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모두가 이 시대 느헤미야가 되어서
하나님의 선한 손길 바라보며 성벽을 재건해야 합니다.
선한 일에 쓰임 받는 선한 백성들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느헤미야에서 북소리처럼 반복해서 등장하는 단어가 ‘ 일(work)’ 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시고 다스리며 지키는 일을 하도록 계획하신 것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에덴동산에 인간을 두시고 다스리며 지키게 하신 것입니다. 넓은 의미로 말하면 인간은 일을 통해서 만족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일을 통해서 인간의 탐욕이 강화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일을 통해 기쁨을 누리고, 감사하고, 만족을 누리고,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이루도록 계획하셨습니다.
일과 관련해서 세 부류 사람을 구분할 수 있습니다. 첫째,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둘째,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는 알지만 보고만 있는 사람들입니다. 셋째, 일이 일어나게 하며 그 일을 이루는 사람들입니다. 느헤미야는 세 번째 부류의 사람입니다. 느헤미야가 예루살렘 성벽 재건의 일을 꿈꾸고 일어나게 했습니다. 느헤미야는 그 일을 ‘ 선한 일’ 이라고 불렀습니다. 성벽을 재건하는 일은 어느 시대에나 있을 수 있는 평범한 공사처럼 보입니다. 어떤 면에서 그 일을 선한 일이라고 불렀을까요? 첫째, 하나님의 선한 길로 인도함을 받은 일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2장 18절에서 ‘하나님의 은혜로운 손길’ 이라고 번역된 단어는 히브리어로 ‘ 토브’ 입니다. ‘ 선하다’ , ‘ 하
나님 보시기에 선한’ 이라는 뜻입니다. ‘ 하나님의 선한 손길’ 이라고도 번역되겠습니다. 하나님의 선한 손길은 악과 싸우시는 손길입니다. 당시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는 일은 단순한 토목공사가 아니었습니다. 그 시대 악과 싸우시는 하나님의 선하신 손길로 인도함을 받은 일이었습니다. 둘째, 동기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의 겉모습이 아니라 마음의 동기를 보십니다. 동기가 순수하지 않은 일은 언제나 문제에 부딪치고 무너지게 되어 있습니다. 오래가지 못합니다. 동기가 순수하지 않은 사람이 하는 일은 조금만 어려움이 닥쳐도 그만두게 되어 있습
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순수한 동기로 일을 하는 사람은 문제에 부딪칠수록, 고난이 생길수록 더 힘이 나고, 반전의 역사가 나타나며, 문제가 클수록 더 큰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납니다. 셋째, 자발적인 희생으로 참여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느헤미야는 자발적인 희생으로 이일을 시작했습니다. 누가 그에게 그 일을 해달라고 요청한 적이 없습니다. 백성들이 탄원한 적도 없습니다. 왕이 명령한 적도 없습니다. 예루살렘의 형편을 듣고 자발적으로 그일을 시작했습니다. 그 일은 매우 힘겨운 일이었습니다. 또한 느헤미야는 안전하고 안락한 환경을 내려놓아야 했습니다. 어떤 면에서
느헤미야에게는 할 필요가 없는,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이었습니다. 하지 않아도 되는 일, 누가 요구하지도 않은 일, 당시 사람들이 알아주지도 않을 일이었지만 느헤미야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순수한 동기로 자발적으로 희생하며 참여했습니다. 하나님의 선한 손길을 경험하는 일이었기 때문에 느헤미야는 이 일을 선한 일이라고 부른 것입니다. 선한 일을
하는 사람에게는 확신이 있습니다. 느헤미야에게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기신 선한 일이라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확신
“하늘의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이 일을 꼭 이뤄 주실 것이다. 성벽 재건은 주의 종인 우리의 할 일이다”(느 2:20).
만약 우리 일 가운데 이러한 확신이 없다면 선한 일이 아니거나 선한 일일지라도 꼭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일 중독자는 과도한 성취 욕구에 빠져 있습니다. 일로 자신의 양심을 만족시키고, 평안을 얻으려합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일을 주신 것은 일로 인하여 우리의 양심과 평안을 얻게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죄로 말미암아 일과 우리
의 관계조차 깨어진 것입니다. 일 중독자에게 없는 것이 확신에서 오는 평안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확신이 없습니다. 그래서 과도하게 일하고, 때로는 불필요한 일과 하나님께서 맡기지 않은 일까지 하려는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과도한 성취욕으로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을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불필요해 보이고, 엄청난 희생이 요구되는 일이지만, 하
나님께서 허락하시고, 원하시고, 시대가 요구하는 일이기에 기쁘게 헌신했습니다. 확신을 가졌기에 그의 마음속에는 평안이 있었습니다. 여러분, 우리 모두는 선한 일을 위해 지음받았습니다. 사람들은 쉽고 편안한 일을 택하려 하지만, 우리는 선한 일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선한 일은 때로 우리에게 희생과 헌신이 요구될지라도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확신, 평안,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일입니다. 선한 일일수록 돕는 사람을 찾기가 어렵습니다. 돕는 사람들이 부족해서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확신이 없는 것이 가장 큰 어려움입니다.
느헤미야가 직면한 어려움
“우리는 하나님께서 미리 예비하신 선한 일들을 위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창조된 하나님의 피조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선한 일들을 행하며 살기를 원하십니다”(엡2:10). 느헤미야는 하나님께 선한 일을 구했습니다. 그리고 4개월 동안 계속 기도했습니다. 그 기도 가운데 하나님께서 주신 기회를 붙잡았습니다. 그래서 아닥사스다 왕의 마음을 움직
였고, 지원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왔습니다. 그에게는 두 번째 어려운 관문이 놓여 있었습니다. 백성들의 마음을 움직여서 이 일을 이루는 것이었습니다. 왕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도 매우 어렵고, 불가능해 보이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백성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 또한 힘겨운 일이었습니다. 세 가지 장애물이 있었습니다. 첫째, 백성들에게 패배의 역사의
식이 있었습니다. 성벽 재건은 느헤미야가 처음 시도한 것이 아닙니다. 이미 1차 포로귀환과 2차 포로귀환으로 귀환한 수많은 예루살렘의 백성들이 시도했지만 실패했습니다. 이미 90년 전에 포로가 귀환되었고 성벽재건이 시도되었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실패했습니다. 실패 원인이 외부의 방해가 있었지만 그보다 중요한 이유는 백성들의 마음 상태였습
니다. 백성들은 성령의 감동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귀환했지만, 막상 현실에 부딪히니 각자의 삶을 더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인간적으로 이해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역사에 쓰임 받는 백성들 입장에서는 삶의 우선순위가 뒤바뀐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백성들의 식어진 마음을 일으켜야 했습니다. 또 한 가지 문제는 느헤미야 스스로에게도 변화가 일어나야 했습니다. 느헤미야는 아닥사스다 왕의 술 관원이었습니다. 페르시아의 관원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지금 해야 하는 일은 성벽을 재건하는 건축가, 행정가, 지도자 역할입니다. 지도자의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더군다나 무너진 성벽을 쌓은 일 자체도 어려웠습니다. 한 가지 문제가 더 있었습니다. 훼방하고 공격하는 세력이 있었습니다. 19절 말씀을 보면 대적 세력의 중심이 되는 세 사람의 이름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세 사람은 호론 사람 산발랏과 암몬 사람 도비야, 그리고 아라비아 사람 게셈입니다. 첫째 인물은 산발랏입니다. 바벨론 이름입니다. 바벨론이름을 사용한 것은 정치적인 이유 때문일 겁니다. 그는 바벨론 시대부터 사마리아의 총독으로 임명되었습니다. 페르시아로 지배국이 바뀌었어도 여전히 페르시아에 충성을 다하는 간신형 지도자였습니다. 만일 예루살렘 성벽이 재건되면 사마리아의 세력이 약화될 것을 염려했기에 그는 예루살렘 재건을 방해하는 세력으로 등장했습니다. 둘째, 인물은 도비야입니다. 그는 암몬 사람입니다. 그의 이름은 유대인 이름입니다. 도비야는 ‘여호와는 선하시다’ 라는 아주 좋은 이름입니다. 유대인들이 좋아하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도비야는 유대 사회 깊이 들어가 정치적인 이권을 차지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유대인들에
게 영향을 미쳐서 성벽 재건을 방해했던 인물입니다. 셋째, 인물은 게셈입니다. 아라비아 사람입니다. 그는 이방인이었지만 페르시아 제국의 통치하에서 아라비아 지역뿐만 아니라 당시 에돔, 모압 지역까지 영향을 미쳤던 인물이었습니다. 이 세 인물의 공통점은 자신의 이권과 이기심입니다. 정치적인 이익, 세상의 중심에 있는 이기심을 따라 자신의 이익
을 놓치지 않기 위하여 예루살렘 성벽 재건이라는 선한 일을 방해했습니다. 느헤미야가 직면한 어려움은 전방위 360도,
동서남북에서 찾아오는 것이었습니다. 스스로도 엄청난 변화를 이끌어내야 합니다. 백성들의 식어진 마음을 이끌어내야 합니다. 대적들로부터 이 일을 보호해야 합니다. 매우 힘겨운 성벽 공사를 이루어야 합니다.
선한 일이라고 확신하며
그 선한 일에 참여하기
“나는 예루살렘으로 가서 그곳에서 3일 동안 머물렀습니다. 그러던 중 밤에 몇 사람을 데리고 순찰을 나갔습니다. 나는 내 하나님께서 내 마음에 예루살렘을 위해 할 일을 정해 두신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내가 타고 있던 말 외에는 탈 것도 없었습니다”(11~12절). 이 말씀에서 두 가지 단어를 주목해야 합니다. 첫째, ‘ 밤에’ 입니다. 느헤미야는 밤에 정찰을 나갔습니다. 밤은 정찰에 적합한 때가 아닙니다. 달빛만 의지해서 정찰을 한다는 것은 어리석어 보이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가 밤을 정찰의 시간으로 선택한 것은 뱀처럼 지혜로운 일이었습니다. 그가 밤에 움직여 할 이유가 분명했습니다.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에 도착했을 때 혼자 온 것이 아닙니다. 그를 도울 많은 이들이 함께 왔습니다. 아닥사스다 왕의 지원 때문입니다. 군대장관과 마병들까지 왔습니다. 당시 군사의 호위를 받으면서 왔다는 것은 페르시아 왕의 신임을 보여 주는 일이었기 때문에 사람들로부터 주목을 받았을 겁니다. 그때부터 사람들의 감시를 받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느헤미야는 눈에 띄지 않는 밤에 최소한의 안내 위원만 동행하고, 숨소리가 큰 말이 아니라 나귀를 타고 순찰을 나갔습니다. 느헤미야는 지혜로운 지도자였습니다.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불필요한 고난이나 소모적인
논쟁에 휩싸이지 않도록 했습니다. 대적들과 싸우는 것이 목적이 아니기 때문에 싸움을 최대한 피한 것입니다. 해야
할 일에 집중할 수 있도록 다른 사람들이 잘 때 깨어서 정찰한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쉴 때 일한 것입니다. 새로운 역사
의 새벽을 가져오는 지도자들에게는 새벽을 준비하는 밤이있었습니다.
두 번째 주목할 단어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입니다.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에 도착했을 때 사람들이 매우 궁
금했을 것입니다. 3일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고 침묵 속에 머물며 그는 기도했고, 준비했고, 앞으로 할 일을 하나님께
먼저 아뢴 것입니다. 지도자에게는 고독한 시간이 있습니다. 이 고독 속에서 비전이 잉태됩니다. 다른 사람에게 알리
기 전에 하나님과 나누는 만남 속에서 앞으로 일에 대한 그림이 그려지는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자신이 할 일을 사람
들에게 떠벌리듯, 자랑하듯 서둘러 말하지 않았습니다. 3일 동안의 침묵, 밤의 정찰,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는 이 기간이
야말로 느헤미야에게는 가장 중요한 시간이었습니다. 새벽을 깨우기 위한 밤의 준비, 사람들을 이끌어 내기 이전에 하
나님 앞에서 가지는 고독의 시간은 비전이 잉태하는 시간이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영감이 주어지는 시간이요, 현실
을 파악하는 시간이었습니다. 느헤미야가 순찰해 본 결과 성벽은 다 무너져 있었고, 성문들은 불에 탄 채 버려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느헤미야는 매우 현실적인 계획을 세웁니다. 느헤미야 때 원래 예루살렘 성벽보다 훨씬 작은 규모로 축소되어 재건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할 수 있는 만큼 한 것입니다. 욕심을 부리지 않았습니다. 느헤미야는 모든 준비가 되었다고 판단되었을 때 백성들에게 도전했습니다. 느헤미야는 백성들에게 강요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상태를 비난하지도 않았습니다. 죄책감을 불러일으키지도 않았습니다. 느헤미야는 하나님께서 주신 비전, 또 마땅히 깨달아야 할 진리를 깨닫게 함으로 그 선한 일에 초청했을 뿐입니다. 선한 일이라고 확신하며 그 선한 일에 참여하는 것이 얼마나 큰 의미가 있는지 깨닫는 것만큼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
지체 의식, 정체성 의식, 하나님 의식
“그 후 나는 그들에게 말했습니다. ‘ 우리가 당면한 고난은 여러분이 보는 바와 같소. 예루살렘은 폐허가 됐고 그 성문
들은 불에 타 버렸소. 자, 이제 우리가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합시다. 그러면 우리가 다시는 수치를 당하지 않을 것이오.’
나는 또한 내 하나님의 은혜로운 손길이 내게 있는 것과 왕이 내게 말한 것을 그들에게 말해 주었습니다. 그들이 대답
했습니다. ‘ 우리가 재건을 시작합시다.’ 이렇게 해 그들은 이 선한 일을 시작했습니다(17~18절).
느헤미야가 백성들의 세 가지 의식을 일깨웠습니다. 첫째, 지체 의식을 일깨웠습니다. 느헤미야는 1장에서 탄식하며 기도할 때도 ‘ 우리’ 라는 공동체 용어를 통하여 조상들과 자신의 죄를 동일시했습니다. 실상은 느헤미야가 잘못한 것이 아닌데도 ‘ 우리’ 라고 했습니다. 또한 느헤미야는 백성들과 자신을 동일시했습니다. ‘ 우리’ 라는 공동체 의식이 매우 중요합니다. 이 시대 한국 교회 문제를 일부 어떤 교회의 문제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문제, 나의 문제입니다. 지체 의식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입니다. 둘째, 정체성 의식입니다.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는 사람은 절대로 이 선한 일에 참여할 수 없습니다. 예루살렘이야말로 그들의 정체성을 대표하는 장소입니다. 또 하나님이 주목하시는 장소입니다. 그곳에 장막이 세워졌고, 성전이 세워졌고, 그곳에 하나님께서 임재하셨습니다. 예루살렘이 황무했다는 것은 그들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황무해졌다는 것이고, 그들의 믿음이 무너졌다는 증거입니다. 그래서 느헤미야는 백성들이 받았던 곤경과 수치와 능력을 상기시키며 예루살렘성이 폐허가 되어 있다고 했습니다. 그들의 역사의식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그들의 정체성을 일깨웠습니다. 예루살렘이 그들의 정체성의 핵심이었습니다. 셋째, 하나님 의식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자신이 체험한 살아계신 하나님의 도우심, 자신이 여기까지 오게 된 하나님의 선하신 손길을 간증했습니다. 느헤미야의 간증이 백성들에게 전염되었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에 대한 참된 확신은 반드시 다른 사람에게 전염되기 때문입니다. 백성들의 식어진 마음을 일으키는 것은 느헤미야의 웅변력이 아니었습니다. 어떤 물질적인 보상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느헤미야가 체험한 하나님이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확신이 백성들에게 흘러갈 때 그들의 마음이 움직인 것입니다. 그래서 백성들 스스로 성벽을 재건하자는 말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의 선한 손길을 바라보며
“그들이 대답했습니다. ‘ 우리가 재건을 시작합시다.’ 이렇게 해 그들은 이 선한 일을 시작했습니다”(18절).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이 선한 일에 참여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선한 일
의 모습입니다. 강요나 협박이나 어떤 보상을 약속함으로 움직이게 하는 것이 아니라 느헤미야가 경험했던 희생, 자
발적인 참여, 하나님의 선한 손길에 대한 체험에 다른 사람들이 참여하게 된 것입니다. 이를 위하여 매우 신중하고 하
나님 앞에 철저하게 준비했던 느헤미야의 기간이 있었습니다. 참된 지도력은 새벽 나팔을 불기 전에 고독한 밤 하나님
과 나누며 비전을 잉태하고, 그 비전을 다른 이들에게 전하기까지 가장 현실적이고 가장 실제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을
준비하는 기간에서 나옵니다. 또한 불의한 대적 앞에서는 사자 같은 담대함으로 백성들을 보호합니다. 느헤미야는 한
손에는 창을 들고 한 손에는 삽을 들었습니다. 또 백성들을 품고 일을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의 선한 손길을 바라보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이 시대 우리가 누군가를 비난하고, 정죄하고, 지도자들만 비판하며 탓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선한 손길을 바라보며 우리 모두가 느헤미야가 되어서 새로운 성벽을 재건해야 합니다. 한국 교회 무너진 성벽을 재건해야 합니다. 대한민국의 무너진 성벽을 재건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선한 일에 쓰임 받는 하나님의 선한 백성들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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