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박진호컬럼

바로 네가 가라! (사6:8)

새벽지기1 2017. 10. 19. 07:18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은즉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그때에 내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사6:8)

신자의 일생은 하나님께 소명(calling)을 받아 꾸준히 실천하는 삶의 연속이어야 합니다. 또 그 소명은 남들이 하지 못하는 자신만의 독특한 것이어야 합니다. 물론 모든 신자가 처음 예수를 믿을 때에 평생을 두고 그리스도를 증거하면서 자기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야 한다는 공통적이고도 궁극적인 사명(mission)은 다 받습니다. 그러나 그 기본적 사명이 막연한 관념으로 머물러선 안 되며 현실에 직접 구현할 수 있는 구체적인 방안까지 하나님께 받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렇다고 모든 신자가 목사나 선교사가 될 수는 없습니다. 결국 현재 열심히 일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자기 삶의 현장에서, 직업과 가정과 인간관계를 다 망라하여서,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자신의 삶에서 구현하므로 당연히 자신만의 소명이자 구체적인 소명이 되는 것입니다. 그럼 죄를 안 짓고 선하게 살면서 예수 믿으라고 열심히 전도하는 것입니까? 그러나 이는 그리스도를 증거 하라는 신자의 보편적 사명을 풀어서 설명한 것에 불과하지 자신에게만 유일한 소명은 아닙니다.  

미국 법무부에서 일하던 게리 호젠은 업무를 진행하면서 국제사회에 너무나 큰 문젯거리가 많음을 발견했습니다. 누군가가 그 일을 발 벗고 나서서 해결해야 한다고 믿고 주위에 그럴만한 적당한 사람이 있는지 물색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중 어느 날 불현듯 하나님이 자기를 주시하고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다른 누구도 아닌 그 문제들의 전문가인 바로 네가 그 일을 맡으라는 그분의 부르심에 강력히 사로잡힌 것입니다. 그래서 1997년 폭력, 성적학대, 노예제도, 정치적 압제의 희생자를 돕는 국제정의선교회를 창설했습니다.

누구라도 아주 좋은 귀중품을, 그것도 남들은 전혀 모르고 자기만 먼저 알았고 또 다른 누구보다도 자기에게 꼭 어울릴 것 같은, 발견하면 어떤 대가를 치르고라도 꼭 갖고 싶어 합니다. 그와 정 반대의 경우도 있습니다. 자기 주위에서 아주 어려운 문제를, 그것도 남들은 전혀 모르고 자기만 먼저 알았고 또 다른 누구보다도 자기가 나서면 해결 될 것 같은, 발견하면 어떤 희생이 기다리더라도 반드시 해결하고 싶어지는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신자가 되었다는 의미는 아주 간단합니다. 전자의 사람에서 후자로 바뀌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자연적 본성은, 신학적 용어로 원죄 하에 영혼이 부패된 심성은, 전자에만 머뭅니다. 누구나 이 땅에서 안락과 형통만, 그것도 자기와 자기 가족 우선의, 바랍니다. 평생을 두고 그 목표를 달성하려고 모든 대가를 치릅니다. 또 그런 상태에선 스스로의 노력으로 후자의 심성으로 결코 바꿀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그 본성을 죽여서 인간 내면이 정반대로 뒤집어지는 성령의 역사를 일으켜 주어야만 합니다.

간혹 자신을 완전히 희생하며 아주 이타적인 삶을 사는 불신자 내지 비기독교인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겐 하나님이 그 일을 보여주셨고, 하나님의 방식과 인도에 따라 그 일을 행하며, 무엇보다 그 일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한다는 인식이 전혀 없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자신의 인간적 의만 자랑하거나 결과적으로 드러날 뿐입니다.  

신자의 경우는 자신의 주위에 어떤 문제가 보이고 또 자꾸만 자기가 나서서 해결해야 할 것 같은 마음의 부담 내지 내면의 독촉이 생긴다면 바로 하나님이 맡기신 소명입니다. 자신의 눈앞에 겉으로 분명히 드러난 문제가 바로 하나님이 자신에게 주는 소명인 것입니다.

아프리카 선교사로 가는 것 같이 거창하고 경건하고 종교적 색채가 드러나야만 소명이라고 착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 큰 소명만 찾다가는 평생가도 주님의 일을 못합니다. 우리 중 대부분이 하나님의 그런 큰일을 감당할 그릇이 되지 못합니다. 어쩌면 우리 스스로 그런 점을 잘 알고 있을지 모릅니다. 그래서 큰일만 찾는 숨겨진 본의는 하나님의 일을 하기 싫다는, 아니면 최대한도로 미루겠다는 것입니다. 뒤집으면 세상에서 즐길 것 다 즐기면서 살다가 주일 성수라는 최소한의 종교적 의무만 다하겠다는 뜻입니다. 주일 성수했기에 때때로 부르짖으면 세상 즐거움을 배가시켜줄 것이라는 또 다른 착각도 하면서 말입니다.    

하나님이 이 땅에 온갖 문제들을 생기게 하는, 사실은 죄에 찌든 인간들끼리 만들어 내는 문제가 거의 전부이므로 하나님은 그대로 묵인하는 것임, 뜻이 무엇입니까? 인간이란 문제가 있어야만 비로소 당신을 찾게 된다는 것입니다. 서로 가진 것 희생하며 섬기게 되고, 함께 모여서 기도하게 되며, 무엇보다 서로 간에 진정한 사랑이 형성되며, 그러는 와중에 하나님이 베푸시는 은혜와 권능을 각자 나름대로 체험하며, 그 인간관계나 공동체에 주님의 거룩하고도 아름다운 통치가 임하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자연스레 주님을 몰랐던 자들을 십자가 구원으로 초대할 수 있으며, 이미 믿은 자들은 그 믿음이 더욱 견고해집니다. 세상의 문제로 인해 불신자는 하나님을 의심, 원망, 불신하게 되지만 신자더러는 오히려 그분을 더 소망하며 감사와 찬양으로 이어지게 만드는 것입니다. 신자에게 믿음과 소망을 더 부어주셔서 주위 사람을 그 은혜에 동참시키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생의 문제들이란 따져보면 자질구레한 것들이 사실상 대부분입니다. 보통의 경우 아주 치명적인 문제는 평생에 한두 번입니다. 또 아무리 완악한 불신자라도 병원에서조차 손을 놓는 말기 암 선고를 받으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하나님을 찾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기도 한두 번으로 말기 암이 낫는 것 같은 기적적이고도 비상한 방법으로는 사람을 거의 구원하시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질구레한 일들을 통해서 당신의 남겨두신 자를 찾습니다. 말하자면 신자가 자기 주위의 온갖 문제들을 해결하는 것이 자신의 소명으로 알고서 적극적으로 또 기꺼이 나서서 주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모습으로 이 땅을 다스린다는 것입니다. 또 그럴 때에 그리스도의 빛이 더 확실하게 드러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신자더러 작은 일에 충성하고, 작은 소자에게 잘 대해주라고 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먼데 계시는 분이 아닙니다. 바로 우리 곁에서 아주 작은 일에, 특별히 신자 주위에 있는 소자들이 자질구레한 문제들로 힘들고 아파할 때에 당신께서도 함께 아파하시는 모습으로 계십니다.

단 하나님의 관심은 그런 아주 평범하고도 일상적인 양상을 통해 당신의 부르시는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신자에게 모아집니다. 이사야처럼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라고 순종하는 자 말입니다. 신자가 그 작은 일에 충성치 않으면 그분은 그 문제를 계속 남겨 두시거나 때로는 점차 크게 만드십니다. 신자가 나를 보내라는 고백을 할 때까지 말입니다.

재차 강조하지만 주님의 소명과 그에 순종하는 일을 너무 심각하게 여길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작고 일상적인 일로 부르신다고 누차 말씀드렸습니다. 또 하나님이 나 같이 연약한 자에게 보여준 문제라면 내가 충분히 감당할 수 있거나, 최소한 그분이 해결책을 다 마련해 놓고서 나의 믿음의 결단과 실천만 보고자 하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대통령과 사장이 시키는 일에는 순종을 꽤 잘하면서, 아니 심지어 서로 자기가 하겠다고 싸우기까지 하면서도,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문제는 왜 그렇게 다들 미루는지요? 하나님이 직접 육성으로 나에게 대놓고 명령하지 않았다는 핑계만 계속 대면서 말입니다. 그야말로 이사야가 소명 받기 직전에 실토한 그대로 아닙니까?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5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