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께서 이르시되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대답하되 없나이다 이르시되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잡으리라 하시니
이에 던졌더니 물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더라” (요 21:5-6)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은 부활의 주를 직접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옛 직업인 어부로 돌아오고 말았다. 눈으로 직접 목격하고 손으로 만져보기까지 했었는데도 그것이 마음 중심 속에 자리 잡는 확신으로는 이어지지는 못했다. 아직 성령이 강림하기 이전이었기 때문에 여전히 육에 속한 삶을 살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실망감에 휩싸인 베드로와 제자들을 예수께서 다시 찾아오셨다. 그곳은 베드로가 처음으로 예수를 만난 ‘메타노이아’의 장소이기도 했다.
부활의 주께서는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에게 세 가지의 의미 있는 말씀과 행동을 전해 주셨다. 그것은 모두가 그들 속에 깊이 감추어져 있는 지나간 시간의 추억들이다. 긍정적인 것은 다시 끄집어내어 주셨고, 부정적인 것은 자존심을 건드리지 않은 채 사랑으로 감싸주셨다. 그렇게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격려하시며 새롭게 용기를 내도록 이끌어 주셨다.
첫 번째는 빈 배로 돌아오는 제자들에게 배 오른편에 그물을 던져보라는 말씀이었다.
그 말씀에 순종한 제자들은 큰 물고기를 무려 153마리나 잡았다. 이것은 예수께서 베드로를 처음 만나 그를 제자로 삼았던 사건과 깊은 연관이 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처음 만났던 그 날도 베드로는 밤새도록 아무 것도 잡지 못했다(눅 5:1-11). 그 아침 예수께서는 베드로의 배를 빌려 바닷가에 모여 있던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신 후, 베드로에게 깊은 곳에 그물을 내려 보라고 하셨다. 베드로가 깊은 곳에 그물을 내리자 그물이 찢어질 만큼 많은 고기가 잡혔다. 그 일로 인하여 베드로는 ‘메타노이아’를 경험하면서 자신의 직업을 버리고 예수를 따르는 제자가 되었다.
예수께서 빈 배로 돌아오는 제자들에게 오른편에 그물을 던져보라고 명령하신 것은 베드로가 처음 주를 만났던 그날의 ‘메타노이아’를 기억나게 하시기 위함이었다. 한번 주님을 따르기로 결정했다면, 다시 세상으로 돌아가는 것은 무익하다는 점을 말없이 설명하신 것이다. 쟁기 잡은 자가 뒤를 돌아보는 것은 합당치 못한 일이다. 경주하는 자처럼 오직 앞에 있는 목표만을 향하여 달려가는 것이 바른 제자의 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도에 실망하여 본궤도에서 벗어난 제자들을 찾아오신 주님은 그들의 감추어진 첫 사랑과 첫 믿음을 새롭게 회복시켜주셨다.
둘째는 숯불 위에 생선을 구워 조반을 직접 마련하신 것이다.
제자들이 육지에 올라왔을 때 예수께서는 숯불 위에 생선을 굽고 떡도 마련해 주셨다. 밤새도록 수고한 제자들에게 따뜻한 아침식사를 친히 준비해 주신 것이다. 그렇게 하여 예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갈릴리해변에서 정다운 아침식사를 나누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숯불’ 모티프이다. 예수께서 붙잡히시던 그날 밤 베드로는 멀리서 주님의 뒤를 따랐다. 예수께서 대제사장의 집으로 붙잡혀 들어간 후 베드로는 그 집 문 앞에서 서성거리다가 하솔들이 피워놓은 불 주변에 함께 앉았다. 이때에 그 불을 쬐고 있었던 한 여종이 베드로를 예수와 함께 있었던 자라고 고발하였다. 베드로는 자신도 모르게 전혀 모르는 일이라고 하면서 예수를 부인하기를 시작하였다. 그것이 세 번이나 반복되었다. 그때 피워 놓은 불은 일반 불이 아니라 ‘숯불’이었다(요 18:18). 이것은 예수께서 아침식사를 준비하시기 위하여 피워놓은 숯불과 같은 것이다. 이는 예수께서 조반을 준비하신 것은 곧 베드로가 주님을 부인하였던 그 날 밤의 그 숯불을 연상시켜주는 것임을 의미한다.
숯불 주변에서 있었던 그 날 밤의 사건은 베드로에게 기억조차하기 싫은 비참한 실패의 현장이었다. 예수께서는 베드로를 다시 그 실패의 숯불가로 부르신 것이다. 그러나 그 숯불은 책망이나 질책이 아니라 따뜻한 아침식사가 준비된 정다운 장소였다. 이것은 예수께서 베드로의 지나간 잘못을 모두 용서하신다는 표시이기도 하다. 베드로는 그날 밤 닭이 우는 소리를 듣고 밖에 나가 통곡하며 자신의 잘못을 회개하였다. 그러나 마음 속 깊은 곳에는 여전히 죄책감이 남아 있을 수 있다. 예수께서 바닷가에 숯불을 피워 놓으시고 아침식사를 준비하신 것은 베드로의 회개를 받아 주셨음을 무언으로 전달하는 사랑의 배려이다.
세 번째는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세 번이나 반복하여 물으신 질문이다.
‘주님을 사랑합니다’라고 답변하는 베드로에게 주님은 ‘내 양을 먹이라’라는 목양의 사명을 당부하셨다. 이것은 베드로를 교회의 지도자로 삼아 복음을 땅 끝까지 전파하시겠다는 지상명령의 선언이다. 실제로 초대교회는 베드로의 지도력 아래 그 기초와 뿌리를 든든하게 내릴 수 있었다. 이 기초 위에 바울은 복음을 이방세계의 온 땅으로 전파하였다.
예수께서 세 번씩이나 같은 질문을 반복하신 것은 또 다른 의도가 숨어 있다. 그것은 예수께서 잡히시던 그날 밤, 겟세마네로 향하여 나아가면서 베드로가 주님께 당당하게 고백하였던 내용을 회상시켜 준다. 그때 주님은 ‘오늘밤 너희들이 다 나를 버리리라’라고 하셨는데, 베드로는 ‘다 주를 버릴지라도 저는 언제라도 버리지 않겠나이다’(마 26:33)라고 답했다. 그러나 베드로는 불과 몇 시간이 못 되어 주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는 실패를 경험하였다. 그 때 베드로가 주님을 버리지 않겠다고 다짐한 것은 거짓으로 꾸민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의 진심이었다. 문제는 그런 고백이 신앙이 아닌 인정과 의리에 근거한 것이라는 점이다. 그래서 예수께서 간절히 기도하고 있었던 겟세마네에서 베드로는 잠에 빠지고 말았다. 자신을 믿고 있던 베드로는 기도의 필요성이나 여지를 갖고 있지 못했다.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사랑의 여부를 세 번이나 거듭 확인하신 것은 그 날 밤 베드로의 사랑 고백이 여전히 남아 있는가를 다시 물으신 것이다. 베드로는 이미 실패자로서 그런 고백은 이제 더 이상 그에게 남아 있는 것 같아 보이지 않을 수 있다. 그런데도 주님은 베드로의 마음 깊은 심층 속에 숨어 있는 사랑의 고백을 회복시켜 주셨다. 순순한 고백이었지만 그대로 행하지 못했던 실패를 용서하시고 다시금 새로운 기회를 부여하신 것이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베드로에게 초대교회의 미래를 맡기셨다. 꺼져 가는 불씨를 조심스럽게 피우듯 베드로의 마음속에 남아있는 사랑의 고백을 끄집어내셨다.
무명의 인물로 사라질 뻔 했던 베드로는 다시 회복되어 초대교회의 위대한 지도자로 세워졌다. 물론 그것이 구체적으로 실현되기 위해서는 오순절 성령의 강림이 있어야 했다. 성령의 임재와 충만이 없이는 모두가 옛 모습으로 되돌아갈 가능성이 열려있기 때문이다
[출처] 다시 회복된 베드로의 ‘메타노이아’|작성자 viva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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