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잘찌라도 마음은 깨었는데 나의 사랑하는 자의 소리가 들리는구나
문을 두드려 이르기를 나의 누이, 나의 사랑, 나의 비둘기, 나의 완전한 자야 문 열어 다고
내 머리에는 이슬이, 내 머리털에는 밤 이슬이 가득하였다 하는구나 (아 5:2)
Ⅰ. 본문해설
이 아가서는 솔로몬의 작품으로, 솔로몬이 술람미 여인과 나눈 사랑의 경험을 시의 형태로 엮은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히 남녀상열지사만을 다룬 노래가 아닙니다. 성경 모든 책들 가운데 가장 뛰어나게 사랑에 대해서 묘사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그 남녀의 사랑을 통해서 교회와 그리스도 사이에 맺은 언약관계, 그리고 그 끊을 수 없는 사랑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가서는 신랑의 노래가 나오고, 신부의 노래가 나오고, 또 신랑의 노래가 나오는 이런 교창식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우리가 읽은 바로 앞에서는 신랑의 노래가 나왔고 우리가 읽은 이 부분은 다시 신부의 노래가 나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부분에서 신부는 왜 그런지 신랑이 멀리 떠나간 상태에서 홀로 잠들어 있습니다. 이 신부를 각 신자 한 사람 한 사람의 거울이기도 하고 보다 더 공동체적으로는 교회라고 하는 커다란 그리스도의 몸의 한 예표로 볼 때 여기 나오는 잠들어있는 신부의 모습은 잠자는 성도 그리고 교회 역사 속에서 쉽게 잠드는 교회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Ⅱ. 잠자는 성도
어느 시대든 교회는 이처럼 깊은 잠에 빠지기를 좋아했습니다. 잠시 깨어난 때가 있지만 그 시기가 지나고 나면 자극은 사라지고 마치 잠자기 위해 태어난 것처럼 그렇게 잠드는 것이 교회의 처지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어느 시대에도 그 교회가 완전히 잠들도록 내버려 두신 적은 없습니다. 어떤 때는 깊이 잠들고 어떤 때는 살짝 잠이 들지만 어느 때도 하나님이 모든 교회가 완전히 잠들도록 버려두시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어느 교회든지 깨어있는 소수의 성도들이 있어서 그들에 의해 신앙의 본질들이 경험되고 또 그것들이 말과 글로 잘 정리되어 당대에 선포되고 후대의 사람들에게 남겨져서 오류가 가득한 세상에서 신앙의 참된 본질을 찾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 성도 개개인에게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언제 여러분들이 주님을 만나고 회심하셨습니까? 여러분들 중 어떤 분들은 1년 2년도 안 된 분들도 있지만 어떤 분들은 회심하고 30년, 40년 혹은 50년의 세월이 흐른 분도 계실 것입니다.
그러면 그 긴 세월동안 항상 깨어있었는지 여러분들의 믿음 생활을 돌아보십시오. 그러면 여러분들은 여러분들의 신앙생활의 많은 날들 안에서 여러분들은 잠들어 있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교회는 나오지만 영혼은 잠들어 있어서 진짜 생생하게 깨어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속에서 활발하게 뛰어놀며 주님을 섬겼던 때는 회심하고 살아온 날들 중에서 아주 적은 날들이었다는 사실들을 실감나게 깨닫게 될 것입니다. 오늘 여기에 보면 신부가 왜 그런지 신랑이 없어져 버렸는데도 잠들어 있는 장면이 나옵니다. 여기서 우리는 잠자는 성도의 마음이 어떤 것인지 보여주고 싶어 하시는 우리 주님의 섭리를 봅니다.
Ⅲ. 잠자는 성도의 마음
영혼의 침체라고 하는 것은 바로 이렇게 영혼이 잠들어 있는 것을 가리킵니다.
A. 영혼의 침체: “내가 잘지라도”
영혼의 침체는 이전에 가지고 있던 생생한 영적 생명력과 활기를 잃어버리고 영적인 활동이 무기력해져서 하나님의 사랑, 용서, 영광에 대한 감각으로부터 멀어진 상태를 가리킵니다. 이런 영혼의 침체 안에서 신자는 하나님께 싫증을 내게 되고 육체적으로는 하나님을 섬기기에 게으른 삶을 영위하게 되는 것입니다. 신부는 한 때 신랑과 완전히 합치되어 있는 뜨거운 사랑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무슨 이유때문인지 몰라도 신랑은 신부에게서 멀어졌고 그랬는데도 이 신부는 누워서 잠을 청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육체의 생활에 있어서 죽음과 가장 유사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잠입니다. 살아 있는 동안은 우리의 몸이 한 편으로는 자기를 유지하기 위해서 계속 활발하게 이 안에서 신진대사 작용을 하고 또 밖으로는 우리의 눈과 귀 코와 혀 그리고 우리의 살갗을 통해서 외부의 세계와 접촉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접촉한 외부의 많은 사물들에 대한 정보와 지식이 오관을 통해서 우리에게 들어오게 되고 그 때 사랑과 미움 분노와 슬픔 이런 것들을 느끼면서 우리가 이 일도 하고 저 일도 하게 되는 것이 육체가 살아 있는 상태입니다. 그러나 죽으면 이 모든 기능이 일시에 멈춥니다.
그러나 수면 상태도 비슷합니다. 수면에 들어가게 되면 최소한의 육체를 유지할 수 있는 생명의 조절작용만 이루어지고 나머지 활동은 모두 멈추게 됩니다. 10시간 동안을 열렬하게 일하는 사람은 음식을 섭취하지 않고는 일할 수 없지만 10시간 동안 등뼈가 아프도록 잠을 자는 일은 안 먹고 안 마셔도 가능한 것입니다. 이게 영혼의 죽음과 영혼의 잠과 아주 유사한 것입니다. 우리의 영혼이 활발하게 움직여서 하나님을 찾고 은혜에 참여하고 열심히 선한 일을 하면서 하나님을 섬기노라면 양식을 끊임없이 공급받지 않고는 영혼도 그 일을 행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오랫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먹지 않고도 넉넉히 살 수 있고, 오랫동안 하나님의 은혜가 심령을 변화시키는 기쁨이 없어도 능히 살아갈 수 있는 이유는 영적으로 활동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 여러분들이 생애적으로 주님을 만나고 아무리 기름진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기뻐한다고 할지라도 여러분들이 끊임없이 영혼이 움직여서 하나님을 향해 살아있는 행동으로 주님을 섬기는 삶을 살지 않으면 얼마 지나지 않아서 하나님의 말씀의 양식을 섭취하고 싶은 이 영적인 욕구가 감퇴되거나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진정으로 산 것이 아닙니다. 육체의 죽음은 숨이 끊어지고 모든 활동이 멈추는 것이 죽음입니다. 그러나 영혼의 죽음은 개념이 틀립니다. 신자의 영혼이나 불신자의 영혼이나 어떤 상황에서도 인간의 영혼은 멸절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영혼에게 있어서 살아있다고 하는 것은 작용이 멈추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께로부터 끊임없이 진리와 성령 안에서 영적 생명을 공급받고 영적 생명을 공급받을 때 창조의 목적에 합당하게 주님을 위해서 선한 일을 행하며 하나님을 사랑하며 이웃을 사랑하며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만일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져서 이런 영적인 생명력이 사라지게 되고 아주 결핍되게 되면 그 다음에 영혼은 죽어있는 상태가 됩니다. 그런데 이 죽어있는 영혼은 하나님을 향해서는 죽어있어도 자기의 육체를 향해서는 놀랍도록 살아있고 큰 힘을 발휘하게 됩니다. 죄는 은혜가 사라진 것이 곧 죄입니다. 죄에 빠지기 위해 별도로 노력할 필요는 없고 은혜를 못 받고 성령과 진리로부터 멀어지면 그는 죄에 사로잡힌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 때 그는 영혼이 죽은 상태에서 수많은 욕망을 따라서 잘못된 행실들을 낳게 되는데 이것을 가리켜서 성경은 죽은 행실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영혼의 침체는 바로 이러한 커다란 문제들을 가지고 오게 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내가 무슨 죄를 지었냐고 묻지 마십시오. 성경은 여러분들이 짓는 죄에 대해 관심을 갖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들이 충만한 하나님의 생명을 가지고 그 진리와 은혜 안에서 살아있는 삶을 사는 것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만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를 구원해 주신 의도대로 생활할 수 있는 것이죠.
B. 마음의 감각
이렇게 이 신부는 한 때는 신랑을 뜨겁게 사랑하고 그 없이는 도저히 살 수가 없었는데 지금은 신랑이 어디에 갔는데도 그가 어디에 있는지 모르는데도 잠들 수 있는 신부가 되었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향해 한 번도 마음이 바뀌시거나 우리를 버리시는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의 신부인 우리는 순간순간 그 마음을 지키지 않으면 그 신랑을 배반하고 버리고 그리고 잘못된 길로 갑니다. 바로 이 술람미 여인이 오늘 잠들고 있는 모습이 그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성경에 보면 이 여자가 노래하기를 “내가 잘 찌라도 마음은 깨었는데”라고 노래합니다. 그러니까 잠들기는 하였지만 완전히 편안하게 마음까지 충분한 휴식을 취하고 있지는 못한 장면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가 예수 믿기 전에 구원받지 못한 사람일 경우에는 그러시지 않았지만 예수를 믿고 구원받은 순간에 하나님이 우리 영혼을 새롭게 창조하십니다. 이렇게 새 창조에 버금가리만치 하나님이 우리의 영혼을 새롭게 만드시면 하나님께서 놀랍도록 우리에게 세 가지 감각에 눈뜨게 해주십니다. 하나님의 사랑, 그리고 하나님의 지극한 영광, 나 같은 죄인을 용서해주셨다는 사죄에 대한 감각이 그것입니다.
그러한 감각은 영혼이 은혜를 많이 받고 말씀의 공급을 받으면서 생생하게 하나님과의 교제를 누릴 때에는 극도에 달하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얼마나 높고 위대하신 분이신지에 대해서 충분하게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읽거나 혹은 자신의 생활을 돌아보거나 심지어는 찬양을 부를 때조차도 하나님은 온 땅과 만물 위에 지극히 뛰어나고 높으시며 아주 아름다우신 분이시고 자신은 아주 미천한 존재라고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그 분 앞에 복종하고 사는 것이 참 행복이라고 그렇게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신자가 성령 충만한 가운데 살면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생생한 감각을 갖게 됩니다. 이천년 전에 나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 예수의 그 고난 때문에 나 같은 죄인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그 큰 은혜를 오늘 현재적으로 내가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을 때에도 나 같은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그 큰 사랑을 경험하고 그리고 생생하게 그 은혜와 사랑에 감사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자기 같은 인간을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충분히 느끼게 되고 그 사랑 때문에 자기의 마음에 이해가 가지 않는 모든 환경과 삶의 질서들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자기와 같은 죄인이 용서 받았다고 하는 생생한 감각이 성령 충만한 은혜 생활가운데 생생하게 유지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자기 같은 죄인을 용서해주신 은혜 때문에 자기는 아주 무가치한 존재이고 하나님만이 영광을 받으셔야한다는 소명감을 느끼게 되는 것이에요.
그러나 신자가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멀어지고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이 그 영혼에 아주 분명하게 영향을 끼치는 이 영적 생활이 사라지게 되면 신자의 마음은 굳어지고 신자의 정신은 아주 혼란스러워지게 됩니다. 그래서 영혼의 침체에 빠졌을 때 우리의 머리는 꼭 쓰레기통과 같아집니다. 가치 있는 것과 없는 것, 하나님의 것과 사람의 것, 영적인 것과 육체의 것, 버려야할 것과 붙잡아야 할 것들이 뒤엉켜서 무엇이 중요하고 무엇이 덜 중요한 것인지 모르게 되어서 우리 속에서 쓰레기통과 같이 존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혼의 침체에 빠진 사람에게 뭘 물어보면 항상 하는 말이 “몰라”입니다. 하나님이 당신을 기뻐하실까요? 잘 모르겠는데요. 당신은 왜 열렬히 기도를 못하고 있습니까? 잘 모르겠습니다. 당신이 어떻게 살아야지 주님께 기쁨을 드릴 수 있을 까요? 하나님이 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기까지 하시면서 당신 같은 사람을 구원하셨을까요?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은혜에 충만하게 되면 이런 것들이 아주 질서 있게 정렬이 됩니다. 이것은 가치가 없는 생각, 이것은 비본질적인 것, 이것은 매우 중요한 것, 이것은 목숨 버려도 붙들어야 될 것, 그리고 이것은 내가 행하지 않아도 될 일들이 분명하게 딱 정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영혼의 침체에 빠지게 되면 이러한 생생한 감각들이 사라집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이 나를 버리셨다. 나는 그리스도 예수에 의해 버림받고 내팽개쳐졌다고 하는 느낌이 들게 됩니다. 말씀을 들어도 옆에 있는 성도들은 눈물을 흘리며 주님을 만나는데 나의 마음에는 찬바람이 붑니다. 옆에 있는 사람은 주님의 말씀을 듣고 말할 수 없이 감격하고 기뻐하는데 나는 짜증이 납니다. 그 때에 저는 사랑하시고 나는 하나님이 버리셨다는 느낌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상황이라도 그리스도는 교회도 성도도 버리시는 법이 없습니다. 언제나 버리고 떠나가는 것은 교회요, 신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보라 내가 세상 끝날 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몸은 주님이 거하시는 성전입니다. 은혜가 사라지고 진리로부터 멀어지게 될 때에 신자의 마음은 신랑을 향한 간절한 사랑을 상실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 여자처럼 신랑이 없는데도 찾으러 갈 생각도 안하고 잠을 잘 수 있는 마음이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렇지만 어떤 경우에라도 신자의 마음은 완전히 잠들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인간에게 빈 잔과 같은 마음의 공허함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술 마시고 춤을 추고 노래하고 극도의 향락에 빠져보아도 채워질 수 없는 것들입니다. 인간은 신자이든 불신자이든 하나님 당신 자신으로 영혼을 창조하셨기 때문에 영혼은 끊임없이 육체에 갇혀서 자기가 본래 왔던 하나님의 품을 그리워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인간 본연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복음의 빛이 비추기 전까지는 자기 안에 이런 목마름이 있지만 이것이 무엇 때문에 생기는 것인지는 모릅니다. 그게 쾌락인줄 알고 재밌게 놀고 취하고 때로는 죄를 지으면서 까지 극단의 향락으로 달음질치지만 그 순간이 끝나고 나면 더 깊은 공허함이 영혼을 휩싸 그는 우주 공간에 홀로 내동냉이 쳐진 것 같은 무서운 두려움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신자의 마음 안에 있는 이 영혼의 빈 잔은 세상에 있는 것들로는 절대로 채워지지 않습니다. 영혼의 침체에 빠졌다고 해서 하나님이 단번에 그에게 벼락을 내리시거나, 죽여 버리시거나, 사업이 도산하게 하거나 하시지 않습니다. 때로는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떠나서 영혼이 깊은 잠에 빠졌는데도 그 사람의 삶에는 계속해서 번영이 있을 수 있습니다. 마치 니느웨로 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다시스로 간 배를 탄 요나가 한동안 순풍에 돛 단 듯이 항해하는 뱃전에서 즐거워하였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신자의 영혼은 아무리 깊은 잠에 빠져도 그리고 외적으로 번영이 있고, 평화가 있어도 마음에 진정한 안식은 찾지 못합니다. 오늘 이 신부가 신랑이 사라지고 잠들었지만 그러나 마음까지는 잠들지 못해서 그렇게 불안한 가운데 잠들어 있는 것처럼 신자도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그런 사람들입니다. 여러분 중 어떤 분들은 “내가 지금 곤고한 것은 불경기 때문이다. 장사만 잘되면 행복할 텐데“라고 말할지 모릅니다. 여러분들 가운데 어떤 분들은 우리 아내만 건강하다면 우리 집에 무슨 근심이 있을까라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은 진정으로 우리 영혼의 쉼과 완전한 만족의 궁극적인 원인이 아닙니다. 우리의 지난날들의 신앙생활을 생각해보십시오.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께 붙어있고 그리스도를 뜨겁게 사랑하고 그분과의 생생한 은혜의 교제 속에서 생활할 때 그 때 우리가 항상 돈 많고 건강하고 주위에 속상한 일 없이 태평성대를 누리며 살았습니까? 아닙니다. 때로는 견디기 힘든 고통 속에서 핍박을 받거나 사랑하는 사람을 죽음 저편으로 떠나보내기도 했습니다. 때로는 믿었던 사람으로부터 배신을 당하고 견딜 수 없는 슬픔을 경험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 앞에 깨어 있고 생생한 하나님과의 은혜의 교제 안에 살 때에는 이 모든 인생의 풍랑과 괴로움들이 예수님의 품으로 이끌어 가는 도구가 되었습니다. 그 풍랑을 인하여 주님 안에 있는 안식을 더 그리워하고 사랑하게 되었고 그래서 우리는 시인처럼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입니다. 고난당하기 전에는 제가 그릇 살았지만 고난을 경험하고 난 후에는 제가 주님의 율법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많은 고통의 순간들은 우리로 하여금 잊기 쉬운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 속으로 우리를 데려갔습니다. 그래서 나 같은 인간이 그 십자가의 고난을 통해 구원의 은혜를 입은 것이 절대로 일상적인 일이 아니고 내 모든 피와 살들이 소리쳐도 다 찬송할 수 없는 크고 놀라운 은혜라고 하는 것을 깊이 느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나의 나 된 것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버리고 얻을 수 있는 것들 중에 진정으로 값어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오히려 그리스도를 버리고 붙잡았던 많은 것들은 그 순간에는 아주 커다란 기쁨을 주는 것 같지만 결국은 더 큰 슬픔과 고통을 겪게 만듭니다. 신자는 어떤 영혼의 깊은 침체 속에서도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의 감각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습니다.
게다가 그리스도께 사랑을 받지 못하는 신자의 영혼의 상태가 감출 수 없다고 하는 것도 너무 분명하지 않습니까? 그렇게 하나님이 주신 사명에 충실하던 사람이 어느 한 순간에 헌 신발 팽개치듯이 사명을 버리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대답은 주님의 사랑이 그 사람의 마음속에서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의 사랑을 버리고서도 진정한 만족을 느낄 수는 없습니다. 마치 신랑이 멀리 떠났는데도 여인은 잠들었지만 그 잠은 예전에 신랑의 품에서 얼굴을 기대고 그 심장의 박동소리를 느끼며 신랑의 오른 손에 의해서 머리부터 온 몸에 이르기까지 어루만짐을 받으며 잠들었던 그 잠과는 다른 종류의 잠인 것과 같습니다.
Ⅳ. 찾아오시는 그리스도
그러면 여러분 이제까지 살아온 인생 중에 우리 사랑하시는 주님 앞에 살아온 세월들은 얼마나 될까요? 몇 해 동안 주님을 섬기며 살아왔나요? 마치 살기 싫은 부부가 억지로 사는 것처럼 살아온 날들이 우리의 신앙생활이 아니었습니까? 결국 이 신부는 계속 잠자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마음은 무엇인가 알 수 없는 허전함에 마음까지 잠들지는 못했습니다. 물론 이 여자가 떨치고 일어나서 신랑을 찾으러 어두운 밤길을 나간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달빛 먼 길 어디엔가 자기를 버리고 홀연히 떠났을 것이라고 생각하던 신랑이 바로 그 밤에 바로 문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신랑의 소리가 들렸습니다. “나의 사랑 나의 비둘기 나의 완전한 자야 제발 문을 열어다오 내 머리에는 이슬이 내 머리털에는 밤이슬이 가득히 맺혔노라.” 사랑이 식은 신부가 신랑 없어도 넉넉히 잠들어 있는 그 밤에 신랑은 신부가 그 문을 열어줄 때를 기다리며 온 밤이 지나도록 그 이슬을 머리와 온 몸에 흠뻑 맞으며 그 바깥에서 신부가 깨어나기를 기다렸습니다. 급기야 그는 이슬에 젖은 손으로 문고리를 문을 향하여 문을 두드리게 되었습니다. 이게 오늘날 우리의 영혼의 모습을 정확히 보여주는 하나님의 그림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온 땅과 하늘 위에 높으신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찾아오십니다.
그러나 그 온 땅과 만물 위에 뛰어나신 그리스도가 정작 계시고 싶은 곳은 황제의 보좌나 이 세상 임금들이 앉는 의자가 아닙니다. 우리 주님이 진정으로 계시고 싶은 곳은 우리의 마음 그 속입니다. 그래서 신자의 마음은 그리스도가 가장 거하고 싶으신 곳입니다. 주님이 우리의 마음의 높은 보좌에 계셔서 우리의 마음에 있는 수많은 것들을 통치하고 싶어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 안에 충만히 계셔서 우리 안에 있는 온갖 쓰레기들을 걷어내시고 우리의 마음을 아름답게 가다듬으심으로써 주님은 우리 안에 충만하게 당신의 질서를 펼치기 원하시는 것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주님은 우리의 마음에 그렇게 오시기를 원하시지만 우리의 주님은 점령군처럼 우리의 마음의 문을 비인격적으로 부수고 군화발로 우리 마음속에 들어오시지는 않습니다. 신랑이 얼마나 힘세고 튼튼한 사람이었을 텐데. 그까짓 작은 문 하나 부수고 신부가 있는 방 속으로 급히 들어갈 수가 없겠습니까?
그러나 신랑은 마음에 없는 신부를 가슴에 품고 잠들기 보다는 자기를 그리워하고 목말라하는 신부를 가슴에 품고 싶어 했습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아무리 예수를 믿어도 마음을 우리 그리스도께 온전히 드리려고 하지 않는다면 사실은 나머지는 모두 다 거짓입니다. 주님과 결혼했는데 누구를 마음에 품고 계시나요? 여러분들은 주님께 사랑받기 위해 태어났고, 또 사랑을 받고 있고, 그 신랑이 여러분들을 너무 사랑하셔서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이 낮고 천한 세상에 오셔서 자기가 사랑하는 아버지께 버림받기까지 여러분들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치셨는데 여러분들은 예수 대신 매일 가슴에 누구를 품고 잠드셨나요? 영혼의 깊은 잠 속에서 사실 그대들의 마음속에 품고 있는 그 사람은 누구입니까? 세상의 재물입니까? 명예입니까? 자기 자신의 행복입니까? 자아입니까? 과연 그것이 신랑이신 그리스도를 밤이슬을 맞으며 밖에 세워두면서 까지 부둥켜않고 온 밤을 지내야할 만큼 그렇게 가치 있는 것들일까요? 번잡하고 아주 소란스러운 마음에서 멀어지십시오. 굳이 기도원을 올라가지 않아도 하루 쯤 휴가를 내서 교회에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기도하며 금식하며, 찬송하며, 말씀을 읽고 그래도 시간을 남으면 교회 마당이라도 쓸면서 흩어진 영혼의 시선을 한 곳에 모아 우리의 참 신랑이신 그리스도를 한 번 바라보십시오. 그러면 모든 것들이 사라지고 신랑이 없어서 울고 잇는 여러분들의 영혼의 흐느낌이 들릴거에요.
Ⅴ. 결론
그때 깨닫게 됩니다. 아 그렇구나! 내 인생의 모든 곤고함이 우리 주님을 내가 버렸기 때문이구나! 나의 행복과 즐거움과 보람을 찾아서 내가 너무나 멀리 주님을 떠나왔구나. 그때 신자의 영혼은 탄식하며 주님 앞에 울부짖게 됩니다. 하나님 나는 신랑을 잃은 신부입니다. 내 신랑이 어디를 갔습니까? 내가 방종하니 신랑이 내가 지겨워 멀리 떠났습니까? 그 때 주님은 말씀하실 것입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서 두드리노니 누군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둘도 아니고 하나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그분께 사랑을 받고 그 분을 사랑하며 신랑이신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며 부부애로써 사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잠시 지나는 것이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거듭날 때 예수 없이 살 수 없는 유전자를 우리의 영혼 속에 심으셨습니다. 그래서 모든 것들은 헛된 것들이고 우리의 영혼에 참된 안식을 주지 못합니다. 여러분들은 주님이 여러분들을 버렸다고 생각하고 불순종하고 하나님께 범죄함으로, 버림받았다고 생각하지만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주님 대신 죄를 택하고 순종대신 불순종을 택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없이 사는 고통이 무엇인지를 알게 하시려고 섭리 속에서 여러분들의 선택을 지켜보십니다.
그러나 주님은 오늘 이 신랑이 밤이슬 흠뻑 맞으며 온밤이 지나도록 사랑하는 신부의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여러분들의 마음의 문 가장 가까운 곳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리고 오늘 이렇게 말씀을 통해서 여러분들의 마음의 문을 두드리고 계시지 않습니까? 이제 문을 여는 것은 우리의 몫입니다. 그래서 문 밖에 홀로계신 그리스도 그 분이 우리를 위해 하신 일을 생각한다면 우리가 어떻게 그 분을 문 밖에 홀로 세워둘 수 있겠습니까? 그분이 우리를 위해 죽으셨으니 우리의 생명도 그분의 것인데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들 중에 그분께로부터 받지 않은 것이 없는데 우리가 어떻게 신랑 되신 그 분을 그렇게 취급할 수 있겠습니까? 주님을 모르던 시대에는 우리의 죄 때문에 그의 가슴에 못 박았지만 이제는 그 사랑을 알고 그와 혼인하였으니 신랑 되신 그리스도의 품을 그리워하고 그 품으로 돌아가는 신부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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