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 안에 이 마음을 품으십시오. 그것은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기도 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모습을 지니셨으나, 하나님과 동등함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서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과 같이 되셨습니다. 그는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셔서,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를 지극히 높이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그에게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 있는 모든 것들이 예수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고,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라고 고백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습니다. 좋으신 주님께서 주시는 평안과 위로와 새롭게 하시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 위에 함께하시기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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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우리는 잘못 살고 있다.
오늘은 11월 넷째 주일이며 교회력으로는 한 해의 마지막 주일입니다. 다음 주일은 교회력으로 한 해가 시작되는 대림절 첫 주일입니다. 갑자기 오늘이 한 해의 마지막 주일이라고 하니까 당황스럽지요? 교회력은 그리스도의 생애를 중심으로 짜여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탄생, 메시야의 오심을 기다리는 대림절이 새해의 시작입니다. 교회력의 마지막 주일 이름은 왕국주일 혹은 왕이신 그리스도의 날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가 왕이라고 고백하는 것은 예수님이 다윗, 솔로몬, 세종, 정조처럼 한 명의 왕이셨다고 고백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모든 인간이 따라 살아야 할 길, 왕도, 바른 길, 생명의 길을 보여 주신 분이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왕국주일을 맞아 왕 되신 예수님을 기준으로 지난 한 해 우리의 살아온 날들을 돌아보고 새로운 삶을 다짐하는 우리 모두가 되길 소망합니다.
지난 한 해를 돌아보며 절로 나오게 되는 말이 있습니다. ‘힘들었다.’ 우리 교회가 힘들었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가 힘들었다는 말입니다. 여당과 야당은 서 있는 위치와 지향이 다르기에 싸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번 정부 들어 여야의 대립은 너무 극심했습니다. 국민의 보다 나은 삶을 위해 함께 협력하고 협치해야 한다는 본분을 잃어버렸습니다. 국민을 위해 싸운다는데 국민이 보기에는 자리와 권력을 위해 싸우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정치인들이 싸우는 사이에 국민들의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는 ‘전세사기방지’와 같은 민생법안들은 오랜 시간 표류했습니다. 2023년 한 해 자영업하시는 분들 중 폐업하신 분이 100만 명이 넘었고, 올해도 거의 그와 비슷할 것이 예상된다고 합니다. 자영업은 우리나라 경제의 20%를 차지하는 중요한 축입니다. 그 축이 무너지고 있는 겁니다. 목회실이 점심 식사하러 간 식당의 사장님도 ‘코로나 때보다 지금이 더 힘들다, 물가가 오르고, 재료값이 오르고, 손님은 줄고, 거기다가 코로나 때 대출 받은 대출금까지 갚아야 해서 힘들어 죽겠다.’라고 하셨습니다. 특단의 조치와 지원이 절실합니다. 우리나라 정치인들이 서로 죽도록 싸울 것이 아니라 그 싸울 힘으로 죽어가는 국민들을 살리기 위해 노력하면 좋겠습니다.
세계적으로도 참 힘든 한 해였습니다. 전쟁에 대한 뉴스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의 전쟁, 이스라엘과 아랍 국가들의 전쟁,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쟁. 그 전쟁들로 인해 세계는 함께 긴장했고 경제적으로도 어려워졌습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쟁은 점점 격렬해지고 있습니다. 우크라이나는 미국과 영국으로부터 미사일을 지원받아 러시아 본토를 폭격했고, 이에 맞서 러시아는 핵무기 사용이 가능하도록 법으로 바꾸고 시험 삼아 대륙간 탄도미사일을 발사함으로 우크라이나와 우크라이나를 지원하는 국가들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전쟁이 갑자기 격렬해진 이유는 내년 1월에 미국의 트럼프가 대통령으로 취임하게 되면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양쪽에 실력행사를 해서 전쟁을 종전시킬 가능성이 커졌기 때문입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는 종전 협상 테이블에서 상대국에 더 많은 것을 요구하기 위해 열을 올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미 러-우 전쟁이 일어난 지 1000일이 지났습니다. 그간 전쟁으로 죽거나 다친 사람이 무려 100만 명이 넘습니다. 우크라이나의 난민은 670만 명이 넘습니다. 너무나 큰 피해입니다. 불의한 전쟁은 하루속히 끝나야 하고 전쟁을 일으킨 자에게는 반드시 책임을 물어야 합니다.
자연도 힘든 한 해였습니다. 지구온난화로 전 세계가 뜨겁게 끓어올랐습니다. 요즘 출근할 때마다 교회 앞에 가로수로 심겨진 은행나무와 플라타너스를 유심히 보게 됩니다. 이제 겨울이 다 되어 가는데 아직 이파리가 파랗습니다. 가을이 더워지면서 단풍도 들지 못한 채 겨울을 맞게 된 것입니다. 활엽수들은 이파리를 떨구고 민둥몸이 되어야 겨울옷을 입는 것인데, 푸른 이파리를 잔뜩 매달고 어찌 겨울을 날지 얼어죽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됩니다. 나무가 철이 없어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우리 인간이 철이 없이 살아 일어난 일입니다. 환경위기다, 환경재앙이다, 말할 뿐 그릇된 삶의 습관을 하나도 바꾸지 못하고 살아가는 우리 인간의 잘못입니다. 신발장에 신발이 그득한데 또 신발을 사고, 옷장에 옷이 그득한데 또 옷을 사고, 편리하다고 플라스틱 일회용품을 계속 써온 우리 인간의 잘못입니다.
우리나라의 정치적 상황이,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전쟁이, 무너져가는 자연의 질서가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는 것은 이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잘못 살고 있다는 것, 가는 곳 모르면서 그저 달리고 있다는 것, 바른 것을 기준 삼아 삶을 재편성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2. 그리스도 찬가
유대 사람들은 예수님에게서 오래토록 고대했던 메시야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유대인의 왕’이라고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존경과 찬양의 의미로 부른 ‘유대인의 왕’이라는 말은 예수님을 죽음에 이르게 만드는 말이 되었습니다. 제사장과 율법학자들은 예수 죽이기를 주저하던 총독 빌라도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사람을 놓아주면, 총독님은 황제 폐하의 충신이 아닙니다. 자기를 가리켜서 왕이라고 하는 사람은, 누구나 황제 폐하를 반역하는 자입니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십시오. 우리에게는 황제 폐하밖에는 왕이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황제 폐하밖에는 왕이 없습니다’ 제사장과 율법학자들은 예수를 죽이는 일에 혈안이 되어 그만 그들의 속마음을 드러냈습니다. 그들은 백성들 앞에서는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고 사는 사람처럼 행세를 했지만, 실상 그들의 왕은 로마 황제였던 것입니다. 겉으로 고백하는 왕과 속으로 고백하는 왕이 다른 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어떤 방식으로든 그가 진짜 왕으로 모시고 사는 존재는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되어 있습니다. 입으로는 자유, 민주, 국민, 하나님을 왕이라고 말하지만, 결정적 순간 그의 진짜 왕은 권력, 부, 욕망, 자기 자신이었음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우리의 왕, 삶의 기준으로 삼기 위해서는 새삼스럽지만, 예수님이 어떤 분이셨는지를 다시 한번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에 대해서는 성경 곳곳에 많은 설명이 되어 있습니다만, 오늘은 빌립보서 2:5~11의 말씀을 가지고 살펴보겠습니다. 빌립보서 2:5~11의 말씀은 <그리스도 찬가>라는 제목이 붙어 있는 말씀입니다. 성서학자들은 이 구절이 초대교회 집회에서 찬양으로 불려진 예수님에 대한 고백으로 보고 있습니다. 개역개정으로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예수님은 하나님의 본체이시며 하나님과 동등한 분이셨습니다. 예수님을 만났던 사람들은 예수님 속에서 하나님을 느꼈습니다. 그 느낌은 마치 예수님 자체가 하나님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병든 자를 고치시고, 귀신을 쫓아내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기도 했지만, 그런 기적 없이도 예수님은 만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함께하고 계심을 느낄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본 자는 하나님을 보았다,라고 하셨는데, 이는 예수님 자신의 고백이었다고 보기보다는 예수님을 만났던 자들의 고백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비우시고 낮추신 분이셨습니다. 하나님과 같이 귀하신 분이 인간의 몸을 입으셨습니다. 인간의 몸도 왕이나 제사장이나 바리새인의 몸이 아니라 목수의 몸을 입으셨습니다. 인간의 몸을 입으신 예수님은 사람들을 섬기셨습니다. 세리 창기 이방인처럼 죄인으로 낙인찍혀 살아가던 사람들은 예수님을 통해 처음으로 사람으로 대접 받고 자신을 죄인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로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삶을 저주와 형벌로 받아들이며 살던 이들이 예수님과의 만남을 통해 삶이 기쁨과 축복이 될 수도 있음을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비우고 낮추심으로 공허하고 비천하게 살던 이들을 채워주시고 높여주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예수님을 사람들이 죽였습니다.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을 왕으로 삼고 살던 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고 살던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역사 속에서 쉽게 사라질 수 없는 분이셨습니다. 예수님이 가셨던 길이야말로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이 따라 걸어야 할 진리와 생명의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이름을 세상에서 가장 높은 이름으로 높여 주셨고, 모든 이가 그 앞에 무릎을 꿇고, 그를 주로, 참된 왕으로 고백하게 하셨습니다.
빌립보서 기자는 ‘예수님은 이렇게 훌륭한 분이셨다. 그러니 그분을 찬양하자’,라고만 말하지 않았습니다. 2:5에서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살자고 말했습니다. 이 말을 염두에 두고 그리스도의 찬가를 읽어보면 이렇습니다. ‘우리도 비록 사람의 모습으로 살지만 하나님의 모습을 드러내려 노력하며 살자. 우리를 비우고 낮추어 다른 사람들을 채우고 높여 주며 살자. 비록 이 세상에서 인정받지 못한다 하더라도 하나님이 인정해 주시는 삶, 하나님이 높여주시는 삶을 살자.’ 빌립보서 기자의 이 권면을 따라 살 때 예수를 왕이라고 고백하는 우리의 고백은 참된 고백이 될 것입니다.
3. 예수, 우리 왕이여
임금 왕王자는 한 일자가 위에서 아래로 세 개가 있고 그 중간을 세로획이 이어주고 있습니다. ‘왕’자는 갑골문에 보면 고대에 권력을 상징하던 도끼를 그린 상형문자입니다. 그런데 어떤 이는 이 글자를 좀 다르게 풉니다. 제일 위에 한 일자는 하늘을, 제일 아래 한 일자는 땅을, 중간의 한 일자는 사람을 뜻하고, 이 셋을 하나로 이어주는 세로획과 같은 역할을 하는 사람이 왕이라고. 곧 하늘과 땅과 사람을 하나로 이어주는 이가 사람을 참되게 다스리는 왕이라는 말입니다. 참 멋진 해석입니다. 자기 하고 싶은 대로 다 하는 사람이 왕이 아니라, 하늘과 땅과 사람을 잇는 사람, 하늘의 뜻을 땅과 사람 사이에 이루는 사람이 왕입니다. 예수님이 그런 왕으로 사셨습니다.
이탈리아 아씨시의 성자 프란체스코를 아시지요? 기독교 역사에 있어 가장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이로 평가 받고 있는 성자입니다. 그는 본디 부유한 상인의 아들이었으나 회심 후 아버지에게 받은 모든 것을 돌려드렸습니다. 속옷까지 돌려드리고 알몸이 되었습니다. 자신을 완전히 비우고 낮춘 것입니다. 늘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기도하던 어느 날 프란체스코는 다음과 같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되었습니다. “가서 허물어져가는 나의 집을 고쳐라.” 프란체스코는 동네에 무너져 있던 성당을 고쳤습니다. 그런데 그 이후에야 하나님이 말씀하신 집이 하나의 성당이 아니라 모든 교회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교회를 새롭게 하기 위해 가난과 겸손을 실천하기 위한 수도 공동체를 세워 무너져가던 교회를 새롭게 세우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프란체스코는 자연의 모든 만물을 귀히 여겼습니다. 태양을 형님이라 부르고 달을 누이라 불렀습니다. 프란첸스코는 자연 만물도 사람처럼 귀한 생명으로 여겨 꽃, 새, 물고기, 심지어 포악한 늑대에게까지 설교했습니다. 또한 프란체스코는 사람들을 하늘과 이어주었습니다. 그의 제자들이 남긴 글을 보면 프란체스코는 기도 중에 그의 몸이 공중에 뜨고, 그 몸에서 빛이 나는 일이 많았다는 이야기가 자주 나옵니다. 이는 실제로 그의 몸이 공중부양을 하고 그 몸에서 빛이 나왔다기보다는 사람들이 프란체스코를 통해, 하늘을, 하나님을, 예수님을 가까이 느끼게 되었다는 말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프란체스코는 자기의 삶을 통해 하늘의 뜻을 사람과 땅 위에 그대로 전해주며 살았습니다. 그가 그렇게 살 수 있었던 것은 예수를 자기의 왕으로 모시고 살았기 때문입니다.
하늘의 법을 무시하고, 땅의 뭇 생명의 아픔에 귀 기울이지 않고, 함께 살아가는 이들을 귀히 여기지 않고 살아온 결과가 오늘 우리 눈앞에 놓여 있습니다. 그릇된 것을 왕으로 삼고 살아온 결과입니다. 우리가 매주일 ‘임재의 기원’ 찬양으로 부르는 <예수, 우리 왕이여> 찬양을 예배당에서뿐 아니라 일상의 자리에서 입술이 아니라 삶으로 부르는 이들이 되면 좋겠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하나님을 우리도 이 세상이 보여주며 살아갈 수 있도록 노력합시다.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비우고 낮추어 다른 사람들을 채우고 높이셨듯이 우리도 자신을 채우고 높이는 일이 아니라 다른 이를 채우고 높이는 일에 열심을 내며 살아갑시다. 기쁘고 감사한 마음으로 그 귀하고 아름다운 일을 함께 이루어가는 청파의 교우들과 믿음의 사람들이 되길 간절히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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