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낮은 곳에서 부르는 생명의 노래'

묻힐 장소가 아닌 죽음의 자리

새벽지기1 2020. 2. 7. 06:53


묻힐 장소가 아닌 죽음의 자리


흔히 짐승도 죽을 때는 제 자리를 찾는다고 한다.

사람도 마찬가지로 늙고 병들면 혈육과 고향산천을 그리워한다고 한다.

인간이 묻히고자 하는 육신의 무덤자리는 체로 한정되어 있고,

죽은 자를 묻는 이는 살아있는 자의 몫이 된다.

그런데 인간의 욕망의 무덤은 그 끝이 어딘지 참 묘한 감정을 자아낸다.

죽은 자의 무덤은 살아있는 자에 의하여 무한로 치장되고

살아있는 자의 거처보다 더욱 호화찬란하여 정녕 누가 산자인지, 죽은 자인지

가늠할 수 없을 정도이다.


부끄럽게도 오랫동안 묻힐 자리에만 급급해 왔던 우리의 장례문화는

고유한 민속 문화와 민속신앙이 맞물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르기까지

앙의 허구를 낳게 하는 안타까운 현실에서 깊은 성찰을 요구한다.

이른바 마지막 때의 부활을 위해서 화장을 해서는 안 된다는 왜곡된 종교적 신념이다.


성경에서 바울 사도가 언급한 부활체란

죽음의 형태나 장례의 형식과는 전혀 무관한 사안임을 밝혀주고 있다.

시신처리에 대한 관심으로 말하자면 야곱과 요셉은 애굽의 장례 방식인 미이라(창50:3,26)로 처리되었으니

얼마나 유대 기독교와는 다른 낯선 사건이었는가?
소위 매장에 연연하는 많은 사람들의 경우 이른바 조상을 잘 모시면 복을 받는 방법으로

풍수지리와 연결된 ‘명당자리’를 묘지로 택하는 그것이다.

러나 사실 알고 보면 역술과 요행이라는 비역사적인 연결점이라는 데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더구나 예부터 분묘는 그 사람의 신분을 드러내는 양식이 되어 왔기 때문에

돌아가신 분을 진심으로 기리기보다는 과시를 위한

치례의 한 방법으로까지 전락하기도 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이런 모습은 마치 결혼식이 그러하듯이 이미 장례식에서부터 허례허식으로 차별화되어 나타나곤 한다.

이 모든 일은 우리의 장례문화가 얼마나 허술한 그늘을 가지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예가 된다.


사실 사람들은 묻힐 자리는 중요한 줄 알면서 죽을 자리에 해서는 관심을 갖지 않고 있다.

사람에게 중요한 것은 묻힐 자리보다 죽을 자리다.

죽는 자리가 그의 영원한 현주소로 확정되기 때문이다.


가룟 유다는 배신자의 자리에서 죽었기 때문에 그는 원한 배신자로 낙인이 찍혔다.

스데반은 전도하다가 죽었기 때문에 원히 순교자로 추앙을 받고 있다.

사도 바울의 죽음의 영역과 삶의 지평은 비범하게 넓었다.

그는 사나 죽으나 자신은 주님의 것이라고 했는가 하면,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고백하기도 했다.

우리도 삶과 죽음의 긴장관계 속에서 나타나는 신비의 영역을

어떻게 하면 아름답고 의미 있게 맞이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며 살아야 하지 않을까?


많은 경우 사람들은 죽음과 관련해서 이제까지 살아 온 삶과는 관계없이
미화하거나 장식하기에만 급급하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의 죽음은

하나님 앞에서의 삶의 결산인 동시에 결단인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따라서 우리는 삶을 논하는 것은 곧 죽음을 논하는 것이요,

죽음을 일컬음은 곧 삶을 직시하자는 것이 된다.

마틴 루터는 기독교인들에게 있어서 장례식 자체보다도 더 소중히 여겨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곧 ‘죽음에 임하는 태도’라고 말한 바 있다.

어쩌면 루터는 “묻힐 자리”보다 “죽을 자리”의 중요성을 일깨워준 최초의 개신교 신학자가 아닌가 싶다.

그가 1915년에 쓴 ‘죽음에 관한 설교’를 보면

기독교인들이 복된 죽음을 맏이하기 위한 몇 가지 사항을 안내하고 있다.

첫째로, 죽음 이후에 있을 다툼과 싸움을 피하기 위해서 이 세상의 일들을 잘 정리하라고 권면하다.

둘째로, 영혼이 고통 속에 있지 않기 위해서 모든 사람과 화해하라고 말하다.

셋째로, 죽음에 대한 두려움, 죄에 대한 혐오 그리고 지옥과 원한 형벌에 대한 저주를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으로 극복
하라(고전15:57)고 했다.

참으로 깊이깊이 음미해야 할 권면이라 생각한다.


성경에 나타나는 모세는 가나안 땅이 멀리 바라다 보이는 느보 산에서 죽음을 맞았다.

모세의 죽음은 히브리 백성에게 엄청난 사건이었다.

래서 그들은 무려 30일간이나 모압 평지에서 애곡하였다.

그 정도면 모세의 묻힌 자리는 유명한 성지가 되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모압 땅에 장사를 지낸 모세의 묘지를 아는 자가 오늘까지 없다(신34:6)고 증언한다.

들이 무관심해서을까? 결코 그럴 수 없다.

모세는 요셉처럼 “내 뼈를 옮겨가라”(창50:25)는 유언 같은 것을 남기지도 않았다.

자기 무덤에 연연하지도 않았고 자기 무덤을 알리는 것조차도 허락하지 않았던 모세는

“묻힐 자리”의 사람이 아니라, “죽을 자리”의 사람이었음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정녕 예수님의 경우는 어떠했는가?


실로 예수께서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흔하게 누리는 세 가지가 없는 삼무(三無)의 사람이었다.

태어 날 곳이 없으셨으며, 머리 둘 곳도 없으셨고, 마지막 묻힐 한 평의 땅 조차 없으셨던 분이시다.

예수님은 오로지 ‘인자의 때’에 해 관심을 가지셨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인자의 때’는 시간과 공간을 모두 함축하신 말씀이다.

예수께서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작정하신 때,

당신께서 “죽으실 자리”를 그토록 찾으셨던 것이다.

그리고는 끝내 골고다 십자가에서 그 자리를 발견하셨던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한낱 묻힐 자리에 연연하지 않으셨던 분이다.

그러므로 오늘의 기독교의 메시지는 “묻힐 자리”가 아니라,

도리어 “죽을 자리”에 있음을 직시하여야 한다.

“죽을 자리”는 “묻힐 자리”를 초월한다.


예수님은 아리마 요셉의 무덤에 잠시 들어가 계셨으나

사실 주님은 묻힐 자리에 대해선 별 관심이 없으셨다.

오히려 죽을 자리에 대해 비상한 관심을 가지셨다.

십자가에서 죽으실 것을 수차 말씀했고 그 십자가로 인류를 구원하신 것이다.

삶의 자리가 죽을 자리를 확정짓듯, 죽는 자리가 그 사람의 생을 또한 확정 짓는다.


그렇다. 죽을 장소(place)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죽음의 자리(how you die)가 얼마나 중요한가!


성도의 죽음을 귀히 보시는 주님!
“주여! 죽을 때도 주님 안에만 있게 하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