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호봇과 브엘세바(3월 28일)
) -->
'이삭이 거기서 옮겨 다른 우물을 팠더니 그들이 다투지 아니하였으므로 그 이름을 르호봇이라 하여 이르되
이제는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넓게 하셨으니 이 땅에서 우리가 번성하리로다 하였더라'(창세기 26:22)
) -->
이삭은 이 땅에서 나그네 길을 걸으면서 아브라함이 지나갔던 길을 더듬으며 지나간다.
그는 아버지 아브라함의 신앙의 여정을 본받길 원하였다.
그러면서 아브라함이 팠던 우물들을 찾아내어 다시 파기 시작한다.
그리고 우물 이름도 아브라함이 지었던 대로 따라짓는다.
이 모든 이삭의 행동은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시고 이제 자신과도 언약을 맺으신
여호와 하나님을 계속 의식하며 살았음을 말한다.
) -->
이때 그랄 백성이 이삭의 뒤를 쫓아와서 우물을 가지고 이삭의 종들과 다툰다.
이에 이삭은 생명처럼 귀한 우물을 그들에게 주고 다른 곳으로 가서 우물을 판다.
또 그랄 사람들이 와서 우물을 빼앗으려고 이삭과 다툰다. 그러면 이삭은 그 좋은 우물을 양보하고
또 이사하여 우물을 판다. 그리고 마침내 어떤 곳에 도착하여 우물을 파니
더 이상 그랄 사람들이 좇아와서 시비를 걸지 않는다.
그래서 이삭은 그 우물의 이름을 “르호봇”이라고 하였다.
그 뜻은 여호와께서 넓은 곳을 주셨으며 그 땅에서 형통할 것이라는 뜻이다.
) -->
바로 이 사건 직후에 하나님께서는 이삭에게 나타나셔서 아브라함과 하셨던 약속을 다시 한 번 확증해 주신다.
곧,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쳐 믿음의 시험에 통과한 것처럼 이제 이삭도 믿음의 시험에서 통과하였다는 뜻이다.
더 놀라운 것은 그렇게 이삭을 질투하며 다투고자 하였던 그랄 왕 아비멜렉이
친히 찾아와 이삭과 언약을 나누고 헤어진다.
그 후 그 땅에서 다시 우물이 터졌으니 그 우물의 이름을 “브엘세바”라고 하였다.
이는 언약의 우물, 또는 일곱의 우물이란 뜻이다.
) -->
하나님께 인정받은 이삭의 믿음의 삶은 “르호봇”으로 증거되었다.
즉, 르호봇은 여호와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나타난 양보의 삶이다.
하나님만이 은혜의 뿌리이며, 그 은혜는 여호와 하나님을 믿고 사는 자들에게 임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증거가 "르호봇"이다.
선으로 악을 이기는 믿음이요, 세상에 속한 것들에 대해 양보로 싸움을 피하는 믿음이다.
이러한 믿음의 삶의 극치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이다.
십자가 상에서 우리 주 예수님께서는 오직 하나님을 믿으며 모든 사람들에게 양보하셨다.
오직 하나님께서 신원하여 주실 것과 복을 베푸실 것을 믿고 모든 것을 내려놓으셨다.
) -->
만일 이삭이 그랄 목동들과 우물 때문에 싸웠다면 그 인생은 어떻게 되었을까?
분명히 그는 우물 때문에 싸움하느라 평생을 낭비하였을 것이다.
또한 하나님께서 얼마나 크신 분이신지 체험치 못하였을 것이다.
스스로의 힘으로 먹고 사는 인생이 되었을 것이다.
) -->
그러나 언약의 여호와 하나님을 의식하며 인생의 길을 걸어갔던 이삭은
가는 곳마다 우물이 터지는 역사를 체험하였다.
그리고 그 우물의 역사는 르호봇의 체험으로, 나아가 브엘세바의 확신으로 발전하였다.
이처럼 복음의 삶은 친히 언약의 하나님께서 역사하고 복을 주며 인도하시는 삶이다.
[출처] 3월 28일 르호봇과 브엘세바|작성자 스데반 황
'좋은 말씀 > 스테반황' 카테고리의 다른 글
복음적인 인생관 (0) | 2018.05.30 |
---|---|
“내가 약할 때에 강함이라.” (0) | 2018.05.28 |
하나님의 의가 어떻게 나타나는가? (0) | 2018.05.23 |
그리스도를 깨달음 (0) | 2018.05.21 |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에 동참하라. (0) | 2018.05.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