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빛이 있었다. 그 빛이 세상에 와서 모든 사람을 비추고 있다. 그는 세상에 계셨다. 세상이 그로 말미암아 생겨났는데도, 세상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였다. 그가 자기 땅에 오셨으나, 그의 백성은 그를 맞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를 맞아들인 사람들, 곧 그 이름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주셨다. 이들은 혈통에서나, 육정에서나, 사람의 뜻에서 나지 아니하고, 하나님에게서 났다. 그 말씀은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의 영광을 보았다. 그것은 아버지께서 주신, 외아들의 영광이었다. 그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였다.'
1. 혼돈 속에 빛으로 찾아온 말씀
좋으신 주님께서 주시는 위로와 평안과 새롭게 하시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 위에 함께하시기를 빕니다. 오늘은 대림절 둘째 주일이며 성서주일입니다. 주님의 말씀인 성서가 우리에게 주어짐에 감사하고, 그 말씀을 소중히 여길 뿐 아니라 다른 이에게 전하며 살기를 다짐하는 날입니다. 우리에게 찾아온 귀한 말씀, 성경의 의미를 다시 한 번 되새기는 시간이 되길 소망합니다.
지난 화요일 저녁에 다들 깜짝 놀라셨지요? 핸드폰에 ‘대통령 비상계엄 선포’ 알림이 떠서, ‘요즘은 신문사도 가짜 뉴스를 올리나?’ 싶었습니다. 얼른 인터넷에서 몇 곳의 언론사를 검색해본 후 진짜인 것을 확인했습니다. 믿기지 않았습니다. 방송에서 대통령은 비상계엄을 선언하였습니다. 계엄사령관은 포고령을 발표했습니다. 국민의 많은 기본권을 제한한다는 말 끝에는 이런 말도 있었습니다. “위반자는 처단한다.” 도저히 믿기지 않았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피 흘려 이룩하고 지켜온 민주주의가 한 순간에 무너지는 느낌이었습니다. 다행히 국회위원들이 빠르게 ‘계엄해제요구안’을 가결시켰습니다. 이를 막으려 했던 군인들을 보좌관들과 시민들이 저지함으로 가능했던 일입니다. 하룻밤 사이에 일어난 대부분의 일이 이해하기 어렵고 가슴 아팠지만, 계엄선언 다음날 대통령이 여당관계자들과 함께 모인 자리에서 했다는 말이 참으로 가슴 아프게 다가왔습니다. “나는 잘못이 없다.” 나는 잘못이 없다? 본인 때문에 온 국민이 놀라고 온 세계가 놀랐는데 나는 잘못이 없다니. 계엄선언도 잘못되었지만, 그런 큰 과오를 저지르고도 스스로 잘못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더 큰 잘못입니다. 논어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과이불개 過而不改 시위과의是謂過矣. 잘못을 하고도 고치지 않는 것을 잘못이라고 한다.
계엄은 일단락되었습니다만, 대통령이 탄핵이 돼야 한다 아니다가 맞서고 내란죄다 아니다가 맞서고 있어 정리까지는 꽤 시간이 걸릴 듯합니다. 그때까지 이 사회는 계속 혼란을 겪을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혼란한 사회를 보며 떠오른 성경말씀은 창세기 1:2이었습니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어둠이 깊은 위에 있고’… 창세기는 천지창조 이전의 상태를 ‘혼돈과 공허와 어둠’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혼돈과 공허와 어둠이 가득했던 세상에 하나님께서는 “빛이 있으라” 말씀하심으로 창조를 시작하셨습니다. 이는 마치 물리학자들이 우주의 시작에 대한 이론으로 빅뱅, 대폭발을 이야기하는 것과 비슷한 느낌을 줍니다. 그런데 사실 이 말씀은 이스라엘 역사에 있어 혼돈과 공허와 어둠이 가장 심했던 시기인 바벨론 포로기 때 찾아왔던 말씀이었습니다. 창세기 1:2에는 혼돈과 공허와 어둠이 극심했던 시기에 자기들에게 찾아와 새로운 시작과 빛이 되셨던 말씀에 대한 체험이 담겨 있습니다.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혼란한 시기를 보내고 있는 우리에게도 새로운 시작과 빛이 되시는 주님의 말씀이 찾아오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2. 말씀이 찾아와 하시는 일
갈라디아서 2장에는 초대교회에 있었던 하나의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배경은 안디옥교회였습니다. 안디옥교회는 시리아에 있던 교회로 이방인 선교의 전초기지와 같은 역할을 하던 중요한 교회였습니다. 베드로가 그 안디옥교회에 방문했습니다. 베드로는 그곳에서 이방인 기독교인들과 함께 식사를 했습니다. 유대인인 베드로 사도가 이방 기독교인과 함께 식사를 한 것은 그것 자체로 하나의 사건이었습니다. 유대인은 본디 율법에 의해 이방인과 겸상을 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율법을 어기는 것입니다. 안디옥의 이방 기독교인들도 유대인인 베드로 사도가 율법의 규율을 넘어서 자신들과 함께 식사를 한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고 그에 대해 고마운 마음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식사 도중에 예루살렘 교회에서 유대 기독교인 몇 사람이 오자, 베드로가 일어나 나갔습니다. 그 자리에서 함께 식사하던 유대 기독교인들도 일어나 나갔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에서 온 유대기독교인이 율법으로 자신들을 정죄할까봐 두려웠던 것입니다. 베드로가 식사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가는 순간, 그 식탁에 남아 있던 이방 기독교인들은 어떤 마음이 들었을까요? ‘우리는 함께 식사도 할 수 없는 부정한 존재구나. 이방인과 유대인의 간극은 복음으로도 넘어설 수 없는 것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을까요? 베드로는 유대 기독교인들로부터 정죄받음을 피하려다가 이방 기독교인들에게 큰 상처를 주었습니다.
바울은 그런 베드로의 얼굴을 마주 보고 “그것은 잘못한 일이다”라며 나무랐습니다. 새번역 성경이 ‘잘못한 일’이라고 번역한 말은 헬라어 성경을 보면 ‘저주받을 만한 일’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강하게 질책한 것입니다. 바울이 보았을 때 베드로의 행동은 아주 위선적인 행동이었으며 복음의 진리를 따르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안디옥의 이방 기독교인과 함께 식사함으로 자신이 율법의 선을 넘어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는 것처럼 행동하더니 예루살렘에서 사람들이 오자 식사 자리에서 일어나 나감으로 자신이 여전히 율법에 붙들려 있음을, 자신의 이중성을 드러내 보였습니다. 또 그뿐 아니라 율법을 들어 이방 기독교인을 부정한 자로 차별한 것은 복음의 정신을 따르지 않은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수제자였고 바울은 제자 출신이 아니었습니다. 믿음의 연한도 베드로가 바울보다 훨씬 많았습니다. 초대교회 내에서의 입지도 베드로가 바울보다 훨씬 컸습니다. 베드로가 바울에게 화를 낼만도 했는데 갈라디아서에는 바울의 면박에 대한 베드로의 반응은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아마 베드로가 바울의 질책을 받아들였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사도행전 15장에는 예루살렘 회의 장면이 나옵니다. 초대교회에서는 이방 기독교인에게 어디까지 율법을 지키라고 해야 하는가가 늘 논쟁거리였습니다. 유대 기독교인 중에는 이방 기독교인도 할례를 받고 여러 모세의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가 많았습니다. 이 논쟁은 초대교회 내에 있던 혼돈과 어둠이었습니다. 사도들과 장로들이 많은 논쟁을 벌였습니다. 논쟁을 잠재운 것은 바울이 아니라 베드로였습니다. 베드로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방 사람들도 복음의 말씀을 믿게 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주신 성령을 그들에게도 주셨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그들 사이에 아무런 차별을 두지 않으셨다. 그런데 왜 우리도 감당할 수 없던 멍에를 그들에게 지우려 하느냐.’ 베드로의 모습이 안디옥 교회 때와는 상당히 달라졌습니다. 이방인 논쟁은 다음과 같은 원칙을 세우며 종결되었습니다. “이방인에게 할례와 율법을 강요하지 않는다.” 사람의 위대함은 그가 잘못을 저지르지 않음을 통해 드러난다기보다는 그가 잘못을 저지른 후 어떤 자세를 취했느냐를 통해 드러납니다. 베드로는 바울의 질책을 통해 자신의 잘못을 깨달았을 뿐 아니라 바울을 도와 초대교회가 이방인 선교에 있어 바른 기준을 세우게 만들었습니다. 말씀이 우리에게 찾아와 하시는 일은 언제나 그와 같습니다. 우리로 자기절대화에서 벗어나게 하시고, 말씀을 기준 삼아 우리의 잘못을 고치게 하십니다. 그렇게 말씀에 바로 선 사람이 있는 곳에서는 혼란과 공허와 어둠이 잦아들고 빛이 찾아듭니다.
3. 육신이 말씀이 되어
세상에는 자기를 절대화했기에 잘못을 고치지 않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시인 김수영은 자기를 절대화하며 반성하지 않는 자가 어떤 문제를 만들어내는지를 <절망>이란 시에서 명확하게 드러냈습니다.
풍경이 풍경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곰팡이 곰팡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여름이 여름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속도가 속도를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졸렬과 수치가 그들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바람은 딴 데에서 오고
구원은 예기치 않은 순간에 오고
절망은 끝까지 그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다
마지막 줄이 압권입니다. ‘절망은 끝까지 그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다.’ 자기를 절대화하고 반성하지 않는 사람은 주변 사람들에게 큰 절망과 아픔을 가져다줍니다. 혼돈과 공허와 어둠을 가져다줍니다. 에덴 동산의 아담과 하와의 이야기가 우리들에게 들려주는 메시지도 그것 아닙니까? ‘자신이 하나님이 되려고 하지 마라, 저마다 하나님처럼 절대적 존재가 되려고 할 때 세상은 무너진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의 후예인 인간은 절대적 존재가 되려는 본능을 품고 살아갑니다. 황제와 독재자뿐 아니라 모든 인간 속에는 그런 본능이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삼고 자기의 잘못을 고치며 살아가야 할 믿음의 사람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의 주장을 절대화하는 도구로 사용함으로 이 세상에 절망과 혼돈과 공허와 어둠을 가져올 때가 많습니다. 대표적으로 중세 교회가 그러했습니다. 11세기 교황이었던 그레고리오7세는 교황이 황제나 왕보다 우월하다고 선포했습니다. 그는 27개조의 칙서를 발표했는데 거기에는 이런 내용이 담겨 있었습니다. “로마 교황은 홀로 보편적이다. 오직 교황만이 어느 누구에게도 심판받지 않는다. 로마교회의 결정에는 결코 오류가 없으며, 영원토록 오류를 범하지 않는다.” 교황은 홀로 보편적이라는 말은 교황 홀로 절대적이라 말입니다. 절대적이기에 오류가 없고 오류가 없기에 심판받지 않는다고 말한 것입니다. 소위 말하는 교황무오설의 근거가 되는 칙서입니다. 무오설 혹은 무류성이라고 말하는 단어는 영어로 Infallibility입니다. 직역하면 ‘틀릴 수 없음’입니다. 자신을 절대화한 교황과 중세교회는 말씀에서 멀어져갔습니다. 절대자로 군림한 교황과 교회는 부유해지는 동시에 부패했고 일반 민중의 절망과 고통은 커져만 갔습니다.
그런 그릇된 절대성과 무오류성에 맞섰던 이가 있었습니다. 존 위클리프. 그는 1300년대 영국에서 살았던 옥스퍼드 대학 출신의 신학자요 신부였습니다. 그는 어느 날 로마 교황청에 방문했다가 돈을 밝히는 교황의 탐욕적인 모습을 보고는 크게 실망했습니다. 그는 교황과 성직자들의 부패를 비판했습니다. 위클리프가 비판의 근거로 세운 것은 말씀, 성경이었습니다. 성경 속의 예수님은 사람들을 섬기며 가난하게 사셨는데 예수님을 구세주로 고백하고 따르는 교황과 성직자들은 섬김을 받으며 부유하게 살았습니다. 성경과 중세교회 사이에 큰 격차가 있었던 것입니다. 위클리프는 그 격차를 줄이기 위해서는 민중들로 하여금 직접 성경을 읽게 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당시 중세교회는 라틴어 성경을 사용했습니다. 그래서 일반인들은 성경을 읽을 수가 없었습니다. 위클리프는 성경 번역을 금지했던 교회의 법을 어기고 1382년 성경을 영어로 번역했습니다. 그런데 위클리프는 성경을 라틴어에서 영어로만 번역하지 않았습니다. 삶으로도 번역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를 따라 섬김을 받기보다는 섬기며 살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는 성실하고 청빈하게 살았습니다. 많은 이가 위클리프의 삶을 보면서 감화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중세교회는 위클리프를 따르는 사람들을 죽였습니다. 위클리프가 번역한 성경을 읽는 사람들을 성경과 함께 화형시켰습니다. 위클리프는 1384년 죽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죽고 31년이 지난 후 교황은 위클리프의 무덤을 파헤쳐 그의 유골을 끄집어내 화형에 처하고 그 재를 강물에 뿌리도록 했습니다. 그의 재는 강물 속으로 사라졌지만, 바른 말씀을 기준으로 잘못을 고치려던 그의 노력은 얀 후스와 루터와 같은 이의 가슴 속으로 스며들어 마침내 종교개혁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요한복음 1:14의 말씀을 읽어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예수님 당시의 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말씀을 자신을 절대화하는 도구로 전락시켰습니다. 그들은 율법으로 사람들을 다스릴 뿐 말씀으로 자기의 잘못을 고치려하지 않았습니다. 하여 율법은 사람들에게 빛과 생명이 되지 못하고 절망과 아픔이 될 뿐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반대셨습니다. 예수님은 말씀으로 자신을 절대화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말씀에 절대적으로 순종하셨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을 보게 되었고, 말씀의 본뜻이 무엇인지를 확연히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는 말 속에 담긴 뜻이었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은 예수님을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라고 하였지만, 예수님은 육신이 말씀이 되신 분이시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육신을 가지고도 말씀을 이루며 살 수 있음을 몸소 보여 주셨습니다. 그 예수님이 우리의 희망이며 모범입니다. 혼돈과 공허와 어둠과 절망이 가득한 이 시대도 하나님과 말씀을 필요로 합니다. 누군가는 자기의 삶으로 하나님과 말씀을 드러내며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과 말씀 속에 있는 생명과 빛을 세상에 전하며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그런 사람이 됩시다. 그러기 위해서는 해야 할 일들이 있습니다. 우리 자신을 절대화하며 살지 맙시다. 우리가 그렇게 살아갈 때 우리는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절망과 고통이 될 뿐이라는 사실을 잊지 맙시다. 말씀을 기준으로 하여 끊임없이 우리의 잘못을 인정하고 고치며 살아갑시다. 그럴 때 우리는 혼돈과 공허와 어둠과 절망이 가득한 이 세상에 빛과 생명을 가져오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베드로처럼, 위클리프처럼, 예수님처럼. 우리 청파의 모든 교우와 이 시대의 모든 믿음의 백성들이 그 귀한 일을 이루며 살아가길 간절히 기원합니다.
'좋은 말씀 > 김재홍목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내 영혼의 열망 (시 42:1-5) / 김재홍 목사 (0) | 2024.12.25 |
---|---|
헤롯에 맞서 (마 2:12~18) / 김재홍 목사 (3) | 2024.12.17 |
그리스도를 기다리며 (마 2:9~11) / 김재홍 목사 (2) | 2024.12.05 |
예수, 우리 왕이여!(빌 2:5~11) / 김재홍목사 (1) | 2024.11.26 |
생명의 말, 죽음의 말 (눅 18:10~14) / 김재홍목사 (0) | 2024.11.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