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컬럼3

예수 안에서 행할 때

새벽지기1 2020. 10. 30. 06:28

포이에마 예수교회가 세워진지 5년이 되었습니다. 그동안 인도하여주신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립니다. 무엇보다 교회를 세우기 위해 누군가의 큰 기여 없이, 여러 사람의 고만고만한 헌신으로 여기까지 온 것이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입니다.

5주년을 준비하고 묵상하면서, 거라사 땅에 사는 광인 이야기가 마음에 떠올랐습니다. 축하하고 즐거워해야 할 날, 어울리지 않을 법한 이야기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오늘날의 사회와 교회를 드러내며, 동시에 그 해결책과 앞으로의 방향을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성경은 다음과 같이 전합니다. “그 도시 사람으로서 귀신들린 자 하나가 예수를 만나니, 이 사람은 오래 옷을 입지 아니하며 집에 거하지도 아니하고 무덤 사이에 거하는 자라”(눅 8:27) 마가복음은 더 자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는 여러 번 고랑과 쇠사슬에 매였어도 쇠사슬을 끊고 고랑을 깨뜨렸음이러라. 그리하여 아무도 저를 제어할 힘이 없는지라. 밤낮 무덤 사이에서나 산에서나 늘 소리 지르며 돌로 제 몸을 상하고 있었더라.” (막 5:4-5)

거라사 땅은 지금의 요르단 북부에 위치한 비옥한 지역입니다. 로마 귀족층을 먹일 돼지를 키우는 경제적으로 부유한 도시였습니다. 그 부유한 도시 출신인 그 남자는 최악의 상태에 놓여있습니다. 가족과도 이웃과도 함께 살 수 없었습니다. 그는 공동묘지에 살면서 옷도 입지 않고, 괴로움에 괴성을 지르며 살아갑니다. 쇠사슬과 고랑으로 그를 묶어도 제어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스스로 몸을 자학하기만 합니다.

그 남자와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나 생각할 것입니다. 하지만 깊이 생각해 보면 중증은 아닐지라도 너도 나도 유사한 증상들을 하나쯤은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소외와 외로움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숨 막히는 경쟁, 군중 속에서의 고독, 집단 따돌림, 그럴듯한 겉모습에 가려진 공허감. 모두 서로에게 자신을 채워달라고 아우성치고 있습니다.

그 원인은 무엇보다 사랑하는 법을 잊었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관계보다 소유를 극대화하려는 마음은 생존, 노동, 결혼 등을 소유의 개념으로 바꾸어 버렸습니다. 단순한 문제가 아니라, 인간 타락의 근원을 드러내는 근본적인 문제입니다.

그 뿌리는 가인에게로부터 비롯됩니다. 가인의 이름의 뜻은 ‘소유와 획득’입니다. 가인은 자신의 소유와 욕망을 극대화하려고 하나님마저도 이용합니다. 동생 아벨이 없으면 자신의 제사를 받으시리라 생각하여 동생마저도 제거해 버립니다.

가인이 말합니다. “내가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창 4:9) 가인의 항변에 하나님은 그렇다고 하십니다. 인생은 소유가 아니라 관계라는 뜻입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가인은 하나님을 떠나 ‘유리하다, 방황하다’라는 뜻을 가진 에덴 동편 ‘놋’으로 갑니다. 그리고 소외와 고독은 더욱 깊어질 뿐입니다.

소유와 욕망의 극대화하려는 가인의 후예는 자신을 강화하고 집단을 이룹니다. 필연적으로 그 집단 안에서 왕따가 만들어 집니다. 약자가 착취당합니다. 집단으로부터 이탈은 죽음이라 생각하며 살아가지만, 주변에는 경쟁자들뿐입니다. 그 얄팍한 결속은 외로울 수밖에 없습니다.

거라사의 광인을 붙들고 있는 것은 악한 영입니다. 소유 극대화를 추구하는 한 악한 영에 조종당하는 가인의 후예입니다. 그 남자와 우리의 차이점은 그는 악한 영들에게 휘둘리고, 우리는 그럭저럭 산다는 점일 뿐입니다.

이 근원적인 문제의 해결책은 악한 영들의 말을 통해 역설적으로 드러납니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당신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당신께 구하노니 나를 괴롭게 하지 마옵소서.”(눅 8:28) 귀신이 귀신처럼 알 듯, 악한 영들은 예수님이 가장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과 자신들은 예수님을 절대 이길 수 없음을 이야기 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려하고 목숨을 많은 사람들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라.” 예수님은 ‘사랑’ 자체이십니다. 자신의 모든 힘을 오직 살리는 데만 사용하십니다. 이기고 군림하는 사탄과는 전혀 정반대의 길입니다. 그 근본적인 차이를 모르고 예수님의 사랑의 힘을 이기고 군림하는데 사용하려니 교회 안에서도 귀신들린 사람이 많고, 정신 분열이 일어나는 것은 당연합니다.

예수님께서 악한 영들을 물리치시는 것은 사랑의 힘입니다. 사랑의 힘은 그 관계가 깊어질수록 강합니다. 사랑을 하면 상대를 알고 싶고, 닮고 싶어집니다. 신앙의 본질인 하나님과의 친밀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가장 사랑하는 것입니다.

구원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야샤’는 “공간을 넓게 하다.”는 뜻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당신을 만난 사람들에게 새로운 공간을 만들어주셨습니다. 이 새로운 공간은 가인의 후예로 유리하고 방황하던 사람들이 잃어버렸던 세계입니다.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엡 2:10)

우리들은 원래 예수님 가운데서 선한 일을 하도록 지음 받은 존재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님처럼 생각하고 살아갈 때, 그 잃어버렸던 세계, 새로운 공간이 생겨납니다. 입지는 점점 넓어지고, ‘하나님의 지으신 바’, ‘포이에마’ 곧 아름다운 詩들이 되어갑니다.

예수님이 그러하셨던 것처럼 사랑하는 사람, 살리는 사람이 되기로 합시다.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사랑하고 살리는 힘을 달라고 간절히 기도하며, 우리의 힘을 모아 주님께서 맡기신 생명의 일들을 열심히 행하십시다. 그리할 때 시냇가에 심겨진 나무처럼 늘 푸르고 많은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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