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이재훈목사

어둠의 세력에 대해 승리하시다 (마태복음 4:1~11)

새벽지기1 2020. 7. 23. 06:48

“하나님 말씀 생명처럼 여기고, 하나님 시험하지 않고 신뢰하며,
하나님만을 경배할 때 어둠의 세력을 이기고 승리할 수 있습니다.”

 

세상에는 분명 어둠의 세력이 존재하고 활동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겪고 있는 이 사회의 아픔과 상처와 끔찍한 일들의 이면에는 분명 어둠의 세력이 존재합니다. 우리가 깨어서 어둠의 세력의 실체를 알고, 대적하고, 승리하지 않으면, 우리의 삶도 어둠의 세력의 먹이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지식, 재물, 경험으로는 어둠의 세력을 이길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어둠의 세력에 대하여 완전히 승리하셨고, 우리는 그분을 믿고 의지함으로써 승리할 수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기 위해서 시험을 담당하셨습니다. 죄인 된 우리를 구속하기 위하여 죄인과 같이 세례를 받으셨고, 죄인 된 우리가 어둠의 세력에 대하여 승리하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가 일생동안
겪는 모든 시험을 겪으셨습니다. 그 시험에서 승리하심으로 우리에게 승리를 선물해주셨습니다. 첫째 아담은 그 시험에서 패배했습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가 어둠의 세력의 종이 되었지만, 둘째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그 시험에서 승리하심으로 그를 믿는 모든 자에게 승리를 주시는 분이 되셨습니다. 1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성령에 이끌려 광야에서 금식하며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공생애를 시작하신 예수님을 공격하기 위하여 어둠의 세력들이 움직인
다는 것을 성령님께서 아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금식하며 더욱 성령 충만함을 입어 마귀의 공격을 이길 수 있도록 성령님께서 인도하셨다는 뜻입니다. ‘ 시험’ 이라는 단어는 유혹이라는 의미도 포함이 되어 있지만, 더 넓게는 영적 공격입니다. 예수님께서 받으신 시험은 영적 공격이며, 우리 모두가 받을 수 있는 영적 전쟁의 아주 중요한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 시험받으신 장면은 우리 모두가 살아가면서 겪는 시험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승리가 우리의 승리가 되기 위해서는 예수님이 어떻게 이 시험을 대하셨는지, 어떤 원리로, 무엇을 붙잡고 승리하셨는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어둠의 세력들은
언제나 본능을 공격한다!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다가와 말했습니다. ‘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이 돌들에게 빵이 되라고 해 보시오’”(3절).
“돌을 빵으로 만들라”는 시험은 단순히 기적을 일으키라는 뜻이 아닙니다. 기적을 일으켜 배고픔을 해결하라는 단순한 의미가 아닙니다. 여기서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면”이라는 말은 가정법 같지만, 마귀도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인데 이렇게 굶주림의 고통을 받을 필요가 없지 않은가?”라는 말입
니다. 사람들은 고통을 피할 수 있는 능력이 없지만, 당신은 고통을 피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존재인데 구태여 고통 받을 필요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겉으로 볼 때는 예수님 입장에서 한편이 되는 것 같지만, 궁극적으로 이것은 십자가를 질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고난을 받을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 공격은 예수님께서 40일을 금식하신 후에 극도로 배고픔에 처해 있을 때 주어졌습니다. 어둠의 세력들은 언제나 우리 안에 있는 본능과 결핍된 본능을 공격합니다. C.S. 루
이스가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우리가 저지를 수 있는 가장 위험한 짓은 자신의 본성에 있는 본능 중 하나를 골라 무
슨 대가를 치르더라도 꼭 따라야 할 사항으로 절대시하는 것입니다. 절대적 지침이 된 이후에도 우리를 마귀로 만들지 않을 본능은 없습니다.” 어떤 본능을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만족시키려 한다면 우리는 마귀처럼 변하게 될것입니다.

 

자연법칙과 자연법(도덕률)


하나님께서 이 세상과 인간을 창조하실 때 두 가지 중요한 법칙을 만드셨습니다. 첫째, 자연법칙입니다. 이것은 과학으로 발견될 수 있는 하나님의 창조질서입니다. 모든 자연과 우주에 담겨 있는 법칙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창조하실 때 그 법칙 가운데 이 세상이 존속되도록 만드셨습니다. 만일 이것을 어길 경우 엄청난 대가를 치르게 됩니다. 높
은 곳에서 중력의 법칙을 무시하고 뛰어내리면 죽습니다. 엄청난 대가를 치르게 되는 겁니다. 자연법칙은 우리가 지켜야만 하는 것이고, 또 경험을 통해서 지키게 됩니다. 둘째, 인간 안에 있는 자연법입니다. ‘ 도덕률’ 이라고도 부를 수 있고, ‘ 인간본성의 법칙’ 이라고도 부를 수 있습니다. 옳고 그름을 따지는 능력입니다. 자연법칙은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자연법칙은 무서워하고 존중합니다. 그런데 인간 안에 있는 자연법은 인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자꾸 어기려고 합니다. 그것이 타락한 인간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문제가 됩니다. 분명한 것은 인간의 자연법은 가르쳐 주지 않아도 압니다. 교육을 하나도 받지 않은 사람일지라도 도덕률이 있습니다. 우리가 함께 살기 위해서는 지켜야 될 규칙이 있습니다. 그 규칙이 어떻게 생겨났을까요? 교육도 아니고, 본능도 아닙니다. 인간에게 주어진 자연법칙입
니다.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는 옳고 그름을 규정하는 분입니다. 그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기에 인간은 스스로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서로 왜 싸웁니까? 내가 옳다고 주장하는 것을 상대방도 옳다고 해야 하는데 다른 주장을 하니까 서로 싸우는 것입니다. 내가 옳고 당신이 틀렸다는 것입니다. 다툼의 원인은 모든 인간이 옳고 그름에 대한 분별하는 능력이 인간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자연 속에 있는 법칙만이 아니라 인간 안에도 자연법이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질서대로 인간이 살도록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 안에 있는 자연법 중에서 어떤 것은 과학으로도 증명될 수 있습니다.


그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게 인간의 성입니다. 성은 남자와 여자 외에는 없습니다. 과학으로도 증명되는 것입니다. 남자와 여자 외에 다른 성염색체나 유전자가 발견된 적이 없습니다. 자연과학 법칙으로 증명된 것입니다. 중력의 법칙을 어기고, 열역학법칙을 어기고, 자연 속에서 발견된 과학의 법칙을 어기면 어떻게 되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남자와 여자 외에 다른 성이 없는 과학으로도 증명된 자연법칙을 어기게 되면 엄청난 대가를 치르는 됩니다. 그것은 자연법칙일 뿐만 아니라 인간의 안에 있는 자연법, 도덕률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더 큰 위기가 오는 것입니다. 2016년 미국 뉴욕주에서 31개 성을 인정했습니다. 남자와 여자 외에 성을 자기가 태어날 때는 X라고 해놓고, 그 다음에 자기가 선택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선택한 성을 다른 사람이 인정하지 않으면 25만 달러의 벌금을 냅니다. 시설 사용이나 채용 등 모든 면에서 자기가 주장하는 성을 모든 사람들이 받아들여야 합니다. 남자와 여자 외에 존재하지 않는 성이 제3의 성이 아니라 31개, 혹은 수십개의 성을 인정하게 될 때 자연법칙을 어길 뿐만 아니라 인간 안에 있는 도덕률을 무너뜨리는 겁니다.


C.S. 루이스는 <순전한 기독교>라는 책에서 “이런 도덕률은 마치 수학의 세계와 같다”고 했습니다. 수학공식에 반기를 드는 학생 봤습니까? 인정할 수 없다고 하려면 그것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또 다른 법칙을 스스로 만들어야 합니다. 수학의 세계는 자연법칙 안에 있는 질서를 가져온 수치화된 법칙입니다. 1더하기 1은 2라는 답 외에 다른 답은 틀렸습
니다. 1 더하기 1은 2밖에 없는 것처럼, 인간의 성은 남자와 여자 외에는 없습니다. 다른 것이 아니라 틀린 것입니다. “1 더하기 1을 3이라고 쓴 학생에게 너희들이 그렇게 주장하니까 받아들여 줄게"라고 말하는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1 더하기 1은 2가 아니라 3으로 계산해서 비행기를 만들면 추락하는 것처럼, 우리의 삶이 틀린 답을 다른 답으로 인정해주면 그 인생은 추락합니다. 그로 인해 생겨난 엄청난 붕괴와 낭비는 상상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 사회적 성’ 이라는 소위 젠더평등을 인정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틀린 것이기 때문입니다. 틀린 것을 다른 것으로 만드는 것이 인간에게 주어지는 유혹입니다. “돌을 빵으로 만들라”는 것은 유혹이요, 시험이요, 공격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절대로 자신의 본능이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기적을 일으키신 적이 없습니다. 모두 타인을 위한 섬김이었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무너뜨린 기적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동정녀에게 잉태하셔서 기적으로 태어나셨지만 성인으로 태어나지 않으셨습니다. 아기가 잉태되어 모태에서 자라고, 성장의 모든 과정을 자연의 창조질서 그대로 지키셨습니다. 창조질서가 무너진 게 아니라 개입한 것뿐입니다. 홍해가 갈라지고, 요단강이 멈춰서고, 해가 멈춰 서고, 인간이 치유되는 기적도 원래 상태로 회복시켜주는 것입니다. 모든 기적은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지키는 것입니다. 유일하게 기존의 창조 질서가 아닌 완전히 새로운 창조 질서의 모습을 보여준 기적이 부활입니다. 그것은 새로운 자연이요, 새로운 창조의 영역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돌을 떡으로 만들라”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무너뜨려서 본능을 만족시키라는 뜻입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지켜야 될 창조질서요, 그것이 곧 우리의
생명입니다. 인간에게 주어진 자연의 법칙, 만물에 있는 자연의 법칙을 어기면 둘 다 죽습니다. 인간이 왜 죄 가운데 죽게 되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벗어났기 때문입니다. 인간 안에 주신 하나님의 법칙, 도덕률, 우리가 지켜
야 될 말씀에 불순종했기 때문에 죽음이 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이 우리의 생명입니다. 인간의 본능을 뛰어 넘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이 우리의 생명입니다.

 

하나님 뜻 아는 만큼 행하고,
모르면 머물러 기다리는‘참된 믿음’


“마귀가 말했습니다. ‘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뛰어내려 보시오. 성경에 기록됐소. 하나님이 너를 위해 천사들에게 명령하실 것이다. 그러면 천사들이 손으로 너를 붙잡아 네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도록 할 것이다’”(6절). 첫 번째 공격 장소는 광야였는데 두 번째는 예루살렘 성전 꼭대기입니다. 광야와 성전 꼭대기는 대조적입니다. 광야는 하나님께 버림을 받았다는 느낌을 줍니다. 그러나 예루살렘 성전은 하나님께 가까이 있다는 느낌을 줍니다. 왜 장소를 옮겼을까요? 예수님의 믿음을 시험해보는 것입니다. 필요 없는 모험입니다. 안 해도 되는 모험입니다. 마귀는 시편 91편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자를 천사를 통해서 그 발이 해치지 않도록 도와주신다”는 말씀을 인용하면서 부추기고 있습니다. 참된 믿음은 하나님께서 하라고 하시는 것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 하지 않은 것은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믿음을 잘 해석해야 합니다.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믿음으로 포장해서도 안 되고, 또 하나님께서 원하지 않는 것을 믿음으로 하나님을 시험해서도 안 됩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길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공급하심이 나타납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심이 나타납니다. 예수님은 한 순간도 하나님의 뜻을 벗어난 적이 없습니다. “예수께서 마귀에게 대답하셨습니다. ‘ 성경에 또 기록됐다. 주 네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7절). 믿음이란 우리가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믿음이 하나님에 의해 시험되어야 합니다. 진정한 믿음이란 날마다 하나님 앞에서 나의 믿음이 시험되어야 합니다. 진정한 믿음은 하나님의 뜻을 알면 아는 만큼 행하는 것이고, 그 뜻을 모르는 경우에는 머물러 기다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순간도 하나님의 뜻 밖에 있지 않도록 그 길을 걸어가는 것이 참된 믿음입니다.

 

“주 네 하나님께 경배하고
오직 그분만을 섬기라”


세 번째 시험 장소는 높은 산입니다. 여러분, 예수님께는 장소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약해서 끌려 다닌 것이 아니라 강하시기 때문에 어디든 상관없는 것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당할 수 있는 다양한 시험을 미리 보여주시기 위해서 다양한 곳에서 시험을 받으신 것입니다. “그러자 마귀는 다시 아주 높은 산꼭대기로 예수를 데리고 가 세상 모든 나라와 그 영광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리고 마귀가 말했습니다. ‘ 당신이 만약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당신에게 주겠소’”(8~9절). 마귀의 소원은 단 한순간이라고 하나님처럼 되어 보는 것입니다. 경배를 받아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짓말을 합니다. 마귀는 분명 거짓과 속임수를 했습니다. 마귀는 약속한 것을 줄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세상 모든 나라와 영광은 마귀의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줄 수 없습니다. 완벽한 거짓말입니다. 마귀는 이 세상의 지배자가 아닙니다. 마귀가 지배하고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영역이 있습니다. 불순종하는 사람들, 하나님으로부터 떠난 불순종하는 사람들은 마귀가 이용할 수 있습니다. 지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영광과 존귀와 경배를 받으실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이시라는 믿음으로 하나님만 사랑하고, 하나님만 섬기며, 경배하는 사람은 마귀가 절대로 공격할 수 없습니다. 무너뜨릴 수 없습니다. 올해 온누리교회의 ‘ 온 맘 다해 하나님만 사랑하라’ 는 표어는 영적 전쟁의 승리의 비결입니다. 온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오직 그분만을 섬기는 영혼은 어둠의 세력이 절대로 무너뜨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마귀에게 말씀하셨습니다. ‘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성경에 기록됐다. 주 네 하나님께 경배하고 오직 그분만을 섬기라’”(10절).


하나님을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기는 영혼은 결코 어둠의 세력이 무너뜨릴 수 없습니다. 하나님만을 예배하지 않고
경배하지 않으면 우리는 다른 무엇을 경배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권력이든지, 인간의 본능이든지, 자신의 욕심이
든지, 인간은 반드시 무엇인가를 경배하게 되어 있습니다. 경배는 가치 있는 것을 높인다는 뜻입니다. 가치 있게 여기
는 것이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하나님 한 분만을 경배하는 것이 아닐 때 반드시 사람은 자신이 경배하는 그것
으로 인하여 무너지게 되어 있습니다. 어둠의 세력은 반드시 그것을 이용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을 바라보며 자신의 나라를 꿈꾸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꿈꾸셨습니다. “주 네 하나님께 경배하고 오직 그분만을 섬기라”는 말씀이 어둠의 세력을 이기는 유일한 비결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생명처럼 여길 때 우리는 악한 세력을 이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시험하지 않고 신뢰할 때 우리는 어둠의 세력을 이길 수 있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을 경배할 때 이 승리가 우리의 것이 될 줄로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