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억눌린 자에게 해방을 주시고,
보지 못하는 자를 보게 하시는 일들을 날마다 체험하십시오.”
우리 인생에 큰 영향을 주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상황과 소명입니다. 의미 없는 인생을 살게 되는 이유는 상황에 이끌리기 때문입니다. 상황이 주는 영향을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상황의 영향이 있더라도 소명을 깨닫고, 소명에 집중하는 인생을 사는 사람은 상황을 이끌고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온도계와 온도조절기의 차이를 아실 겁니다. 온도계는 현재 공간의 온도를 보여줄 뿐입니다. 그러나 온도조절기는 온도를 바꿈으로 환경과 상황을 바꿀 수 있습니다. 상황에 이끌리는 인생은 온도계처럼 현재 일어나는 일을 그대로 보여줄 뿐입니다. 그러나 온도조절기 같은 인생은 소명에 집중하기 때문에 상황을 바꾸고, 초월해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소명에 온전히 순종하는 삶을 사셨습니다. 그리고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시며 이 땅에서의 삶을 마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맡기신 소명을 다 이루셨다는 뜻입니다. 십자가의 소명에 집중하신 예수님의 인생은 하나도 의미 없는 일이 없었습니다. 어떠한 상황도 그분을 무너뜨릴 수 없었습니다. 소명이 상황을 이기는 삶을 사셨습니다.
복음을 듣는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나사렛 회당은 예수께서 자란 곳입니다. 예수님은 베들레헴에서 태어났지만 나사렛에서 자라셨습니다. 그 이유는 아버지 요셉이 목수였고, 예수님도 목수로 성장했기 때문입니다. 당시 베들레헴은 젊은 사람들에게는 인기가 없는 지역이었습니다. 나사렛이 신흥도시입니다. 많은 건축이 일어나는 나사렛에 살아야 일자리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지만 나사렛에서 자라야 했습니다. 회당은 예수님께서 많은 친구들과 친척들이 더불어 다니던 곳이었습니다. 그날도 예수님께서 잘 아는 사람들이 모여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께서 자신이 자라나신 나사렛에 오셨습니다. 안식일이 되자 예수께서 늘 하시던대로 회당에 가셔서 성경을 읽으려고 일어나셨습니다”(16절).
‘늘 하시던 대로’ 라는 단어에 주목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기 전 30여년 동안 회당에 정기적으로 그리고 적극적으로 참여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영성과 내면을 보면 성령이 역사하시는 회당이라 보기 어렵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읽혀지는 곳, 하나님의 말씀이 가르쳐지는 곳이었
기에 예수님께서는 회당을 존중하셨고, 소중히 생각하시고, 적극적으로 참여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 구약성경은 큰 종이로 돌돌 말은 두루마리입니다. 어느 한 부분을 읽으려면 펼쳐야 했습니다. 당시 회당에서 7명이 성경 읽는 것에 참여했는데, 처음에는 제사장이 읽고, 두 번째는 레위인이 읽고, 그 다음에 5명의 유대인들이 돌아가면
서 혹은 자원해서 읽을 수 있었습니다.
“예언자 이사야의 두루마리를 건네받으시고 두루마리를 펼쳐 이렇게 기록된 곳을 찾아 읽으셨습니다. ‘ 주의 영이 내게 내리셨다. 이는 하나님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셔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도록 하기 위해서다. 하나님께서는 포로 된 사람들에게 자유를, 못 보는 사람들에게 다시 볼 수 있음을, 억눌린 사람들에게 해방을 선포하기 위해 나를
보내셨다. 주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도록 하기위함이다’”(17~19절).
예수님께서 이사야서 말씀을 읽으신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이 메시아에 대한 어떤 기대를 가지고 있는지를 예수님께서 잘 아셨기 때문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이 기대했던 메시아는 로마의 압제로부터 정치적으로 해방시켜주고, 경제, 군사적으로 강대국을 만들어 줄 제왕 같은 지도자를 메시아로 꿈꿨습니다. 메시아가 어떤 일을 하고, 메시아가 어떻게 세상에서 일할 것인지를 보여주는 이사야의 말씀과 동떨어진 메시아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것을 깨닫게 해주시고, 이 땅에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의 소명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셨습니다. 메시아의 첫 번째 소명은 ‘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 입니다. 돈과 명예와 권력이 없는 가난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에서 말
씀하신 가난입니다. 천국의 문을 통과하는 가난입니다. 이 가난은 완전히 파산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전인적인 가난을 의미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의를 내놓을 수 있는 가난입니다. 자신의 죄와 악함 때문에 마음이 깨어지고 무너진 가난입니다. 하나님의 구원 없이는 결코 살아갈 수 없음을 깨닫는 가난입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음이 들려옵니다. 복음이 들려지지 않는 까닭은 자기 의, 자기만족이 가득한 부유한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가난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고백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의 말씀대로 깊은 곳에 그물을 던졌을 때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고기가 많이 잡혔습니다. 그때 베드로가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했습니다. 전능하신 예수님의 임재 앞에서 자신의 죄악 됨과 부정함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놀랍게도 자신의 부정함, 더러움, 추함과 죄악 됨을 하나님 임재 앞에서 발견하고, 두려워하고, 스스로에게는 아무런 희망이 없음을 깨닫고 절망하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나라가 임합니다. 예수님 당시 천국을 경험한 사람들은 자신이 이룬 것이 너무 많아 하나님 앞에 자랑하고 감사하던 바리새인들이 아니었습니다. 자신들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를 구하는 것 밖에는 없다고 생각했던 세리와 죄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의 마음이 가난해졌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18장에 젊은 부자관원이 나옵니다. 그는 부모로부터 많은 부를 물려받았고, 율법을 열심히 지키는 젊고, 경건한 리더십이 있었습니다. 그가 예수님께 “어떻게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라고 질문했습니다. 말씀도 지켰습니다. 누구에게나 존경받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에게 “네가 가진 재물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시자 근심하며 돌아갔습니다. 그에게는 재물이 우상이었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19장에 삭개오가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내려오라”하신 그 한마디에 삭개오는 자신의 모든 부정한 삶을 회개하고, 되갚고, 변화된 삶을 고백했습니다. 삭개오의 마음이 이미 가난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복음은 ‘자유의 복음’
가난한 자들에게 주신 세 가지 자유가 있습니다. 첫째, 포로 된 자들을 자유케 합니다. 둘째, 억눌린 사람들을 해방케 합니다. 셋째, 못보는 사람들을 다시 보게 합니다. 28절에 나오는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억눌린 사람들에게 해방을 먼저 말씀드리는 것은 이 자유와 해방이라는 단어가 헬라어로 아페시스(ἄφεσις)로 같기 때문입니다. 포로 된 자, 억눌린 자
사이에 못 보는 사람들을 다시 보게 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자신의 포로 됨과 억눌림도 보지 못하는 영혼이 된다는 것입니다. 죄는 우리 눈을 멀게 하고, 방향감각을 방황하게 합니다. 예수님의 소명은 죄로 초로되고, 죄에 억눌리고, 죄로 앞을 보지 못하는 영혼들을 다시 보게 하고, 포로 된 상태에서 자유케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 소명의 핵심 단어는 ‘ 자유(해방)’ 로 번역된 이 단어입니다. 예수님의 복음은 자유의 복음입니다. 자유와 해방으로 쓰인 단어가 누가복음에서는 또 다른 두 가지 의미로 사용됩니다. ‘ 용서’라는 단어로도 사용됩니다. 누가복음 1장 77절 “주의 백성에게 그들의 죄를 용서해 주어구원의 지식을 전할 것이다”는 말씀에서 ‘용서’ 라는 단어가 자유라는 단어와 같습니다. 죄가 용서되어야만 죄로부터 자유케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같은 단어를 쓴 것입니다. ‘빚을 탕감하다. 빚으로부터 벗어나다’ 라는
뜻으로 사용될 때도 동일한 단어가 사용됐습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모든 사람을 용서한 것같이 우리 죄도 용서해 주소서. 그리고 우리를 시험에 들지 않게 하소서”(눅 11:4).
‘ 빚진 사람을 용서한다’ 는 것은 빚으로부터 자유케 되고, 죄를 용서받고, 자유를 향하는 것입니다. 죄로부터 자유케 되는 것은 죄책감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입니다. 이 모든 단어의 용례들이 한꺼번에 사용된 말씀이 있는데 레위기 25장에 나타난 율법에 있습니다.
희년이라는 절기입니다.
“너희는 50년이 되는 해를 거룩하게 하고 그 온 땅의 모든 사람들에게 자유를 선포하라. 그것이 너희를 위한 희년이다. 너희 각 사람은 각자의 소유지로 돌아가고 너희 각 사람은 각자의 동족에게로 돌아가라”(레 25:10).
‘ 희년(Jubilee)’ 은 50년째 되는 해를 말합니다. 7년마다 안식년이 되고, 안식년이 7번 지나고 다음 해인 50년에는 희년이라고 해서 중요한 일이 시행 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자유를 선포하는 것입니다. 종이 되었던 사람들이 해방됩니다. 경제적으로 빚진 사람들이 탕감됩니다. 어떤 토지거래가 있었더라도 원소유주에게로 반환되는 회복이 일어납니다. 독특한 제도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역사에서 희년이 제대로 지켜졌다고 볼 수 없습니다. 희년을 지켰다면 이스라엘 민족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가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인간의 죄와 욕망과 야망을 생각한다면 희년이라는 불가능한 제도를 하나님께서 보여준 이유가 무엇입니까? 장차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약의 모든 율법이 이루어짐을 의미합니다. 구약의 모든 절기가 예수님의 사역과 관련 있습니다. 희년도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심으로 우리에게 자유를 주시는 것을 보여 주시는 제도입니다.
죄의 종 되었던 우리를 자유케 하시고, 죄의 빚진 자가 된 우리를 자유케 하시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원래
유업을 회복시켜 주시고, 사단에게 뺏겼던 하나님 나라의 유업을 회복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이사야 말씀에
서는 ‘ 은혜의 해’ 라고 합니다.
“주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도록 하기 위함이다”(19절).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은혜의 해, 희년의 축복을 주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
신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소명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자유케 하려고 오셨습니다. 자유라는 단어를 깊이 묵상
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우리는 종이었고, 죄의 빚 가운데 허덕였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유업을 잃
어버린 상태였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보지 못하고, 죄의 종으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진정한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주신 영적 자유를 누리면 사회가 변할 수밖에 없습니다. 죄로부터 자유케 된 사람들
이 만드는 사회는 자유로운 사회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질서가 자유민주주의입니다. 이것은 예
수 그리스도께서 변화시킨 우리에게 주신 자유를 기초로 형성된 사회질서입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두 가지 자유가 있습니다. 첫째, ‘ 하고 싶은 것을 하는 자유’ 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자유의 절반뿐입니다. 두 번째 자
유는 ‘ 해야 할 것을 하는 자유’ 입니다. 진정한 자유는 이 두가지가 하나 된 자유입니다. 그래서 “자유가 무엇인가?”라
는 질문에는 “해야 할 것을 하고 싶어 하는 것”이라고 대답해야 합니다. 그것이 진짜 자유입니다. 자유로운 삶을 살고
있는지를 측정할 수 있습니다. 마땅히 해야 할 어떤 일을 기뻐하며 할 수 있는지를 보면 됩니다.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입니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을 기쁘게 하고 있습니까? 그 일을
하고 싶어 합니까? 그렇지 않다면 자유롭지 못한 것입니다.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의지하고 순종하며 살아가는 것을 기
뻐하는 것이 인간이 자유로울 수 있는 길입니다. 인간이 죄인이 된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고 싶은 것만 하는 자유를 사
용했기 때문입니다. 마땅히 해야 할 것,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 먹지 말라고 금하신 것을 말씀 그대로 지키는 것이
진짜 자유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자유를 잘못 사용했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자유가 파괴된 것입니다. 그래서 죄의 종
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인간의 모습을 예수님께서는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고 표현하셨습니다. 죄를 범했
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하지 않도록 정하신 것, 혹은 하도록 정하신 것을 넘어가는 것입니다. 죄의 종이 된 것입니다. 그
래서 죄를 거부할 능력이 없고, 죄의 종이 되어 선택의 능력이 없어졌습니다. 자유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자유
를 누리고 있는 것 같지만, 실상은 죄의 종으로 사는 것입니다. 몸은 자유로운 것 같은데 마음은 많은 것에 얽매어 있는
것입니다. 마음의 상처와 죄의 습관에 얽매어 있는 것입니다. 온갖 중독에 얽매어 있는 것입니다. 마음의 상처에 갇혀
있는 것입니다. 상한 마음의 포로가 되는 것입니다. 죄가 가져온 모든 상처와 죄악의 습관에 억눌려 있는 인간의 상태
를 자유케 하시는 일이 바로 예수님의 소명입니다.
사람들이 왜 죄의 종이 되었습니까? 자유를 ‘ 무엇으로부터 벗어나는 것’ 으로만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자유
란 ‘ 무엇으로부터 벗어나는 것’ 뿐만 아니라 ‘ 무엇으로 향하는 자유’ 입니다. ‘ 하고 싶은 대로 사는 것’ 만이 아니라 ‘
해야 할 것을 하는 것’ 입니다. 인간이 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하나님을 사랑하며, 하나님을 향하여 사
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짜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진정자유를 누리며 살고 있는지를 알기 위한 질문은 “내가 어떤
것을 할 수 있느냐가 아니라 하지 않을 수 있는가?, 멈출 수 있는가?, 그만 둘 수 있는가?, 포기할 수 있는가?”입니다. 마
땅히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포기할 수 없고, 중지할 수 없고, 멈출 수 없다면 종이 되어 있는 겁니다. 또 마땅히 해야 할
것을 하지 못하고 있다면 그것 또한 종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인간 스스로는 이것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자신의 결심,
지식, 경험, 물질로는 죄의 종 된 상태를 끊을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이 우리를 죄로부터 자유케 합니다. 포로 된 자, 억눌린 자로부터 우리를 자유케 하실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8:32).우리를 자유케 하는 것은 진리입니다. 진리는 곧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진리는 어떤 사상적 체계가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분을 믿고, 그분 안에 거할 때 우리는 자유케 됩니다. 그분의 소명이 우리를 자유케 하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으면 자유로워집니다. 진리는 마땅히 있어야 할 하나님의 창조질서대로 거하는 것입니
다. 그것이 자유입니다. 새는 하늘을 날도록 창조하셨습니다. 물고기는 물속에 있을 때 자유롭습니다. 우리가 경험하
는 모든 인생도 진짜 자유를 누리려면 규칙을 지켜야 합니다. 진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신 질서입니다. 그리
스도 안에서 우리를 재창조하신 하나님의 질서입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중심은 ‘ 절대 진리는 없다’ 는 것입니다. 자기
가 진리라고 믿는 것이 진리라고 생각합니다. 여기에는 엄청난 함정과 거짓말이 있습니다. 세상에는 절대 진리가 없
다면서 그 주장만큼은 절대적이라고 합니다. 세상의 모든 진리는 절대적이지 않다고 주장하는 명제를 절대적이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거기에 거짓말이 있습니다. 거짓은 절대 인간을 자유케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진리는 인간을 자유
케 합니다. 우리의 삶에 자유함이 없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원과 그분 안에 거하는 삶이 아닙니다. 예수님
을 잘 믿으면 정말 자유로운 영혼이 됩니다. 그 자유는 하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하는 방종이 아니라 마땅히 해야 할 하
나님의 법칙을 지키고, 그것을 기뻐하며, 살아가는 삶입니다. 예수님의 소명은 죄의 종 되었던 우리를 자유케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유케 된 영혼은 해야 할 많은 의무들이 부담이나 짐이 아닙니다. 기쁨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억눌린 자에게 해방을 주시고, 보지 못하는 자를 보게 하시는 일들
을 날마다 체험하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 말씀의 능력은 듣고 믿는 그 자리에서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의 시간은 언
제나 오늘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죄로부터 자유케 되는 역사가 지금 일어나야 합니다. 우리를 자유케 하시는 주님
의 소명이 오늘 우리에게 이루어지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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