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사람들이 외면하고, 손가락질하고, 비난해도
예수님만큼은 진실을 아시고 그 아픔을 아십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마음을 보시고 구원을 선포하십니다.”
"인자는 잃어버린 사람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10절).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과 예수님의 모든 사역을 한마디로 요약하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이전 사람은 잃어버려진 상태입니다. 사람들의 문제는 자신이 괜찮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스스로 계획하고, 결정하고, 문명을 이룩하고, 기술을 발전시키고, 남이 이루지 못한 성취를 이룰 때 사람들은 자신에게 문제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잃어버려진 상태라는 성경의 진단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끔찍한 죄악을 범해야만 죄인이 아니라 세상에서 가장 모범적이고 도덕적인 의로운 사람처럼 보이는 심령도 죄인이라고 말씀합니다. 그 죄의 본질은 본래 있어야 될 상태에서 벗어나 있는 것입니다. 죄라는 단어인 ‘ 하마르티아’ 는 빗나가 있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본래 있어야 할 상태에서 빗나가 있는 것, 본래 속해 있어야 할 상태에 속하지 않은 상태를 잃어버린 상태라고 합니다.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왜곡된 존재라는 것입니다. 본래 하나님께 속해야 할 인간이 하나님께 속하지 않은 인생이 잃어버려진 상태입니다. 인간은 누구인가,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인간은 누구에게 속한 존재인가”라는 질문을 던져야만 해결될 수 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존재하게 됐으며, 우리는 누군가와의 관계 속에서만 살아갈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누구에게 속한 존재인가에 대한 질문에 대답할 수 없다면 인간은 잃어버려진 상태입니다. 인간에게 일어난 모든 문제의 근원은 잃어버려진 상태에 있기 때문에 생깁니다.
누가복음에서는 삭개오를 통해서 잃어버려진 사람을 보여줍니다. 잃어버려졌다가 되찾은 바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가장 잘 보여주는 사람이 바로 삭개오입니다. 삭개오는 사람들에게 비난받았던 세리였고, 세리장이었습니다. 당시 세리가 유대인에게 비난을 받았던 이유는 로마 정부를 대신하여 유대인들로부터 세금을 거두어 바쳤기 때문입니다. 민족
의 매국노로 취급받았습니다. 여리고는 당시 무역의 관문이었습니다. 모든 무역 상인으로 부터도 막대한 세금을 거두었습니다. 삭개오는 허가받은 도둑 역할을 했습니다. 신약 성경에 유대인들의 세리에 대한 평가를 알려주는 단어가 나옵니다. ‘ 세리와 죄인’ 입니다. 그냥 ‘ 죄인들’ 이라고 하지 않고 ‘ 세리와 죄인’이라고 표현한 것은 많은 죄인들이 있지만,
그 죄인들의 부류를 대표하는 사람들이 세리이고, 죄인 중의 죄인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삭개오도 세리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삭개오는 세리로서도 성공한 세리장 위치에 올랐습니다. 삭개오라는 이름의 뜻은 순결(pure)입니다. 그가 태어났을 때 부모가 순결한 인생을 살라고 이름을 붙여줬는데 안타깝게도 이름과 정반대의 삶을 살았습니다. 삭
개오의 주변에는 그의 위치와 돈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따르고 있었지만, 남모르는 마음의 아픔, 고통, 외로움, 공허함 속에 시달렸을 것이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양심과 정반대의 길을 살아가는 인생은 언젠가 그 양심이 폭발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돈만 많이 벌면 사람들이 부러워할 것이고,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살아갈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많은 친구들 또
한 생길 것이라고 착각했을 겁니다. 그러나 그의 인생은 원하는 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동족으로부터 따돌림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시간이 흘러갈수록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친구가 없다는 고민 속에 있었을 겁니다. 그러던 중에 삭개오가 예수님이 여리고에 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삭개오는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알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뽕나무 위로 올라가는 행동을 했습니다.
삭개오가 나무에 올라간 이유
“삭개오는 예수께서 어떤 분인지 보려고 했으나 많은 사람들 때문에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키가 작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예수를 잘 보기 위해 먼저 달려가 뽕나무 위로 올라갔습니다. 예수께서 그 길로 지나가실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3~4절). 예수님을 보고 싶어서 나무 위에 올라간 삭개오는 중년 남성입니다. 더군다나 얼굴이 잘 알려진 인물입니다. 여리고 사람들이 보면 누구나 알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사람들의 비난을 받는 사람의 얼굴은 많이 알려지기 때
문입니다. 바로 그 사람이 예수님이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나무 위에 올라갔습니다. 본문에 서는 “키가 작아서 예수님을 볼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문자적으로 볼 때 분명 그 이유가 있습니다. 그러나 단지 키가 작아서 나무 위에 올라갔다고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그 이후 일어난 엄청난 인생의 변화를 보면 키가 작아서 나무에 올라갔다고만 볼 수 없습니다. 삭개오는 지금 어떤 심각한 상황에 있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내면의 깊은 고민 속에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보고 싶소”라고 사람들을 헤치면서 갈 자신은 없었습니다. 자신을 최대한 숨기면서 예수님을 보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멀리서 보려고 했는데 사람들이 많아서 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나무 위에 올라간 것은 자신을 감추려고 했던 것입니다. 한글성경에는 ‘ 뽕나무’ 라고 돼 있는데 정확하게 말하면 ‘ 돌무화과나무’ 입니다. 무화과나무 앞에 ‘ 돌’ 이라는 단어를 붙여서 번역한 것은 이 나무의 열매가 가치가 없기 때문입니다. 돌무화과나무, 돌감람나무 등 ‘ 돌’ 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은 상품 가치가 없는 열매를 가진 나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돌무화과나무를 가치 있는 무화과나무로 바꾸기 위해서는 농부들이 나무에 올라가서 열매 하나하나에 바늘을 찔러 구멍을 내고, 거기에 올리브기름을 발라준다고 합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면 아주 가치 있지는 않지만 그래도 사람들이 먹을 수 있고, 팔 수 있는 무화과나무로 바뀐다고 합니다. 여리고에는 늘 나무에 올라가서 돌무화과나무에 기름을 바르는 농부들이 있었습니다. 삭개오는 농부로 자신을 위장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노출되지 않으면 서, 동시에 자신이 원하는 예수님을 보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 행동조차 우스꽝스럽습니다. 평범한 행동이 아닙니다. 중년의 남성, 잘 알려진 공직자가 이와 같은 행동을 하고 있는 것은 그가 위기 상황에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위기 상황에 처하게 되면 다른 사람의 시선을 느끼지 않습니다. 위급한 상황에는 아무도 예절을 지키지 못합니다. 심각한 내면의 문제, 인생의 깊은 위기 속에 있으면 평상시에 관심 가졌던 모든 것이 의미 없게 됩니다. 다른 사람들의 시선조차 의미 없게 됩니다.
여리고에 있는 사람들이 삭개오가 누구인지 몰랐을 리 없습니다. 나무 위에 올라 있는 삭개오의 모습 그 자체가 자신의 인생에 대하여 깊은 회의감을 가지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무엇인가 다른 사람이 알지 못하는 심각한 마음의 고민과 갈등과 위기가 있다는 증거입니다. 양심의 가책이 폭발 직전에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밤이 되면 자신의 부정한 삶으로 곤경에 빠진 사람들의 환상에 시달렸을지도 모릅니다. 많은 돈을 축적했지만 그가 원했던 것은 사람들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의 주변에는 친구가 없었습니다. 마음을 나눌 친구가 없었습니다. 삭개오에게 일어난 내면의 변화는 성령님께서 그의 영혼을 움직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들었을 때 ‘ 그분이 누구인가? 그분을 만나보고 싶다’ 는 궁금증을 가지게 되는 것은 성령님의 역사입니다. 삭개오는 예수님을 찾는 자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보고 싶어 신경을 집중시키고 있었습니다.
삭개오를 찾아오신 예수님
그리고 나타난 놀라운 변화
“예수께서 그곳에 이르셨을 때 위를 올려다 보며 삭개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 삭개오야, 어서 내려오너라! 내가 오늘 네 집에서 묵어야겠다.’ 삭개오는 얼른 내려와 기뻐하면서 예수를 맞이했습니다”(5~6절). 삭개오가 나무에서 떨어질 만한 충격적인 일이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이 그를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삭개오의 이름을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 “너희 집에 묵어야겠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의 습관, 문화적 코드로 해석하면 매우 충격적인 일입니다. 1차적으로는 유대인들은 세리와 상종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그 장벽을 뛰어넘는 것도 큰 충격이지만, 유대인들은 깊이 오래 사귀어도 그의 집에 잘 머물지 않고, 초대도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삭개오의 깊은 내면의 문제를 관통해 보신 것입니다. 삭개오의 가장 큰 문제는 돈은 있었지만 친구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자기가 원하는 것을 성취했지만 허무했습니다. 그가 잃어버린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의 이름을 불러 주셨고 “어서 내려오너라 내가 너희 집에 좀 머물러야겠다”고 친구의 초청을 했을 때 삭개오는 기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여러분, 여기에 복음의 기적이 있습니다. 삭개오가 예수님을 보려고 나무 위에 올라가 있었지만 실상은 예수님께서 그를 찾아오고 계셨습니다. 삭개오가 주도적으로 아무도 모르게 예수님을 보려고 한 것 같지만, 예수님은 삭개오가 찾기도 전에 그를 만나려고 걸어오고 계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만날 때도 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이라는 분에 대해 누군
가로부터 소식을 듣고 혹은 자신이 추구함으로 예수님을 알게 된 것 같지만, 예수님께서 먼저 우리를 찾아오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삭개오를 찾아오실 때 놀라운 점이 있습니다. 당시 모든 유대인들이 충격을 받으며 수군거리며 예수님을 비판한 이유입니다. 삭개오에게 회개를 먼저 명령하지 않으셨습니다. 삭개오를 책망하지 않으셨고 도전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삭개오의 이름을 부르고 “어서 내려오너라”고 하신 것까지는 좋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다음에 어떤 말을 기대했을까요? “삭개오야. 너의 모든 부정한 삶을 회개하고, 네가 축적한 모든 재물을 돌려주고 나를 따르라”라고 말씀하기를 기대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으면 여리고 거리에 모인 사람들에게서 박수가 터져 나왔을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유대인들이 당황하고 수군거리고 예수님을 비난하는 이유는 ‘ 삭개오가 어떤 죄인인 줄 안다면 저런 말씀을 안 하셨을 텐데’ 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삭개오는 도저히 구원받을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왜 삭개오를 책망하지 않으셨을까요? 누가복음 18장에 예수님을 찾아온 젊은 부자 관원 나옵니다. 그 젊은 부자 관원은 아주 진지하고, 율법도 잘 지키고, 경건한 가정이었습니다. 젊은 부자 관원은 세리처럼 불의한 방법으로 재물을 축적한 것도 아니기에 도덕적으로 비난을 받을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젊은 부자 관원에게 예수님은 삭개오에게 하셔야 할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의 가진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고 나를 따르라.”
그랬더니 젊은 부자 청년 관원이 근심하여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삭개오는 있는 그대로 맞아주셨습니다.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젊은 부자 관원은 예수님을 따르는 일을 포기하고 돌아갔지만, 삭개오는 예수님께서 요구
하지 않은, 젊은 부자 관원에게 하신 말씀을 하지도 않았는데 그대로 행했습니다. 삭개오가 “제 소유의 반을 가난한 사
람에게 나누어 주고, 누군가를 속여 얻은 것이 있다면 4배나갚아주겠다”고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삭개오를 증오와 미움의 대상으로 보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 마음에 가난함을 보셨습니다. 삭개오
는 지금 마음이 가난해져 있었습니다. 나무에 올라가서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궁금해 할 만큼 삭개오는 마음이 가난해
져 있었습니다. 돈으로 살 수 없는 인생의 가치가 있다는 것을 뼈저리게 깨닫고 있었습니다. 재물을 축적하면서 수많은
동족들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는 것을 양심의 가책을 통해 깨닫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체면도 잊어버리고 나무
에 올라가 있었습니다. 삭개오는 자신이 잃어버려진 영혼이라는 것을 깨닫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삭개오를
긍휼히 여기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가장 필요한 마음을 나누는 친구가 되어 주셨습니다.
스펄전 목사님은 삭개오에 대한 예수님의 태도를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삭개오를 보셨을 때 느끼는 감정은 마치 병든 아이를 돌보는 어머니의 모성애였고, 배고파 죽게 된 지
경에 이른 사람을 보고 그에게 먹을 것을 주어야겠다고 느끼는 감정이었고, 물에 빠진 사람을 보고 그를 구원하기 위
해 물 속에 뛰어드는 사람들의 심정이었다.”
물에 빠져서 허우적거리는 사람을 지금까지 도덕적으로 어떻게 살았는지 구별해서 건져주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가 누구든 물속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사람은 구원하게 돼 있습니다. “속히 내려오라”는 말씀은 나무 위에서 내려오라
는 음성이었지만, 삭개오에게는 그가 쌓아 올린 죄악, 교만, 우상 속에서 내려오라는 말씀으로 들렸을 것입니다. 구원의
부르심이요, 사랑의 부르심이요, 거룩으로 향하는 부르심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짧은 순간 믿을 수 없는 변화가 일어난
것입니다. 삭개오는 그냥 예수님이 보고 싶었을 뿐입니다. 그리고 이런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구원을 선포하시고,
친구가 되어주신 예수님
“예수께서 삭개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 오늘 구원이 이집에 이르렀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인자는 잃
어버린 사람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9~10절). 예수님께서 구원을 선포하셨습니다. 세 가지 증거 때문입니다. 첫째, 삭개오가 자신이 죄인임을 철저히 인정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지적하지 않았지만 스스로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했습니다. 둘째, 우상으로 섬겼던 돈으로부터 자유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삭개오가 말한 대로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누구에게 속인 것은 4배로 갚았으면 그는 가난한 사람이 되었을 것입니다. 더 나아가 삭개오는 자신의 부정한 삶으로 인하여 고통 받았던 사람들과의 관계를 회복하려 하고 있습니다. 구약에서 다른 사람에게 손해를 끼쳤을 때 배상하는 제사가 속건제입니다. 레위기에 나타난 다섯 가지 제사는 번제, 소제, 화목제, 속죄제, 속건제입니다. 나머지 제사는 동물이나 곡식을 가지고 하는 제사인데, 속건제는 가치로 배상하는 것이기 때문에 돈으로 변상합니다. 변상의 원칙은 손실 원액 원금에 20%를 추가로 주는 것입니다. 삭개오가 속건제를 드린다고 할 때 원금의 20%만 더해서 배상하면 됩니다. 그런데 삭개오는 4배, 400%를 배상하겠다고 했습니다. 진심의 회복 노력입니다. 그는 아마 배상을 위해서 전 재산을 써야 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는 자유로워졌습니다. 이것이 구원의 증거입니다. 잃어버려진 상태에서 되찾아진 상태, 하나님으로부터 잃어버려진 상태에서 구원받은 영혼은 모든 우상으로부터 자유로워집니다. 특히 삭개오는 하지 않아도 되는, 요구받지 않은 내려놓음을 통해서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회복하려고 합니다. 예수님이 그의 친구가 되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관계를 회복하면 예수님이 친구가 되어 주신다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친구가 되어 주시기 때문에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할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이 여리고에서 일어난 기적입니다.
오늘 이 시대 삭개오처럼 잃어버린 영혼이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도 잃어버린 영혼이 아니었습니까? 잃어버린 영혼
은 자신의 모든 방황을 다른 것으로 채우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속한 인생으로 되돌아가는 길만이 모든 방황을
끝낼 수 있습니다. 삭개오는 사람들로부터는 회복과 인정, 위로와 긍휼을 얻지 못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의 가난한
마음을 아시고, 그가 왜 그런 인생을 살게 됐는지를 깊이 이해하시고, 이름을 부르시고, 그의 집에 찾아오셔서 친구가
되어 주셨습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외면하고, 손가락질하고, 비난하는 상황에 처해 있을지라도 예수님만큼은 진실
을 아시고 아픔을 아십니다. 왜 그렇게 되었는지를 아십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마음을 보고 계십니다. 그래서 구원을
선포하시는 것입니다. 삭개오에게 일어난 놀라운 기적이 우리의 삶에도 일어나기를 축원합니다. 나무에 올라가 예수님
을 조용히 보고자 하는 우리들에게 예수님께서 찾아오십니다. 그리고 만나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찾아오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 우리 주변에 잃어버린 많은 영혼들이 예수님 앞에 나올 수 있도록 도와주기를 바랍니
다.
'좋은 말씀 > 이재훈목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하나님의 은혜로운 손길 (느헤미야 2:1~10) (0) | 2020.09.10 |
---|---|
주의 종들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소서 (느헤미야 1:1~11) (0) | 2020.09.03 |
자유의 복음을 선포하시다.(누가복음 4:14~22) (0) | 2020.08.20 |
어둠의 세력에 대해 승리하시다 (마태복음 4:1~11) (0) | 2020.07.23 |
하늘이 열리고 복음이 들리다 (마태복음 3:13~17) (0) | 2020.07.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