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컬럼3

고난에서 영광으로 가는 길

새벽지기1 2020. 11. 1. 06:38

고난에서 영광으로 가는 길

인간이 신을 찾게 된 첫 번째 이유는 고난을 피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각 종교마다 신들의 노여움이 재앙과 고난의 근원이라 생각하고, 그 고난을 피할 방법들을 가르칩니다. 추종자들은 이를 열심히 행합니다.

기독교는 고난의 원인을 인간의 타락과 그 죄악이라고 분명하게 이야기합니다. 물론 부분적으로 하나님의 진노와 뜻에 의한 고난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 근본 바탕은 사랑이고, 진노는 그분의 사랑에 한 부분입니다.

고난의 원인 규명보다 더 중요한 것은 고난에 대한 올바른 대처입니다. 제자들은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을 보고 예수님께 묻습니다. “이 사람이 맹인으로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요 9:3)

예수님은 제자들의 초점을 고난에 담긴 의미로 옮기셨습니다. 고난의 의미를 알면, 고난에 바르게 대처할 수 있고, 그것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최악의 고난인 십자가를 지셨고, 최고의 영광 드러내셨습니다.

사무엘하 13장부터 19장까지는 괴악한 이 일들의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일의 근본적인 원인은 다윗이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취한 사건 때문입니다. “칼이 네 집에서 영원토록 떠나지 아니하리라. (중략) 너는 은밀히 행하였으나 나는 온 이스라엘 앞에서 백주에 이 일을 행하리라”(삼하 12:10-12)

다윗은 여느 왕처럼, 여려 명의 아내를 두었고, 그 사이에 열아홉 명의 자녀가 있었습니다. 암논은 두 번째 부인 아히노암에게서 태어난 다윗의 맏아들이고, 다말과 압살롬은 네 번째 부인 그슬 왕의 공주 마아가에게서 태어난 남매입니다.

맏아들 암논은 왕세자답지 못한 생각을 합니다. 그의 이복누이 동생 다말을 연모한 것입니다. 이복누이에 대한 연정도 이상하지만, 그 연애 행각은 저급하기 이를 때 없습니다. 더러운 곳에 파리가 꼬이듯, 간교한 요나답이 등장합니다. 그는 다말이 걸려들 술수를 암논에게 가르칩니다. 그 술수로 암논은 다말을 더럽히고서는 헌신짝처럼 버립니다. 버림받은 다말은 수치감과 모멸감에 빠집니다. 그 소식을 들은 다말의 오빠 압살롬은 암논을 죽일 계략을 2년 동안 준비하였고, 마침내 왕자들을 모두 모아 놓고 결행합니다.

압살롬이 암논과 왕자들 모두를 죽인 것으로 알고 다윗은 자기 옷을 찢고 통곡합니다. 이때 간교한 요나답은 압살롬에 의해 암논만이 죽임을 당했음을 알리면서, 자신의 잘못을 죽은 암논에게 뒤집어씌웁니다. 그때 목숨을 부지한 왕자들이 돌아오고, 이들도 다윗과 함께 대성통곡을 합니다. 그 옆에 신하들도 대성통곡을 합니다. 그 와중에 압살롬은 요단강 건너 외갓집인 그술로 도망합니다. 난장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사건에서 중심을 잡고 제 정신인 사람이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암논은 정욕에 사로잡혔고, 다말은 억울함과 수치심에 사로잡혔고, 압살롬은 복수심에 사로잡혔고, 간교한 요나답은 기회주의에 사로잡혔고, 다윗은 그저 일어난 일에 대해 울고불고 하였고, 그의 신하들은 상관에 반응하여 덩달아 따라했을 뿐입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 모두 자신을 사로잡은 일들에 매달려 제 정신들이 아닙니다. 가끔씩은 제대로 사는 것인지 생각하다가 금세 원래 자리로 돌아가 휘둘립니다.

어떻게 해야 중심을 견지하며, 고난에 잘 대처할 수 있을까요?

성경의 해답은 ‘안식’입니다. 안식일을 뜻하는 히브리어 ‘샤바트’의 뜻은 “포기하다. 멈추다. 휴식을 취하다.”입니다. 이 말에는 어떤 종교적 또는 영적인 내용이 없습니다. 그저 안식일이 되면 일단 멈추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안식일(주일)은 진흙과 같은 나를 빚어 하나님의 형상을 이루도록 나를 모두 맡겨 버리는 날입니다. 안식일은 하나님의 창조의 리듬으로 삶을 조율하고, 하나님과 보조를 맞추는 날입니다. 모든 것을 멈추고 하나님의 은혜와 신비를 향해 초점을 맞추는 날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대한 경외감안에서 근심, 분노, 욕망, 억울함, 무기력, 슬픔 등 모든 것을 용해시켜버리는 날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사랑의 뜻이 나도 모르게 내 생각에 깃드는 날입니다.

만약 이들 중 단 한사람이라도 안식으로 들어갔다면 이런 일들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일어났다고 해도 제대로 안식일을 누린 사람이라면 그 일을 하나님의 방법으로 그치게 하였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의 주인이십니다.(막2;28) 예수님께서는 각종 문제에 시달리는 제 정신이 아닌 많은 사람들을 만나셨습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예수님은 문제에 사로잡히지도, 휘둘리지 않으셨습니다. 가장 철저히 개입하셨으면서도 언제나 중심을 잡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은 사람들로 하여금 제정신을 차려 그 사람이 가야할 가장 올바른 길을 가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최악의 불의의 십자가의 죽음 앞에서 우리에게 최고의 본을 보이십니다. 참담한 고뇌 가운데 예수님은 기도하십니다.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기도가 이어집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아버지여 창세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요 17:4-5)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감당하셨을 때 그 십자가가 하나님의 영광으로 바뀌었듯이, 내 고난과 고통과 억울함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감당하면, 예수님과 하나가 되고, 내 고난은 찬란한 하나님의 영광으로 바뀝니다.

예수님이 진리이십니다. 그 분의 행동과 말씀 그 자체가 진리입니다. 그분을 따라가고 그분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 참 안식으로 들어가는 길이며, 진리를 사는 것입니다. 그리할 때 마침내 예수님처럼 세상을 이기고 반드시 부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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