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리민수목사

나를 본받는 자 되라! (고전11:1)

새벽지기1 2017. 6. 4. 08:04



본문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서론

 

사랑하는 여러분!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사람이 누군지 아십니까?

결심한 대로 사는 사람입니다.

언행이 일치하는 사람입니다.

자신을 본받으라고 하는 사람입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사도 바울입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살고 있다.

그러니 여러분도 나를 본받으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참 짧습니다.

하지만 내게는 가장 강렬한 말씀입니다.

그 어떤 설교 한편 보다도 도전이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혹시 인생의 롤 모델이 있습니까?

저는 몇 분이 있습니다.

하지만 제 인생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미친 성경의 두 인물입니다.

구약에서는 느혜미야입니다.

신약에서는 단연 사도 바울입니다.

그러면 사도 바울은 어떤 사람일까요?

나는 사도 바울은 ‘4(영성과 지성과 인성과 야성)을 갖춘 사람입니다.

저는 오늘 우리가 본받아야 할 사도 바울의 신앙과 인격,

-그리스도의 제자가 갖추어야 할 4-에 대하여 말씀을 전하고자 합니다.

 

본론

 

그러면 그리스도의 제자가 갖추어야 할 4은 무엇일까요?

첫째, 영성이 있어야 합니다.

 

영적 싸움은 보이지 않는 전쟁이며, 피흘리지 않는 전쟁이며, 목숨을 건 전쟁입니다.

다음은 C.S.루이스의 '스크루테이프의 편지'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언젠가 내가 맡았던 환자는 골수 무신론자(불신자)였는데

대영박물관에서 책읽기를 즐겼지?

그런데 하루는 책을 읽고 있던 환자의 생각이 영 잘못된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이 보이더라구.

아차하는 순간에 원수가 내 환자 곁에 바짝 달라붙었던 거야.

정신을 차릴 새도 없이 20년 동안 공들여 쌓아 온 탑이 통째로 흔들리기 시작했어.

그 때 이성을 잃고 논증으로 방어하려 들었다면 난 아마 완전히 끝장나고 말았을 걸.

하지만 내가 그런 바보 같은 짓을 할리가 없지.

나는 그 즉시 내가 제일 만만하게 쥐고 흔들 수 있는 부분을 건드리면서

점심을 좀 먹어야 할 때가 아니냐고 일러 주었다.

보아하닌 원수가 즉시 반격에 나서서,

이 문제는 점심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 같더구나.

하지만 나는 환자의 귀에 이렇게 속삭였지?

"중요하고 말고, 사실 이건 오전이 다 끝나 가는 자투리 시간에 생각하기엔 너무나도 중요한 문제야.

점심 먹고 개운한 머리로 다시 생각하자"고 얼른 덧붙여 주었지.

이미 전세가 내 쪽으로 확연히 기울여져 있었어.

(중략) 물론 그 환자는 지금 우리아버지 집에 안전히 거하고 있지>

이 글은 악마 스크루테이프가 조카 마귀이자 신참 마귀에게 양육용으로 보낸 편지 내용이다.

여기서 '환자'는 각자의 악마들이 맡은 '사람'을 나타내고 있으며

'원수'는 그리스도인을 뜻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영적 전쟁이 얼마나 치열한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입니다.

 

사도 바울은 서신서에서 우리에게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6:11)>”권면합니다.

이는 우리 믿음의 삶이 <신앙은 전투>라는 것입니다.

사단은 보이지 않는 존재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 보이지 않는 존재에 대하여 통찰한 사람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 사단의 정체를 분명히 밝혔습니다.

사도 바울은 사단의 정체를 맹수의 모습(벧전5:8-‘우는 사자’)

광명한 천사 모습(고후11:14-주로 진리를 가장한 이단들)

간교한 뱁의 모습(3:1-인간의 말초 신경을 자극하여 각종 쾌락의 유혹하는 존재)으로 나타난다고 했습니다.

영성의 핵심은 영적 분별력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성령의 세미한 음성에 항상 귀 기울여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음성에 민감하게 반응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의 삶과 사역 전반은 <성령에 이끌려 사는 삶>이었습니다.

사도행전16장 몇 절을 제가 읽겠습니다.

6<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9절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이르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

10절 바울이 그 환상을 보았을 때 우리가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

성령에 민감하지 않고는 결코 이해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2:2에서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권면했습니다.

영적 분별력은 성령이 사람만 할 수 있습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고전2:14)”고 했습니다.

 

느혜미야는 성벽건축을 방해하는 산발랏과 도비야의 온갖 공격을 물리칩니다.

하루는 므헤다벨의 손자 들라야의 아들 스마야가 느혜미야에게 이르기를

그들이 너를 죽이러 올 터이니 우리가 하나님의 전으로 가서 외소 안에 머물고

그 문을 닫자 저들이 반드시 밤에 와서 너를 죽이리라 하기로

내가 이르기를 나 같은 자가 어찌 도망하며 나 같은 몸이면

누가 외소에 들어가서 생명을 보존하겠느냐 나는 들어가지 않겠노라 하고

깨달은즉 그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바가 아니라(6:10-12)”

그렇습니다.

영적 분별력은 영적 전투에서 기본이 됩니다.

사도 바울의 사역의 기초는 그의 영성이었습니다.

우리도 영적 분별력이 있는 제자, 성령이 충만한 제자, 성령에 민감한 제자,

성령의 이끌림을 받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의 제자가 갖추어야 할 4은 무엇일까요?

둘째, 지성이 있어야 합니다.

 

말씀의 무지를 꼬집는 유머가 있습니다.

한 목사님이 어느 교회학교에서 설교를 하게 되었습니다.

목사님은 설교 전에 성경실력을 알아보기 위해 어린이들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여러분, 누가 여리고성을 무너뜨렸습니까?”

그러자 한 소년이 손을 내저으며 대답했다. ?

목사님, 저는 그 성을 부수지 않았는데요. 전 정말 모르는 일입니다?

그때 교회학교 교사가 당혹스런 표정으로 말했습니다.

목사님, 저 학생은 정말 착한아이입니다. 절대 거짓말을 할 아이가 아닙니다.”

목사님은 어처구니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교회학교 부장인 장로님이 점잖은 목소리로 용서를 구했습니다.

목사님, 우리 교인들 중에서는 여리고성을 부술 만큼 악한 사람이 없습니다.

차라리 우리가 힘을 합쳐서 다시 성을 쌓겠습니다?

하지만 정말 이런 일이 오늘 날 우리 교회 현실과 무관할까요?

 

지난 주 아침모임 중에 한 지체가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솔로몬왕이 자신의 왕궁은 13년에 걸쳐 크게 짖고

성전은 7년에 걸쳐 작게 건축한 것은 교만함 때문이 아닌가요?“(왕상6-7)

하지만 성전은 하나님이 정해주신 규격 대로 진것이지 일부러 작게 지은 것이 아닙니다.

작게 지었기 때문에 빨리 마친 것이고

궁전은 왕과 대신들이 집무해야 하는 곳이기에 크게 지은 것일 뿐입니다.

다시 말해서 솔로몬이 교만 때문이 아닙니다.

참으로 성실한 지체의 나눔이지만 사실 관계를 정확히 이해하지 못한 결과입니다.

 

저는 앞에서 영성을 가져야 하는 이유가

우리의 싸움이 영적 전투이기 때문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렇다면 영적 전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사도 바울은 그것을 바로 영적 무기인 말씀이라고 기록했습니다.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6:17)”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즘 많은 교회 청년들이 말씀보다 찬양 중심으로 예배하고 있는 모습이 조금은 우려 됩니다.

어느 목사님이 했던 말이 기억납니다.

<요즘 젊은 세 대 워싶 좋아해-그러나 십자가 이야기하면 모두 나간다.

그들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예배하고 있는 것이다.>

좀 심한 표현 같지만 저는 전적으로 공감합니다.

찬양은 열심히 잘 하는데 설교시간만 되면 졸거나 집중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알지 못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아십니까?

젊은 날 성경을 읽다가 청년 예수가 허무하게 십자가에 죽어가는 것을 보고

<예수는 실패한 메시야>로 낙인 찍고

자신을 <하나님께서 다시 보내신 메시야>라며 교주가 된 사람이 통일교의 문선명씨입니다.

신천지 이만희씨는 자신이 <보혜사>라고 공공연히 말하고 있습니다.

보혜사는 하나님(성령 하나님)입니다.

이 말도 안 되는 일들이 어떻게 일어날까요?

그것은 영적 무지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말씀에 대한 지성의 결핍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지적으로 탁월한 하나님의 종이었습니다.

유대교에 있을 때에는 유대교 최고 권위자인 가말리엘 문하에서 수업했습니다.

바울은 나는 유대인으로 길리기아 다소에서 났고 이 성에서 자라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우리 조상들의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고

오늘 너희 모든 사람처럼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이 있는 자라(22:3)”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사도 바울의 이 탁월함을 사용하셔서 신약 성경 13권의 서신서를 기록하셨습니다.

또한 사도 바울은 기독교 신학을 정립한 사람입니다.

예컨대 로마서에서는 구원론을, 에베소서에서는 기독론을, 고린도서에서는 교회론을 기록했습니다.

현재 전 세계 신학대학에서 강의 하는 신학 내용의 대부분은

성령의 감동을 받은 사도 바울이 정립한 것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제가 몇 가지 묻겠습니다.

예수뜻이 무엇인가요?

거듭남이 무슨 뜻인가요?

하나님의 의는 무슨 의미인가요?

대속’ ‘속량’ ‘구원’ ‘영생은 무엇인가요?

이것들을 신학생만 알아야 하는 교리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다시 묻겠습니다. 여러분은 성경을 얼마나 읽고 있습니까?

성경을 바로 알지 않고 믿음 생활을 하는 사람은

무사가 벼리지 않은 칼을 허공에 휘두르는 것과 같습니다.

영성과 지성을 갖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의 제자가 갖추어야 할 4은 무엇일까요?

셋째, 야성이 있어야 합니다.

 

아기 낙타가 어미 낙타에게 물었습니다.

<“아빠! 왜 우리는 등에 혹이 있어?”

응 사막을 다닐 때 목마르면 마시도록 물 저장소야.”

그러면 왜 눈썹은 긴거야?”

응 사막의 모래 바람을 막아주기 위해 조물주가 만드신 거야.”

그러자 아기 낙타가 아빠 낙타에게 물었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여기 있는거야?”

“............”>

 

몇 년 전 TV특집프로그램 중 동물관련 다큐멘타리가 생각이 납니다.

<돼지 젖을 먹는 호랑이><어미 호랑이와 돼지 새끼>이야기 입니다.

태국 방콕 인근에 있는 한 호랑이 동물원에서 있었던 일인데

사육사 말에 의하면 호랑이가 돼지 젖을 먹이는 이유는

호랑이가 온순해지고 돼지 젖이 호랑이 젖보다 영양이 풍부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 사실은 어렵지 않게 증명되고 있었습니다.

호랑이 우리에서 새끼 돼지가 함께 살고 있는 모습을 보여줬기 때문입니다.

정말 신기했습니다.

호랑이에게 있어서 새끼 돼지는 한 끼(?) 식사에 불과한 것인데,

단 한 번도 호랑이가 새끼 돼지를 해친 적이 없다고 합니다.

사육사는 그 이유를 어미 호랑이가 돼지 젖을 먹고 자랐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이 두 예화의 공통점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야성 상실>입니다.

낙타는 광야에 있어야 하고, 호랑이는 정글에 있어야 합니다.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 하고, 호랑이는 호랑이 젖을 먹어야 하듯이

크리스찬은 하나님 말씀을 먹어야 합니다.

 

요즘은 <꽃 미남> <꽃 중년> <훈남>이 인기지만

과거에는 <짐승남> <근육남> <야성적인 남자>가 인기였습니다.

하지만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그리스도의 제자는 <야성>이 생명입니다.

"한국교회를 지탱해왔던 야성(野性)과 역동성이 점점 떨어지고 있습니다.

청계산등 전국에 있는 기도원마다 밤에 기도를 얼마나 많이 했는지 아십니까?

삼각산 돌들이 반들반들해질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떻습니까?

그 곳은 지금 잡초들만 무성합니다.“

다음은 오래 전 서울의 어느 목사님이 한 말입니다.

한 마디로 한국교회가 '역동성''야성'이 떨어졌다는 것입니다.

교회 성장학자인 피터 와그너교수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이제 한국교회의 성장은 절망적으로 멈췄다!'

한국 교회은 이미 이렇게 야성과 역동성이 현저히 상실했습니다.

우리마저 시대적 사명을 포기하거나 방기한다면

우리 민족은 정말 소망이 없습니다.

 

수많은 믿음이 선배들은 이 광야에서 승리한 분들입니다.

요셉은 애굽이라는 광야에서 믿음의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다윗은 사울의 궁정이라는 광야에서 믿음의 승리를 쟁취했습니다.

다니엘은 바벨론과 페르시아라는 광야에서 승리했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수 많은 믿음이 선배들이 광야에서 치열한 싸움을 싸우고 있습니다.

감히 나를 본 받는 자 되라고 일갈한 사도 바울의 삶과 생애는

언제나 야성으로 충만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위해 결혼을 포기했습니다.

바울의 생애는 주로 객지나 타국이었습니다.

아시아는 그이 정원이었고, 지중해는 그에게 정원의 연못이었으며,

마케도니아와 유럽은 그에게 이웃 마을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11장에서 스스로 이렇게 간증하고 있습니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23-27)”

우리는 여기서 사도 바울이 아니라 전사 바울의 모습을 보게됩니다.

도대체 이것이 전도자 입니까?

아닙니다.

이것은 전사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이 야성(野性) 상실의 시대!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영성><지성>과 함께 <야성>을 가져야 합니다.

야성을 갖는다는 것은 야전성을 갖는다는 말입니다.

야전성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광야 정신>입니다.

우리는 온실의 화초가 아니라 광야의 거목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치열한 영적 광야에서 <그리스도의 전사>이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 그리스도의 전사로 거듭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의 제자가 갖추어야 할 4은 무엇일까요?

넷째, 인성을 갖춰야 합니다.

 

오늘 날 한국교회가 무너졌다고 합니다.

저는 그 이유가 바로 이 인성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 믿고 구원 받았다고 아멘’ ‘할렐루야하면서

세상 사람보다 더 인색하고, 불성실하고, 불경건한 삶을 살기 때문입니다.

목사라고 해서 믿었고, 장로라고 해서 믿었고, 집사라고 해서 믿었는데

그가 거의 사기꾼이었다면 이런 이야기를 듣는 불신자이 입장에서 어떻겠습니까?

억울하지만 오늘 날 세상이 보는 교회의 아픈 현실입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신앙만큼 중요한 것이 인성(인격)’입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에 대하여 <육신에 속한 자> 즉 영적 어린아이라고 책망했습니다.

영적 어린아이란 영적으로 미성숙한 것을 말합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하고 싶었던 말은 이것입니다.

너희가 예수 믿은지 벌써 수년, 수 십년이 되었는데 어찌하여 아직도 영적 어린아이냐?

도대체 언제까지 그렇게 영적 앉은뱅이처럼 살 것이냐?”는 책망입니다.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큰 말씀이 아닙니까?

캠퍼스 지체들의 스트레스 중 하나가 피티(presentation)입니다.

조별 발표 때 꼭 뺀질거리는 얌체가 있습니다.

아무 것도 안하고 차려진 밥상에 숟가락만 올려놓는 나쁜 친구입니다.

만약 나쁜 친구가 예수 믿는 사람이면 어떻겠습니까?

 

올해는 제가 본부 훈련원장으로 섬겼습니다.

다음은 내년 캠퍼스선교사가 될 훈련생들에게 입소식에서 한 말입니다.

<여러분! 이제 합숙이 시작됩니다.

아침에 일어나는 일 게으름 피지 마세요.

설거지 당번 한 번 더 하십시오.

회비가 있으면 가장 먼저 내십시오.

다른 동료 비방하거나 하지 마십시오.

비방하는 사람보다 더 나뿐 사람은 비방거리를 제공하는 사람입니다.

시간 약속 잘 지키십시오.

사역자는 무엇보다 인성이 우선 갖춰져야 합니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매주 화요일은 가지장 교육이 있는 날입니다.

모이면 먼저 식사를 하고 청소를 하고 교육을 합니다.

감사한 것은 자동적으로 누군가는 늘 싱크대에서 설거지를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누군가는 청소를 합니다.

누구하나 요령 피우는 사람이 없습니다.

저는 우리 가지장들이 신앙과 인격이 아주 훌륭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사도 바울의 인격은 어떠했을까요?

사도 바울의 인격은 대표적으로 빌레몬서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빌레몬서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우선 바울은 지금 로마감옥에 투옥된 상태입니다.

그 감옥에서 죄인 오네시모라는 사람을 만나 전도해서 제자를 삼았습니다.

알고보니 오네시모는 골로새 교회의 일꾼이자 제자 빌레몬의 종이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이 때 빌레몬에게 편지를 씁니다.

나 바울은 갇힌 중에 얻은 믿음의 아들 오네시모를 위해 그대에게 부탁합니다.

그가 전에는 그대에게 쓸모없는 사람이었으나 이제는 그대와 나에게 필요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내 심장과 같은 그를 그대에게 돌려보냅니다.

나는 기쁜 소식을 위해 내가 갇혀있는 동안 그를 내 곁에 두고 그대를 대신해서 나를 돕게 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대의 승낙 없이는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습니다.(10-14)“

이것이 사도 바울의 인격입니다.

예수 믿고 구원 받으면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오래전에 극장에서 상영된 의미 있는 영화 한편이 있습니다.

바로 <밀양>이라는 영화입니다.

줄거리는 이렇습니다.

<주인공 여자는 이혼 후에 초등생 아들과 함께 밀양으로 내려와 피아노학원을 합니다.

불행하게도 그 아들이 유괴를 당해 죽습니다.

나중에 범인은 잡혔고 감옥살이를 하게 됩니다.

범인은 옥중에서 예수를 믿고 신앙(?)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주인공도 예수를 믿고 교회에 나갑니다.

어느 날 주인공은 살인자(죄인)을 용서하겠다면 면회를 갑니다.

그런데 면회 간 여자에게 살인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이 나를 이미 용서하셨습니다며 묘한 웃음을 짖습니다.

주인공 아이엄마는 '허탈'에 빠집니다.

그 후 불의한 하나님이라며 미워하며 대적하고, 교회를 대적합니다.

그리고 온갖 나쁜 짓 다 해가며 살아가는 내용입니다.

이 한편의 영화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적지 않습니다.

 

이 영화는 오직 예수! 오직 믿음을 외치면서 비인격적인 삶을 사는 성도!

주여! 주여! 하면서 사람에 대해서는 어름보다 차갑게 대하는 성도!

교회에서는 왕노릇하면서 밖에서는 찌질한 성도!

교회에서는 온 몸을 던져서 헌신하면서 가정을 소홀히 여기는 성도!

이 영화는 이들에 대한 경고의 영화이기도 합니다.

여러분! 대신관계와 대인관계는 분리된 것이 아닙니다.

신앙과 인격은 별개가 아닙니다.

잘 못된 인격을 가진 사람이 예수를 믿으면 고등사기꾼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도 바울의 인격적 신앙을 본 받아야 하는 이유입니다.

 

결론

 

결론을 맺겠습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그렇습니다.

사도 바울은 깊은 영성이 있는 그리스도의 종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말씀에 대한 풍부한 지성이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온 세계를 정복하는 전사처럼 누비는 야성을 소유했습니다.

게다가 사도 바울은 <인격>적으로도 훌륭한 주의 종이었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에게도 이 4성이 필요합니다.

우리도 영성과 지성과 야성과 인격을 소유한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