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낮은 곳에서 부르는 생명의 노래'

트라우마와 스티그마

새벽지기1 2020. 2. 9. 07:32


트라우마와 스티그마


현대어의 조류를 보면 웰빙, 힐링, 같은 신조어가 대세인 것 같다.

인간의 생활 속에서 참 아름답고 따뜻한 언어들이 아닐 수 없다.

다만 이러한 언어가 각종 광고의 수단에 동원되고 그 의미가 퇴색되어

갖가지의 상업적 상품성과 부작용들로 하류 유행어로 전락하게 하는 현실이 조금은 안타까울 뿐이다.


이와는 좀 반대가 되는 개념으로서 심리적 외상사건, 신체적, 심리적 안녕을 위협하고

정체성을 파괴하는 외상 후 스트레스장애라고 하는 트라우마(trauma)가 자주 세간에 회자되곤 한다.

세월 호 사건 이후 우리 사회에서 개인적 민족적 트라우마를 염려하는 사람들이 부쩍 많아졌다.

특히 영구적인 정신장애를 남기는 충격이라 하여 사람들은 트라우마에 대해 많은 관심을 보인다.


최근 이 단어가 사회 전반에 통용되기 시작하면서 개인적인 트라우마는 물론

사회 구조의 잘못된 적폐로 트라우마의 고통 속에 함께 빠져 들어가는 경향도 간과할 수 없다.

우리말에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보고 놀란다.’는 옛 속담이 트라우마와 맥을 같이하는 뜻으로 풀이된다.

이러한 큰 충격과 아픔으로 맘 고생하는 분들이 위로 받고 치유되기를 간절히 기원해본다.

이와 같은 문제들을 해결해보자는 선한 의도의 치료를 위한 접근 방식으

‘내적 치유’라는 기독교 특유의 치유론이 있다.

사실 이것은 일반 의학계에는 없는 치유 방법론이다.

일종의 트라우마를 기독교식으로 해결하겠다는 선한 의도의 기독교적 접근방식이다.

그러나 결국 심리학적 요소들을 적인 것들과 혼합하여

말 그대로 기독교식으로 풀어나간 ‘기독교적 심리학’이다.

이러한 문제를 전면적으로 부정하거나 비판적으로 격하시킬 이유는 없을 것 같다.


문제는 과거의 상처를 어루만져 주는 것은 좋은 일인 듯하나,

그 상처를 꺼내기 위해 이미 예수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과거의 내 무덤을 파헤치는 일로 인해

용서받은 내 과거를 다시 들추게 되고, 예수 십자가의 공로 역시 무덤의 해체와 더불어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하게 된다는데 문제가 있다.

기독교적인 회개로도 충분치 못하고 부족한 것처럼 ‘내 안에 또 다른 내가 있다.’는 식으로

못된 나, 과거의 나를 끄집어내어 다시 부관 참시하는 격이다.


성경은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
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5:17) 라고 선언하고 있고,

예수 십자가는 죄의 용서는 물론, 수고하고 무거운 모든 짐으로부터의 해방을 선포하고 있음에도

주님께서 십자가를 통해 해결하신 문제를 다시 뒤적거린다는 것은 결코 바른 신앙행위라고 할 수 없다.

한동안 “가계에 흐르는 저주”라는 책을 통해 잘못된 신앙과 신학으로 혼란을 야기 시키고

잘못된 교리로 호도한 때가 있었다.

그러나 그 일이 잘못된 일이었음을 스스로 인정하고 모든 책들은 회수하고

한국 교회 앞에 물의를 빚었음을 고백하며 자신의 잘못을 수정하였다.


트라우마가 뒤덮은 사회, 지금 우리 사회는 트라우마의 덫에 걸려 너나 할 것 없이

트라우마 병을 앓고 있는 듯하다.

뜻밖의 사고나 또는 피치 못할 상황에서 맞이해야 했던 불운의 트라우마였다면

그것은 마땅히 위로받고 그 상처를 치유하는데 함께 힘을 모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잘못이나 죄로 인해 일어난 사건마저 트라우마에게 책임을 전가한다면

이는 쓰다듬어주고 달래주는 치유의 문제가 아니라,

숨겨져 있는 죄의 암 덩어리를 제거해야 하는 수술과 회개를 필요로 하는 문제요 책임의 문제이기도 하다.

이것이야말로 인간의 어떤 방법으로 치유되는 상처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 안에서 성령님이 수술의 메스를 잡고 진행해야 가능한 일이다.

물론 이때 공급되는 수혈의 피는 예수 십자가의 보혈이다.


내적 치유에 있어서의 쓴 뿌리 역시 같은 맥락이다.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이 충격의 상처와 쓴 뿌리가

나의 죄에 기인하고 있지 않은가 하는 것이다.

피해자가 아니라 가해자의 자리에 있으면서 동반된 죄의식이나 죄책감이 아닌가 하는 것 말이다.

죄를 심리학적으로 설명하는 일처럼 간교한 것은 없다.

“긍정의 힘”, “잘 되는 나” 등등의 여러 인본주의적인 책을 쓴 조엘 오스틴이 대표적인 사람이다.

그는 죄에 하여 선의 결핍이나 에피소드, 혹은 심리적 상처 정도로 약화시켜 이야기 한다.

우리가 죄에 하여 말할 때, 또는 성경에서의 죄에 한 실체는 일반적이고 상대적이며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죄를 말함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의 도덕적 특별 악을 말함이다.

그런 의미에서 죄는 절대적인 성격을 갖는다.


트라우마 보다는 예수님의 흔적인 스티그마를 지니고 살았으면 좋겠다.
트라우마도 스티그마도 무엇인가에 한 흔적이라 할 수 있다.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교회에 보내는 서신 말미에 이렇게 썼다.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갈6:17).

할례와 율법 논제의 종지부를 찍기 위해 복음 때문에 입었던 자신의 몸의 상처를 언급하며 한 말이다.


인류역사에 가장 큰 트라우마가 있다면,

그것은 에덴동산에서 인류를 타락의 길로 빠져들게 한 뱀의 간교한 속임수일 것이다.

그리고 인간들의 죄로 인해 예수 그리스도를 갈보리 십자가에 매달아 죽인 사건일 것이다.

종교 지도자들과 권력의 수반에 있는 정치적 헤게모니와 이데올로기,

그리고 인간의 탐심과 야심으로 인한 집단적 역모다.

물론 이 모든 악의 행태에도 불구하고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선하신 섭리와 주권에 의한 하나님의 큰일을 이루심이었다.


나는 오늘도 십자가 위의 고통 받는 예수상을 쳐다보며

오늘의 숨겨진 내 죄성을 발견하고 깊은 충격 속에서 회개의 자리로 나간다.

이미 2천 년 전에 갈보리 십자가 위에서 그의 피로 내 죄를 사하사 깨끗케 하시고,

내게 성령으로 임하사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게 하신

그 놀라운 그분의 사랑의 흔적을 지닌 자로 살아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