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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6장 11-12절: 물질적인 조건과 관계를 위한 기도

새벽지기1 2023. 11. 5. 05:21

마태복음 6장 11-12절: 물질적인 조건과 관계를 위한 기도

사역:

“우리에게 오늘 필요한 음식을 오늘 우리에게 주소서. 우리의 죄의 빚을 없애 주소서. 우리에게 죄의 빚을 진 사람들에게 우리가 그렇게 해 준 것처럼.”

 

해설과 묵상:

앞에서 하나님의 이름과 통치와 뜻에 대해 기도드린 후 예수님은 우리 자신의 필요를 위해 기도하라 하십니다. 먼저, 우리의 물질적인 필요를 구하라고 하십니다. “오늘 필요한 음식”이라고 번역한 헬라어 단어 ‘에피우시오스’는 “오늘의”라고 번역할 수도 있고 “내일의”라고 번역할 수도 있습니다. 어떻게 번역하든 이것은 생활을 위한 기본적인 음식을 가리킵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소서”에는 ‘세메론’이라는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 오늘 혹은 현재를 의미하는 단어를 두 개나 사용하신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이것은 다만 음식에 대한 기도가 아니라 물질적인 조건에 대한 기도입니다. 앞에서 예수님은, 사랑의 하나님은 우리의 필요를 아시고 구하지 않아도 채워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왜 오늘 필요한 양식을 오늘 달라고 기도하라고 하셨을까? 아마도 예수님은 우리가 이 기도를 역설적으로 드리기를 원하셨던 것 같습니다. 말로는 “우리에게 오늘 필요한 음식을 오늘 우리에게 주소서”라고 기도하면서 마음으로는 “우리에게 오늘 필요한 음식을 먹는 것에 만족하게 하소서”라고 생각 하라는 뜻입니다. 음식만이 아니라 물질적인 조건에 대해서도 주어진 것에 자족할 마음을 달라고 기도하라는 뜻입니다.

 

산상설교에서 예수님은 ‘자족’에 대해 자주 강조하십니다. 물질적인 환경에 대해서는 필요를 채우는 것에 만족하라고 하십니다. 그 이상을 원하면 마음의 방향이 빗나가기 쉽습니다. 원하는 만큼 물질을 가지기 위해 하나님을 이용하려 듭니다. 그런 욕망으로 인해 복음이 자본주의에 물들어 버렸습니다. 물질적인 번영이 곧 믿음의 실력인 것처럼 왜곡되어 버렸습니다. 

예수님은, 믿음의 실력은 물질적인 필요가 채워진 것에 자족하는 능력이라고 하셨습니다. 물질적인 조건에 대해 우리는 “주님, 오늘의 필요를 채워 주시니 감사 드립니다. 제 마음이 헛된 욕심에 사로잡히지 않게 하소서. 주어진 것에 자족하며 하나님 나라를 위해 일하게 하소서”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두번째로 우리 자신의 관계를 위해 기도하라 하십니다. 하나님의 기준에서 보면, 우리는 언제나 죄 가운데 살고 있습니다. 믿음 안에서 우리가 바라고 원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도록 자라가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참여하여 신령한 몸을 입기 전까지 우리의 죄 성은 여전히 우리를 넘어지게 합니다. 

 

영적으로 성장한다는 말은 넘어짐의 빈도가 줄어들고 깨어짐의 정도가 약해진다는 뜻입니다. ‘행함의 죄’(sins of commission, “하지 말라” 하신 것을 행하는 것)에서 해방된 사람도 ‘행하지 않은 죄’(sins of omission, “하라” 하신 것을 하지 않는 것)의 기준에서는 여전히 부족합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설 때에는 항상 용서를 구하는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죄”에 대해 예수님은 ‘빚’을 의미하는 ‘오페일레마’라는 비유 언어를 사용하십니다. 죄를 범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 빚을 지는 것과 같습니다. 빚더미에 눌러 살아본 사람이라면 그것이 얼마나 무거운 짐이라는 사실을 압니다. 빚 진 사람은 빚을 빌려준 사람을 대면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 빚이 해결되지 않는 한 두 사람의 관계는 회복될 수 없습니다. 

 

빚을 해결하는 길은 두 가지 뿐입니다. 하나는 빚 진 사람이 진 빚을 갚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빚을 준 사람이 빚을 없애 주는 것입니다. 당시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은 율법을 철저히 지킴으로써 죄의 빚을 청산하고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예수님은 ‘용서할 줄 모르는 종의 비유’(마 18:23-35)에서 우리가 하나님께 진 빚이 너무 커서 수만 번을 다시 태어나도 갚을 수 없다고 하십니다. 지은 죄가 너무 많고 크기 때문이요, 인간 스스로 자신을 의롭게 만들 수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에게 진 죄의 빚을 해결하는 방법은 하나님께서 그 빚을 없애 주시는 것 뿐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우리가 하나님에게 진 죄의 빚을 청산하는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그분을 주님으로 영접하는 것은 그분이 우리를 위해 작성해 놓은 빚 청산 계약서에 싸인을 하는 것에 비할 수 있습니다. 그로 인해 우리는 떳떳하게 하나님 앞에 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더 이상 두려운 채무자가 아니라 사랑 가득한 아버지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그 사랑 안에 머물러 살아가면서도 우리는 죄에 넘어질 수도 있고 하나님의 의에 미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설 때마다 그분의 긍휼과 자비를 구합니다.

 

이렇게 기도한 후에 예수님은 “우리에게 죄의 빚을 진 사람들에게 우리가 그렇게 한 것처럼”이라는 말을 덧붙입니다. 이것은 “제가 다른 사람들을 용서했으니 저의 죄도 용서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용서를 얻기 위해 우리가 대가로 드릴 만한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은혜로 받는 것입니다. 갚을 수 없는 죄의 빚을 아무 조건 없이 해결 받은 사람은 그 은혜를 다른 사람들에게 흘러가게 해야 합니다. 그것이 ‘용서할 줄 모르는 종의 비유’의 또 다른 요점입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기도하라고 하신 이유는 우리가 용서 받은 사람으로서 용서할 책임을 진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라는 뜻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