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김재홍목사

감사의 지평을 넓히는 사람 (레 19:9~16) / 김재홍목사

새벽지기1 2024. 11. 7. 05:36

밭에서 난 곡식을 거두어들일 때에는, 밭 구석구석까지 다 거두어들여서는 안 된다. 거두어들인 다음에, 떨어진 이삭을 주워서도 안 된다. 포도를 딸 때에도 모조리 따서는 안 된다. 포도밭에 떨어진 포도도 주워서는 안 된다. 가난한 사람들과 나그네 신세인 외국 사람들이 줍게, 그것들을 남겨 두어야 한다. 내가 주 너희의 하나님이다. 도둑질하지 못한다. 사기하지 못한다. 서로 이웃을 속이지 못한다. 나의 이름으로 거짓 맹세를 하여 너희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혀서는 안 된다. 나는 주다. 너는 이웃을 억누르거나 이웃의 것을 빼앗아서는 안 된다. 네가 품꾼을 쓰면, 그가 받을 품값을 다음날 아침까지, 밤새 네가 가지고 있어서는 안 된다. 듣지 못하는 사람을 저주해서는 안 된다. 눈이 먼 사람 앞에 걸려 넘어질 것을 놓아서는 안 된다. 너는 하나님 두려운 줄을 알아야 한다. 나는 주다. 재판할 때에는 공정하지 못한 재판을 해서는 안 된다. 가난한 사람이라고 하여 두둔하거나, 세력이 있는 사람이라고 하여 편들어서는 안 된다. 이웃을 재판할 때에는 오로지 공정하게 하여라.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남을 헐뜯는 말을 퍼뜨리고 다녀서는 안 된다. 너는 또 네 이웃의 생명을 위태롭게 하면서까지 이익을 보려 해서는 안 된다. 나는 주다.----------------------


1. 어수선한 가을


좋으신 주님께서 주시는 위로와 평안과 새롭게 하시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 위에 함께하시기를 빕니다. 지난 주중 폭우로 인해 수백 명의 인명 피해를 본 스페인 위에도 주님의 위로가 함께하시기를 빕니다.

세상이 참 어수선합니다. 여름이 지났지만 이상기온으로 태풍이 계속 몰아치고, 큰 홍수도 자주 발생하고 있습니다. 전쟁의 소문도 날로 늘어가고 있습니다. 이란은 이스라엘과 미국을 향해 공격을 예고했고 북한은 러시아에 군대를 파병하였습니다. 돈벌이와 군사원조를 바라며 자국의 젊은이들을 사지로 내모는 부당한 처사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한 정치인은 우크라이나 측에 북한군 폭격을 요청하고, 북한군이 타격을 입으면 그것을 대북 심리전에 활용하자고 말했습니다. 큰일 날 소리입니다. 만약에 우리 정부가 우크라이나에 그렇게 요청하면 러시아와 북한은 대한민국이 전쟁에 개입한 것으로 여기고 대한민국을 공격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지 않더라도 그 두 나라와 우리나라의 관계는 더욱 적대적인 관계로 악화될 것입니다. 그런 위험을 자처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공적 책무를 담당하는 이들은 국가 안전과 국민 보호를 좀더 무게감 있게 여겨야 할 것입니다. 세상만 어수선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나라는 그 어느 때보다 정치적으로 혼란스러운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지금 문제는 여당과 야당의 대립이 아닙니다. 정부와 국민이 대립하고 있습니다. 정부와 국민 사이가 너무 벌어져 있습니다. 신뢰가 깨어졌습니다. 관계에 있어서 신뢰가 깨어지면 그 위에 아무것도 세울 수 없습니다. 우리 사회가 하루속히 이 혼란을 극복하고 안정을 되찾을 수 있길 소망합니다.

세상은 참 어수선하지만, 가을은 왔고 산야에는 곱게 단풍이 물들고 있습니다. 올해는 늦더위로 인해 단풍철이 예년보다 일주일정도 늦게 왔다고 합니다. 설악의 단풍은 지금이 절정이라고 합니다. 주중에 보니 남산도 단풍이 곱게 물들고 있습니다. 오늘은 청파교회력으로 추수감사절입니다. 지금 농촌은 한참 벼 수확을 하고 있습니다. 저는 농사를 몇 해 지어본 경험이 있습니다. 그래서 모판 만들고 앉히기부터 모내기, 피뽑기, 수확까지 벼농사의 모든 과정을 다 해보았습니다. 그래서 저에게는 사계절 논의 풍경에 대한 기억이 있습니다. 모내기 이후 어렸던 모가 쑥쑥 자라나 흙빛이었던 논을 푸른빛으로 물들이는 봄철의 논은 희망을 불러일으킵니다. 모가 벼로 자라나 온 논을 진한 녹색으로 가득 메운 여름철의 논은 눈을 시원하게 해 줍니다. 늦은 오후 노을빛을 받아 황금빛으로 일렁이는 가을철 논은 감사의 마음이 차오르게 해 줍니다. 저는 푸릇한 봄 논과 진한 녹색의 여름 논과 황금물결의 가을 논도 좋아하지만, 추수를 마치고 텅 빈 늦가을과 겨울의 논 풍경 또한 좋아합니다. 자신이 반 년 동안 열심히 키워낸 결실을 사람들에게 다 내어주고 텅 비어 밑동만 남아 있는 논은 제 마음속에 거룩의 감정을 불러일으킵니다. ‘저 논이 성자와 같구나. 저런 게 거룩이구나. 저렇게 살아야겠구나’란 생각이 절로 듭니다.

2. 레위기가 말하는 거룩


레위기는 ‘와이크라’라는 히브리어로 시작합니다. 와이크라는 ‘그리고 그가 부르셨다’라는 말입니다. 레위기는 출애굽기에 이어지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가 부르셨다’라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출애굽 시키시고 모세를 불러 출애굽의 이유를 말씀해 주셨다’라는 뜻입니다. 출애굽의 목적은 무엇이었습니까? 약속의 땅, 가나안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었지만, 모세가 이집트의 왕 파라오 앞에서 밝힌 출애굽의 목적은 예배였습니다.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기 위해 히브리인들은 출애굽을 한 것입니다. 곧 레위기는 예배에 대한 말씀입니다. 그래서 각종 제사에 대한 설명이 많이 나옵니다. 번제, 화목제, 속죄제, 속건제 등 제사의 종류와 화제, 소제, 전제, 요제, 거제 등 제사의 방법에 대한 설명이 자세히 기술되어 있습니다. 옛날 이스라엘에서 살던 유대인이 아니라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살아가는 우리가 읽고 이해하기에는 쉽지 않은 내용이 연이어 나옵니다. 그래서 새해를 맞아 새로운 마음으로 성경을 통독하다가 창세기와 출애굽기를 지나 레위기를 만나게 되면 큰 위기를 겪게 됩니다. 읽다보면 저절로 눈이 감기는 성경이 레위기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어린이들에게 오경을 가르칠 때 레위기를 가장 먼저 가르친다고 합니다. 어려서부터 하나님을 바르게 예배하는 백성으로 가르치기 위함입니다.

오늘의 본문인 레위기 19장은 “너희의 하나님인 나 주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해야 한다.”는 말씀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거룩’, 그것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백성,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의무입니다. 그런데 그 거룩은 하나님을 예배할 때에만 지켜야 하는 종교적 의무가 아닙니다. 일상 속에서도 지켜야 하는 일상적 의무입니다. 레위기 19장은 우리가 일상 속에서 지켜야 할 거룩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가르침을 주고 있습니다. 부모를 공경하라. 안식일을 지켜라. 우상을 만들지 마라. 십계명과 비슷한 말씀이 나온 이후에 9절과 10절에서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밭에서 난 곡식을 거두어들일 때에는 밭 구석구석까지 다 거두어들여서는 안 된다. 거두어들인 다음에, 떨어진 이삭을 주워서도 안 된다. 포도를 딸 때에는 모조리 따서는 안 된다. 가난한 사람들과 나그네 신세인 외국 사람들이 줍게, 그것들을 남겨 두어야 한다.” 또 이런 말씀도 나옵니다. “품꾼을 쓰면, 그가 받을 품값을 다음날 아침까지 밤새 네가 가지고 있어서는 안 된다.”(13절) “듣지 못하는 사람을 저주해서는 안 된다. 눈먼 사람 앞에 걸려 넘어질 것을 놓아서는 안 된다.”(14절) “재판할 때에는 공정하지 못한 재판을 해서는 안 된다. 가난한 사람이라고 하여 두둔하거나 세력이 있는 사람이라고 하여 편들어서는 안 된다.”(15절) “남을 헐뜯는 말을 퍼뜨리고 다녀서는 안 된다. 이웃의 생명을 위태롭게 하면서까지 이익을 보려 해서는 안 된다.”(16절) 믿는 이가 일상 속에서 이루어야 할 ‘거룩’의 핵심을 레위기 19:18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너의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여라.” 거듭 말씀드립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거룩’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예배의 자리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인간관계와 같은 일상의 자리까지 이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연로하신 부모, 가난한 사람들, 나그네, 부하 직원, 장애인 등 우리 곁에 있는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그들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태도로 드러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 옛날, 레위기에 선포된 말씀을 따라서 추수할 때 자기 밭의 한 모퉁이를 남겨둔 농부의 마음을 헤아려 봅니다. 남을 위해 남긴 밭의 한 모퉁이가 차지하는 비율이 10%인지 5%인지 3%인지 알 수는 없습니다. 사람마다 달랐겠지요. 그러나 그 양이 얼마였든 내가 수고해 얻은 결실의 일부를, 내가 다 가지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길 수 있는 것을 남을 위해, 그것도 내가 잘 알지도 못하는 남을 위해 그대로 남겨 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밭에 남겨진 한 모퉁이는 너를 위해 나의 욕심을 내려놓은 비움이었습니다. 이미 내게 허락된 것만을 가지고도 충분하다 여기는 만족이었습니다. 그런 비움과 만족이 있은 뒤에야 사랑의 나눔이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사랑의 나눔이 있는 자리에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거룩한 모습을 드러내십니다.

3. 감사의 지평을 넓히는 이


추수감사절을 준비하며, ‘감사’에 대해서 새로운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많은 기독교인이 거룩을 예배 시간에 하나님과 자신 사이에만 존재하는 것으로 생각할 뿐 일상 속에서 구현해야할 가치로 생각하지 못하는 것처럼, 감사도 하나님께 자신의 개인사를 두고 감사의 이유를 아뢰는 것으로 생각할 뿐 우리의 감사가 또 다른 지평의 감사로 확장되어야 한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박노해 시인은 팔순의 어머니의 삶을 소재로 <감사한 죄>라를 시를 썼습니다. 어느 날 새벽 어머니께서 기도 중에 흐느끼시며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낯선 서울땅에 올라와 노점상으로 쫓기고/

여자 몸으로 공사판을 뛰어다니면서도
남보다 도와주는 사람이 많았음에/

늘 감사하며 기도했느니라/

거리에서 리어카 노점상을 하다 잡혀온/

내 처지를 아는 단속반들이 나를 많이 봐주고/

공사판 십장들이 몸 약한 나를 많이 배려해주고/

나는 어리석게도 그것에 감사만 하면서/

긴 세월을 다 보내고 말았구나

다른 사람들이 단속반에 끌려가 벌금을 물고/

일거리를 못 얻어 힘없이 돌아설 때도,
민주화 운동 하던 다른 어머니 아들딸들은/

정권 교체가 돼서도 살아 돌아오지 못했어도/

사형을 받고도 몸 성히 살아서 돌아온 불쌍하고 장한 내 새끼 내 새끼 하면서 /

나는 바보처럼 감사기도만 바치고 살아왔구나/

나는 감사한 죄를 짓고 살아왔구나

시인은 감사도 때로는 죄가 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사고가 있었는데 하나님이 도우셔서 나만 하나도 안 다쳤습니다. 얼마나 감사한지요.’와 같은 감사의 간증을 우리는 얼마나 자주 듣고 자주 했는지요. 다른 이의 아픔과 고통과 슬픔을 외면한 채 나의 잘됨과 안녕에 대해 감사하는 나만의 감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감사가 아닐 것입니다.

거룩함 Holy는 고대 영어 hal이 어근인데 hal은 건강함 Health, 온전함 Whole의 어근이기도 합니다. 거룩하게 사는 것이 건강하게 사는 것이고 온전하게 사는 것이다,라고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공동체적으로, 관계적으로 그 뜻을 풀 때 의미가 더 풍성해집니다. 참된 거룩은 자기 혼자만의 건강함과 온전함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건강함과 온전함을 잃은 사람들 – 어르신들, 가난한 사람들, 나그네, 일용직 근로자, 장애인과 같은 사회적 약자들을 사랑으로 품어 그들의 건강함과 온전함을 회복시켜 주는 것입니다. 감사도 그와 똑같습니다. 하나님께 개인의 감사할 이유를 아뢰는 것만이 감사가 아닙니다. 건강함과 온전함을 잃어버린 이들, 감사하기 어려운 상황에 처한 이들을 사랑으로 품어 그가 다시 건강함과 온전함을 회복하여 삶을 감사함으로 고백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그렇게 우리의 감사는 나만의 감사를 뛰어넘어 너의 감사로까지 지평이 확대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이야말로 그런 거룩과 감사를 추구하며 사셨습니다. 그 당시 성전체제를 이끌었던 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은 사람들에게 거룩한 삶을 강조하며 거룩하게 살기 위해서는 율법을 지키고 제사를 드려야 한다고 했습니다. 행해야 할 248개의 조항을 행하고 행하지 말아야 할 365개의 조항을 행하지 말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절기마다 제사를 드려야 한다고 했는데 최대의 절기인 유월절이 되면 사람들은 25만 마리가 넘는 양을 제물로 바쳤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그렇게 강조한 거룩은 성전을 넘어 일상으로 이어지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율법적이고 제의적인 거룩을 강조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의 계명은 하나였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과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그리고 예수님은 제사도 강조하지 않으셨습니다. 공생애 중 예수님께서 직접 성전에 가서 제물을 바치신 모습은 복음서에 한 번도 언급되지 않았습니다. 공생애 중 복음서가 예수님께서 바치신 제사로 기록하고 있는 것은 당신의 몸을 십자가 위에 화목제물로 바치신 제사뿐입니다. 예수님의 거룩은 주로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드러났습니다. 예수님은 항상 만나는 이에게 그가 필요로 하는 것을 주심으로 그를 온전하고 건강하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병든 자에게는 병을 고쳐주셨고, 귀신 들린 자에게는 귀신을 쫓아내 주셨고, 배고픈 자에게는 빵을 주셨고, 친구가 필요한 자에게는 친구가 되어 주셨습니다. 그렇게 예수님으로 인해 온전함을 회복하고 구원을 체험한 이들은 하나님께 감사의 찬양을 드렸습니다. 그게 참된 거룩이고 참된 감사입니다.

가을은 하루하루 깊어갈 것입니다. 우리 모두 가을들녘에 나가 텅 빈 논과 밭 앞에 서보면 좋겠습니다. 저는 늦가을이면 일부러 시간을 내서 가까운 들녘에라도 찾아가 텅 빈 논과 밭 앞에 서봅니다. 그러면 나를 위해 밭 한 모퉁이가 아니라 당신의 모든 것을 말없이 내어주신 예수님이 아주 가깝게 다가옵니다. 그리고, 모두가 자기만의 거룩함과 자기만의 감사를 위해 바쁘고 분주하고 거칠게 살아가는 이 세상에서 나를 위해 자기 삶의 한 모퉁이를 기꺼이 내어준 사람들의 얼굴이 함께 떠오릅니다. 나의 어려움을 자기의 어려움처럼 받아들여준 사람, 나의 기쁨을 자기의 기쁨처럼 기뻐해준 사람, 늘 변함없는 모습으로 곁을 지켜주며 나의 고민을 고요히 들어준 사람, 내가 조금 더 건강해지고 온전해지기를 바라며 일생 나를 위해 자신의 삶을 뭉텅이 뭉텅이 내어주다가 작아진 사람. 그런 사람들이 우리 주위에 있었기에 오늘 우리가 여기 이렇게 서있을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또한 우리 주변에 건강함과 온전함을 상실한 사람들을 회복시켜주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그래서 그들이 다시 건강함과 온전함을 회복하고 삶을 감사하며 살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그렇게 우리가 자기만의 감사를 넘어서 너의 감사로까지 감사의 지평을 넓혀나갈 때 이 세상은 참으로 거룩하고 온전한 하나님의 나라가 될 것입니다. 모두 함께 기쁨으로 그런 나라를 만들어가는 청파교우들과 믿음의 백성들이 되길 간절히 기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