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의 왕이 구유에 누우심으로 세상 가치를 뒤집으셨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마리아가 동정녀인 자신에게 아들이 잉태되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 말씀을 믿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누가복음 1장 후반부를 보면 마리아의 노래가 나옵니다. 그 노래에 제목을 붙인다면 ‘ 세상을 뒤집으시는 하나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내용은 자신과 같은 비천한 여종에게 임하셔서 세상의 복된 통로가 되게 하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교만한 자는 낮추시고, 낮은 자는 높이시고, 세상을 역전시키고, 가치를 뒤집으시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높고 위대하신 분이시지만 언제나 겸손하시고, 자신을 낮추시며, 섬기시며, 희생하기를 기뻐하십니다. 이 세상의 사전에는 ‘ 위대함’ 이라는 단어와 ‘ 낮아짐’ 이라는 단어가 어울리지 않습니다. 세상은 교만해야 승리하는 것 같고, 다른 사람 위에 군림해야 성공한 것 같고, 자신을 희생하고 섬기는 것은 비천한 일이요, 연약한 자들이 하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러
나 높으신 하나님은 낮아지고 섬기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성품이 예수님의 출생에도 나타납니다.
위대하신 하나님의 타이밍
“그 무렵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칙령을 내려 전 로마 통치 지역은 호적 등록을 하게 됐습니다. 이것은 구레뇨가 시리아의 총독으로 있을 때 실시된 첫 번째 호적 등록이었습니다”(1~2절). 아우구스투스라는 로마 황제는 매우 유명한 역사적 인물입니다. ‘ 아우구스투스’ 라는 이름은 로마 원로원에 의해서 붙여진 ‘ 존엄자’ 라는 뜻입니다. 아우구스투스는 정치를 매우 잘한 지도자입니다. 절대 권력을 누린 사람입니다. 세계사에서는 그가 다스렸던 41년을 ‘ 로마의 지배에 의한 평화’ 라고 부릅니다. 최고의 전성기를 만들었습니다. 로마의 통치하에 경제적, 정치적, 사회질서 면에서 안정된 시대였습니다. 헬라문화를 보급해서 문화통일까지 이루었던 시대입니다. 탁월한 정치가에 의해서 로마제국이 확장되고 견고해지자 그 이후 로마 황제들은 그에게 붙여졌던 ‘ 시저 아우구스투스’ 를 직책이나 직위처럼 부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아우구스투스가 로마 황제일 때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매우 위대하신 하나님의 타이밍입니다. 여러 가지 면에서 살펴볼 수 있지만 네 가지로 정리해 보겠습니다.
첫째, 복음이 빠르고 안전하게 세상에 전해질 수 있는 길이 닦였기 때문입니다. 로마의 통치를 위해 8만5천 킬로미터 정도의 길을 닦았습니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이 이때 등장했습니다. 이 길을 통해 복음 전하는 자들이 복음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둘째, 헬라어가 로마가 지배하는 모든 곳에 보급됨으로써 구약 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한 70인 역이 등장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구약 성경을 헬라어로 읽고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구약과 더불어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셋째, 유대인들의 입장에서는 메시아의 오심을 더욱 갈망하게 되었습니다. 지배받는 유대인의 입장에서는 로마가 견고할수록 절망적이었습니다. 그들의 독립권은 상실되었고, 로마의 지배로부터 해방될 꿈이 점점 희미해졌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로마의 입장에서는 최고의 시대였지만 유대인들의 입장에서는 최악의 시대였습니다. 그래서 메시아를 더 깊이 갈망했습니다.
넷째,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철저한 행정과 법치로 인해서 예수님이 베들레헴에서 출생하시도록 섭리되었습니다. 황제가 로마 전역에서 세금을 철저히 거두기 위해 호적 등록을 하게 했습니다. 유대 민족에게는 50년마다 재산이 원 소유주에게 돌아가는 희년법에 의해서 요셉의 원래 고향인 베들레헴에서 호적을 등록하러 가야만 했습니다. 요셉의 아내 마리아가 만삭이던 그때 아내를 데리고 나사렛에서 베들레헴까지 여행을 해야만 했습니다. 하나님이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행정력과 법치력을 이용하신 것입니다.
하늘의 왕, 베들레헴 구유에 누우시다
아우구스투스 황제 때 예수님이 태어나신 것은 대조되는 모습입니다. 당시 아우구스투스는 최고의 권력자입니다. 그러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하늘의 왕 예수님은 로마 제국의 통치를 받던 베들레헴에서 가장낮은 모습으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이 세상의 기준과 가치와 정반대되는 모습입니다. “그러나 너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비록 네가 유다 족속들 중 아주 작지만 이스라엘을 다스릴 사람이 너로부터 나올 것이다. 그의 근본은 먼 옛날, 아주 오랜 옛날로 거슬러 올
라간다”(미 5:2). 베들레헴에서 예수님이 태어날 것을 예언하셨고, 그것이 이루어졌습니다. ‘ 베들레헴’이란 ‘ 벧’ (집)과 ‘ 레헴’ (빵), 빵의 집이라는 뜻입니다. 베들레헴의 역사는 하늘의 왕께서 이 세상에 오실 때 어떤 가치와 기준으로 택
하셨는지를 보여줍니다. 베들레헴은 사람들이 생각할 때 메시아의 출생지로는 합당하지 않아 보이는 성읍이었습니다. 베들레헴은 작고 지저분한 성읍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예루살렘 같은 중심 도시를 택하지 않고 작고 지저분한 베들레헴을 택하셨습니다. 베들레헴은 낭만적인 마을이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이 가장 꺼리는 마을이었습니다. 당시에는 베다니, 벳바게 등 예루살렘을 돕는 여러위성 도시들이 있었습니다. 베들레헴은 예루살렘에 필요한 제사용 동물을 공급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동물들이 많았기 때문에 냄새가 많이 났습니다. 반면 나사렛은 신도시였습니다. 일자리도 있었습니다. 요셉은 목수였기때문에 나사렛에서 건물과 집들을 지으면서 생계를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베들레헴은 당시 버림받은 성읍과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님은 그곳에서 태어나셨습니다.
베들레헴은 슬픔의 성읍입니다. 창세기 35장을 보면 야곱의 아내 라헬이 벧엘에서 돌아오는 길에 죽습니다. 그래서 베냐민을 ‘ 베노니’(슬픔의 아들)라고 불렀습니다. 마태복음 2장을 보면 베들레헴에서 상상할 수 없는 유아 대학살이 일어납니다. 헤롯이 동방박사들의 유대인의 왕이 태어났다는 소식을 들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두려워서 두 살 아래 아기들을 다 죽였습니다. 이것이 베들레헴의 모습입니다. 이것이 세상의 모습입니다. 베들레헴이 선택을 받은 또 다른 이유는 다윗의 동네이기때문입니다. 메시아가 예루살렘이 아닌 베들레헴에서 태어난다는 것은 다윗의 왕조가 몰락했다는 것입니다. 다윗 왕국의 후손이 멸망했지만, 하나님은 다윗의 후손에서 영원히 통치할 왕이 태어난다는 약속을 지키셨습니다. 하나님의 섭리에 의하면 베들레헴에서 예수님이 태어난다는 약속을 이루시기 위하여 요셉과 마리아가 그곳에 간 것
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묵을 방이 없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요셉과 마리아는 동물사육장에 머물러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빈방을 준비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아들이 태어날 방을 준비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가장 낮은 자리에서 가장 낮은 모습으로 이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은 동물의 먹이통에 누우셨습니다. 하늘의 왕이 구유에 누우셨다는 것은 누구나 가까이 할 수 있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있는 모습 그대로 나아갈 수 있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나의 아픔을 이해하지 못하지만, 예수님은 나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보고 계시고, 알고 계실 뿐만아니라 공감하시는 분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베들레헴의 구유에 오심으로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부유한 자로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예수님의 삶은 자신의 것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다른 사람의 구유를 빌려
서 누우셨습니다. 다른 사람의 배에서 설교하시고 사역하였습니다. 다른 사람의 다락방에서 만찬을 하셨습니다. 다른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셨습니다. 다른 사람의 무덤에 묻히셨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 것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하늘의 왕으로서 모든 것의 주인이셨습니다. 그러나 모든 자를 부유한 자로 만드시기 위해 구유를 택하여
누우신 것입니다. “여러분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잘 알고 있듯이 그리스도께서는 부유하신 분으로서 여러분을 위해 가난하게 되셨습니다. 그분의 가난하심을 통해 여러분을 부유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고후 8:9). 예수님이 가장 가난한 자리에 오심으로 예수님보다 가난한 이가 없게 하셨습니다. 이 세상에 가장 가난한 사람일지라도 예수님 앞
에 서면 부유한 자가 되기에 예수님은 모든 이의 위로자가 되시며, 모든 이의 아픔을 이해하시며, 가난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게 하셨습니다. 모든 만물의 주인이자 하늘의 왕이신 그분이 이 땅의 가장 가난한 자의 자리에 오심으로 세상을 뒤집으신 것입니다. 부유한 자가 위대한 자고, 가난한 자가 비천한 자라는 이 세상의 등식을 깨뜨리고, 오히려 가난 속
에서도 참된 부유함을 경험할 수 있고, 스스로 높은 지위에 올랐지만 낮아지지 않으면 결코 그 지위는 위대할 수 없다는 것을 세상에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가장 먼저 목자들에게 소식을 전하다
뒤집으시는 하나님의 역사의 클라이맥스는 목자들에게 가장 먼저 소식을 전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로마의 지배를 받는 가장 버림받은 성읍 베들레헴에 계셨고, 베들레헴에서도 가장 낮은 자리인 구유에 누우셨고, 당시 사람들에게 가장 버림받은 목자들에게 경배를 받으셨습니다. 이 또한 세상의 가치를 뒤집으시는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한편 목자들은 바로 그 지역 들판에서 살며 밤에 양 떼를 지키고 있었습니다”(8절). 당시 목자들은 버림받은 계층의 사람들이 었습니다. 베들레헴 성읍 밖 들판에서 살며 양들과 함께 뒹굴고 잠을 자며 살아야 했습니다. 당시 베들레헴 성읍에는 사람들이 많이
살지도 않았고, 또 잘 살지도 못했던 사회에서 성읍 밖에서 양들과 뒹굴며 살아야 했던 사람들입니다.양은 냄새가 많이 납니다. 털이 촘촘해서 목욕을 할 수가 없습니다. 털을 깎는 것이 곧 목욕입니다. 그런 양들과 함께 뒹굴며 살아가니 그들의 몸에는 늘 냄새가 나고, 사람들은 그 악취를 싫어했습니다. 그래서 성읍 밖 들판에서 잠을 자던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다는 소식을 먼저 알려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경배를 가장 먼저 받으셨습니다.
여러분, 어떤 소식이든지 누구에게 먼저 전해지는가가 중요합니다. 중요한 사건일수록 지도자부터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하고, 긴급한 뉴스가 가장 중요하지 않고, 가장 긴급해 보이지 않는 사람에게 전해졌습니다. 예수님의 출생을 산헤드린 공회원, 바리새인들, 대제사장 같은 사람들에게 계시가 주어져야 하지 않았을까요?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의 가치체계를 뒤집으시며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보여주셨습니다. 중심부에서 주변부로 전해진 것이 아니라 주변부에서 중심부로 전해졌습니다. 예수님의 출생 때 경배했던 두 부류의 사람이 사복음서에 등장합니다. 베들레헴의 목자들과 동방의 박사들입니다. 동방의 박사들은 페르시아에서 별을 보고 징조를 연구하는 지위가 높은 고위 관리들입니다. 목자들은 베들레헴의 들판에서 예수님의 탄생 소식을 듣고 경배하러 왔지만, 동방의 박사들은 예수님이 집에 계실 때 경배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목자들의 경배를 먼저 받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첫째, 어떤 사람도 중요하지 않은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세상은 중요한 사람과 중요하지 않은 사람을 구별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의 역사에서는 중요하지 않은 사람이 없습니다. 또한 우리에게 목자들처럼 빨리 달려가서 주님 앞에 무릎을 꿇고 경배해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천사들이 떠나 하늘로 올라가자 목자들이 서로 말했습니다. ‘ 베들레헴으로 가서 주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신 이 일이
정말 일어났는지 보자’ 그래서 그들은 서둘러 가서 마리아와 요셉과 아기를 찾아냈습니다. 과연 아기는 구유에 누워
있었습니다”(15~16절). 목자들은 서둘러 가서 천사들이 전해준 소식이 과연 정말 일어났는지 보려고 했습니다. 이 목자들의 마음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면 “과연 그러한가? 정말 그런 일이 일어났는가?” 라는 거룩한 질문을 가지고 확인하고, 사실이라면 목자들처럼 경배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드려질 영광, 이 땅에 있어야 할 평화
“천사가 말했습니다. ‘ 두려워하지 마라. 보아라. 내가 모든 백성에게 큰 기쁨이 될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알려 준다. 오
늘 구주이신 주 그리스도가 다윗의 동네에서 태어나셨다. 너희가 천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를 볼 것인데 그것
이 너희에게 표적이 될 것이다.’ 갑자기 그 천사와 함께 하늘의 군대가 큰 무리를 이루며 나타나 하나님을 찬양하며
말했습니다. ‘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의 은총을 입는 사람들에게 평화로다’ ”(10~14절).
하나님께 드려질 영광과 이 땅에 있어야 할 평화를 위해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이 두 가지가 죄로 말미암아 파괴되었기 때문입니다. 마땅히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께 드려야 할 영광을 인간의 죄가 파괴했고, 가렸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고, 이 땅에 마땅히 있어야 할 하나님의 평화가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깨졌기 때문에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오심으로 이 두 가지가 하나가 되었습니다. 마땅히 영광을 받으셔야 할 분이 영광을 받지 않으셨
기 때문에 평화가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인간에게는 존엄이라는 말을 붙이면 안 됩니다. 하나님 안에서 존귀한 자입
니다. 스스로 아우구스투스가 되려는 것은 헛된 욕망입니다. 아우구스투스 황제는 세상에 진정한 평화를 이룰 수 없
는 왕이었습니다. 지배를 통한, 군림을 통한, 무력을 통한 평화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섬김과 희생을 통해
세상의 진정한 평화를 이루시는 하늘의 왕입니다. 가장 존귀하신 분이 가장 겸손한 모습, 가장 능력이 있으신 분이 가
장 비천한 모습으로 세상에 오심으로 죄로 말미암아 왜곡된 세상의 가치를 뒤집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 안에
살아계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이 누우신 구유에서 눈을 뗄 때 세상의 가치에 휩쓸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임
재는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가장 높으신 왕이 가장 섬기는 종이 되는 나라입니다. 세상은 이 나라가 보이
지 않습니다. 세상의 나라는 힘 있는 자가 군림하는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섬기는 왕이셨습니다. 그
래서 구유에 누우신 것입니다. 하늘의 왕이 구유에 누우심으로 세상의 가치를 뒤집어 놓으셨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드려야할 영광을 하나님께 올려드릴 때 이 세상에 평화가 임합니
다. 마음에 평화가 없는 것은 하나님께 드려야 할 영광을 하나님께 드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 나라와 민족이 지극
히 높으신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릴 때 한반도에 참된 평화가 임할 줄로 믿습니다. 개인의 삶에도 참된 평화가 임할
줄로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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