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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6장 9a절: 이상한 하나님

새벽지기1 2023. 11. 4. 06:33

마태복음 6장 9a절: 이상한 하나님

사역:

“그러므로 너희는 다음과 같이 기도하여라. ‘아버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해설과 묵상:

유대인의 기도 방식과 비유대인의 기도 방식을 예로 들어 가르치신 다음, 예수님은 모범 기도문을 제시하십니다. 흔히 ‘주기도’라고 불리는 이 기도문은 주문처럼 암송하도록 주어진 것이 아니라 바르게 기도하는 법을 배우도록 주어진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향해 아무런 수식어 없이 “아버지”라고 부르도록 제자들을 가르치셨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엄위하신 하나님 앞에 서서 기도할 때면 온갖 수식어를 동원하여 그분을 높여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은 두려운 분이므로 최대한의 격식을 갖춰야 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에 반하여, 예수님은 하나님을 부를 때 그냥 “아바”(abba)라고 부르라고 하셨습니다. 아람어 ‘아바’는 애정을 담아 아버지를 부르는 말이었습니다. 이것은 초대 교회에서 예수를 믿는 이들의 중요한 특징이 되었습니다(롬 8:15; 갈 4:6). 

 

여기서 하나님에 대한 예수님의 파격적인 태도가 부각됩니다. 예수님이 공생애 동안 가장 공을 들인 두 가지 주제가 있다면 하나는 하나님 나라였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 이미지였습니다. 하나님을 “아바”라고 부르시고 제자들에게도 그렇게 가르치심으로써 예수님은, 하나님을 생각할 때 분기탱천하여 징계할 회초리를 들고 있는 무서운 분이 아니라 따뜻한 사랑의 눈으로 지켜 보시며 모든 필요를 채워 주시는 분으로 여기라고 말씀 하십니다. 

 

그 하나님 상은 ‘탕자의 비유’(눅 15:11-32)에 잘 묘사되어 있습니다. 학자들은 ‘탕자의 비유’(the parable of the prodigal son)라는 이름 대신에 ‘탕부의 비유’(the parable of the prodigal father)라는 이름을 붙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비유의 주인공은 두 아들을 끝까지 용서하시고 사랑하시는 아버지이기 때문입니다. 둘째 아들은 아버지의 재산을 탕진했지만, 아버지는 자녀들에게 사랑을 탕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분이라는 뜻입니다. 

 

율법적인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이 의심 받고 혐오 당한 이유가 여럿이지만, 그분이 이상한 하나님을 가르친다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이유였습니다. 털끝만큼의 용서도 없는 엄한 하나님을 가르쳐도 율법에 순종하기를 거부하는데, 그토록 유약한 하나님을 가르치면 율법을 지키는 사람은 하나도 남지 않게 될 것이라고 염려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두려움으로 굴복시키는 편이 아니라 사랑으로 감화시키는 편을 택하셨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방법임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하늘에 계신”이라는 말은 하나님이 우주 공간 어딘가에 계시다는 뜻이 아니라 우리가 살고? 차원을 넘어 계시다는 뜻입니다. “하늘”은 사실 언어가 아니라 비유 언어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은 피조물인 인간과는 다른 차원에 계십니다. 저 옛날 전도자가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너는 땅 위에 있다“(전 5:2)고 말한 것과 같습니다. 그 차원을 우리는 ‘초월’ 혹은 ‘절대’ 혹은 ‘영원’이라는 비유 언어를 사용하여 표시합니다. 현대 물리학은 11차원까지 발견했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차원은 그 모든 것을 넘어서는, 물리학자들이 발견할 수 없는 세상입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은 우리가 사는 세상에도 계십니다. 땅을 기어가고 있는 개미에게 저는 초월적인 존재입니다. 개미에게 저의 존재는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저는 개미를 봅니다. 저는 개미의 세계를 초월해 있지만 또한 그의 세계 안에 있습니다. 그것처럼 우리에게 하나님은 초월적인 차원에 계십니다. 우리는 그분을 볼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그분은 우리를 보시고 필요할 때 우리의 삶에 개입하십니다. 그럴 때 우리는 “하나님을 만났다”고 말하지만, 실은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 안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가 기도하는 이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