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이재훈목사

어디에서 예수를 찾는가? (누가복음 2:41~52)

새벽지기1 2020. 7. 9. 06:45

“하나님 안에서 우리는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당연히 임재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맞출 때 임재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13살부터 성인으로 간주하기 때문에 12세부터 금식을 배우고, 부모님과 함께 절기를 지키며, 성인으로서의 삶을 준비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12살 때 유월절 절기를 지키기 위해서 요셉과 마리아와 함께 예루살렘을 방문하게 된 것입니다. 그때 일어난 일은 틀림없이 누가가 마리아로부터 직접 듣고 기록한 일일 것입니다. 유월절 절기를 지키고 집으로 가던 중에 하룻길을 가서야 예수님이 계시지 않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3일이 지나서야 예수님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들은 예수가 일행 속에 있으리라 생각하고 하룻길을 가다가 그제야 친척들과 친구들 사이에서 예수를 찾기 시작했습니다”(44절). 요셉과 마리아는 당연히 예수님이 일행 중에 있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유대인들의 절기를 지키는 풍습을 생각해봐야 합니다. 집에서 출발할 때는 가족 단위로 출발하지만, 예루살렘으로 가는 중에 큰 무리를 이룹니다. 친척들도 만나고, 동료들도 만났을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도착할 즈음에는 많은 사람들이 무리 지어서 가게 됩니다. 당연히 절기를 지키고 집으로 돌아올 때는 큰 무리를 지어서 출발하게 되고, 집에 가까울수록 작은 가족단위로 흩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루살렘에서 출발할 때는 친척들과 친구들이 무리지어 출발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그 무리 중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또 한편으로는 예수님께서 12살이지만 그만큼 요셉과 마리아에게 신뢰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기 전 어린 시절에 대해 유일하게 남아 있는 이 기록은 매우 중요합니다. 예수님에 관한 것은 그 어떤 것도 당연한 것으로 추측해서는 안 된다. 예수님께서 일행 중에 당연히 있을 것이라
고 생각했지만 계시지 않았습니다. 이것을 우리에게 적용할 때 예수님의 임재에 대한 아주 중요한 교훈이 있습니다. 스펄전 목사님은 “예수님에 관한 것은 그 어떤 것도 당연한 것으로 추측해서는 안 된다”고 권면했습니다. 교회라는 간판만 붙인다고 예수님이 임재하실 것이라고 추측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예배에 단순히 참석한다고 해서 예수님이 임재하실 것이라고 추측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내 이름 뒤에 어떤 직분이나 직책이 붙는다고 해서, 어떤 봉사를 하고 있다고 해서, 성대한 예배당과 풍성한 성경지식이 있다고 해서 예수님께서 당연히 임재하실 것이라고 추측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어떤 삶을 살든지 예수님께서 임재하실 것이라고 추측해서는 안 됩니다. 마치 요셉과 마리아가 ‘ 우리가 돌아가고 있으니 예수님도 돌아오고 있을 것’ 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문제였던 것처럼 영적으로 ‘ 내가 무엇을 하든지 주님께서는 나와 함께 하실 것’ 이라고 추측해서는 안 된다는 교훈을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유일하신 아들,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오신 분


“3일이 지나서야 그들은 성전 뜰에서 예수를 찾게 됐습니다. 그는 선생들 가운데 앉아서 이야기를 듣기도 하고 묻기도 하고 있었습니다. 예수의 말을 들은 사람들마다 그가 깨닫고 대답하는 것에 몹시 감탄했습니다”(46~47절).
예수님께서는 성전에서 율법학자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령으로 잉태되신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 세상에 성육신하셨지만, 율법의 모든 지식을 회당에 가지도 않고, 대화의 과정도 없이 세상에 태어나실 때부터 가지고 있던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죄만 빼고 인간이 겪는 모든 과정을 겪으셨습니다. 그러나 죄가 없으셨기에 예
수님의 배움의 능력은 다른 사람과 비교할 수 없는 탁월함이 있었습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역사된 것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12살 때 율법학자들과 대화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12살 때 율법학자들이 감탄할 정도의 율법을 꿰뚫어 보는 통찰력이 있었고, 그들을 가르치기도 하셨습니다. 율법학자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예수님을 보고 ‘ 왜 요셉과 마리아에게 미리 말하지 않고 행동하실까’ 라는 질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율법을 더 알고, 율법학자들을 가르칠 의도였다면 요셉과 마리아에게 미리 말하고 실행했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혹은 일행들이 다 떠난 것을 알았다면 쫓아가서라도 말을 하고 다시 왔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부모님의 마음을 헤아리지 않은 것 같은 행동을 하고 있습니다.
“그 부모는 예수를 보고 놀랐습니다. 그래서 그의 어머니가 말했습니다. ‘ 얘야, 왜 우리에게 이렇게 했느냐? 네 아버지와 내가 얼마나 걱정하며 찾았는지 모른다’”(48절). 3일 동안 아이를 못 찾았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아마 간담이 다 녹았을 것입니다. 그 상황에서 예수님을 만났으니 화도 나고, 안심이 되기도 했을 것입니다. 당연한 부모의 놀람과 분노입니다. 그런데 화를 내고, 분노하고 있는 요셉과 마리아의 이면에 문제가 있습니다. 그분이 누구신지를 예수님을 육신의 자녀로 양육하고 있는 동안 점점 잊어가고 있었습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예수님이 성령으로 잉태된 분임을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모든 인간이 겪는 발달 과정을 그대로 겪으셨습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예수님을 육신의 자녀로 대해가고 있었습니다. 동시에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잊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걱정하고, 불안해하고, 분노
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 모습이 지금 우리의 모습입니다. 말씀 속에 나타난 예수님의 생애와 사역을 읽으면서 우리식으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나의 경험에 예수님을 끼워 맞추는 것입니다. 때로는 예수님이라면 용납할 수 없는 일을 하면서도 ‘ 예수님도 이해하시겠지’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였다고 하면서도 예수님의 임재라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인간적인 분노와 욕심과 탐욕으로 서로를 정죄하면서 모임이 끝날 때는 예수님을 부르며 마칩니다. 예수님의 임재에 합당하지 못한 모습이 나타난다는 것은 예수님을 우리의 수준으로 끌어 내리는 것입니다. 그분이 어떤 분이신지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지 않고 인간 예수처럼 끌어 내리는 것입니다.

 

때로 신학자들이 역사적 예수라는 이름으로 예수님에게서 모든 신비와 기적과 초자연적인 능력을 빼버리고 과학과 이성으로 이해할 수 있는 예수님으로 각색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요셉과 마리아의 모습입니다. 자신들이 받아들이지 못하는 예수님을 축소해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요셉과 마리아가 예수님께 맞추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자신의 삶에 맞추려고 했던 모습입니다. 육신의 자녀도 부모 뜻대로 맞추지 못합니다. 육신의 자녀를 부모의 철학과 교육을 시켰는데도 그렇게 되지 않는 이유는 내 자녀이기 전에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부모의 계획보다 하나님의 계획이 앞서기 때문에 부모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육신의 자녀일뿐만 아니라 그분은 하나님의 유일하신 아들이시며,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오신 분입니다. 그분이 어떻게 요셉과 마리아의 틀에 맞춰질 수 있겠습니까? 부모가 할 수 있는 최고
의 불신앙은 자녀를 부모의 틀에 맞추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자녀를 쓰시려고 하는데 그 부모가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이 육신의 틀에 제한하려고 할 때 어긋나는 것입니다. 때로 부모의 자녀에 대한 나름대로의 사랑과 기대가 하나님의 부르심과 어긋나는 순간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때 부모가 하나님 중심으로 바라보지 않으면 자녀를 향한 하나님의 뜻에 걸림돌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어디에서 예수를 찾고 있습니까?” “그러자 예수가 말했습니다. ‘ 왜 나를 찾으셨습니까? 내가 마땅히 내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 모르셨습니까?’”(49절). 충격적인 말입니다. 이 말을 들었을 때 요셉과 마리아는 화가 더 났을 것입니다. 합당하지 않은 말씀 같습니다. 함부로 말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예수님께 인간적인 정이 떨어졌을지도 모릅니다. 부모와 자녀에게도 정이 떨어지는 순간이 있습니다. 지금 예수님의 말씀을 보면 완전히 정을 떼는
것 같습니다. 정을 떼야 하기 때문입니다. 요셉과 마리아가 12년 동안 예수님을 얼마나 애지중지 키웠을까요? 마리아가 얼마나 예수님을 품에 안고 젖을 먹이고 사랑을 다 했을까요?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면 예수님께서 고난을 받고 십자가를 지셔야 했습니다. 사랑하는 자녀가 십자가에 서 참혹하게 죽임을 당하는 것을 어느 부모
가 감당할 수 있을까요? 병으로 자녀가 먼저 죽어도 부모는 평생 지울 수 없습니다. 그런데 무고하게 고난을 받고 십자가에서 죽임 당하는 것을 부모가 봐야 합니다. 특히 마리아가 이것을 어떻게 감당할 수 있을까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12살을 기점으로 작심하고 정을 떼신 것입니다. 인간적인 정을 계속 가지고 있으면 엄청난 충격을 받기 때문에 그것을 감당하게 하려고 예수님이 누구신지 분명하게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불순종하거나 반항하는 청소년 시기 행동을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러고 나서 예수는 부모와 함께 내려가 나사렛으로 돌아가서 부모님께 순종하며 지냈습니다. 예수의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에 간직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는 지혜와 키가 점점 더 자라 가며 하나님과 사람들로부
터 사랑을 받았습니다”(51~52절).
예수님께서 이 사건 이후 나사렛에 내려가서 순종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았습니다. 순종하는 예수님, 사랑받는 예수님을 보면 이 행동이 청소년기 반항에서 나온 불순종이나 부모에게 대항하는 태도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매우 의도적입니다. 요셉과 마리아를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때로 자녀의 신앙이 더 성숙하면 부모님을 가르쳐야 할 때가 있습니다.

 

인생의 경험은 더 많지만 영적인 깊이는 자녀가 더 깊을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순종적인 분이셨지만 요셉과 마리아의 인간적인 정이 하나님의 뜻과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에 대한 것보다 앞설 때 그것을 바로 잡아주셨습니다. 신앙공동체 가운데 예수님의 임재를 경험하지 못하는 가장 큰 걸림돌이 뭔지 아십니까? 다툼과 분열은 말할 것도 없고, 인간적인 좋은 관계가 예수님의 임재를 가릴 수 있습니다. 물론 좋은 관계여야 합니다. 그러나 인간적인 정으로 끈끈하게 묶여 있는 공동체는 예수님의 임재가 보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교민 교회에서 목회하면서 일부 성도들이 뭉쳐 있어서 무슨 말을 해도 일심동체로 움직였습니다. 인간적인 정으로 뭉쳐 있어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상관없는 것 같았습니다. 나와 가까운 사람이 주장하면 무엇이든지 하나가 되고, 그것이 하나님의 뜻인지 아닌지는 상관없는 것 같았습니다. 교회가 세상의 비웃음을 받을 때는 반드시 그런 모습이 됩니다. 인간적인 정과 의리, 관계, 우리가 함께 살아온 날들이 더 중요합니다. 예수님의 임재가 있느냐 없느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시작 기도와 마침 기도만 하는 것과 같습니다. 기도의 능력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임재가 보이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요셉과 마리아가 빠질 수 있었던 문제를 예수님이 미리 교정해 주신 것입니다. 제가 성도님들께 이렇게 권면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이 보일 만큼만 가까웁시다!” 너무 멀어도 예수님이 보이지 않고, 너무 가까워도 예수님이 보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도 예수님이 보일 만큼만 가깝지 않으면 그 관계가 예수님의 임재를 가로막는 걸림돌이 될 수 있습니다. 요셉과 마리아에게
는 육신의 부모와 자녀의 관계가 예수님의 임재를 가로막는 걸림돌이 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요셉과 마리아에
게 이렇게 교훈하셨습니다. “지금 당신들이 찾고 있는 예수는 육신적인 자녀인 예수를 찾고 있는 것 아닙니까? 당신들은 지금 어디에서 예수를 찾고 있는 것입니까?”

여러분, 우리는 어디에서 예수님을 찾고 있습니까? 인간관계에서 입니까? 어떤 교회활동에서 입니까? 나의 성취에
서 입니까? 내가 인정받는 것에서 입니까? 예수님의 임재가 없는 공동체에서 예수님의 임재를 찾는 것만큼 모순이 없습
니다. 어디에서 예수를 찾고 있는 것입니까?

 

하나님 안에서 경험하는 예수님의 임재

 

예수님께서 “내가 마땅히 내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 모르셨습니까?”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원문으
로 직역하면 “내 아버지의 안에(in my Father’s) 있어야 하는 줄 모르셨습니까?”입니다. 소유격으로 끝나고, 그 뒤에 ‘
집’ 이 없습니다. 그런데 왜 ‘ 집’ 이라고 했을까요? 소유격 뒤에는 여러 가지가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이 생깁니다. 요셉과
마리아가 예수님이 어디 있는가를 찾았기 때문에 “내가 마땅히 내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 모르셨습니까?”라고
번역하는 것이 합당합니다. 그러나 킹제임스 번역 같은 번역에서는 ‘ 일’ 이라고 번역했습니다. 합당한 것은 집도 되고,
일도 되고, 사람들도 됩니다. 풍성한 의미, 아버지 안에 있는 모든 것들, 예수님은 아버지 안에 계셨고, 아버지의 뜻 가운
데 계셨고, 아버지의 일을 하고 계셨고,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고, 아버지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지는 삶에 지금 살
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안에 있어야 하는 줄 알지 못합니까?”라고 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어디서 예수님의 임재를 경험할 수 있습니까? 아버지의 나라, 아버지의 뜻, 아버지의 집입니다. 아버지
의 집이 어디 있습니까? 예배당입니까? 성령이 임하시는 우리의 심령, 거룩한 성령 안에 있을 때 우리가 아버지의 집이
되는 것입니다. 교회가 성령 안에 있을 때 성도들이 곧 성전이 되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곧 성전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
님께서는 아버지의 집에 계시기에 우리도 아버지의 집을 향할 때 예수님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안에서
우리는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일행 중에 당연히 있을 것이라고 착각하고 추측했던 요셉과 마리아가 빠졌던 신앙
의 모순이 우리에게는 없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내가 무엇을 하든지 당연히 임재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맞추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아버지께 맞출 때 아버지 안에, 그 뜻 안에, 그분이 원하시는 일이 지상명령이 됩니다.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고 주께서 말씀하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는 그 일에, 아버지의 일에, 아버지의 집에 머물러
있을 때 그곳에서 예수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