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세계는 차이와 갈등을 하나로 만들고,
그 다음을 연결해 가는 은혜가 있습니다.
이 나라와 민족 안에 존재하는 긴장과 갈등이
서로를 끌어안는 창조적인 힘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느헤미야서를 통해서 선한 역사를 보게 됩니다. 개인이 선한 일을 행하는 것은 스스로 결단하면 되는 것이기에 어려운 일이 아닐 겁니다. 물론 그것도 쉽지 않은 일입니다. 자신 안에 있는 욕심, 이기심, 탐심을 내려놓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보다 더 어려운 것은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선한 일에 참여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공동체 모두가 선한 일에 참여
하게 하고, 더 나아가 한 나라가 선한 일의 역사에 참여하게 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불가능한 일처럼 보입니다. 사람들의 마음속에 있는 이기심, 욕망, 이기주의, 서로 간의 차이와 갈등을 뛰어넘어 모두 함께 선한 일에 참여하게 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역사 속에서 이러한 선한 일이 분명히 존재했습니다. 자신의 이기심을 내려놓고 서로의 차이와 갈등을 뛰어넘어 선한 역사를 이루는 일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역사 속에 존재해 왔습니다. 느헤미야 시대 무너진 성벽을 재건하는 일이 바로 그러한 일입니다.
1차, 2차 포로귀환 때 성전이 어렵게 재건되었지만, 백성들은 삶에 바빴습니다. 하나님의 성이 재건되는 일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들의 식어진 마음을 다시 일으키고, 헌신하게 하고, 희생하게 하는 일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느헤미야를 통해서 이 선한 일을 이루셨습니다. 모두 함께 어떤 일에 참여할 때는 반드시 차이가 생기고,
갈등이 생기며, 긴장이 생깁니다.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하게 하는 것, 익숙했던 것을 내려놓고 새로운 변화를 가져오게 하는 것은 갈등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선한 일의 역사는 모든 갈등과 차이, 긴장을 뛰어넘어 하나님의 선한 일을 함께 이루는데 참여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 하나 됨이란 모두가 동일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모두 같은 생각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더 크고 더 선한 목표를 위해서 각자의 생각을 내려놓고, 차이를 넘어서 긴장을 창조적으로 끌어안는 것입니다.
차이와 갈등, 긴장 에너지를
창조적인 에너지로 전환
사회 안에 존재하는 차이와 갈등, 긴장의 에너지를 창조적인 에너지로 전환시킬 수 있는 것이 민주주의입니다. 민주주의란 자동적으로 굴러가지 않습니다. 민주주의란 긴장을 끌어안는 제도입니다. 차이로 인한 긴장, 서로 다른 생각으로 인한 갈등을 끌어안을 때 민주주의가 작동합니다. 어느 기자가 링컨에게 “연방을 반대하고 이탈한 남부인들이 전쟁에서 패배하고 돌아오는 것을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라고 질문했습니다. 링컨은 “나는 그들을 한 번도 집을 떠난 적이 없는 형제들처럼 대할 것입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또 사람들이 남부인들이 세운 임시 대통령 제퍼슨 데이비스를 처벌해
야 한다는 요구를 계속했을 때 링컨은 “남에게 판단을 받고 싶지 않으면 남을 정죄하지 말라고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서로 한 형제입니다. 서로 용서하고 감싸줘야 하지 않겠습니까?”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공포했습니다.
“미합중국의 대통령 나 에이브러햄 링컨은 남부의 모든 사람들에게 모든 재산권의 회복을 포함한 전면적인 사면을 선포합니다. 우리 모두는 남부의 주들이 탈퇴하였다 돌아오는 것을 형제들이 집을 나갔다가 돌아온 것으로 생각하고 그들을 도와주며 절대 죄를 물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이 선한 일을 이루었던 링컨 대통령의 민주주의의 모습입니다. 링컨의 리더십을 미리 보여준 지도자가 바로 구약의 느헤미야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느헤미야 3장은 성벽 재건의 상세한 과정을
기록했습니다. 무미건조해 보이는 내용입니다. 익숙하지 않은 이름, 익숙하지 않은 지명, 해석하기 어려운 사람들의 기록이 우리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기록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위기의 시대 링컨이 보여 줬던 민주주의 지도력의 시각으로 이 기록을 보면 느헤미야가 백성들과 함께 이루었던 성벽 재건이 서로 다른 직업, 관심, 능력의 차이, 경제력의 차이, 백성들이 가지고 있었던 긴장과 갈등을 모두 뛰어넘어 성벽을 재건하는 일에 서로 연결된 공동체를 이룬 매우 감동적인 기록입니다.
더 중요한 목적과 느헤미야의 지도력
느헤미야는 성벽의 구간을 40여 부분으로 나누어 동시에 건축하도록 했습니다. 그래서 52일 만에 성벽재건을 완공했습니다. 아주 길지 않은 성벽 구간을 40여 부분으로 나누어 한꺼번에 건축한 것은 창의적인 방법입니다. 일의 효율과 목적을 동시에 극대화한 방법입니다. 때로 효율과 목적은 상반되기 쉽습니다. 효율을 따지면 전문적인 사람들이 알아서
해야 합니다. 그 일을 모르는 비전문가들이 공사에 참여하면 효율적이지 못합니다. 그러나 이 일의 목적이 무엇입니까? 소수의 사람들이 해치우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백성들이 동참하는 것이 더 중요한 목적입니다. 효율적이지못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느헤미야가 이끈 백성들이 함께했던 성벽 재건은 효율과 목적을 동시에 이루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동시에 참여할 수 있게 해서 공사기간을 단축했습니다. 성벽의 길이를 약3.2km 정도로 볼 때 40개 부분으로 나누면 한 공사 영역당 80m 정도 됩니다. 느헤미야는 동시에 그리고 짧은 기간에 성벽 재건을 완성할 수 있도록 영역을 나눴습니다. 전문적인 사람만 성벽재건에 참여한 것이 아닌데도 자물쇠와 빗장까지 달 정도로 완성도가 있었습니다. 또 성의 각 부분이 용도에 맞게 건축되도록 했습니다. 각 문의 용도가 달랐습니다. 성에는 문이 10여 개 있었습니다. 제사에 필
요한 양들을 들여오는 문이 있었고, 고기들을 들여오는 어문이 있었고, 또 오물을 골짜기에 버리는 분문 등이 있었습니다. 각 부분이 용도에 맞도록 건축되도록 했습니다. 또한 함께 일하는 사람들에게 정당한 권한을 위임했습니다. 3장에 나오는 많은 이름들은 중간 지도자들로서 권한을 위임받았던 사람들입니다. 9절, 12절, 14절, 19절까지 모든 이름들이 중간 리더십들의 이름입니다. 권한을 위임하는 것은 지도자가 책임을 면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더 많은 책임을 지는
것입니다. 권한을 위임하는 것은 스스로 고통을 지는 것입니다. 자기가 일하는 것보다 어려운 것은 다른 사람이 일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일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 주고, 권한을 위임해 주는 일들이 느헤미야의 지도력에서 나타났습니다.
지역, 직업, 계층, 성별을 넘어
모두 함께 기쁨으로 참여
“그다음은 하루맙의 아들 여다야가 자기 집 맞은편을 복구했으며 그다음은 하삽느야의 아들 핫두스가 복구했습니다”(10절). 28절에서 31절까지 자기 집과 마주한 부분을 복구했다고 반복하고 있습니다. 자기 집 맞은편을 복구하는 것은 곧 자기 집 벽을 쌓는 것이고, 자기에게도 이득이 됩니다. 지혜로운 일의 분담입니다. 일의 효율성만이 아니라 선한 일의 목적을 어떻게 성취했는지가 나타납니다. 성벽 재건은 단순한 공사가 아닙니다. 전문적인 기술자들이 하는 일이 아니었습
니다. 이 일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들로 하나 되는 것이 선한 목적입니다. 자신의 삶에 몰두했던 것을 뛰어넘어, 이기주의를 뛰어넘어, 서로의 차이를 뛰어넘어, 긴장을 끌어안고 하나 되게 하는 것이 성벽 재건의 더 중요한 목적입니다. 효율성으로만 따질 수 없는 목적입니다. 선한 일은 대개 혼자 할 수 있는 일을 두 사람이 하고, 두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을 네 사람이 하고, 네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을 열 사람이 함께 참여함으로써 선한 일이 확대되는 것이 목적입니다. 한 사람이 그 일을 해치우는 것이 아니라, 가능한 많은 사람들이 선한 일에 함께 참여하게 되는 것이 바로 선한 일에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선한 일의 목적은 다양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서로의 차이를 극복하고, 선한 목표를 향하여 차이를 넘어서서, 긴장을 창조적으로 끌어안을 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느헤미야는 모든 지역, 계층, 전문적이지 않은 사람들까지 성벽재건에 참여하도록 했습니다. 효율성을 떨어뜨리는 일입니다. 그러나 이 공사의 목적에서는 매우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예루살렘 밖에 있는 사람들도 참여했습니다. 예루살렘 성 안에 사는 사람들만의 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들 모두의 성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에 사는 백성들도 참여했습니다. 2절에 보면 여리고가 나오고, 5절 드고아, 7절 기브온과 미스바, 13절 사노아, 14절 벧학게렘, 16절 벧술, 18절 그일라 지역을 지도에서 찾아보면 예루살렘에서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이스라엘 역사상 각 지역에 사는 사람들이 함께 참여해서 행한 공사가 없었습니다. 내가 사는 지역이 아니라고 외면하지 않고, 자기 집을 떠나 먼 지역에서 불편함을 무릅쓰고 함께 참여한 것입니다. 또한 각종 직업을 가진 다양한 사람들이 참여했습니다. 18절에 보면 금세공업자들이 참여했습니다. 금세공업자들은 손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손을 다치면 직업을 바꿔야 할지도 모르는 거친 일을 했습니다. 향품업자들도 참여했습니다. 그들은 비교적 부유하며 시간을 낼 수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남은 시간과 힘을 하나님을 위해 드렸습니다. 32절을 보면 상업무역을 하는 사람들도 참여했습니다. 하루라도 더 많은 지역에 가서 물건을 파는 사람들이 이 기간 장사를 내려놓고 수입을 포기하고 참여했습니다. 관리들뿐만 아니라 평민들, 남자들만이 아니라 여자들도 모두 함께 기쁨으로 참여했습니다.
말이 아니라 행함으로 참여하는 일
“그다음은 삽배의 아들 바룩이 성의 굽은 곳부터 대제사장 엘리아십의 집 입구까지 그다음 구획을 열심히 복구했습
니다”(20절). 느헤미야가 바룩이라는 사람이 열심히 땀 흘려 일하는 것을 기억한 것입니다. 다른 구절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평가입니다. 자신에게 할당된 것보다 많은 부분을 힘써 일하는 모습을 느헤미야가 부지런히 살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더 귀찮은 일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분문은 다른 사람들이 손대기 싫어하는 곳이었습니다. 그곳은 오물을 버리는 곳이기 때문에 매우 심한 악취가 나는 지역이었기 때문입니다. 새로 건축하는 것이 아니라 복원하고 보수하는 일이기 때문에 냄새가 가장 많이 나는 지역이었습니다. 그 지역에서도 자신의 책임을 다했습니다. 더 많은 대가를 요구하고, 더 귀찮은 일을 한 것이 아니라 각자 맡은 지역에서 책임을 다한 것입니다. 그러나 참여하지 않은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5절에 보면 드고아 귀족들은 공사에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대개 고된 노동 앞에 서면 사람의 됨됨이 나타나기 마련입니다. 어떤 이들은 소매를 걷어 올리고 일하고, 어떤 사람들은 꾀를 부리며 모습조차 보이지 않습니다. 건강한 몸이었지만 힘들다는 이유로 참여하지 않는 모습들도 분명 있었습니다. 드고아 귀족들이 참여하지 않으므로 드고아 평민들이 두 배의 일을 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삶에서 때로는 지식으로, 때로는 보이지
않는 영역에서 선한 일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말이 아니라 행함으로 참여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느헤미야, 촉매제 같은 지도자
오늘 본문에 ‘ 그다음’ 이라는 단어가 수없이 반복됩니다. 이것은 일의 순서를 밝히는 단순한 나열이 아닙니다. 모두
가 자신에게 맡겨진 일에 책임을 다했고, 옆에서 함께 일하는 동료들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 그다음은 다른 누군가가 아니라 바로 나’ 라는 의식이 선한 일을 이루는 공동체 의식입니다. 기러기 떼는 다른 곳으로 이동할 때 V자대형을 이루며 이동합니다. 기러기만이 아니라 여러 새들이 그렇습니다. 공기역학적으로 제일 앞서 나는 새가 가장 많은 공기 저항을 받고 그 뒤에 나는 새들은 비교적 저항을 덜 받기 때문입니다. V자대형을 이루며 날아가다가 선두의 새가 지치면 일행으로 돌아오고, 또 다른 새가 제일 앞서 날게 됩니다. 만일 날다가 어떤 새가 문제가 생겨서 이탈하게 되면 반드시 두 세 마리의 새가 함께 이탈해서 혼자 외롭지 않도록 곁에 있다가 본대로 복귀할 때까지 함께 해 줍니다. 우리가 볼 때는 이성적이지 않고, 본능에 충실해 살아가는 이 새의 무리마저 함께 공동체를 이루는 법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바로 그런 분이기 때문입니다. 새들이 무리를 지는 선한 모습을 우리가 본받아야 합니다. 그다음을 계
속 연결해 가는 새들의 본능 속에 하나님의 성품이 담겨 있습니다. 인간의 죄악이 하나님의 성품을 망가뜨려 버렸습니
다. 그다음은 바로 나라는 의식을 잃어버렸습니다. ‘ 누군가 하겠지’ , ‘ 내가 안 해도 되겠지’ , ‘ 이건 내가 할 일이 아니야
’ 라는 생각이 선한 일을 이루지 못하게 합니다. 내가 보기 싫은 사람, 받아들이기 어려운 사람,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
심지어 나를 비판하는 사람, 나의 생각에 반대하는 사람, 나와 생각이 다르면 적이 되는 세상입니다. 나를 비판하면 원
수가 됩니다. 서로 다른 생각을 존중하고, 내 의견에 반대하고 심지어 나를 비판한다 할지라도 그것을 끌어안을 수 있는 마음이 바로 긴장을 창조적으로 끌어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마음을 회복해야 합니다.
우리는 느헤미야의 이 기록을 읽을 때 매우 지루하게 느꼈습니다. 그러나 느헤미야에게는 가장 감동적인 기록이었습
니다. 이 명단에서 한 사람의 이름이 빠졌습니다. 느헤미야입니다. 그는 누구보다 많이 수고했고, 더 많이 희생했습니
다. 그러나 자신의 이름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이것을 가리켜 촉매제와 같은 지도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변화를 일
으켰지만 촉매제는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세상의 소금이라고 하실 때 소금은 촉매제
입니다. 소금이 녹은 물은 짜지만, 소금은 보이지 않습니다. 느헤미야는 모든 변화를 일으켰지만 자신의 존재감을 주장
하지 않았고, 자신을 녹여 희생했습니다. 느헤미야는 오케스트라 지휘자와 같이 수많은 악기에서 나오는 소리를 듣고
화음을 이루었습니다. 느헤미야는 40여 개의 현장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잘 듣고 아름다운 지휘를 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동일하게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차이와 능력이 있게 만드셨습니다. 그 차이가 때로 긴장을 만들어냅니다. 때로
는 갈등을 만들어 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세계는 차이와 갈등을 하나로 만들고, 그다음을 연결해 가는 은
혜가 있습니다. 우리가 이루어온 자유민주주의는 모든 긴장과 갈등을 창조적으로 끌어안는 선한 제도입니다. 어느 시
대보다 느헤미야가 보여줬던 모습, 링컨이 보여줬던 하나님의 선한 역사를 회복해야 될 때입니다. 이 나라와 민족 안에
존재하는 모든 긴장과 갈등이 우리를 허무는 파괴적인 힘이 아니라, 서로를 끌어안는 창조적인 힘으로 하나 되는 선한
일이 일어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
살아계신 하나님 아버지,
느헤미야가 그 시대 백성들과 함께 이루었던
선한 일의 역사가 이 시대 일어나게 하옵소서.
교회가 하나 되고, 나라가 하나 되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통일이 이뤄지고,
전 세계 사람들에게 복음을 증거할 수 있는
통로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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