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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6장 16-18절: 탐닉도, 금욕도 아니다

새벽지기1 2023. 11. 9. 06:41

마태복음 6장 16-18절: 탐닉도, 금욕도 아니다

사역:

“또 너희는 금식할 때 위선자들이 그러는 것처럼 초췌한 모습을 하지 말아라. 그들은 얼굴 표정을 어둡게 하여 그들이 금식하고 있다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보이려 한다. 진정으로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그들은 받을 것을 다 받았다. 그러니 너희는 금식할 때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깨끗이 씻어서 단정히 하여라. 그래서 너희가 금식하고 있다는 사실이 사람들이 아니라 숨어 계시는 너희 아버지께만 보이게 하여라. 그러면 드러나지 않은 채 지켜 보시는 너희 아버지께서 응답해 주실 것이다.”

 

해설과 묵상:

금식은 유대교인들의 중요한 영적 훈련 중 하나였습니다. ‘금식’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쭘’(tzsum)은 ‘입을 막다’는 뜻입니다. 금식은 주로 음식을 끊는 행위를 말하는데, 때로 물까지 금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금식은 비상의 상황에서 자연스럽게 생겨난 행동이었을 것입니다. 크나 큰 재앙을 당하고 나면 그 충격으로 인해 식음을 전폐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면 그분 앞에 머물러 앉아 통곡하고 절규하고 간구하게 되어 있습니다. 혹은 하나님 앞에 큰 죄를 범했을 경우, 죄책감에 짓눌려 식욕을 잃어버립니다. 그럴 경우, 하나님 앞에 전적으로 항복하고 용서를 구하게 됩니다. 

 

식음을 전폐하는 것은, 지금 당한 일이 자신에게 그만큼 중요한 일이라는 고백입니다. ‘금식기도’라는 특별한 기도 방식은 이런 상황에서 생겨났을 것입니다. 그 전통이 이어져 금식기도는 비상의 상황을 대처하는 영적 처방으로 여겨졌습니다. 개인적으로나 국가적으로 중대한 사안이 발생하면 금식하며 기도하는 전통이 만들어진 것입니다. 국가적인 재난을 당했을 때(삿 20:26; 에 8:21-23; 느 1:1-4; 욘 3:10) 혹은 중요한 과제를 앞두고 있을 때(마 4:1-17; 행 14:23) 금식하고 기도했습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교 안에는 정기적으로 금식하며 기도하는 전통이 자리를 잡았습니다. 경건한 유대인들은 일 주일에 두 번 즉 월요일과 목요일에 금식을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루가 일몰 이후에 시작되는 것으로 여겼기 때문에 저녁식사로부터 세 끼를 금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영적으로 깨어 있기 위해 금식을 하는 것은 존경 받을만한 일이었습니다. 영적인 가치을 그만큼 중요하게 여기고 있다는 의미였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반전이 일어납니다. 사람들로부터 영적인 사람으로 인정받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자신이 금식 중이라는 사실을 드러내곤 했습니다. 가장 전형적인 방법이 초췌하게 보이도록 가장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는 사람이 기력 없어 보이고 초췌해 보이면 누구나 그 이유를 묻게 됩니다. 그럴 때 못 이기는 척 자신이 금식 중이라는 사실을 알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목적이 이미 이루어졌고, 따라서 하나님에게서 받을 상은 없다고 지적하십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금식을 할 때 오직 하나님에게만 집중하라고 하십니다. 금식을 하는 이유는 사람들에게 인정 받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깨어 있기 위한 것입니다. 따라서 마음이 갈리지 않고 온전히 하나님께 향해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항상 우리를 지켜 보고 계시는 하늘 아버지께서 금식으로 드리는 기도에 응답해 주실 것입니다. 

 

금식을 ‘하나님을 강제하는 수단’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단식투쟁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어내기 위한 극단적인 투쟁입니다. 단식투쟁은 가끔 분신자살로 이어집니다. 고대 사회의 우상 숭배자들이 자식을 제물로 드린 이유는 그들이 믿는 신을 강제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와 같은 신관을 부정하셨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는 우리의 필요를 우리 자신보다 더 잘 아시고 구하기도 전에 공급해 주시는 분입니다. 그분 앞에서는 단식으로 투쟁할 이유가 없습니다. 단식투쟁으로 그분의 뜻을 바꾸지도 못하거니와 바꾼다 해도 그것은 우리에게 해롭습니다.

 

금식은 우리 자신을 꺾고 비워서 하나님의 뜻에 맞추려는 노력입니다. 영적으로 더욱 깨어 있으려는 노력이며, 영적으로 더욱 충만하기를 힘쓰는 것입니다. 정해진 기간 동안 육신적인 욕망을 제어하여 영적인 갈망을 키우려는 노력입니다. 일상사로 인해 분산된 마음을 하나님께 집중하자는 노력입니다. 하나님 앞에 머물러 앉아 그분이 전부이고 자신은 전무라는 사실을 고백하고 인정하는 행위입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우리의 소망을 기뻐하셔서 응답해 주십니다. 금식을 통해 우리의 존재는 정화되고 우리의 마음은 하나님께 조율됩니다. 

 

우리의 내면이 흐트러져 있고 더러워져 있다는 자각이 들 때가 금식할 때입니다. 일상사에 너무 매몰되어 있다 싶을 때 혹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비전과 소망이 흐려져 있다 싶을 때가 금식할 때입니다. 어떤 중대한 문제를 앞두고 하나님의 뜻에 더 가까이 가고 싶어진다면, 그 때도 금식할 때입니다. 자기 자신이 혐오스러워질 정도로 큰 죄를 범했을 경우,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금식하며 자신을 꺾어야 합니다. 

 

금식은 또한 금욕주의와 다릅니다. 욕망은 좋은 것입니다. 인간다움을 위해 하나님께서 주신 귀한 선물입니다. 하지만 그 욕망이 죄의 힘에 사로잡힌 까닭에 자주 우리의 인생을 망가뜨리는 흉기로 변하곤 합니다. 현대 사조는 그 욕망들을 원하는 대로 만족시켜 행복을 극대화시키라고 부추깁니다.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 때로 극단적인 금욕주의가 일어나곤 합니다. 예수님은 ‘탐닉’도, ‘금욕’도 반대하십니다. 그분은 ‘절제’의 길을 제시하십니다. 

 

금식의 원리는 식욕만이 아니라 성욕, 명예욕, 성취욕, 권력욕, 쾌락욕구, 인정욕구 등의 모든 욕망에 적용해야 합니다. 어떤 욕망이 자신을 사로잡고 있는 한도를 넘어섰다 싶을 때, 금식의 결단력을 발휘해야 합니다. 그것은 그 욕망을 오용하는 길로 이끌기 때문입니다. 식욕은 건강을 위해 주어진 것이지 식탐을 위해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성욕은 사랑을 주고 받는 도구로 주어진 것이지 쾌락을 위해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성취욕은 의미 있는 일을 위해 헌신하도록 주어진 것이지 스스로를 소비하도록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욕망이 도를 넘고 길을 잃었다 싶을 때 잠시 그것을 끊어서 잃어버린 통제력을 되찾아야 합니다.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도를 넘어 발호하고 있는 욕망이 있는지를 알려면 자주 멈추어 하나님 앞에 서야 합니다. 그 욕망을 어디까지 허용하고 언제 끊어야 할지를 알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조명 아래에서 잠잠히 자신을 돌아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욕망의 끄는 힘을 끊을 수 있는 힘을 얻기 위해 하나님의 도움을 구해야 합니다. 매일 혹은 하루에도 자주 멈추어 자신을 돌아보고 묵상하고 기도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