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신국원교수

[기독교문화 변혁, 핵심 읽기](39) 공포물 문화

새벽지기1 2016. 10. 19. 08:06


두려움 이기는 근원은 하나님 사랑
 

  
 

여름이 되면 납량을 앞세운 공포물이 범람하곤 합니다. 나이든 이들 중엔 <전설의 고향>이나 <드라큘라> 같은 공포물을 접해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인터넷에는 그보다 몇 십 배 더 엽기적이며 잔혹한 영상을 어린이들에게까지 무차별로 공급하는 사이트가 허다합니다. 사실적 영상과 음향이 결합된 멀티미디어의 공포물은 무시무시한 경험을 뇌리에 깊이 박아 넣습니다. 직접 베고 찌르고 머리에 총을 쏠 수 있는 게임들은 더욱 심각합니다.

공포 문화의 본질

공포물이 모두 악한 것은 아닙니다. <나니아 연대기>나 <반지의 제왕> 같은 기독교인의 작품에도 도깨비와 귀신, 마술사가 등장하고 용과 같은 괴물들의 공포스런 전투가 흔히 등장합니다. 인간의 이중성을 묘사한 <지킬박사와 하이드씨>나 <프랑켄슈타인>은 명작에 속합니다. 드라큘라의 원조 <노스페라투>도 그렇습니다.

공포물은 여름철 더위를 식히기 위한 것만은 아닙니다. 그것은 세상이 얼마나 두려움으로 가득한지를 잘 보여줍니다. 귀신, 괴물, 흡혈귀, 외계인, 범죄자는 공포의 뿌리인 악, 죽음, 재난, 악령의 화신들입니다. 예를 들어 <조스>는 상어 습격처럼 재난에 대한 사회적 공포를 형상화합니다. <여고괴담>같이 왜곡된 교육현실을 반영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런 작품들은 직면하기 싫어도 진지하게 다뤄야만 하는 일그러진 현실을 그립니다. 타락한 세상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밝히는 것은 환상을 깨뜨리는 효과가 있습니다. 악의 존재를 실감나게 보여주며 눈에 보이지 않는 영의 세계에 대한 각성을 일깨웁니다. 공포는 사랑만큼이나 강렬한 정의감과 분노를 불러일으키기도 합니다. 특히 예술이 그에 맞서 극복하는 용기를 북돋을 수 있다면 분명히 가치가 있는 일입니다.


공포물의 폐해

따라서 공포물을 무조건 왜곡된 상상력이요 변태적 취향이라고 배격할 수 없습니다. 물론 대부분의 공포물은 이런 예술의 수준이 아닙니다. 단지 충격적이며 잔혹하고 괴기한 내용으로 정신만 산란하게 하는 것이 부지기수입니다. 선정적이고 폭력적인 눈요기를 통해 장사 속을 채우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영적 세계나 심지어 기독교적 요소도 많이 등장하지만 제대로 그려지는 경우는 많지 않습니다. 죽음이나 악과 같이 진지하게 다루어야 할 주제를 희화화하거나 오락화하는 것이 가장 큰 잘못입니다.

공포물은 순간의 오락을 넘어 우리 마음 가운데 깊숙한 두려움을 심습니다. 괴물이나 귀신이 두려움을 주고 정서를 어지럽히는 것은 예술이 헛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입증합니다. 생생하고 잔혹한 이미지를 평생 못 잊는 것이 공포물의 특성입니다. 단지 머리 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신체적으로 식은땀을 흘려 더위를 식히는 효과를 낼 정도로 사실적입니다. 그것은 신체를 마비시킬 정도입니다.

공포물은 귀신이나 괴물의 실재성과 관계없이 작동합니다. 듣고 볼 때 설득력이 있는 세계의 이미지를 마음 속 깊이 심기에 구경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충격적 이미지는 의식에 침투하여 어떤 계기가 마련되면 급속히 살아나 사람을 공포에 몰아넣습니다. 공포를 유발할 수 있는 상상력의 씨앗을 뿌리는 것도 바람직한 일이 아닙니다. 나아가 불면증이나 가위에 눌린다면 돈 주고 생병을 얻는 셈이니 우매한 일입니다.


공포의 극복

공포의 근원은 불신앙입니다. 죄로 인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 인간은 모든 것을 두려워합니다. 하나님과 교제가 회복될 때 공포의 근원이 없어집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란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롬 8:35) 하물며 예술적 상상력의 산물인 공포물이 우리를 사로잡도록 방치할 이유는 없습니다.

공포는 사람을 나약하게 만듭니다. 공포가 몰려오면 그것을 확대시키지 않아야 합니다. 몰입할수록 점점 커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감정은 직접적으로 통제할 수 없습니다. 평소에 선하고 즐겁고 밝고 좋은 이미지를 많이 가지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공포물로 인해 두려움에 빠지곤 한다면 그런 환경을 떠나야 합니다. 그 대신 긍정적인 이미지를 대신 채우는 것이 필요합니다. 공포를 이길 선한 이미지의 근원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 분의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기”(요일 4:18) 때문입니다.

이미 마음 속에 심어진 공포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직면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공포를 조장하는 문화는 피할 뿐 아니라 맞서야 할 대상입니다. 죄, 악, 죽음, 악령과 사탄은 실재합니다. 재난도 그렇습니다. 그것은 피하거나 외면할수록 무서운 힘으로 압도합니다. 유일한 해결은 그것을 이길 힘을 찾는 것입니다. 그것은 오직 전능하시고 사랑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의지함에서만 발견됩니다.

신국원 교수  opinion@kidok.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