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박진호컬럼

영적 침체의 실체 (요4:13,14)

새벽지기1 2017. 10. 28. 06:5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4:13,14)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는 신자는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물을 먹게 된다고 분명히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솔직한 실상은 어떠합니까? 예수님 지적대로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여전히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 증거와 훼방”(마15:19) 뿐인 것 같습니다. 살인, 간음, 도적질을 의도적으로 계획 수행한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산상수훈대로 마음속으로는 형제와 이웃에게 그런 범죄를 쉽게 저지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이 주시는 물을 마신다는 뜻은 일차적으로 그분을 믿어 구원 얻는 것을 말합니다. 또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도 신자 속에 영원토록 내주하시는 성령에 대한 은유입니다. 문자 그대로 삶의 기쁨과 보람, 또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찬양이 속에서 끊임없이 솟아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성령이 환각제, 마취제, 안정제 역할을 해서 신자로 종교적 광신자, 맹신자로 만드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럼에도 영원히 목마르지 않고 영생토록 솟아나는 성령이 내주하니까 최소한 그런 악한 마음은 안 들어야 할 것 아닙니까? 예수를 믿었으면 뭔가 달라도 달라야 할 것 아닙니까? 그 원인은 물론 성령의 역할이 약화, 제한, 침체, 퇴보, 한마디로 영적으로 메말라 있기 때문입니다. 또 그렇게 된 원인은 말씀과 기도에 등한히 했기 때문입니다. 그럼 역으로 따지면  말씀과 기도에 열심을 다하면 속에서부터 끊임없이 평강, 기쁨, 감사가 솟아나야 합니다. 그러나 여전히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럼 대체 어디에서 잘못된 것입니까?

그 이유는 영적 침체, 역으로는 영적 충만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도덕적 종교적 열매가 안 맺히면 영적으로 침체되었다고 너무나 단순하게 생각합니다. 예수 믿었으니 나쁜 일과 완전히 담을 쌓아야 하고 지속적으로 선한 일을 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직분을 맡은 부서는 부흥 성장해야 합니다. 자기 내면에서도 기쁨과 감사가 말 그대로 퐁퐁 솟아나야만 영적으로 침체되지 않았다고 믿습니다.

열매에 신경을 쓴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매사에 조급해질 수밖에 없다는 의미가 됩니다. 그러면 또 자기 어깨에 잔뜩 힘이 들어가게 마련입니다. 자기가 선행 봉사하고, 자기가 전도하고, 자기가 가르칩니다. 열심히 노력은 하지만 연약하고 어리석은 자기에게 의존한 것으로 그칩니다. 심지어 기도와 말씀도 성령님의 인도를 구하지 않았기에 아무리 간절한 마음으로 구하고 읽었어도 주님과의 교제가 아니라 종교적 행위를 한 것에 불과합니다. 결국 성령님의 역할을 스스로 제한하고선 열매가 없다고 실망하고 지치게 됩니다.  
    
참으로 아이러니한 결과입니다. 영적 열매를 맺으려 하다가 오히려 더 침체에 빠지니 말입니다. 그렇다고 예수님의 권면대로 우리는 가지이기에 포도나무이신 그분께 붙어 있기만 하면 됩니까? 이 또한 주님 특유의 은유입니다. 거기다 우리는 분명 믿었고, 우리 속에 성령님이 내주하시고, 현재 잘 믿고 있으니 그분께 붙어있는 것입니다. 떨어진 가지가 아닙니다.

침체(沈滯)란 문자 그대로 그 자리에 푹 주저앉아 꼼짝 안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어떤 것에든 묶인 상태입니다. 그런데 여기서도 문제는 꼭 나쁜 일에 묶여 있어야만 침체라고 간주하는 것입니다. 죄를 짓거나, 교회 생활에 소극적이거나, 개인 신앙생활에 나태한 것들만 침체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선하고 의로워 보이는 일이라도 그 일에만 계속해서 묶여 있다면 그 또한 침체입니다. 이를테면 나쁜 일에 빠져 있어야만 영적침체라고 간주하는 우리의 경직된 사고부터 영적으로 침체된 가장 손쉬운 본보기입니다.    

교회는 양적으로 성장해야 하고, 그러면 건물부터 확장해야 하고, 반드시 자체적으로 선교사를 훈련해서 파송해야 하고, 연초에는 특별새벽기도회를 해야 하며, 큰 교회에서 성공한 프로그램을 도입해야 하는 등 큰 부흥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침체가 교회 안에 얼마든지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도 분노, 시기, 질투, 탐욕, 습관적 죄, 게으름 등에 묶여있는 것 뿐 아니라 자신과 주님을 향한 스스로의 서약, 맹세, 결단, 계획, 등에 묶여 있는 것도 침체입니다.

명백히 악한 것은 물론, 아무리 겉으로 선해 보여도 한 자리에 오래 동안 아무 변화 없이 머물러 있다는 것은 영적으로 충만하지 않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입니다. 반드시 쇠퇴하거나 썩기 마련입니다. 쉴 새 없이 흐르는 물에 이끼가 끼지 않고 고기들도 살아 숨 쉴 수 있지 않습니까? 그렇다고 교회나 성도가 도덕적 종교적 영적인 일을 계속 활기차게 해야 한다는 뜻으로 되돌아가선 안 됩니다.

신자는 하나님이 이끄실 종착지에는 관심을 두지 말고 한 발자국이라도 그분과 함께 앞으로 나가야만 합니다. 아무리 선한 일을 해도 단지 열매를 목표하느냐 아니면 정말 주님의 인도대로 그분과 함께 선하게 전진하느냐의 차이입니다. 초점은 행동으로 나가기에 앞서 우리 마음부터 진짜 그래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말투를 잠시 흉내 내자면, “진실로, 진실로 이르노니, 매일 아침이 진짜, 진짜 새로운 아침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제와는 전혀 다른 오늘입니다. 그 오늘 말고 다시 오는 오늘이란 영원토록 없습니다. 신자는 날마다 순간마다 새로운 소망과 믿음과 성령 안에서 새롭게 생각하고, 말하고, 행해야 합니다.

새날에 대한 신자의 다짐은 불신자도 새벽마다 행하는 결단과 다릅니다. 우리에게는 진짜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주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신자의 오늘이 어제와 전혀 다른 까닭도 그분이 그것을 결코 원치 않으시고 반드시 앞으로 끌어주기 때문입니다.

신자는 주님께서 오늘 나에게 과연 어떤 새롭고도 오묘한 은혜를 부어주실지 날마다 더 강해진 소망 가운데서 잔뜩 기다리고 있어야 합니다. 그분의 은혜가 충만히 부어질 수 있도록 자신을 완전히 비워서 내어드려야 합니다. 물론 평소의 일상사나 소원하고 계획하는 바도 최선을 다해 수행하면서 말입니다. 하나님께선 내가 행하는 자유와 당신만의 절대적 주권을 합쳐 오늘도 경이로운 감동을 불러일으키리라 확신해야 합니다. 나의 현실상황과 상관없이 그분과의 내밀(內密)한 체험적 교제를 통해 참 생명을 날로 더 힘차게 누려야 합니다.
  
갈라디아서에서 성령의 열매를 어떻게 설명합니까?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갈5:22) 아닙니까? 이 중에 외적으로 드러나는 열매 즉, 선행, 구제, 봉사, 교회 부흥, 성전건축, 전도, 선교, 등은 없습니다. 우리 내면에서 성령이 역사하여서 정말 속에서 샘솟는 것들뿐입니다. 그것도 우리 어깨에서 완전히 힘을 빼고서 그분의 인도만 간절히 바랄 때에만 생기는 것들입니다.

또 신자가 완전히 손을 놓고 성령의 이끄심 만을 기다려야 하기에 이런 열매는 금지할 법이 없다고 말한 것입니다. 또 성령이 맺혀 주시는 것이므로 당연히 인간이 금지할 수도 없습니다. 예수님 말씀대로 포도나무 가지에 붙어있기만 하면 자동으로 열리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으로 치면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입니다.

말하자면 영적 침체에서 벗어나 성령의 충만한 인도를 받으려면 도덕적 실천이나 종교적 과업수행보다는 우리 마음부터 새롭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분의 신선함을 날마다 신선하게 받고 싶다는 우리의 신선한 소망과 열정이 앞서야 합니다. 아무리 영적 열매가 좋은 것이긴 해도 그 열매부터, 그것도 빨리 맺으려 하면 오히려 영적 침체에 빠지게 됩니다. 날이 갈수록 더 새로워지는 주님을 향한 소망 없이는 열매가 결코 생기지 않습니다.

바꿔 말해 자신에게서 도덕적 종교적 하자를 찾아내기 이전에 내가 지금 어디에선가 한참 동안 머물러 있지나 않는 지부터 살펴봐야 합니다. 요컨대 주님이 어디로 이끌든지 정말로 온전한 감사로 따를 준비가 되어 있는지부터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