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
지난 한 주간 캠퍼스에서 치열한 영적전투를 치르고 개선한 동역자 여러분을
주님의 이름으로 격려하고 축복합니다.
오늘 설교 제목이 ‘신앙의 배수진을 치라!’입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다시피 배수진은
기원전 200년경 중국 한(漢)나라 대장군 한신이 조나라를 공격할 때 사용한 전술입니다.
당시 한나라군은 조나라 군대에 비해 상대적으로 열세였는데
한신은 강을 뒤로하고 진을 쳤습니다.
달아날 길이 막힌 부하들이 죽을힘을 다하여 싸워 강한 적군을 격파하했습니다.
전투가 끝난 후, 한신은 모든 장군들과 함께 승리를 축하연을 베풀었는데
한 장군이 한신에게 물었습니다.
"병법에서 말하기를, '진을 칠 때에는 산이나 언덕을 오른편에 두거나 뒤에 두어야 하고,
강과 연못은 앞이나 왼편에 두어야 한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장군께서는 저희들에게 강물을 뒤에 두고 진을 치게 하셨으니,
이것은 무슨 전술입니까?"
한신은 웃으면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장군들, 이것도 병법에 있는 것인데, 그대들이 주의해서 보지 않았던 것뿐이오.
'사지에 몰아 넣은 후에야 살게 되고, 망할 지경이 되어서야 존재하게 된다'는것 말이요.
이번 전투는 길거리에 있는 백성들을 몰아다가 싸우는 것과 같았기 때문에,
이런 형세에서는 그들을 사지에 몰아 넣어 스스로 싸우게 하지 않고,
빠져나갈 수 있는 곳에 있게 하였다면 모두 달아나 버렸을 것이오."*
그런데 이 '背水陣 전법'이 오늘 본문과 어떤 관계에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신앙의 자세’와 관련이 있습니다.
눈을 감고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앞에는 40년전 이스라엘 정탐군들이 보고 떨었던 견고한 성 여리고가 있습니다.
뒤에는 곡식을 거두는 철이 되어 강둑이 넘치는 요단강이 흐르고 있습니다.
우리 인생가운데도 이와같이 사방이 가로막여 있을 때가 있을 수 있습니다.
어쩌면 그 때가 바로 지금일지 모릅니다.
이 때 우리가 가져야 할 신앙의 태도가 바로 ‘신앙의 배수진’입니다.
◆본론
그러면 성도가 배수진을 친 신앙의 자세를 어떻게 견지해야 할까요?
▶첫째, ‘퇴로가 차단된 신앙’으로 살아야 합니다.
오래 전에 호국의 달을 즈음에서 ‘전우’라는 드라마를 방영한 적이 있습니다.
그 드라마에서 이태란이라는 배우가 맡은 역할이 바로
아군(인민군) 중 전선에서 이탈하는 병사를 사살하는 임무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퇴로를 차단’하는 임무를 맡은 것입니다.
퇴로를 차단 당한 부대는 ‘전멸’을 하든지 ‘기사회생’을 하든지! 둘 중의 하나입니다.
오늘 본문 상황은 어떻습니까?
여호수아서3장 15절을 보면
‘요단이 곡식을 거두는 시기에는 항상 언덕에 넘치더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시말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앞에는 여리고성이
뒤에는 넘치는 요단강이 흐르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퇴로가 차단 된 상태’입니다.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은 완전히 퇴로를 차단 당한 상태에서
‘할례를 행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이 받았던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저는 대학1학년 2학기 때 캠퍼스에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1년 선배가 저에게 복음을 전했는데 그 때 주님을 영접한 것입니다.
지금도 생각하면 그 분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그 해는 제게 있어서 인생의 BC와 AD의 분수령이 되는 해이기도 합니다.
제가 믿음 생활을 한지 꼭 1년이 지났을 무렵!
아버지께서 제가 예수 믿는 것을 아시고 강력한 제동을 거셨습니다.
-예수를 택하든지 내 말에 순종하든지 하라!-
만약 아버지 말씀을 듣지 않고 계속 예수를 믿겠다면 ‘학비’를 모두 끊겠다는 것입니다.
일종의 협박(?)이기도 했지만
그 당시 저희 가정은 대학을 다닐 경제적 형편이 되지 못했습니다.
일년 동안 아버지께서는 저 뿐 아니라
제가 있을 때는 가족 어느 누구에게도 말씀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아버지가 아들의 의지를 꺽기 위해 ‘침묵 시위’를 하셨던 것입니다.
저는 그 때까지 한 번도 아버지의 말씀에 불순종한 기억이 없습니다.
하지만 그때 내게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는
‘효 불효’의 문제가 아니라 ‘생명’의 문제였습니다.
나는 결코 ‘예수’를 포기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학비가 끊겼습니다.
하지만 그날부터 저는 ‘믿음의 배수진’을 쳤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비록 당시 초신앙이었지만 하나님께서 도우시리라는 ‘기도 응답의 확신’이 있었습니다.
그 때 제게 주신 말씀이 바로 요14:14입니다.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시간 관계상 결론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주님께서는 제가 다니던 대학에서 두명 선발하는 군장학생에 합격시켜 주셨습니다.
2
놀랍게도 주님께서는 제게 학비 뿐만아이라 생활비와 용돈 모두를 해결해 주셨습니다.
할렐루야!
그 후 아버지와의 관계는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일년 후 제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만 예수 믿고, 가족들에게는 전도하지 마라!-였습니다.
하지만 그 후에 제 동생들 대부분이 예수를 믿었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기독교 역사가운데 믿음 안에서 승리한 사람들은 모두가
이렇게 믿음의 배수진을 치고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히브리서10장39절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뒤로 물러가 멸망에 빠질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
절대 절명의 상황!
사면 초가의 상황!
이런 상황은 특정한 사람에게만 다가오지 않습니다.
인생의 누구에게도 이런 상황은 닥칠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 때 우리는 결단해야 합니다.
‘퇴로가 차단 되었을 때가 하나님의 기회’이기 때문입니다.
▶성도가 배수진을 친 신앙의 자세를 어떻게 견지해야 할까요?
둘째, 불가능한 명령도 ‘순종’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여호수아에게 내린 명령은 바로 ‘할례를 행하라!’는 것입니다.
본문2절을 읽겠습니다.
‘그 때에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너는 부싯돌로 칼을 만들어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다시 할례를 행하라 하시매’
성경은 많은 부분이 ‘불가능한 명령’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예컨대 아브라함에게 100세에 낳은 아들을 모리아산 제단에 바치라든지
모세에게 홍해를 건너라든지 여호수아에게 넘치는 요단을 건너라든지 말입니다.
본문 말씀도 어쩌면 ‘불가능한 명령’일 수 있습니다.
지금 이스라엘 앞에는 견고한 성 여리고가 있습니다.
이성은 그들의 아버지세대가 두려워했던 성입니다(민13장).
그리고 뒤로는 ‘넘치는 요단강’이 있습니다.
이제 퇴로는 차단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상황에서 하나님께서는 ‘할례를 행하라!’는 것입니다.
할례는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임을 표시하는 행위입니다.--골2:11
하지만 할례를 행하는 일은 현실적으로 최소 ‘7일정도’ 감래해야 하는 고통이 따릅니다.
이것이 당시 군사전략적 측면에서 얼마나 ‘비상식적이고 어리석은 일’인지
우리는 창세기34장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3
야곱이 하란에서 귀향하던 중 세겜땅에서 잠시 체류하고 있을 때
야곱의 외동 딸 디나가 산책을 나갔다가 세겜 추장에게 강간을 당하고
야곱에게 디나와 결혼을 요구 했을 때
시므온과 레위가 할례를 조건으로 수락한 후
할례 후유증으로 고통당하던 세겜 남자들을 모두 죽인 사건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두 가지 사 실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는, 하나님은 우리에게 가능한 명령을 내리실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명령은 ‘믿음’으로만 할 수 있습니다.
또 한가지 사실은 ‘하나님의 방법’과 ‘세상의 방법’은 다르다‘는 사실입니다.
고린도전서1:25을 보면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다‘
고전1:27-29에도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그래서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고전1:18)’
하나님께서 할례를 명하신 이유는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임을 표시하기 위한 것이기도 했지만
한 가지 이유가 더 있다고 봅니다. 그것은
-너는 나만 의지하라!-이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이 부당한 명령에 순종’했습니다.
본문 3절을 읽겠습니다.
‘여호수아가 부싯돌로 칼을 만들어 할례 산에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할례를 행하니라’
할렐루야!
사랑하는 형제자매여러분!
신앙은 바로 ‘불가능해 보이고’ ‘무모해 보여도’
그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명령이라고 여겨지는 순간!
믿음으로 즉각 순종해야 합니다.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도가 배수진을 친 신앙의 자세를 어떻게 견지해야 할까요?
▶셋째, ‘주님의 도우심을 확신’해야 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과연 이스라엘 백성들은 넘치는 요단강을 건너고
여리고 앞에서 할례를 행할 때 두려움이 없었을까요?
이 세상에 그런 인생은 없습니다.
우리의 믿음의 선배들은 두려움이 없어서 박해도 이겨내고
순교도 한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착각입니다.
신앙은 두려움이 없는 것이 아니라 두려움을 내려놓은 것입니다.
신앙은 부담감이 없는 것이 아니라 거룩한 부담감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떻게 그 두려움을 극복했을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도우심에 대한 확신’이었습니다.
지금 본문에 나오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굽 2세대입니다.
그들은 두 가지 경험을 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에 대한 경험입니다.
그들은 부모세대로부터 하나님께서 홍해를 어떻게 건너게 하셨는지
광야에서 어떻게 입히고 먹이셨는지
요단 동편에서 아모리 족속을 어떻게 멸하셨는지 똑똑히 듣고 보았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아버지 세대의 실패에 대한 교훈입니다.
아버지 세대의 특징은 ‘불순종’과 ‘불신앙’이었습니다.
그들은 언제나 입에 ‘원망’을 달고 살았습니다.
민수기 이야기가 바로 그 이야기 아니겠습니까?
그들은 적어도 ‘나는 부모세대처럼 살아서는 안 되겠다’ 그런 결심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에 대한 확신’입니다.
그들은 그 확신으로 요단을 건넜고
그 확신으로 할례를 행했고, 그 확신으로 여리고를 정복했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영적 전투에는 놀라운 법칙이 있습니다.
사단은 약자에게 강하고 강자에게 약하다는 것입니다.
40년 여리고성은 분명 요새였습니다.
열두 정탐꾼들이 보고했던 것처럼
여리고 거민들이 보기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메뚜기 같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지금도 그렇게 생각할까요? 본문 1절입니다.
‘요단 서편의 아모리 사람의 모든 왕과 해변의 가나안 사람의 모든 왕이
여호와께서 요단 물을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서 말리시고 우리를 건네셨음을 듣고 마음이 녹았고 이스라엘자손들의 연고로 정신을 잃었더라‘ 할렐루야!
40년 전이나 지금이나 상황은 변한 것이 없습니다.
여리고 성도 그대로였고 하나님도 그대로였습니다.
다만 달라진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의 태도’입니다.
불순종과 불신앙과 원망의 세대인 부모들과
믿음 안에서 순종으로 살기로 결단한 아들세대의 차이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여러분!
신앙은 다시 말씀드리지만 ‘영적 전쟁’입니다.
우리의 영적 싸움에도 분명한 ‘실체’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또한 우리의 유일한 병기는 ‘곧 하나님의 능력(성령의 능력)’이라는 사실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고린도후서10장 4절
‘우리의 싸우는 병기는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 앞에서 견고한 진을 파하는 강력(=하나님의 능력=성력의 능력)이라(고후10:4)'
그러나 무기만큼 중요한 것은 ‘믿음의 확신’입니다.
성도가 가져야 할 확신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사도 바울이 고백한 확신 바로 그것입니다.
로마서8장 38-39절입니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정말 귀한 것은 이런 하나님에 대한 확신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도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넘치는 요단강에도 담대하게 나갔고
여리고 앞에서도 담대하게 할례를 행했습니다.
그들은 드디어 여리고를 정복했고
나아가 ‘언약의 땅’ 가나안을 정복했던 것입니다.
◆결론
결론을 맺겠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신앙은 ‘영적 전쟁’입니다.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입니다.
따라서 여호와의 전쟁은 ‘두 가지 전제 조건’이 따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과 ‘믿음으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신앙은 바로 이것입니다.
앞에는 태산이 있고
뒤에는 넘치는 강이 있어서
의지 할 곳이라고는 오직 한 분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을 때!
바로 그 때 그 분에 대한 확신으로 서는 것입니다.
신앙의 배수진을 치고 살아가는 믿음의 제자!
날마다 그 믿음으로 승리하는 제자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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