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헤미야의 기도를 품고, 함께 기도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회개하며, 말씀 속에서 소망과 비전을 품고,
자신을 헌신하는 종의 기도에 귀 기울이십니다.”
느헤미야서는 우리 곁에서 조언해주는 인물처럼 다가옵니다. 역사상 수많은 지도자들이 느헤미야의 멘토링을 받았습니다. 느헤미야서는 일어난 일들을 정리할 뿐만 아니라 그일 이면에 있는 하나님의 역사, 동기, 마음의 상태 등을 있는 그대로 고백하고 있기 때문에 인생의 고난과 딜레마 가운데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뜻 가운데 있어야 할지를 알려줍니다. 느헤미야서를 통해서 전염병 재난의 터널을 하나님의 지혜와 방법,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태도로 지나가면서 무너진 세상, 삶과 예배, 공동체가 회복되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느헤미야는 이스라엘 포로귀환시대에 쓰임받았던 인물입니다. 그 이름의 뜻은 ‘ 하나님의 위로’ 입니다. 이름 그대로 하나님께서 순종하는 종들을 어떻게 위로하시는지를 잘 보여 주는 인물입니다. 하나님의 위로가 필요한 이때 교회가 느헤미야가 되어서 하나님 위로의 통로가 되어야 합니다. 동일한 어려움에 처해 있지만 그 어려움에 휩쓸리는 사람이 있고, 위로할 수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위로할 수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사람뿐입니다. 그 상황을 변화시키고 새롭게 할 수 있는 사람은 느헤미야와 같은 하나님의 종들입니다. 이 시대 한국 교회가 한국 사회의 느헤미야가 되어야 합니다.
느헤미야는 페르시아 아닥사스다 왕의 술관원이었습니다. 당시 술관원은 왕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단 두 사람 중에 한 사람이었습니다. 한 사람은 왕의 부인이요, 또 한 사람은 술관원이라고 알려지고 있습니다. 자신의 능력이나 누군가의 추천에 의해 오를 수 있는 위치가 아닙니다. 왕의 절대적인 신임과 친밀한 인격적인 관계가 있어야만 세워질 수 있는 자리였기 때문입니다. 느헤미야의 입장에서 볼 때 그는 포로로 귀환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세상적인 이유로 볼 때 그는 아닥사스다왕의 술관원으로 있는 것이 훨씬 더 안전했고, 평안했고, 안락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때에 맞게 사람을 세우시고 또 보내시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3차 포로귀환 때 느헤미야를 성벽을 재건하고, 백성들이 다시 예배
공동체가 되어서 하나님의 부흥을 경험하게 하는 일에 사용하셨습니다. 에스더가 수산궁에 있었던 것처럼, 요셉이 애굽에 있었던 것처럼, 다니엘이 바벨론 한복판에 있었던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종들을 때에 맞게 그 위치에 합당하게 불러 사용하십니다. 느헤미야는 왕의 술관원 위치에 있었지만 예루살렘에 대한 형편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
니다.
느헤미야의 눈물의 기도
“내 형제 가운데 하나니가 몇몇 사람들과 함께 유다에서 왔습니다. 그래서 나는 포로로 잡혀 오지 않고 그곳에 남아 있는 유다 사람들의 안부와 예루살렘의 형편을 물었습니다. 그들이 내게 말했습니다. ‘ 포로로 잡혀 오지 않고 그 지방에 남아 있는 사람들은 지금 큰 고난과 수모를 당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벽은 무너졌고 그 성문들은 다 불에 탔습니다
’”(2~3절). 가장 안전한 삶을 살고 있는 느헤미야가 무너진 예루살렘 형편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 사람의 특징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
습니다. 여러 위대한 믿음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늘 가슴에 품고 있었습니다. 수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 나는 이 세상과 상관없다’ 는 시각으로 외면하지 않았습니다. 수많은 죄악이 가득한 이 세상을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긍휼히 여기며, ‘ 그들 가운데 어떻게 하나님의 소망이 전해 줄 수 있을 것인가, 하나님의 위로가 그들 가운데 어떻게 전해줄 수
있을 것인가’ 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대했습니다. 느헤미야의 관심은 단지 동족이기 때문만이 아닙니다. 하나님에 대한 관심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일컫는 백성들이 여전히 수치와 수모를 당하고 있으므로 그것은 곧 하나님의 수치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예루살렘의 형편에 깊은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가 범하는 가장 나쁜 죄는 무관심일 수 있습니다. 나만 괜찮고 편안하면 된 것처럼 살아가는 인생은 하나님의 종으로서 세상의 위로가 되는 통로가 될 수 없습니다.
“예루살렘아, 누가 네게 인정을 베풀겠느냐? 누가 너를 위해 슬퍼하겠느냐? 누가 네 안녕을 묻기 위해 발길을 멈추겠느냐?”(렘15:5).
이 질문에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이 바로 느헤미야입니다. 느헤미야는 선조들로부터 많은 이야기를 들었을 겁니다. 1차, 2차 포로귀환 때 많은 동족들이 돌아갔지만, 여전히 성벽이 무너져 있었습니다. 당시 고대사회에서 성벽이 없는 것은 수많은 도적들과 침입에 노출되어 있기 때문에 계속 수치와 수모를 당하며 웃음거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백성들이 너무나 지쳐 있었기 때문에, 소망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성벽을 재건하고 다시 예루살렘을 온전케 하는 일에 아무도 나서고 있지 못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예루살렘 형편을 들은 느헤미야의 반응은 기도였습니다. 단순한 기도가 아니라 절박한 기도, 간절한 기도, 통곡의 기도, 눈물의 기도, 가슴을 찢는 기도, 수일 동안 사라지지 않는 슬픔의 기도를 하나님 앞에 드
렸습니다.
“나는 이 말을 듣고 그만 주저앉아 울고 말았습니다. 나는 몇 날 며칠 동안 슬픔에 잠긴 채 금식하면서 하늘의 하나님 앞에 기도하며”(4절).
며칠 동안 슬픔에 잠겨 통곡하고, 금식하며, 하나님 앞에 기도했습니다. 가슴이 찢어지는 눈물의 기도는 하루아침에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 소식이 충격적이기 때문에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오랜 시간동안 예루살렘을 위하여 기도를 드렸고, 관심을 가졌고, 하나님의 뜻을 구했고, 그 소식을 듣자마자 가슴에 묻어 두었던 소원이 터져 나온 것입니
다. 예레미야가 그런 눈물을 흘렸습니다. 사도 바울이 동족을 바라보며 그런 눈물을 흘렸습니다. 예루살렘을 바라보며 슬피 우셨던 예수님의 눈물이 바로 느헤미야를 통해서도 터져 나온 것입니다. 오늘 이 나라가 어려운 것은 판단력이 부족하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한국 교회가 어려운 것은 목회자들이 성경강해를 못 해서 그런 것도 아닙니다. 이 말씀을 통
해 볼 때 나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눈물의 기도, 통곡의 기도, 가슴을 찢는 기도, 슬픔에서 터져 나오는 기도가 메말랐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가 눈물의 기도를 잃어버렸기에 한국교회가 위기에 처해 있는 것입니다. 세상으로부터 수치를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으로부터 신뢰를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세상에 영향을 주고 있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 믿음의 선배들은 많이 배우지 못했고, 경제적으로도 넉넉하지 못했지만 느헤미야의 기도가 있었습니다. 며칠 동안 슬퍼하며 통곡하며 슬피 우는 눈물의 기도가 있었기에 이 나라와 민족이 지금처럼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던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느헤미야의 기도를 회복하기를 원합니다.
참된 하나님의 종의 마음,
품어야 할 기도의 내용
“주의 종들인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 주의 종이 밤낮으로 주 앞에 기도하니 주께서는 귀를 기울이시고 눈을 떠서 이 기도를 들으소서. 저와 제 조상의 집을 비롯해 우리 이스라엘 족속이 주님을 거역했던 죄를 고백합니다. 우리가 주께 매우 악하게 굴었습니다. 주께서 주의 종 모세에게 주신 계명과 율례와 규례를 우리가 지키지 않았습니다”(6~7절).
느헤미야가 죄를 고백합니다. 그런데 엄밀히 말하면 예루살렘이 함락되고 이 형편에 있는 것은 느헤미야의 책임이 아닙니다. 조상들의 책임입니다. 그러나 조상들의 책임을 자신의 책임으로 여기는 것이 느헤미야 기도의 특징입니다. 느헤미야는 조상들이 범한 죄와 동일한 죄를 범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자신이 범한 것처럼 회개하고 있습니다. 그 증거는 ‘
우리가’ 라는 단어를 반복하고 있는 것입니다. ‘ 우리’ 라는 대명사가 조상들의 죄, 민족의 죄, 나라의 죄가 바로 나의 죄라는 것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에서 어떤 사건이 일어나면 누군가 한 사람 때문에 사회 전체가 어려워진 것이라고 희생양을 찾아 공격합니다. 한국 교회의 문제점을 누군가 때문이라고 정죄하고, 비난하며, “나는 저들과 다르다”는
패러다임에 빠져들 위험이 많습니다. 물론 다를 수 있습니다. 분명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그렇게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느헤미야는 자신의 죄인 됨을 깊이 깨닫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조상들만의 죄악이 아니라 자신 또한 하나님 앞에 동일한 죄인임을 깨닫고 있었기에 “우리가 하나님 앞에 범죄했습니다. 우리가 모세에게 주신 계명
과 결례를 지키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거역했던 죄를 고백합니다”라고 했습니다.
오늘 한국 교회가 회복해야 될 것은 ‘ 우리’ 입니다. “나는 괜찮은데 당신 때문에 일이 일어났다”는 시각은 참된 회개의 기도가 아닙니다. 우리의 문제입니다. 우리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돌이켜야 할 문제입니다. 어느 누군가만 회개하고 변화되면 세상이 달라질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우리의 책임이라는 공동체 의식이 바로 느헤미야가 보여 줬던 영적 태도입니다. 그는 눈물 흘리며 통곡하며 안타까워 하면서 누군가만 정죄하지 않고, 우리의 죄요, 나의 죄라고 고백했습니다. 이것이 참된 하나님의 종의 마음이요, 우리 모두가 품어야 할 기도의 내용입니다. “유일한 삶의 기둥은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주께서 주의 종 모세에게 하신 말씀을 기억하소서.
‘ 너희가 만약 죄를 지으면 내가 너희를 여러 민족들 가운데로 흩어 버릴 것이고 만약 너희가 내게 돌아와 내 계명을
지키면 너희 포로 된 사람들이 하늘 끝에 있더라도 내가 그들을 거기에서부터 불러 모아 내 이름을 위해 선택해 놓은
곳으로 데려올 것이다’ 라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들은 주께서 주의 큰 능력과 주의 강한 손으로 구속하신 주의 종이
요, 주의 백성들입니다”(8~10절).
느헤미야의 기도 내용이 놀랍습니다. 바벨론에서 자라서 페르시아의 관료로 일하는 사람의 기도라고 보기 어려울 정
도로 대단히 성경적입니다. 그는 예루살렘 성전과 회당에서 율법 교육을 오랫동안 경험하지 않았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는 정확한 신앙을 갖고 있습니다. 현실 역사의 문제와 해결책을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찾는 성경적 신앙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모세를 통해서 전해 준 말씀을 전체적으로 깊이 묵상하며 살아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에게는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아주 편리하고 찾아보기 좋은 책으로 된 성경이 없었습니다. 그들에게는 가죽이나 두루마리 형태
혹은 그것조차 없어 몇 개의 조각조각 된 사본만이 남아 있었을 뿐입니다. 느헤미야 시대 사람들은 하나님 말씀의 일
부분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뜻을 헤아려야 했습니다. 우리가 성경의 한 부분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되면 오해
할 수 있고 잘못 해석할 수 있습니다. 성경 66권 전체 말씀을 해석해야만 해석 되는 부분이 많기 때문입니다. 느헤미야는
그런 축복을 받지 못한 세대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모세에게 주신 말씀을 붙잡음으로 해결책을 찾았습니
다. 모세에게 주신 말씀 가운데 “너희가 죄를 지으면 하나님께서 여러 민족 그 가운데 흩으실 것이요 그러다 동시에 다
시 돌이켜 회개하고 돌아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면 하늘끝에 있다 할지라도 또 다시 돌아오게 하리라. 하나님께서
택하신 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하신 말씀을 붙잡았습니다. 여러분, 우리 시대 처참하고 절망적인 소식들, 한국 교회
가 함께 모이지 못 하는 이 비참하고 수치스러운 현실 가운데 우리가 느헤미야처럼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약속을 붙잡
고 기도하며 소망을 가져야만 이 시대를 뚫고 나갈 수 있습니다. 느헤미야가 모세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정확하게
주장하며 기억하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절대로 잊지 않으시며, 말씀을 붙잡는 자들은 곧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붙잡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언약의 말씀을 붙잡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과 마음을 붙잡는 것입니다. 그 손을 붙
잡는 것입니다. 언약의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그 언약을 잘 지키는 자들은 복 가운데 거하게 하시지만, 그
언약에 충실하지 않을 때는 징벌을 하시고 심판하십니다. 심판 또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돌아오게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은 시대와 문화를 뛰어넘어 느헤미야가 경험했던 하나님을 이 시대
우리도 경험하게 해주는 축복의 통로입니다. 그러므로 코로나19 감염병 시대에 모임이 취소되고, 제대로 활동하지 못
하는 시간에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사모하고, 말씀 속에서 소망을 얻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혼란스러운 세상에서 우리
가 기댈 수 있는 유일한 삶의 기둥은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 헬무트 틸리케’ 라는 독일인 목사는 히틀러를 반대한다는 이유로 교수직에서 쫓겨나고 나치에 끌려가 고문당하고
또 언제 감옥으로 끌려갈지 모르는 불안한 생활 속에서 목회하던 사람입니다. 그가 목회하던 슈투트가르트교회는 폭
격으로 완전히 무너져 내렸습니다. 그 광경을 보고 집으로 참담한 마음으로 돌아왔는데 집도 산산조각 났습니다. 가장
중요한 집과 교회 예배당이 폭격으로 무너졌습니다. 상황이 갈수록 악화되었습니다. 그러나 틸리케는 주일마다 빠짐없
이 강단에 섰습니다. 그리고 이런 고백을 남겼습니다. “온통 혼란스러운 세상에서 우리가 의지할 수 있는 확실한 기둥은 언제나 신실하시며 늘 의지할 수 있는 하나님뿐입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결코 무너지지 않는 기둥입니다.”
“주의 종의 기도에 귀 기울이소서”
“‘ 주여, 이 종의 기도와 주의 이름을 경외하기를 기뻐하는 주의 종들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소서. 오늘 주의 종이 이
사람 앞에서 은총을 입고 잘되게 하소서.’ 그때 나는 왕에게 술을 따라 올리는 사람이었습니다”(11절).
느헤미야의 기도에서 반복되어 사용하는 중요한 단어가 있습니다. ‘ 종’ 입니다. 여덟 번이나 반복됩니다. 그는 페르
시아 왕의 종이었지만 그의 진정한 정체성은 하나님의 종입니다. 우리 모두가 주의 종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받은 백
성과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종입니다. 참된 자녀는 종으로서 섬기는 직분을 감당하기도 합니다. 자녀로서 주의
종 일을 감당하는 것과 세상적인 종의 관점에서 어쩔 수 없이 일하는 것은 차이가 있습니다. 주의 종이 느헤미야의 정
체성입니다. 느헤미야는 자신을 하나님의 종으로 여겼고, 하나님께 종의 기도에 귀 기울여 달라고 간절히 기도했습니
다. 기도하는 가운데 느헤미야는 점점 더 자발적이 됩니다. 그의 기도는 슬픔으로 시작해서 헌신의 기도로 마무리됩니
다. 단지 통곡하는 기도가 아니라 비전을 바라보는 기도로 나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기도할 때
놀랍게도 하나님의 뜻에 쓰임 받는 삶으로 변화됩니다. 우리가 주의 종으로 쓰임 받는 것이 때로는 두려울 수 있습니
다. 그러나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 혼자 하는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
나님께서 모든 상황을 주관하시고, 내가 움직일 수 없는 모든 사람들, 상황, 필요를 이끄시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하나
님의 종으로 헌신해서 사는 것만큼 감격스러운 것이 없습니다. 흥미진진한 삶이 없습니다. 자원하여 헌신할 때마다 하
나님께서 이루시는 일들을 체험할 수 있기 때문에 기쁘고 감격스런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느헤미야는 하나님의 뜻에 자신을 헌신하고 있습니다. 슬픔의 기도로 시작해서 참된 회개의 기도로 나아가 이제는
하나님의 뜻에 기도로 자신을 드리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종의 기도에 귀 기울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참된
기도로 나아가는 영혼에게 귀를 기울이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기도에 응답하기를 기뻐하십니다. 느헤미야
의 기도를 품고, 함께 기도하기를 바랍니다. 마음을 찢고 슬퍼하며 눈물의 기도를 드리기를 원합니다. 이 세상의 혼란
가운데 우리 모두가 “나의 문제입니다. 나의 죄입니다. 우리의 죄입니다”라고 회개하며,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소망을
품고, 비전을 품고, 회복의 약속을 붙잡고 기도하기를 바랍니다. 우리 모두가 이 세상에 하나님의 위로가 되는 주의 백
성들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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