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물어 해 질 때에 모든 병자와 귀신 들린 자를 예수께 데려오니' (막 1:32)
시몬의 장모는 이제 온전한 정신을 차렸습니다. 동네 사람들에게 이 사건이 얼마나 충격적으로 받아들여졌을는지는 볼을 보듯 분명합니다. 이 동네 저 동네 이 소문이 삽시간에 퍼졌겠지요. 사람들은 병자들과 귀신 들린 사람들을 예수님에게 데리고 왔습니다. 그 때가 “저물어 해 질 때”라고 합니다. 야간 조명이 거의 없었던 고대 사회에서 해가 진다는 건 낮에 할 수 있는 모든 일들을 접어야 할 때입니다. 낮과 밤의 경계인 바로 그 순간에 예수님에게는 일거리가 많아진 셈입니다.
어린 시절의 저는 “해 질 때”를 무척 좋아했습니다. 낮의 역동성과 밤의 평화와 달리 이 저녁은 저에게 신비롭게 다가왔습니다. 가정환경이 좋지 못했던 까닭이겠지만 집보다는 밖으로 쏘다니던 일이 많았던 어린 시절의 저에게 해가 꼴깍 넘어간 직후 짙어지는 노을과 침침한 색깔로 바뀌는 사위(四圍)는 환상적이었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 살던 천호동은 농촌과 거의 다를 게 하나도 없었습니다. 논, 밭, 들판, 숲, 개천, 과수원과 함께 살았습니다. 혼자서 들과 숲을 돌아다니다가 갑자가 온 세계가 붉게 변하는 장면 앞에서 충격을 받곤 했습니다. 이런 충격은 숲만이 아니라 동네에서 친구들과 놀 때도 자주 있었습니다. 한창 정신없이 뛰어놀던 동네 마당과 집들이 저녁노을에 반사되어 전혀 다르게 보입니다. “지금 내가 꿈을 꾸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마 이런 어릴 때의 경험이 어렴풋한 ‘존재’의 경험이었겠지요. 무엇이 ‘있다’는 걸 경험하는 것 말입니다. 그런 느낌은 제 의식 깊은 곳에 아직도 생생하게 살아있습니다.
우주 물리학적으로 해가 진다는 말은 그렇게 옳은 건 아닙니다. 해는 지는 게 아닙니다. 해는 그냥 그렇게 존재하는 것이고, 대신 지구가 시계 바늘 방향으로 돌고 있을 뿐입니다. 이런 사실을 전혀 몰랐던 고대인들에게 해가 지고 다시 뜬 현상은 신비로움 자체였습니다. 수많은 고대 종교가 태양을 신으로 섬겼다는 건 당연합니다. 그리스도교 역시 여기서 예외는 아닙니다. 물론 다른 종교처럼 태양 자체를 숭배한 게 아니라 그것을 창조한 야훼 하나님을 예배했지만 그리스도교 역시 태양 빛을 중요한 신앙적 메타포로 받아들였습니다. 주일을 지킨다거나 12월25일을 성탄절로 지키는 전통, 예수님이 빛으로 이 세상에 오셨다는 요한의 해명이 여기에 포함됩니다.
오늘 우리는 고대인들에 비해서 엄청나게 많은 물리학적 정보를 알고 있습니다. 물론 이런 정보라는 것도 우주 전체를 대상으로 놓고 본다면 거의 무의미할 수도 있지만, 우리가 고대인들에게 비해서 상대적인 우위를 점하고 있다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이런 물리학적 정보의 우위가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이런 정보가 우리의 삶에 무슨 영향을 끼치는 걸까요? 신비 경험이 축소되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는 고대인들보다 미숙한 사람들일지 모릅니다. 인간 언어를 뛰어넘는 ‘거룩’의 영역을 놓치고 사는 우리에게 삶은 점점 건조해지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이 거룩은 주술이 아니라 존재의 신비입니다.
저는 고대인들의 삶과 우리의 어린 시절이 비슷한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아는 건 많지 않아도 근본에 대해서 우리보다 더 가까이 접근해 있다는 점에서 말입니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이겠지만, 제 어린 시절의 ‘세계’는 마치 요정들이 노는 숲속 같았습니다. 세상을 아는 지식은 없었지만 세상과의 직접적인 만남을 가능한 시절이었습니다.
저는 지금도 어린 시절 제게 충격적이었던 “저물어 해 질 때”가 그립습니다. 굳이 해 질 때만이 아니라 제가 살아가는 모든 순간이 바로 그런 환희와 놀라움으로 가득했으면 합니다. 여러분에게도 그런 은총이 넘치시기를...
주님, 존재의 신비 안으로 들어가기 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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