 용서하여 주시기를 빌면서, 이 몸의 열매를 주님께 바쳐야 합니까?” 북이스라엘과 시리아가 공격해오자, 유다의 왕 아하스는 자기의 아들을 불에 태워 제물로 바쳤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금하신 것이요 이방의 풍속이었습니다. 아하스의 제사 속에는 ‘신에게 내가 가진 것 중 가장 큰 것을 바쳤으니, 신도 내게 큰 것을 주어야 한다’는 극히 인간적인 계산이 들어가 있습니다. 그게 바로 욕망의 힘입니다. 욕망은 신앙의 깊숙한 곳까지 파고들어와 신앙마저도 자기 아래 굴복시킵니다.
미가는 6:8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너 사람아, 무엇이 착한 일인지를 주님께서 이미 말씀하셨다. 주님께서 너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도 이미 말씀하셨다. 오로지 공의를 실천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하나님은 우리에게 수 천 마리의 제물과 강줄기를 채울 올리브 기름과 자식을 제물로 바치는 것을 원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공의를 실천하는 것과 인자를 사랑하는 것과 겸손히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입니다. 공의는 히브리어로 미쉬파트라고 합니다. 정의와 공평를 뜻하는 말로 하나님의 속성 중 하나이며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요구되는 덕목 중에 하나이기도 합니다. 인자를 사랑하라, 할 때의 인자는 ‘사람’ ‘이웃’을 의미합니다. 곧 인자를 사랑하라는 말은 사람과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겸손히 하나님과 함께 행하라,는 말의 원어적 의미는 ‘하나님과 함께 겸손히 걸어가는 것’입니다. 자기의 삶이 언제나 하나님 앞에서의 삶임을 잊지 말고 겸손히 살아가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주전 8세기 이스라엘 사람들은 욕망을 삶의 기준으로 삼고 살았습니다. 그러다보니 그들의 삶은 나날이 망가질 뿐이었습니다. 미가서 6장 후반부에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삶이 어떻게 망가졌는지가 나옵니다. 장사하는 사람들은 가짜 되와 저울과 추를 사용했습니다. 부자들은 가난한 자들의 재산을 뺏기 위해 폭력을 사용했습니다. 일반 백성들은 이득을 위해 거짓말을 일삼았습니다. 미가는 그렇게 자기의 욕망을 중심에 두고 기준을 자기 좋은 쪽으로 바꾸어 다른 이가 해를 입어도 전혀 신경 쓰지 않으며 사는 형태를 ‘오므리의 율례’라고 명명했습니다. 오므리 왕가는 북이스라엘의 번성했던 왕가 중에 하나입니다. 오므리와 그의 아들 아합, 아합의 아들들인 아하시야와 여호람이 오므리 왕가였습니다. 오므리 왕가는 부유했지만 정의롭지 못했습니다. 아합 왕은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았습니다. 거짓을 만들어 나봇을 죽이고 그의 포도원을 빼앗았습니다. 오므리의 율례는 오므리 왕가의 네 명의 왕들의 율례만이 아니었습니다. 오므리의 율례는 욕망을 삶의 제1기준으로 삼고 사는 우리 모든 인간의 율례입니다. 미가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율례인 공의와 사랑과 겸손을 기준으로 삼고 살라고 명했습니다만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왜 그럴까요? 인류의 오랜 기준인 오므리의 율례에 반하기 때문입니다.
3. ‘나’라는 기준 내려놓기
중세의 사람들은 천동설을 믿었습니다.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고 태양과 다른 별들이 지구를 중심으로 돈다고 믿었습니다. 코페르니쿠스가 태양이 중심이며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돌고 있다고 말했을 때 아무도 그 말을 믿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보았을 때 지구의 땅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고 태양이 지구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사라졌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루터와 코페르니쿠스는 동시대 사람이었습니다. 루터 또한 코페르니쿠스의 말을 믿지 않았습니다. 루터는 코페르니쿠스를 “바보”라 부르며,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고 믿었습니다. 루터는 교황 중심의 유럽사회를 말씀 중심의 사회로 바꾸기는 했지만, 지구중심주의에서는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루터가 벗어나지 못한 것이 또 하나 있었습니다. 루터는 자신이 만인제사장론을 주장하면서 펼친 자유와 평등의 정신이 농노들에게까지 이르는 것에는 반대했습니다. 루터는 농노들이 자기의 말을 듣고 자유와 평등을 주장하며 봉기했을 때 처음에는 그들을 편들었지만 그들의 봉기가 과격해지자 이내 그들을 멀리하였습니다. 끝내 루터는 자신의 뒤를 봐주던 제후들 편에 섰고 제후들이 10만 명이 넘는 농노들을 잔인하게 죽이는 것에 동의했습니다. 어쩔 수 없었다,라고 말하기에는 피해가 너무 큽니다.
오늘 우리는 루터가 벗어나지 못했던 지구중심설에서 벗어나기는 했지만, 여전히 자기중심주의에서는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늘 자기 자신을 중심에 놓고 살아갑니다. 자신의 존재가치, 자신의 주장, 자신의 이득은 언제나 다른 이의 존재가치, 다른 이의 주장, 다른 이의 이득보다 중요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존재가치는 아랍 사람들의 존재가치보다 중요하고, 정부의 주장은 국민 대다수의 주장보다 중요하고, 인간 이득은 뭇생명의 생존보다 중요합니다. 미가가 제시한 하나님의 율례인 공의와 사랑과 겸손은 자기중심주의에서 벗어나라는 하나님의 요구입니다. 공의는 자신을 중심에 두지 말고 보편적 올바름을 중심에 두라는 말이고, 사랑은 자신을 중심에 두지 말고 타자의 아픔과 소망을 중심에 두라는 말이며, 겸손은 자신을 중심에 두지 말고 하나님을 중심에 두라는 말입니다.
칠레의 작가 루이스 세뿔베다의 동화 <갈매기에게 나는 법을 가르쳐준 고양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어느 날 갈매기가 기름덩어리를 뒤집어쓴 채 해안가 어느 집 발코니에 추락하게 됩니다. 갈매기는 그곳에 있던 고양이 소르바스에게 자기가 낳은 알을 부탁하고 죽습니다. 알은 무사히 부화했습니다. 고양이 소르바스는 친구 고양이들과 함께 아기 갈매기 아포르뚜나다를 정성껏 키웠습니다. 갈매기 아포르뚜나다는 빠르게 자랐습니다. 고양이들은 아포르뚜나다에게 나는 법을 가르치려 노력했지만 허사였습니다. 그들은 고양이지 갈매기가 아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고민 끝에 고양이들은 인간에게 찾아가 도움을 요청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사실 고양이들은 인간의 말을 할 줄 알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들에게 인간의 말로 말을 걸었다가는 고양이들은 인간의 노리개가 되거나 자유를 잃고 동물원 철장 속에 갇혀 지내게 될지도 모르는 위험이 있었습니다. 고양이들은 장시간 토론을 했고, 아포르뚜나다를 위해 고양이 세계의 오랜 규칙이었던 ‘인간과 인간의 말로 소통하면 안 된다.’는 금기를 딱 한 번만 깨기로 결정했습니다. 고양이들은 자기들을 이해해줄만한 사람으로 어느 시인을 선택했고 그에게 찾아가 상황을 설명하고 도움을 청했습니다. 시인은 처음에 놀라기는 했지만 고양이들의 청을 받아들였습니다. 시인은 어린 갈매기를 데리고 성당의 지붕의 난간으로 올라갔습니다. 시인은 아포르뚜나다가 날개를 펼쳐 바람을 느끼도록 했습니다. 아포르뚜나다는 성당 난간에서 뛰어내렸고 이내 바람을 타고 하늘 높이 날 수 있었습니다. 타자의 아픔과 소망에 공감하기 위해 ‘나’라는 기준을 내려놓을 때 우리는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지는 것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개혁보다 중요한 것은 기준입니다. 그릇된 것을 기준으로 하는 개혁은 개악이 될 뿐입니다. 바른 것을 기준으로 개혁해야 합니다. 우리와 우리의 주장과 우리의 이득이 기준이 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이 바른 기준입니다. 자기의 구원이 아니라 우리의 구원을 위해 자기 자신과 자기의 주장과 자기의 이득을 모두 내려놓으셨던 분,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나라를 체험하게 해주셨던 예수님이 우리의 기준입니다. 참 가슴이 아픕니다. 얼마 전 세계성찬주일에 말씀드렸던 바와 같이 우리나라의 무종교인들을 대상으로 한국종교들의 선호도를 조사했을 때 개신교회의 선호도는 단 3%로 3대 종교들 중 꼴찌였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개신교회를 자신만 아는 이기적인 집단으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지금 한국개신교회는 사회와 세상을 향해 이래야 한다 저래야 한다 말할 처지가 아닙니다. 교회 다니지 않는 사람들이 교회를 향해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 믿으십시오. 예수를 잘 믿으십시오.’ 그들이 보았을 때 교회의 기준이 예수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사회와 교회를 개혁하려기보다는 우리 자신부터 개혁해야 합니다. 자기 자신과 자기의 주장과 자기의 이득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절대화하려는 오므리의 율례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예수님처럼 공의와 사랑과 겸손이라는 하나님의 율례를 기준 삼아 자신부터 바르게 개혁해 나가야 합니다. 그렇게 우리가 공의와 사랑과 겸손을 실천하며 살아갈 때 교회 또한 이 사회 속에서 공의와 사랑과 겸손의 상징으로 다시 서게 될 것입니다. 그 귀한 일을 함께 충실히 감당하는 청파교우들과 믿음의 사람들이 되길 간절히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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