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매일 묵상

겟세마네(3)(막14:33)

새벽지기1 2024. 2. 24. 06:23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가실새 심히 놀라시며 슬퍼하사'(막14:33)

 

예수님의 공포와 불안은 사명의 해체로 인한 것입니다. 그의 사명은 임박한 하나님 나라의 선포였습니다. 거기에 근거해서 예수님은 말씀을 가르치고 병든 자를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셨고, 죄의 용서를 선포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참여할 수 있는 길은 율법이나 종교적 업적이 아니라 회심뿐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하나님의 나라와 일치해서 활동하셨습니다. 그 하나님의 나라가 아주 가까이 왔다고, 이미 시작했다고 보았습니다. 그런 생각에 집중해서 예수님은 삼년 가까운 공생애를 사셨습니다.

 

마지막 순간이 다가왔습니다. 그것은 그가 전혀 의도하지 않았던 일입니다. 그가 선포한 하나님 나라는 여전히 요원했습니다. 세상은 여전히 부조리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요지부동이었습니다. 제자들을 통해서 예수님의 사명이 전수될 것 같지도 않습니다. 아무 것도 이룬 것이 없는 상태에서 죽음이 임박한 예수님의 심정이 어땠을지는 불문가지입니다.

 

여기서 몇 가지 질문이 가능합니다. 하나님과 본질적으로 하나인 분이 어떻게 공포와 불안을 느낄 수 있을까요? 예수님의 실존은 우리 인간과 다를 게 하나도 없었다는 사실을 전제해야 합니다. 인간의 실존적 불안을 그대로 안고 있는 하나님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몰트만의 표현을 빌리면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이 곧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면 자신의 운명을, 즉 사명이 해체되리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어야 하는 게 아닐까요? 미리 알고 있었다면 실망할 일도 없고, 따라서 충격을 받을 일도 없었겠지요. 이런 문제가 기독론에서 중요합니다. 그의 신성과 인성의 관계에 대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안에서 모든 인식에 제한이 없는 분이었지만, 동시에 그런 한계를 안고 사셨습니다.

'좋은 말씀 > -매일 묵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겟세마네(5)(막14:35)  (0) 2024.02.24
겟세마네(4)  (0) 2024.02.24
겟세마네(2)(막14:33)  (0) 2024.02.23
겟세마네(1)(막14:32)  (0) 2024.02.23
나를 버리리라(7)(막14:31)  (0) 2024.02.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