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박진호컬럼

세상은 절대 알지 못하는 최고의 축복 (창22:2)

새벽지기1 2017. 10. 25. 07:00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창22:2)

아브라함이 모리아 산에서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한 사건은 많은 영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잘 알다시피 그 산은 바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골고다 언덕이었고 또 하나님께서 이삭 대신에 어린 양 제물을 예비해 놓으심으로써 예수님의 대속 죽음을 예시한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래도 대부분의 신자는 제일 먼저 하나님께 가장 귀하게 여기는 것마저 온전히 바치라는 뜻으로 이해할 것입니다. 누구나 쉽게 분별할 수 있는 의미란 바로 하나님이 가장 강조하고 싶은 진리일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 부분에서 많은 이들이 지나쳐버리는 더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단순히 최고로 소중한 것까지 바치라는 의미를 넘어서는 뜻입니다.

이삭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약속의 씨앗입니다. 아브라함이 백세에 낳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귀염둥이 독자 정도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먼저 약속하셨고, 아브라함은 우여곡절의 믿음으로 25년을 기다린 후에 얻은 그분의 상급 중에서도 최고의 상급입니다. 그에게 평생에 걸쳐 하나님께 받은 축복 중에 어느 것이 가장 좋은가 물었을 때 틀림없이 한 순간의 주저도 없이 이삭이라고 대답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은 바로 그런 이삭을 지금 번제로 바치라고 즉, 당신 앞에서 죽여서 불에 태우라고 요구한 것입니다.

실감나게 설명하면 예수 믿고 나서 받은 축복 모두를, 구원 받아 그분의 자녀가 되었다는 사실 하나만 빼고는, 아무 소용없으니 몽땅 다 버리라고 명한 셈입니다. 하나님은 지금 신자의 기도에 응답하여 온갖 축복을 주셔놓고는 몽땅 회수해 가겠다는 셈입니다.

우리들이 새벽 기도 때마다 자주 울부짖는 바로 그 내용입니다. “하나님 저를 예수 믿게 하시고 또 이렇게까지 그 믿음을 성숙시켜 놓으시고는 지금 이런 환난이 대체 왠 말입니까? 아무리 열심히 기도해도 나아지기는커녕 더 심해지는 것은 또 왠 까닭입니까? 정말로 나를 완전히 말라비틀어지게 만들어 죽일 셈입니까?”

너무나 말이 안 되는 요건이 또 있습니다. 믿고 난 후에 크게 잘못한 일도 없고, 아니 영적으로 아주 충만할 때에 청천벽력 같이 그런 환난이 닥친다는 것입니다. 아무런 사전의 징조나 경고 없이 불시에 너무나 큰 고난 가운데 떠밀어 넣으시고는 사방 벽의 문고리를 다 잠가버립니다. 위에서 내려오는 작은 불빛 하나만 빼고는 말입니다. 그래서 하늘을 향해 두 팔을 벌리고 어서 빨리 구출해달라고 울부짖어 봅니다. 그러나 계속 감감 무소식일 뿐 아니라 사방에 막힌 벽은 점점 더 좁혀져 옵니다.

아브라함의 경우는 믿음의 조상으로, 또 예수님의 선조로 세우기 위해서라도 이삭을 죽이지 않았습니다. 또 욥은 모든 것을 다 빼앗아갔지만 완전한 항복 선언을 받고는 모년에 갑절의 축복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고통이 끝없이, 더 강하게 지속되다가 생을 마감하는 경우마저 있습니다. 우리 믿음에 아무 하자가 없는데도 말입니다.

예수 믿기 전에 가졌던 것을 다 앗아가시겠다면 우리로선 마땅히 군말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후에 온전한 믿음으로 당신께 받은 축복마저 빼앗으시니 문제입니다. 하나님은 주셔놓고 다시 빼앗아 가는 심술쟁이입니까? 언제 어디서든 당신 기분대로 막가는 개구쟁이입니까? 대체 왜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신자에게, 자신에게 아니라면 가까운 주위 성도 중에서라도 간혹 일어나는 것입니까? 그것도 우리가 잘 믿어서 현실적으로 형통하겠다는 불순한 의도라곤 추호도 없었는데도 말입니다. 거기다 주님의 사랑으로 물질과 기도와 말씀을 통해 불쌍한 이웃을 열심히 섬기고 있었는데도 말입니다.    

당신께서 주신 최고의 상급마저 다 내려놓으라고 하신다면 과연 무슨 뜻입니까? 다시금 제일 먼저 쉽게 떠오르는 해석이 무엇입니까? 당신이 주시는 상급도 당신보다 우위에 둘 수는 절대 없다는 것입니다. 나아가 당신이 주시는 상급만 기대하기보다는 오직 당신만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 기도도 현실적 정신적 영적 문제에 응답받는 것이 최종 목적이 아니라 그분과의 깊은 교제가 우선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는 우리 모두 몸에 완전히 배어있지 않다 뿐이지 익히 들어서 알고 있는 내용입니다. 또 그렇게 하려고 열심히 노력하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여기서도 쉽게 간과해버리는 의미가 또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받은 최고 좋은 것마저 당신께서 앗아가심은 사실상 최고로 큰 환난으로 다가옵니다. 그런 큰 환난 중에 자신에게 최고로 좋은 것마저 포기하고 하나님만 바라볼 수 있었다면 그 다음에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아무리 말도 안 되는 고난이 생겨도 그리 슬프거나 낙심치 않게 될 것 아닙니까? 바로 하나님이 신자가 현실적으로 믿음으로 도달해야할 종착지로 정해놓은 곳입니다.  

다른 말로 하나님 당신은 끝까지 신비와 경외의 대상인 절대자로 남겠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욥처럼 그분에게 고난의 이유를 따져봐야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또 그분이 말씀해 주어도 우리는 이해하지 못할 뿐입니다.

그렇다고 그분은 독선적인 절대자가 결코 아닙니다. 우리를 억지로 그곳으로 끌고 가지 않습니다. 절대적 주권을 가졌다고 해서 무조건 힘으로 강요하지 않습니다. 그분께 조금이라도 의심, 불만, 불신을 가지면 바로 벌주시는 분도 아닙니다.  

절대자라는 의미는 모든 면에서 완전하기에 언제 어디서나 한 치의 변함도 없다는 뜻입니다. 세상의 어떤 것으로도 영향 받지 않으며 스스로 영원토록 자존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규칙을 정해놓고 인간의 감정, 동의, 감사, 경배 없이도 무조건 힘으로 밀어붙인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당신의 거룩한 품성에 바탕을 둔 전지전능성이 영원토록 변개가 없기에 절대적인 것입니다. 한마디로 그 분을 제외한 모든 것은 다 변해도 당신만은 안 변한다는 것입니다.

믿음이 좋고 의를 잘 실천하고 있는 신자도 평생에 한두 번은 완전히 비참하게 무너지는 경우를 겪을 수 있습니다. 가진 것이 몽땅 없어지는 것으로 그치는 정도가 아니라 어쩌면 다시는 재기하지 못할 것 같이 여겨집니다. 깨어지고 깨어져 더 이상 깨어질 것이라곤 없도록 철두철미하게 깨어집니다. 또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는 것을 넘어서 앞으로 좋은 것이라곤 하나도 얻을 수 없을 것 같은 절망의 나락에 빠집니다.

결국, 하나님은 고난이 그치지 않고 쉴 새 없이 흔들리고 변하는 이 세상에서 신자로서 온전히 살아갈 수 있는 길은 주위 여건이 아니라 신자 자신이 흔들리지 않고 변하지 말아야 한다는 교훈을 가르쳐 주시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인생을 미리 자포자기해서 아무 감정, 미련, 염려 없이 살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말하자면 자신을 완전히 비워서 텅 비워진 채로 생을 마감하라는 뜻은 하나님께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신자가 이 땅에서 흔들리지 않는 길은 절대 흔들림 없는 당신만 붙드는 것임을 산 체험으로 알게 해준 것입니다. 자기 의지를 동원해 종교적 신념을 굳게 지키라는 것이 아닙니다. 신자가 더 내려 갈 데 없는 상황에서, 물론 올라올 계단조차 없어 보일 때에, 진정으로 겸비해져 가슴을 열고 하나님만 바라보면 당신의 진짜 당신다우심을 깨우치게 해주신다는 뜻입니다. 신자가 기도와 말씀 속에서 그분만 소망하면 그분의 놀랍고도 풍성하며 정밀한 은혜의 숨결을 세미하게 감지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성령 안에서 세상이 줄 수 없는 진짜로 고요한 평강이 임하도록 해주십니다.  

말하자면 신자에게 욥 같은 고난을 허락할 때에, 하나님은 신자가 속한 외부 영역을 깨트린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실은 신자의 내면을 오직 당신만 남기고서 완전히 다 부숴버린 것입니다. 믿고 난 이후에 받은 최고 축복마저 다시 빼앗아 가실 때에는 그 축복의 회수가 목적이 아니라 그것마저 당신만 바라보는 데에 최고, 최후의 장해물이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신자가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하든 완전히 발가벗은 상태에서 당신과 일대일로만 상대해주길 바랍니다. 왜냐하면 당신부터 완전히 벌거벗고서 우리를 일대일로만 상대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벌거벗는다는 것이 불경스런 표현이 아니라 신자에게 아무 것도 감추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아니, 그분은 태초부터 영원까지 진짜로 그냥 그분일 뿐입니다. 감춘다, 벗는다는 표현조차 그분에겐 전혀 타당하지 않지만 우리의 이해 수준에 맞추어 설명한 것입니다.

바꿔 말해 하나님과 신자 사이에는 기도와 말씀 외에는 아무 것도 남지 않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당신께서 당신의 당신다우심을 신자더러 온전히 알게 해주시려는 뜻입니다. 하늘에 속한 모든 것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신자더러 오직 성령의 인도를 받으며 성경말씀과 기도에 무시(無時)로 전념하라고 명하는 것입니다.

예수 믿고 난 후에도 두 번 다시는 생길 것 같지 않은 환난을 겪고 나면 이전과 달라지는 특이한 현상이 하나 있습니다. 이미 말씀드린 다른 고난들 쯤이야 고난으로 여겨지지도 않는다는 점은 인간 지정의에 비추면 너무나 자연스런 반응일 것입니다. 그보다 이제는 어떤 미세한 축복도 너무나 큰 은혜로 다가오기에 오직 감사밖에 나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 또한 신자로선 사실상 필연적 반응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이 다 깨어져 도무지 회생할 기미조차 안 보였는데 조금이라도 소망이 보이면 얼마나 소중하겠습니까? 죽었다 살아난 사람은 다시 숨을 쉬고 있다는 사실부터 가장 먼저, 가장 크게 감사할 것 아닙니까? 마찬가지로 절망의 맨 밑바닥에 떨어진 이후부터는 비록 그 고난이 그치지 않고 또 심해지고 있는 중이라도 주님이 주신 어떤 작은 은혜라도 몸에서부터 저절로 찬양과 감사가 우러나오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너무나 말도 안 되게 예수 믿은 후에 주신 최고의 축복마저 앗아가도 우리 속에 내주하신 성령님은 절대 철수하지 않습니다. 믿음의 뿌리는 완전히 죽이지 않고 남겨둡니다. 모든 현실적 축복을 다 잃어버리고 나면 신기하게도 그 뿌리가 도리어 더 견고해집니다. 이제부터 정말로 싱싱하고도 순수한 새싹이 새파랗게 하나씩 돋아납니다. 주님과 나만의 교제와 동행이 온전한 모습으로 새롭게 시작됩니다.  

자기 주위의 현실적 차원이 풍성해져야만 겨우 염려기 줄어드는, 아니 그것을 지키려 염려가 더 커가는, 세상 사람들로선 도무지 누릴 수 없는, 아니 알지도 못하는 신자만의 참된 축복입니다. 벌거벗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온전하고도 순수한 사랑 앞에 구원 받은 후에도 신자가 자기를 감추고 있던 모든 것을 다 벗어버리고 엎드리면 하늘로부터 온전한 위로와 평강이 임합니다. 최고의 상급까지 버려야만 얻을 수 있는 최고의 축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