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목회단상

신앙적 회심과 인문적 이해

새벽지기1 2017. 3. 12. 17:03


많은 이들이 신앙과 이성의 조화를 시도해왔다.

하지만 둘은 근본적으로 긴장관계에 있다.

기독교적 신앙의 세계는 이성의 차원을 포함하지만 본질적으로는 이성의 차원을 넘어서는 것이고,

또 하나님의 은총과 계시라는 초이성적 세계와의 접촉이기 때문에 둘 사이에는 긴장이 있을 수밖에 없다.

솔직히 둘 사이의 긴장은 주님 오시는 그날까지 결코 극복되지 않을 것이다.

둘 사이의 혼연일체는 결코 성사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신앙과 이성이 대립한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대립하기는커녕 서로를 필요로 한다.

신앙은 이성을 필요로 하고, 이성은 신앙을 필요로 한다.

신앙의 현실을 보면 이성이 신앙의 걸림돌로 작용하고,

신앙이 이성의 어둠을 조장하는 경우가 왕왕 있지만,

신앙의 정상성을 위해서는 이성의 도움이 필요하고,

이성의 정상성을 위해서는 신앙의 도움이 필요한 것이 사실이다.

신앙과 이성은 긴장간계에 있지만 상호대립적이기보다는 상호보완적이다.

 

인간의 삶이라는 관점에서도 그렇다.

인간의 삶에는 회심과 이해라는 두 요소가 꼭 필요하다.

인간의 삶에는 반드시 회심이 요청되는데 회심을 위해서는 신앙이 필요하고,

인간의 삶에는 반드시 인문적 이해가 요청되는데 인문적 이해를 위해서는 이성이 필요하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더더욱 그렇다.

신앙의 관건은 결국 삶, 즉 신앙으로 일상을 살아가는 삶이다.

그리고 진정한 의미의 신앙적 일상을 살기 위해서는 신앙적 회심뿐 아니라 인문적 이해가 동반되어야 한다.

신앙적 삶이라고 해서 현실과 동떨어진 곳에서 따로 이루어지는 게 아니고

동일한 세계 현실 속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진정한 의미의 신앙적 일상을 살기 위해서는

인간적인 삶의 결(인문)을 형성하는 환경에 대한 이해가 꼭 동반되어야 한다.

 

아주 작은 예를 들어보자.

제품을 구입할 때 백화점을 이용하는 것과 동네 시장을 이용하는 것은 신앙적 삶과 깊은 관계가 있다.

백화점을 자주 이용하는 사람은 자기도 모르게 부자의 금고를 채워줌으로써

우리 사회의 빈부격차가 더 벌어지게 하는데 일조하는 것이다.

개인에게는 사소한 일일 수 있지만 사회적으로는 빈부격차를 심화시키는 엄청난 일이다.

큰 고민 없이 광고와 유행을 추종하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소비자를 조종하는 자본가들의 힘과 음모를 더 강화시켜주는 일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정직하게 증언하고 따르지 않는 교회에 출석하는 것은

주님의 교회를 타락시키는 일에 참여하고 동조하는 것이다.

선거의 계절에 언론에서 하는 말을 듣고 투표를 하는 것은

언론의 의도와 음모에 부화뇌동하는 것이다.

 

사실 이런 일들은 개인의 의지나 의도와 아무 상관없이 벌어진다.

부자를 더 부자 되게 하려는,

자본가들의 힘과 음모를 더 강화시켜주려는,

주님의 교회를 타락시키려는,

불의한 언론 권력을 옹호하려는 뜻이 전혀 없이 벌어진다.

당연히 신앙적 고민도 크게 하지 않는다.

자기 행위가 비신앙적인 행위라는 인식도 거의 하지 못한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질까?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달리 말해 인문적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최근에 메르스로 온 국민이 불안에 떠는 국가적 위기상황에서

일부 그리스도인들이 메르스를 동성애와 이슬람이 퍼지는 걸 막기 위해

하나님이 보낸 것이라고 해석한 것도 인문적 이해가 부족한데서 나온 망발이며,

세월호 사건을 하나님이 우리나라를 사랑하사 보낸 경고라고 해석한 것도 똑같다.

오늘의 한국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사람들의 눈살을 찌푸리는 상식 이하의 언행을 많이 하는 것은

거의 대부분 신앙적 회심이 없는 탓도 있지만 인문적 이해가 부족한 탓이 더 크다고 생각된다.

 

지금 세계는 하나의 사회가 되었다. 세계가 하나의 시장이 됐다.

하여, 나 하나의 행동이 나 하나로 끝나는 법이 없다.

나의 일거수일투족이 세계에 영향을 미친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세계의 영향권 아래에 살고 있고,

나도 모르는 사이에 세계에 영향을 미치며 살고 있다.

이런 세계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가 제대로 된 신앙적 삶을 살기 위해서는

반드시 신앙적 회심뿐 아니라 인문적 이해가 필요하다.

인문적 이해가 신앙 자체에는 크게 도움이 되지 않지만

진짜 신앙으로 살기 위해서는 인문적 이해가 꼭 필요하다.

신앙으로 살아야 하는 삶의 환경을 제대로 이해해야만 제대로 분별하며 살 수 있으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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