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때에 사람들이, 귀신이 들려서 눈이 멀고 말을 못하는 사람 하나를, 예수께 데리고 왔다. 예수께서 그를 고쳐 주시니, 그가 말을 하고, 보게 되었다. 그래서 무리가 모두 놀라서 말하였다. "이 사람이 다윗의 자손이 아닌가?" 그러나 바리새파 사람들은 이 말을 듣고 말하였다. "이 사람이 귀신의 두목 바알세불의 힘을 빌지 않고서는, 귀신을 쫓아내지 못할 것이다." 예수께서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어느 나라든지 서로 갈라지면 망하고, 어느 도시나 가정도 서로 갈라지면 버티지 못한다. 사탄이 사탄을 쫓아내면, 스스로 갈라진 것이다. 그러면 그 나라가 어떻게 서 있겠느냐? 내가 바알세불의 힘을 빌어서 귀신을 쫓아낸다고 하면, 너희의 아들들은 누구의 힘으로 귀신을 쫓아낸다는 말이냐? 그러므로 그들이야말로 너희의 재판관이 될 것이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영을 힘입어서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에게 왔다. 사람이 먼저 힘 센 사람을 묶어 놓지 않고서, 어떻게 그 사람의 집에 들어가서 세간을 털어 갈 수 있느냐? 묶어 놓은 뒤에야, 그 집을 털어 갈 수 있다. 나와 함께 하지 않는 사람은 나를 반대하는 사람이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않는 사람은 헤치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사람들이 무슨 죄를 짓든지, 무슨 신성 모독적인 말을 하든지, 그들은 용서를 받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것은 용서를 받지 못할 것이다. 또 누구든지 인자를 거슬러 말하는 사람은 용서를 받겠으나, 성령을 거슬러 말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도 오는 세상에서도, 용서를 받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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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바른 말이 무너진 곳에서는
좋으신 주님께서 주시는 위로와 평안과 새롭게 하시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 위에 함께하시기를 빕니다. 그리고 두 주만에 두 개의 태풍 피해를 입은 미국의 플로리다 위에도 주님께서 주시는 위로와 치유가 함께하시기를 빕니다.
지난 9일은 한글날이었습니다. 1446년에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반포한 날을 기념하여 정한 날입니다. 훈민정음,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입니다. 한글날을 즈음하여 우리의 말살이가 올바랐는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이번 한글날 어느 공무원은 신조어, 축약어의 잦은 사용으로 소통에 장애가 생긴다고 걱정을 했습니다. 저도 요즘 MZ세대의 말을 많이 모르긴 합니다. 우리 동네 어느 빌라 쓰레기장에 이런 말이 붙어 있었습니다. ‘분리수거 알잘딱’ 쓰레기 분리수거를 알아서 잘 딱 하라는 말이랍니다. 이건 아십니까? ‘ㅇㅈ’ 인정입니다. 그런데 저는 이런 신조어나 축약어가 문제의 말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런 말들은 처음에만 ‘뭔가?’하지만 금방 뜻을 알게 되고 소통에 문제가 없습니다. 정작 우리 사회와 이 세상에서 인간과 인간사이의 소통을 방해해는 문제의 말들은 따로 있습니다. 공감하고 소통할 마음이 없이 하는 말, ‘답정너’- ‘답은 내가 정해놓았으니 너는 내가 원하는대로 대답만 하면 돼.’와 같은 말, 책임을 회피하거나 부정하는 말, 상대를 차별하고 무시하는 말이야말로 소통을 방해하고 문제를 야기하는 말들입니다.
요즘 남북갈등이 심각합니다. 북한의 김정은 위원장이 통일에 관심이 없다며 남북 두 국가론을 주장한 이후 남북 관계는 더욱 단절되었습니다. 남북을 오갈 수 있게 만들었던 경의선 국도와 철도, 동해선 국도와 철도가 사라지고, 길을 밝히던 가로등도 다 뽑혀나갔습니다. 그리고 길이 있던 자리에는 지뢰를 설치했습니다. 이는 북한 내부통제를 강화하기 위한 방법 같으나 스스로를 고립시키는 결코 좋지 못한 방법입니다. 남과 북 사이에 서로를 인정하지 않는 말, 서로를 적으로 규정하는 말, 서로를 비방하는 방송과 쓰레기 풍선이 오가더니 결국에는 관계가 더 멀어지고 둘 사이에 있던 길이 사라지고 장벽이 생기고 지뢰가 깔렸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정말 힘들게 많은 이가 많은 공을 들여 만들었던 소통과 화해와 상생의 길이었는데 너무 쉽게 사라졌습니다. 그 길들은 그렇게 쉽게 사라지면 안 되는 길이었습니다. 부디 평화의 주님께서 함께하셔서 남과 북이 다시 이전처럼 서로를 오가는 평화의 관계를 회복할 수 있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지난 7일(월)은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와 이스라엘이 전쟁을 시작한 지 1년이 되는 날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전선을 레바논과 후티반군과 이란으로까지 확대시켰습니다. 1년 전 하마스가 이스라엘의 민간인 축제 현장을 급습해서 많은 이를 살해하고 수백 명을 인질로 납치한 것은 분명한 범죄였습니다. 그러나 그에 대해 이스라엘은 이미 충분히 보복했습니다. 가자지구에서는 4만 명이 넘게 죽었습니다. 희생자의 70%는 여성과 아이들이었습니다. 서울의 절반밖에 안 되는 가자지구에 7만 톤이 넘는 폭탄을 쏟아부었습니다.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가 9월 유엔에서 연설하면서 가자지구와 레바논과 시리아 이란 이라크를 ‘저주’라 표현하고, 친이스라엘 국가인 사우디 이집트 수단은 ‘축복’이라 표현했습니다. 이스라엘에게 가자와 시리아와 이란과 이라크는 나라도 아니고 그 나라의 국민들은 사람도 아닙니다. 그냥 ‘저주’입니다. ‘저주’라 이름을 붙이니 마음놓고 미사일을 쏘아 죽이고, 총을 쏘아 죽일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저주가 아닙니다. 우리와 똑같이 가정을 이루고 행복하고 평화롭게 살아가길 소망하는 사람이며 나라입니다. 바른 말이 사라지고 그릇된 말이 자리한 곳에서는 언제나 단절과 폭력이 발생합니다.
2. 바알세불
사람들이 눈이 멀고 말을 못하는 사람을 예수님께로 데리고 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사람을 고쳐주셨습니다. 이에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놀라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사람이 다윗의 자손이 아닌가?” 유대인들은 다윗의 자손 중에서 자기들을 구원할 메시아가 나타날 것이라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다른 반응을 보였습니다. 그들은 예수가 바알세불의 힘을 빌어 귀신을 쫓아낸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바알세불은 귀신들의 두목, 악마들의 왕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바리새인들의 반응이 참으로 놀랍습니다. 사람의 손으로 고칠 수 없는 큰 장애를 가지고 있던 사람을 치유해 그를 온전하게 만든 사람이 있다면 그를 메시아라고 고백하는 게 당연했지만, 바리새인들은 그렇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적, 곧 악마의 왕, 바알세불이라고 말했습니다. 귀신으로 귀신을 내어쫓는다? 말이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똑똑한 바리새인들이 왜 이런 말도 안 되는 말을 한 것이었을까요?
바리새인, 그들은 이스라엘의 종교권력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율법과 하나님에 대해서라면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고 자부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많은 유대인들은 바리새인의 권위를 인정했고 그들의 율법해석을 따라 율법을 이해했으며 그들의 말을 하나님의 말씀처럼 믿고 따랐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러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자주 바리새인의 이중성에 대해 비판하셨습니다. 겉과 속이 다른 회칠한 무덤, 겉은 경건한 척하지만 안에는 탐욕이 가득한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비판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바리새인들과는 다르게 율법을 이해하셨습니다. 예수님에게는 율법의 조문보다 율법의 정신이 중요하였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그렇게 말하였지만, 나는 이렇게 말한다’는 식으로 율법을 그 당시 현실에 맞게 재선포하셨습니다. 게다가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이 행하지 못하는 기적까지 행하심으로 많은 유대인이 바리새인들보다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제거하고 싶었습니다. 말이 필요했습니다. 유대 사람들 모두가 예수를 미워하게 만들 프레임이 필요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가 귀신들의 왕 ‘바알세불’의 힘으로 귀신을 쫓아냈다는 말을 만들어 냈습니다. 사람들은 자기들의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님을 ‘바알세불’이라고 규정하는 말을 들으며 이전처럼 예수님을 메시아라고 쉽게 고백하지 못했을 것이며, 개중에는 바리새인들의 선동에 넘어가 예수님을 바알세불의 하수인으로 생각한 이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에게 엄한 말로 주의를 주셨습니다. “사람들이 무슨 죄를 짓든지, 무슨 신성 모독적인 말을 하든지, 그들은 용서를 받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것은 용서를 받지 못할 것이다. 또 누구든지 인자를 거슬러 말하는 사람은 용서를 받겠으나, 성령을 거슬러 말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도 오는 세상에서도 용서를 받지 못할 것이다.” 다른 모든 죄는 용서 받을 수 있지만 성령을 모독하고 거스르는 죄는 용서받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으로 하여금 병자를 고치게 하신 이는 성령, 하나님의 영인데 그것을 바알세불이라 말한 것은 성령을 모독하고 거스른 참으로 악한 죄라는 뜻입니다. 그렇게 가치가 전도된 세상, 최고의 선을 최악의 악이라고 명명하고 정죄하는 세상에서는 그 어떤 선한 가치도 세울 수가 없습니다. 성령을 모독하고 거스른 자는 이 세상에서도 오는 세상에서도 용서받지 못할 것이라 말씀하셨는데, 이는 그렇게 선을 악이라 말하고 악을 선이라 말하는 세상은 아무리 세대가 지나도 아무런 가치를 세울 수 없다는 말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어느 사회마다 ‘바알세불’이라는 말이 있어왔습니다. 권력을 가진 자가 자기의 마음에 들지 않은 자를 대중의 동의를 이끌어 처단할 때 사용하는 말이‘바알세불’이었습니다. 사람을 살리고, 생명을 살리고, 평화를 만드는 사람이 권력자의 생각과 다르고 권력자의 지위를 흔들고 권력자의 이익에 손해를 끼치면 그 사람을 조직과 국가와 신의 이름으로 ‘바알세불’이라 부르며 정죄하고 죽이고 추모도 못하게 했습니다. 중세 유럽의 마녀 사냥이 그랬습니다. 약 삼사백 년에 걸쳐 50만 명이 넘는 죄 없는 여성들이 마녀로 낙인이 찍혀 죽임을 당했습니다. 프랑스의 영웅 잔다르크도 그중 한 명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계시를 받고 전쟁을 이끌었던 잔다르크는 이끄는 전쟁마다 승리했습니다. 그의 인기가 치솟자 왕과 성직자들은 그를 시기했습니다. 결국 ‘사제를 거치지 않고 계시를 받았다’는 말도 안 되는 죄명으로 그를 화형시켰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것 아십니까? 바리새인이 예수님을 바알세불, 악마의 왕이 부르고 그를 죽이려 마음먹는 그 순간 그들이야말로 바알세불에게 사로잡혀 바알세불의 하수인이 되었던 것을. 바알세불은 그렇게 역사합니다. 자신을 절대선으로 여기고 그에 반대하는 자를 절대악으로 정죄해 그를 죽이려 할 때 그는 그 순간 바알세불의 하수인이 되어 바알세불의 일을 하게 됩니다. ‘바알세불’, ‘악마의 왕’은 그런 식으로 시대와 사회에 따라 그 이름을 달리 하면서 악마의 왕으로서 자기의 일을 계속 해나가고 있습니다.
3. 조심해, 하나님은 말이야
파울로 코엘료는 그의 소설 「브리다」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조심해, 신은 말이야. 어떤 상황에서도 말을 조심히 해야 해.” 신은 말입니다. 우리에게는 그런 경험이 있습니다. 평범한 일상이었는데 어떤 이가 나에게 한 한 마디 말 때문에 갑자기 나의 일상이 지옥으로 변하거나 천국으로 변한 경험이. 말은 우리에게 신적인 영향력을 끼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항상 말할 때 조심해야 합니다. “조심해, 신은 말이야. 어떤 상황에서도 말을 조심히 해야 해.”라는 말을 우리 기독교인들은 이렇게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조심해, 하나님은 말이야.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의 말이 하나님께서 하실 만한 말이 되도록 노력해야 해.” 그 반대도 있습니다. “조심해, 바알세불은 말이야.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의 말이 바알세불의 말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해.” 그런데 말은 존재에서 나옵니다. 우리가 예수님처럼 자신을 비우고 자신의 모든 것을 다른 이를 위해 아낌없이 내어주며 사는 존재가 될 때 우리는 예수님과 같이 사람들의 아픔에 공감하고 이해하고 살리는 말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바리새인들처럼 자신을 욕망으로 가득 채우고 자기의 뜻을 하나님의 뜻으로 내세우며 사람들을 정죄하며 사는 존재가 될 때 우리는 바리새인과 같이 사람들을 판단하고 정죄하고 죽음으로 내모는 말을 하게 될 것입니다.
소설가 한강이 노벨문학상을 수상했습니다. 국가적 경사이며 기쁨입니다. 그런데 한강 작가는 수상 기념 기자회견을 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그의 아버지, 한승원 작가가 기자회견을 열었습니다. 한승원 작가는 소설 「아제 아제 바라아제」를 쓰신 분입니다. 한승원 작가는 딸의 수상소식을 듣고는 수상을 축하하기 위해 돼지를 잡아 마을 잔치를 열려고 했다가 취소했다고 합니다. 한강 작가가 지금 러시아 우크라이나,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전쟁이 치열해서 날마다 사람들이 주검으로 실려 나가고 있는데 기자회견이나 축하 잔치를 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참으로 귀한 마음입니다. 한강은 그런 사람 그런 존재인 것입니다. 한강 작가는 불의한 권력자에 의해 그 시대의 바알세불로 낙인찍혀 억울하게 죽어간 생명들에 대한 글을 썼습니다. 그는 5.18을 다룬 「소년이 온다」를 쓰면서는 매일 울었고, 어떤 때는 세 줄을 쓰고 한 시간을 울기도 했다고 합니다. 억울하게 죽어간 이들의 고통과 아픔에 깊이 공감하며 글을 쓴 것입니다. 윤동주의 <서시>에 나온 한 구절이 떠올랐습니다.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하는 마음, 그 마음은 예수님의 마음과도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한강은 그런 마음을 가지고 사는 존재였기에 그런 말을 하고 그런 글을 쓸 수 있었던 것입니다. 바알세불은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바알세불은 자기를 사랑해주지 않는 모든 것을 죽입니다. 뉴스를 보는데 이스라엘의 총리와 군장관 등 각료들이 한 자리에 모여서 군사 회의를 하는 장면이 나왔습니다. 그리 크지 않은 공간에 둘러 앉아 어디를 어떻게 공격할지에 대한 회의를 하는 것 같아보였습니다. 그런데 그들 모두는 머리 위에 키파를 쓰고 있었습니다. 키파는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예배하고 기도할 때 쓰는 작고 동그란 모자입니다. 충격적이었습니다. 그들은 사람을 죽이는 회의를 하는데, 군인뿐 아니라 아이들과 여성들을 미사일로 쏘아 죽이는 회의를 하는데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런 회의를 한 것입니다. 탄식이 절로 나왔습니다. “하나님, 언제까지 이 인류가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일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행해야 합니까? 하나님, 언제까지 이 인류가 사람이 사람을 혐오하고 증오하는 일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행해야 합니까?”
여러분, 조심합시다. 바알세불과 같이 자신을 절대화하고 나와 다른 이를 악으로 규정하고 제거하려는 존재가 되지 않도록, 그리고 바알세불처럼 판단과 정죄와 죽임의 말을 하지 않도록. 그리고 노력합시다. 예수님과 같이 자기를 비워 너를 살리기 위해 나를 내어주는 존재가 되도록, 그리고 예수님처럼 공감과 이해와 살림의 말을 하도록. 우리가 날마다 그렇게 살아갈 때 그릇된 말들이 조금씩 사라지고 바른 말들이 제자리를 잡을 것이고, 그렇게 바른 말들이 제자리를 잡을 때, 단절과 폭력이 넘치는 이 세상도 좀더 하나님 나라에 가까운 세상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여기 모인 우리 모두와 이 땅의 모든 기독교인이 기쁨으로 그 일을 감당해 나갈 수 있길 간절히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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