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계시는 주여,
주는 거룩하시니이다”(시 22:3)
신앙을 정의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이다. 그 가운데 가장 기본적이고 핵심적인 것은 하나님과의 동행이다. 신앙은 우리 스스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길을 하나님과 함께 걷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은 그와 동행하시기 위함이었다. 그래서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셨다. ‘하나님의 형상’은 우리가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도록 주어진 영적 연결고리이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 아담은 에덴동산에서 하나님과 함께 거니는 친밀한 사이였다. 그것은 죄를 범하고 숨어 있던 아담에게 하나님께서 “네가 어디에 있느냐?”고 하신 말씀 속에 잘 나타나 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동산을 홀로 거니시면서 늘 함께 산책의 동반자 역할을 하였던 아담을 찾으신 것이다(창 3:9).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들과 동행하시길 원하신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창 17:1)고 명령하신 적이 있다. 여기에서 ‘행하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히트할레크’는 함께 거니는 산책을 의미한다. 그것이 곧 아브라함이 하나님 앞에서 ‘완전하게’ ‘순수하게’ 살아가는 방법이다. ‘완전하다’로 번역된 히브리어 ‘탐밈’은 완벽이 아닌 ‘순수’를 뜻한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신앙의 삶은 각자의 개별적이고 사적인 모든 부분에서 실제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하나님과의 동행이 넓으면 넓을수록 신앙이 깊어지고 건강해지는 것이 그 때문이다. 그런 개별적 신앙생활이 공적인 성격을 지니는 것이 교회공동체의 예배이다. 곧 예배는 개별적으로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던 신앙의 개체들이 정해진 시공간에서 함께 하나님을 만나는 모임이다.
예배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통로는 말씀과 찬송이다. 말씀과 찬송은 하나님을 만나는 예배의 두 중심 기둥이다. ‘말씀’은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내려주시는 선물이라면, ‘찬송’은 우리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거룩한 예물이다. 선물인 말씀이 먼저 우리들에게 주어질 수도 있고, 예물로서의 찬송이 먼저 하나님께 드려질 수도 있다. 그러나 받는 것보다 드리는 것이 더 성숙한 자의 모습이다. 우리가 먼저 하나님께 우리의 찬송을 드리는 것이 성숙으로 나아가는 지름길이 될 수 있다.
찬송은 하나님께서 우리들 가운데 계시는 자리이다. 그래서 오늘의 본문은 하나님을 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계시는 분이라고 소개하였다. “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계시는 주여, 주는 거룩하시니이다”(시 22:3) 여기에서 본문을 이해하는 중요한 단어 세 개가 있다.
첫째는 ‘찬송’이다. ‘찬송’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테힐라’는 ‘자랑하다’와 ‘확신하다’는 뜻을 함께 지니고 있다. 찬송은 하나님을 자랑하는 것이다. 그분께서 베풀어주신 일을 널리 알리는 것이다. 그리고 그 하나님 때문에 확신을 갖고 당당하게 살아가는 것이다. 자랑하는 것은 확신을 갖고 있어야 가능하다. 그래서 찬양은 우리의 구원자 되시는 하나님을 맘껏 높이는 것이며, 또한 하나님의 자녀로서 당당함을 잃지 않는 것이다.
둘째는 ‘계시다‘이다. 여기에서 ‘계시다’로 번역된 히브리어 동사 ‘야사브’는 ‘자리에 앉다’는 뜻이다. 찬송은 곧 하나님께서 앉으시는 의자이다. 의자에 누가 앉느냐에 따라 그 의자의 의미와 가치가 달라진다. 우리들이 앉으면 일반의자가 되지만,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께서 앉으시면 왕좌가 된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계신 주’는 하나님께서 찬송이라는 왕좌에 앉아계신다는 뜻이다. 곧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찬송은 하나님께서 좌정하시는 왕좌가 된다.
왕좌는 가장 값진 귀한 재료로 만든 최고의 걸작이어야 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왕좌 역할을 하는 우리의 찬양이 최고 걸작이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최고의 찬양이란 우리들이 지니고 있는 기량을 다하여 최고의 완성도를 이룬 찬양을 의미한다. 찬양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서는 최선을 다하는 것이 우선적이겠지만, 우리의 최선 위에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기도가 빠지지 말아야 한다. 우리의 찬양이 기도의 그릇에 담겨야 완성도 높은 찬양이 된다.
셋째는 ‘거룩’이다. 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계신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시다. ‘거룩하다’로 번역된 히브리어 ‘카도쉬’는 ‘구별하다’는 뜻이다. 하나님께서는 피조물인 우리들과 구별되시는 분이시다. 그분은 창조주이시며 만왕의 왕이시다. 그런 점에서 찬양은 하나님을 거룩하신 만왕의 왕으로 높여드리는 역헐을 한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모습을 가득 찬 구름으로 표현한다. 구름이 가득 찬 것은 하나님의 영광으로 가득 찬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또한 성령으로 충만하다는 뜻이다. 하나님께서 임재하신 곳은 항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는 곳이 된다. 그래서 우리의 찬양은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와 성령의 충만함을 경험하는 거룩한 통로이다.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면, 성령의 감동이 임한다. 성령의 감동이 임하면, 닫힌 영혼의 문이 열려진다. 영혼의 문이 열리면, 그동안 저주로 막혔던 모든 것이 풀리게 된다. ‘저주’를 의미하는 히브리어 ‘아라르’는 어원적으로 ‘묶여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영적으로 풀리면, 질병이 고침을 받는 신유의 역사가 일어나고 더러운 귀신이 쫓겨나는 영적 해방을 경험하기도 한다. 이런 것들이 찬송의 왕좌에 앉으신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베풀어주시는 풍성한 복과 은혜이다.
하나님의 복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말씀의 깨우침이다. 말씀을 깨우치면 영혼의 새로움을 경험할 수 있다. 찬송의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께서는 무엇보다도 우리의 영혼을 새롭게 하시는 말씀을 전해 주신다. 그래서 찬양과 말씀은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동전의 양면처럼 늘 함께 공존하는 것이다. 그만큼 찬양사역자의 역할이 중요하다. 주일예배에서 말씀 선포 바로 앞에 찬양대의 찬양 순서가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출처] 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계신 하나님|작성자 viva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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