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후의 청교도이며 최고의 설교자 스펄전은 1834년 6월19일,영국의 에섹스,켈비션에서 청교도의 후예로 출생하였다. 그는 가정의 불편한 환경(기록이 없음) 때문에 18개월이 못되어서 조부 제임스 스펄전 부부와 함께 살았다. 목사인 할아버지와 함께 6년동안 살면서, 조부의 목사관은 스펄전의 어린 소년에게는 보물의 집이었고 장래에 사용될 많은 ‘화살의 깃들’을 제공해 준 곳이기도 하다. 그는 6살에 그곳에서 천로역정을 접하게 되었고 그의 저술양식도 존 번연의 영향을 받았다.
스펄전의 성장 배경에는 훌륭한 성품과 헌신적인 경건을 소유한 어머니가 있었다. 그의 어머니는 어린 시절부터 기독교교리들을 설명하고 교육하였다. 1850년 1월에 올 세인츠 농업학교에서 스펄전은 ‘요리사’라고 불리던 메리 킹 선생님을 만나게 되었고 그녀와 친밀한 교제를 하면서 중생의 경험을 하였고 ‘중생한’ 그의 정신과 영혼은 값으로 따질 수 없는 보배들로 채워지게 되었다. 그가 10살부터 15살까지 계속된 영적 고뇌에서 벗어나게 되었는데 그 때의 경험을 이렇게 말했다.
‘나는 꿈 속에서 기독도가 십자가에 가까이 다가간 순간 그 짐이 어깨에서 벗겨져 등에서 떨어져 내리는 것을 보았다. 그 때 기독도는 기쁘고 시원하여 유쾌한 마음으로 주님께서 슬픔을 당하심으로 나에게 안식을 주셨고 주님께서 죽으심으로 내게 생명을 주셨다.’
목회자가 되기로 결심한 후 스펄전은 사도 바울처럼 영적 자양분을 공급받기 위해 전적으로 공부에 열중하였고 하나님께 헌신하였다. 그는 묵상을 통해 큰 깨달음을 얻기도 하였다. 스펄전은 가난한 상황에서 캠프리지 학교에 입학하였고, 16살의 나이로 목사가 되어 워터비치 침례교회의 목회자로 사역하기 시작하였다. 그의 사역은 2,3주가 지났을 때 예배당은 사람들로 가득채워졌다. 그 때 ‘그는 마을 전체를 전복시켜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렸다.
워터비치에서 목회하는 동안 스펄전은 모든 세대를 통하여 그리스도인의 능력을 뒷받침해주는 주춧돌 역할을 함께 할만한 오순절 사건과 같은 놀라운 경험을 하였던 것이다.
‘그리스도의 뜻에 전적으로 자신을 맡기고 모든 삶의 영역에서 계속 주님을 신뢰하였던 것이다.’
1854년 스펄전은 19세에 런던 뉴 파크 스트리트 교회에 청빙되었고 워터비치에 이어 ‘불타오르는 사역’을 시작하였다. 목회사역 초기부터 313명 정도가 출석하던 예배당은 초만원이 되었고, 예배처소를 옮겨가며 예배를 드렸지만 그들을 수용하기에는 부족하였다. 급기야 1856년에는 서리 음악회관을 임대해서 예배를 드리게 되었는데 시작한지 얼마 안되어서 ‘불이야! 발코니가 무너져 내리고 있다.’는 외침을 듣고 사람들이 공포에 휩쌓이고 7명이 사망하고 많은 사람이 중상을 입었다. 그 사건으로 스펄전은 거의 실성할 정도가 되었고 깊은 우울증에 빠지기도 하였다.
스펄전은 대중 복음전도에도 힘썼다. 영국뿐만 아니라 네덜란드,프랑스 등에서 그 지역에 가장 큰 건물을 빌려서 집회를 가지기도 하였다. 스펄전을 청교도의 후예로 만든 것은 세가지 세력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어린 아들, 챙넒은 모자의 그늘, 그리고 웨스트우드의 수잔나 등이다.
먼저 수산나는 심오한 영적 본성과 육체적 매력을 지닌 매혹적인 여자였는데 스펄전은 그녀와 사랑에 빠졌고 1856년에 결혼에 이르게 되었다. 그러나 그들의 결혼생활은 행복하였지만 수산나가 소망 없는 환자가 되어 종종 별거생활을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수산나는 남편을 위해 청교도 서적(벡스터의 개신교목사)을 읽어주곤 하였다. 그녀는 상처받고 낙심한 스펄전에게 언제나 위로자가 되었던 것이다.
스펄전은 오른 손에는 성경을, 왼손에는 청교도 경건서적을 들고 다니면서 끊임없이 상고하고 깊이 묵상하는 시간을 통해 성령의 불세례를 받았다고 한다. 청교도 후예 찰스 스펄전의 정신은 철저하게 ‘성경노선’이었다. 그는 자신의 설교를 ‘화살’이라고 했다. ‘화살은 자라는 것이 아니고 단지 화살로 제조되는 것이다(조지 스윈녹). 스펄전은 시 7:13절을 읽고서는 ‘블타는 화살을 제조하는 일’을 본업으로 삼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스펄전의 독서경향을 살펴보면, 그는 광범위하게 독서를 하는 사람이었다. 성경과 신학에서 시작하여 문학,전기,과학,역사,미술,시등의 서적들을 읽고 식견을 가지고 있었다. 셰익스피어의 모든 희곡을 읽었으며 그 중의 몇 권은 여러차례 되풀이하여 읽었다. 그러나 그의 가장 중요한 책은 역시 성경이었다. 그는 책을 매우 빨리 읽어 내려갔다. 일주일에 가장 읽기 힘든 책 6권을 규칙적으로 읽었다. 그는 이런 결심을 하였다.
‘나는 반드시 독서와 연구와 기도에 몰두하여, 생각없이 내뱉는 말로 성령을 근심시키지 않을 것이다.’
스펄전은 위대한 개인 전도자였다. 그는 개인적으로 많은 시간을 사람들과 만나 상담하고 전도하는 데 보냈다. 그의 인간의 마음을 꿰뚫어 보는 신비한 능력과 군중을 움직이는 놀라운 기술은 대부분 개인적으로 사람들에게 전도하고 상담한 데서 나온 것이다. 그는 전도하면서 이렇게 울부짖었다. ‘주께서 아시다시피 저는 지상에서 가장 훌륭한 연사가 되기보다 오히려 그녀의 영혼을 죽음에서 구원하는 도구가 되기를 원합니다.’
스펄전은 연약한 목회자였다. 그는 극심한 우울증에 사로잡힐 때가 자주 있었다. 심신이 야해져서 휴양을 떠나기도 하였고, 서리 홀의 사건은 그를 더 심한 좌절감으로 몰아 넣었던 것이다. 그럴 때마다 주님을 의지하고 위로를 받아 회복하였고 사역을 지속할 수가 있었다.
저자는 스펄전의 천재성과 그의 사역의 결과물들이 너무 많아서 자신이 실망할 때가 있다고 고백한다. 그러나 스펄전의 기교보다도 그의 정신을 본받고자 한다고 말한다. 스펄전은 많은 책이 있지만 그 중에 ‘농부 존의 이야기’‘시편강해’‘성도와 구세주’‘스펄전과 함께하는 아침묵상’‘신앙의 수표장’‘화살의 깃털’‘목회자 후보생들에게’등등이 있다.
스펄전은 목회자와 설교자이기도 하지만 각 단체에 강의하는 일에도 빠지지 않았고 책을 출판하여 가난한 목회자들에게 책을 공급하는 일에도 힘썼다. 그리고 독지가의 후원을 받아 고아원을 운영하기도 하였다. 스펄전은 1891년 새로 건축한 메트로폴리탄 성전에서 ‘전리품을 나누는 다윗의 규례’라는 제목의 마지막 설교를 하고 목회사역을 중단하였다. 그의 나이가 56세였는데 그의 머리는 백발이었고, 얼굴은 고뇌의 주름살이 잡혀 있었다. 심신이 매우 쇠약해져서 몸을 스스로 지탱할 수도 없어서 오른손으로 의자의 등받이를 붙잡고 마지막 설교를 했다고 한다. 그는 주님의 일로 완전히 녹초가 되었던 것이다.
1892년 1월 스펄전은 개인적으로 드리는 마지막 예배를 드렸고,1월23일 토요일,그는 자기 비서에게 ‘나의 사역은 끝났다’고 말했다. 1월26일 화요일,그는 사랑하는 교인들에게 사랑이 담긴 해외전보를 치고,1892us 1월 31일 주일 밤에 이 땅에서의 순례를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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