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왕의 말을 듣고 떠났다. 그런데 동방에서 본 그 별이 그들 앞에 나타나서 그들을 인도해 가다가, 아기가 있는 곳에 이르러서, 그 위에 멈추었다. 그들은 그 별을 보고, 무척이나 크게 기뻐하였다. 그들은 그 집에 들어가서, 아기가 그의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엎드려서 그에게 경배하였다. 그리고 그들의 보물 상자를 열어서, 아기에게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렸다.'
------------------------
1. 그리스도를 기다리며
좋으신 주님께서 주시는 위로와 평안과 새롭게 하시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 위에 함께하시기를 빕니다. 첫눈이 내렸습니다. 그런데 요란하게 내렸습니다. 근사한 풍광을 만들기는 했으나 너무 많은 눈이 내려 곳곳에서 큰 피해가 발생했습니다. 도로가 마비되고 학교가 휴교하고 사람이 죽기도 했습니다. 낭만적이었어야 할 첫눈까지 폭력적으로 변한 것을 보며 기후위기를 절감했습니다. 어려움을 당한 많은 사람과 죽음을 맞이한 영혼과 유족 위에 주님의 위로가 함께하시기를 빕니다. 이스라엘과 레바논의 헤즈볼라 사이에 휴전협정이 이루어졌습니다. 레바논뿐 아니라 미국과 프랑스 등 여러 나라가 그 소식을 기쁘게 반겼습니다. 그러나 휴전협정 하루만에 이스라엘은 레바논을 다시 공습했습니다. 참담합니다. 평화의 길이 너무 멀게만 느껴집니다. 이제 얼마 안 있으면 성탄절이 되는데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와 위로가 전쟁의 땅 위에 임하길 소망합니다.
사무엘 베케트의 희곡 <고도를 기다리며>에는 두 부랑자 고고라는 에스트라공과 디디라는 블라디미르가 나옵니다. 그들은 나무가 한 그루 심겨져 있는 길 위에서 고도를 기다립니다. 둘은 고도를 기다리며 서로 싱거운 대화를 나누고 싸우고 화해하고 졸기도합니다. 지나가는 사람들과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며 시간을 보내기도 합니다. 그러나 기다리는 고도는 좀처럼 오지를 않습니다. 저녁 무렵에 양치기 소년이 와서 이렇게 말해 줍니다. “고도씨는 오늘 오지 못합니다. 그러나 내일은 확실히 오신다고 합니다.” 그 다음날 새로운 태양은 떠올랐지만 하루 동안 벌어지는 일은 어제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고고와 디디의 기다림이 무색하게 고도는 저녁이 되어도 오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내일은 고도가 오기를 기다리며 하루를 마칠 뿐입니다. ‘고도’가 무엇인지 누구인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고도를 기다리며 살아갑니다. <고도를 기다리며>는 우리에게 묻습니다. ‘당신은 무엇을 기다리며 살고 있습니까?’라고.
오늘부터 대림절이 시작됩니다. 대림, 기다릴 待에 임할 臨자입니다. 임하시는 분을 기다리는 절기가 대림절입니다. 성탄절이 있는 주간까지 4주간 계속됩니다. 기독교의 교회력은 예수님 오심을 기다리는 것으로 시작이 됩니다. 곧 기독교는 기다림의 종교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것 아십니까? 기다림은 존재를 규정해줍니다. 기다림이 존재를 규정한다, 무슨 말일까요? 수능이 끝나길 기다리는 사람은 수험생이고, 제대를 기다리는 사람은 군인이고, 취업을 기다리는 사람은 취업준비생이고, 출산을 기다리는 사람은 산모이죠. 그 사람이 간절히 기다리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면 그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간절히 기다리며 살고 있습니까?’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기다리며 사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2. 나의 기다림 너의 기다림
아기 예수 탄생 이야기에 등장하는 동방박사들도 기다리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전승에 따르면, 그들은 페르시아에서 별을 관찰하다가 유대의 왕이 태어날 것을 알리는 별을 발견하고 그에게 경배를 드리기 위해 먼 여행길에 올랐습니다. 그 길은 페르시아에서부터 유대 땅까지 족히 1년은 걸리는 먼 길이었습니다. 그들은 광야와 사막을 지나고, 산을 넘고, 강을 건넜을 것입니다. 험한 길이었고 강도를 만날 수도 있는 위험한 길이었습니다. 그들이 오직 작은 별 하나만 바라보며 온갖 위험을 무릅쓰고 계속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던 것은 그들에게 기다림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유대인의 왕을 만난다는 기다림, 그 왕에게 예물을 드리며 경배드릴 날에 대한 기다림이 그들을 계속 걷게 만들었을 것입니다.
동방박사들은 고되고 험한 여행 끝에 드디어 유대 왕의 탄생을 알리는 별이 멈추어선 곳에 이르렀습니다. 그곳은 베들레헴이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는 왕궁에 계시지 않았습니다. 별이 멈추어 선 곳은 허름한 마굿간이었습니다. 제가 동방박사였다면, 한참을 주저했을 것입니다. ‘이곳이 맞아? 정말 이곳이야?’하며 선뜻 마굿간 안으로 들어가지 못했을 것입니다. 내내 길을 안내해 주었던 별을 바라보며 별이 이렇게 말해주기를 기다렸을 것입니다. “경로를 재탐색합니다.” 그러나 그 별은 계속 마굿간 위에 머물렀습니다. 동방박사들은 그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그곳에는 한 가족이 있었습니다. 누가 보아도 왕의 가족은 아니었으며 왕이 될 수 있는 가족으로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호적신고를 하기 위해 고향에 왔지만 방 한 칸 얻지 못하고 마굿간에서 출산을 한 불쌍한 신혼부부와 그들의 가여운 아기였습니다. 달라도 너무 달랐습니다. 동방박사들이 오랫동안 기다려온 여행의 마지막 장면은 결코 이런 장면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찌 된 영문인지 동방박사들은 그 불쌍한 부부의 가여운 아기를 유대인의 왕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유대인의 왕을 만나면 드리려고 가져온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선뜻 그 아기에게 바치고 엎드려 경배했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던 것일까요? 동방박사들은 자기들의 오랜 기다림이 이루어지는 것보다 바로 지금 이 순간 자기들의 눈앞에 있는 불쌍한 신혼부부와 아기의 긴급한 기다림에 응답하는 것이 옳다고 여겼기에 그런 일을 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동방박사들은 그저 불쌍한 부부의 가여운 아기에게 선물을 드리고 경배를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에게 선물을 드리고 경배를 한 것이었습니다. 바로 여기에 하나님의 신비가 담겨 있습니다. 나의 기다림보다 너의 기다림을 귀히 여겨 내가 가진 귀한 것을 너에게 주는 것이 바로 하나님께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드리고 경배하는 것과 같으며, 너의 기다림을 위해 나의 기다림을 뒤로 물릴 때 바로 그 자리에 그리스도께서 임하십니다.
3. 기다림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
우리의 그리스도 예수님께서도 기다리며 사셨던 분이셨습니다. 예수님은 무엇을 기다리며 사셨지요? 하나님 나라가 임하길 기다리며 사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실 때, ‘나라가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는 기도도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는 하나님이 아니라 로마와 율법이 다스리던 나라였습니다. 유대 사람들은 로마의 칼과 창에 짓눌리고 율법의 규율과 정죄에 억눌린 채 살았습니다. 한 명의 온전한 인간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로마와 율법을 위한 도구와 수단이 되어 살아갈 뿐이었습니다. 사실 그때, 하나님 나라가 땅 위에 이루어지기를 기다렸던 것은 예수님만이 아니었습니다. 그 시대를 살았던 모든 사람들이 타는 목마름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렸습니다.
예수님은 가만히 앉아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기를 기다리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기를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다가가 직접 하나님의 나라가 되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사람들에게 하나님 나라가 되어 주셨습니까? 그 옛날 동방박사들이 당신에게 하셨듯이 너의 기다림에 응답하심으로 그렇게 하셨습니다. 주린 자에게는 먹을 것을 주셨고, 목마른 자에게는 마실 것을 주셨고, 나그네는 영접해 주셨고, 병든 자는 돌보아 주셨고, 갇힌 자는 찾아가 보아주심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되어 주셨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임하기를 기다리다가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는 이들에게 하나님 나라가 되어 주는 것. 그것이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신 일이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우리가 이 땅에서 해야 할 일입니다.
세계 곳곳에서 전쟁의 포성이 그치지 않고 있습니다. 그 옛날 베들레헴 마굿간의 젊은 부부와 아기처럼 불쌍하고 긴급한 도움을 필요로 하는 상황 가운데 놓여있는 이들이 많습니다. 작년 12월 대림절, 베들레헴에 있는 루터교 성탄교회에도 예수 구유 장식이 만들어졌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마굿간이 아니었습니다. 지푸라기나 구유도 없었습니다. 무너져 내린 시멘트 더미 사이에 아기 예수 인형이 놓여 있었습니다. 그것은 가자 지구에서 이스라엘의 폭격으로 건물 잔해에 깔려 죽은 수많은 아기를 오마주한 장식이었습니다. 그리스도가 오시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하나님 나라가 임하기를 간절히 기다리는 이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우리가 그들의 기다림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 되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우리가 자기만의 기다림에 함몰되지 않고 서로의 기다림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 되려고 노력할 때, 이 땅에 하나님 나라는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 귀하고 아름다운 일을 기쁨으로 감당하는 청파의 교우들과 믿음의 백성이 되길 간절히 기원합니다.
'좋은 말씀 > 김재홍목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헤롯에 맞서 (마 2:12~18) / 김재홍 목사 (3) | 2024.12.17 |
---|---|
육신이 말씀이 되어 (요 1:9~14) / 김재홍 목사 (1) | 2024.12.14 |
예수, 우리 왕이여!(빌 2:5~11) / 김재홍목사 (1) | 2024.11.26 |
생명의 말, 죽음의 말 (눅 18:10~14) / 김재홍목사 (0) | 2024.11.22 |
감사의 지평을 넓히는 사람 (레 19:9~16) / 김재홍목사 (3) | 2024.11.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