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10월 12일
기독교인이 진리의 기준으로서 오직 성경과 전 성경을 생각할 때, 언어의 놀이공간이나 언어사용과 더불어 머리 속에 표상들을 생산하여 대상들과 거리를 갖고 교통하는 공간 속에 빠지는 것을 아주 자연스럽게 생각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자아성과 분리할 수 없는 그런 공간에서 생기는 의문점들이 오성이나 이성이니 감성과 같은 인간능력이란 이름이나 개념으로 그 공간 안에서 오고가는 그 많은 언어나 표상들의 꾸러미들 속에서 그 해답을 얻을 수 있을지 인류의 어려운 과제가 되어 왔다.
성경 이해에는 한계 있어
물론 나는 인간뿐만 아니라 생명체 전체를 통해서 뿌려져 있는 안에서 밖을 향한 공간 전체를 창조된 비약적 정보로써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생명의 독특한 형식들이라고 생각한다. 현대에 와서 많은 사람들이 언어사용이 없는 기능세계에 대한 동경으로 산 너머 무엇인가 있는 것처럼 그런 세계에 대한 기대를 갖는 경우가 있는데, 그런 세계에서는 의문 자체가 없기 때문에 그렇게 언어나 표상이 없는 세계에서 해답도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 초능일지라도 직관의 세계는 무의식적인 자연세계의 연장에 불과하다. 그래서 명목상 대부분 피할 수 없이 실존을 본질에 선행시키고 행동이나 실험 혹
은 토론을 이론에 선행시키고 있다. 그와 반대로 기독교인들은 사고나 행동에 앞서 하나님의 계시를 선행시켜 오직 성경과 전 성경을 앞세우고 있다.
자연세계의 연장인 직관
그런데 칼빈과 같은 인물은 성경의 어떤 구절을 더 판명한 다른 구절에 의해서 해석하기 전에 모든 성경 구절들은 그 자체로 판명하고 충분하다고 생각하였다. 루터의 경우 후자의 생각에 집념하였기 때문에 종교적 논쟁에 있어서 다른 종교개혁자들과 대화가 깨지는 경우도 있었다. 그렇다면 루터나 칼빈이 왜 그런 생각을 하였겠는가를 묻게 된다.
교회가 서기 529년 오랑쥐 공의회에서 다음과 같은 내용들을 결정한 바가 있다. 전부 25개 조항과 예정론에 관한 결론부분을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는 구하거나 찾아서 얻어진 것도 있지만, 기도하는 일 자체가 은혜이요 의지가 주로부터 준비되어(잠언 8:35, LXX) 우리 안에 역사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원하여 성취하도록 하신다(빌 1:6, 29; 2:8, 13)고 고백하고 있다.
갖는 것은 모두 주로부터 가진 것이요(마 25:29) 받지 아니한 것이 없고(고전 4:7)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고전 15:10)요 주를 떠나서는 아무 것도 행할 수 없고(요 15:5) 기도의 의무도 우리가 받은 것을 주께 드리는(대상 29:14) 마음으로 해야 할 것을 결정하였다. 하나님 없이는 사람이 어떤 선도 행할 수 없듯이 자유도 목마른 자에게 물방울처럼 주실 자에 의해서 회복되고 자유케 되며 어떤 만족이나 하나님에 대한 사랑도 전적으로 하나님의 선물이며 고난도 받게 하신다고 고백하고 있다. 받는 선물뿐만 아니라 받을 수 있는 것도 하나님이 주시고(약 1:17; 요 3:27) 포도나무의 가지가 포도나무에 생명을 주는 것이 아니라 그로부터 생명을 받는 것처럼 주를 떠나서는 아무 것도 행할 수 없다(요 15:5)는 고백으로 요약이 되고 있다.
모든 근본이 되시는 하나님
종교개혁 이전이지만 교회가 존중해야 할 이런 오래된 고백은 한 마디로 모든 것에 앞서서 하나님을 선행시키되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선행시키고 있다. 즉 오직 성경과 전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을 향하여 가되, 그 안에서 그것을 통하여 그것과 더불어 발견된 하나님은 성경 자체보다 선행되고 그 보다 더 크고 영원하다(막 12:24-27)는 사실이다.
그 하나님을 통하여 교회가 과학과 대화할 수 있다. 성경의 무오성은 그 하나님의 속성들과 무오성에 근거한다. 그 하나님의 무오성에 근거하여 성경의 일상용어들과 과학적 사실들과의 충돌에 대해서 당황하지 않고 교회는 기다려야 한다. 가장 엄밀하고 부정할 수 없는 과학적 사실들도 치명적인 인간인자들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아직 어떤 이론도 혼돈이 증가해 가는 극거시세계와 극미시세계 안에 있는 시간 없는 동시성과 시간세계 안의 모든 다양성이 거기 고려되어 있지 않다.
하나님의 무오성만 신뢰해야
그러나 우리의 무지의 확대가 더 큰 무지를 증명해 가고 있다면 어떤 인격체에 의해서 만물이 명령에 의해서 창조되었다는 증거요, 만물의 근원이 하나로 일치해 가면 창조 명령 뒤에 있는 한 하나님을 증명하는 것이며, 거기에 운동이나 변화 및 진화가 있다면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증명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런 모든 증명들도 그 하나님을 진정으로 증명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렇게 진정으로 하나님이 증명해야 할 상대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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