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하용조목사

둘이 하나되다

새벽지기1 2019. 1. 28. 07:50


인간의 역사는 한마디로 ‘담을 쌓는 역사’입니다. 인간은 분열, 갈등, 전쟁으로 나와 너, 지역과 지역, 민족과 민족 사이에 담을 쌓아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역사는 담을 허무는 역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쌓은 담을 허무십니다. 그곳에는 하나됨, 평화, 용서가 있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인생에 역사하셔서 모든 담이 허물어지고 평화를 누리시기를 축원합니다. 


너무 다른 유대인과 이방인


오늘 본문 11~12절은 유대인과 이방인의 다른 점 다섯 가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 이방인은 할례를 받지 않았습니다. 유대인들은 태어난 지 8일째 되는 날에 포경수술을 합니다. 둘째 이방인은 그리스도 밖에 있던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는 히브리말로 메시아, 우리말로 번역하면 구세주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구세주를 기대하고 열망하고 있었지만 이방인들은 어느 누구도 메시아를 기다리지 않았습니다. 셋째 이방인은 이스라엘 백성들로부터 제외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방인이 아니라 아브라함과 이스라엘 백성을 선택하셔서 그 민족을 통해 메시아를 주시고 구원하기를 원하셨습니다.

넷째 이방인은 약속의 언약들에 대해 생소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구약성경도,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창세기 12장 1~2절의 약속도 알지 못했습니다. 다섯째 이방인은 소망도 없고 하나님도 없는 사람들입니다.

정리해 보면 이렇습니다. 이방인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알지 못했습니다. 어느 누구도 정확하고 구체적으로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 못했습니다. 반면에 유대인들은 할례를 받았고, 메시아에 대한 희망이 있었고, 하나님께 선택받았고, 약속의 언약에 익숙하고, 여호와 하나님을 알았습니다.


이방인과 유대인이 이렇게 달랐습니다.  토를라이프 보만이 쓴 ‘히브리적 사유와 그리스적 사유의 비교’란 책을 보면 유대인은 종합적인 사고를 하지만 헬라인은 분석적인 사고를 합니다. 이런 유대인과 헬라인이 어떻게 하나가 될 수 있을까요? 인간의 사상과 경험으로는 하나가 될 수 없지만 성경은 하나가 될 수 있다고 합니다. 


갈등 해결의 열쇠


에베소 교회 안에는 유대인과 헬라인이 섞여 있었습니다. 그래서 갈등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유대인과 헬라인이 다를지라도 하나가 될 수 있다고 하십니다. 유대인과 헬라인이 하나가 되는 것에 대한 다섯 가지 설명이 13~17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첫째 그리스도가 우리의 평화이심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 땅 가운데 진정한 평화를 가져다주실 분은 그리스도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태어나셨을 때 하늘의 천사들이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의 은총을 입은 사람들에게 평화로다.”(눅 2:14) 예수 그리스도만이 이 땅에 진정한 평화를 줄 수 있습니다.

둘째 평화는 혼자 누리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관계 가운데 누리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사야서 11장 6~8절을 보면 이것을 엿볼 수 있는 내용이 있습니다. 늑대가 어린 양과 함께 살고, 표범이 새끼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는데 어린아이가 그들을 이끌고 다니는 것입니다. 이것이 평화입니다. 강자와 약자가 함께 있어도 해치지 않는 사이좋은 관계가 평화입니다.


셋째 평화는 구호나 외침이 아니라 희생입니다.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습니다.(13절) 예수님은 자신의 육체를 찢어서 평화를 주셨습니다.(14절) 십자가를 통해 둘을 한 몸으로 만드신 것입니다.(16절)


넷째 평화는 쟁취하는 것이 아니라 주어지는 것입니다.

진정한 평화는 인간이 쟁취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분 안에서 둘로 한 새 사람을 창조해 평화를 이루셨습니다.(15절) 하나님께서 평화를 이루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평화를 전하셨습니다.(17절) 하나님께서 주신 평화는 우리의 경험을 뛰어넘습니다. 평생 원수지간으로 지낼 것 같은 사람과도 평화롭게 지낼 수 있는 것입니다.


다섯째 수직적인 평화가 이루어질 때 수평적인 평화도 이루어집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과 평화가 이루어질 때 다른 사람과의 평화도 이루어집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통해 화목하게 하셨습니다.(16절) 하나님과 하나가 될 때 비로소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선물 ‘평화’


그리스도의 피로 여러분과 하나님 간에 평화가 이루어졌고 이미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들 특별히 성도들 간에 평화가 이루어졌습니다. 이 모습을 18~19절에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 모두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갈 수 있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여러분은 더 이상 낯선 사람들이거나 나그네들이 아니라 성도들과 동등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가족입니다.”

할렐루야! 우리는 하나님의 가족이 되었습니다. 성막에 가면 이방인의 뜰과 이스라엘 뜰이 칸막이로 나뉘어 있어 이방인이 이스라엘 뜰로 넘어갈 수 없고, 유대인이 이방인의 뜰로 넘어갈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칸막이를 허물어 버리신 것입니다.


여러분, 영적 호적등본을 보면 우리는 모두 다 가족입니다. 누구든지 그 이름을 믿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요 1:12) 우리 모두의 호주는 하나님이십니다. 본적은 천국특별시입니다.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기 때문입니다.(빌 3:20)

이것이 교회입니다. 하나님을 한 아버지로 섬기고, 원수된 것이 풀어지고, 하나의 가족이 되는 것입니다. 지역과 지역이, 계층과 계층이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쟁취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이 평화를 누리는 것이 교회입니다. 교회의 하나됨의 모델이 사회의 평화의 모델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가정 가운데 이 아름다운 평화가 회복되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됨의 축복


이 평화를 20~22절에서 그림으로 보여주십니다. 모퉁잇돌은 집을 지을 때 가장 먼저 놓는 돌입니다. 예수님께서 모퉁잇돌이 되셨습니다. 그 옆에 사도들이 붙고, 이천년 기독교 역사상 사람들이 붙어가는 것입니다. 돌들끼리 부딪히면 깨지니까 예수님과 성도를, 성도와 성도를 하나가 되도록 성령님께서 접착제 역할을 하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놀라운 하나됨이 여러분의 가정과 민족가운데 회복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럼 어떻게 하면 이 평화를 유지하며 살 수 있을까요? 에베소서 4장 2절에서 네 가지로 말씀하고 계십니다. 첫째 겸손입니다. 겸손은 다른 사람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것입니다. 둘째 온유입니다. 쓸데없는 고집을 버리고 ‘지는 게 이기는 것’이라 여기는 것입니다. 셋째 오래 참음으로 행동하는 것입니다. 조급하게 굴지 말고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넷째 사랑으로 용납하는 것입니다. 받아들이고 포용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평화를 선물로 주셨는데 우리가 또다시 담을 쌓으면 되겠습니까. 남을 나보다 낫다고 여기고, 늘 온유하고 부드럽게 받아주고, ‘언젠가는 잘 할거야’라며 기다려주고, 그 사람의 결정에는 이유가 있다고 포용해줄 때 이 땅 가운데 평화가 유지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가운데 겸손과 온유와 기다림과 포용력이 흘러넘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평화가 깨지지 않고 화평케 하는 자로 살아가는 놀라운 복이 있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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