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찰스 스펄전

스펄전의 회심

새벽지기1 2016. 7. 5. 07:29


스펄전의 회심

이 글은 찰스 스펄젼 목사의 회심과 회심 후 뒤따르는 경험에 대한 자서전적 이야기이다.   
이 원문은 4권으로 된 스펄젼 목사의 자서전중 첫째 권의 97-115페이지와 157-166페이지안에 있는 내용이다

1. 위대한 변화 - 회심

나는 사람들이 그들의 회심과 영적생활에 대해 말하는 것을 들었지만, 내 마음은 그들과 그들의 이야기에 대해 메스꺼움을 느꼈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마치 자신들의 범죄함이 대단한 것으로 자랑하는 듯이 그들의 죄악에 대해 말했으며, 또 감사의 눈물은 커녕 진실로 겸손한 마음의 단순한 감사함도 없이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말할 때 그들이 하나님을 높이는 만큼 스스로를 높이는 듯했기 때문이다.

오! 우리가 우리 자신의 회심에 대해 이야기 할 때, 우리가 어떻게 살아왔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깊은 슬픔으로 말하고, 또 우리가 회심할 가치조차 없는 사람인 것을 생각하면서 놀라운 기쁨과 감사로 말하기를 바란다. 한번은 회심과 구원에 관한 설교를 한 적이 있는데, 설교가로서 종종 느끼지만, 이런 이야기를 말한다는 것이 의미없는 일이기만 하고 나에게는 일종의 어리석은 이야기라는 것을 스스로 느꼈다.

그런데 한 생각이 내 마음을 스쳐 지나갔다. “왜 그러나, 너 자신이야 말로 가난하고 잃어버린, 황폐된 죄인이 아닌가. 그것을 말하라, 너가 받은 대로 그것을 말하라. 너가 신뢰하는 하나님의 은총을 너 자신이 느낀대로 말하기 시작하라.” 정말 그때 나는 눈물을 흘렸다. 머리를 끄덕거렸던 나의 청중들의 눈이 밝아지고 듣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이 느꼈던 어떤 것을 설교로 듣고 있었고 또 그것이 그들에게 진실이 아니었더라도 그 설교가에게는 진실인 것을 인식했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들은 처음 주님을 안 뒤에 여러분들의 짐을 내려놓고, 약속의 말씀을 받고, 온전한 구원을 기뻐하고, 그리고 평강 가운데 여러분들의 길을 계속 가게 되었던 많은 날 중에서 그 날과 그 최상의 시간을 기억하지 않는가?  
내 영혼은 그 날을 결코 잊을 수가 없다. 죽어가고, 거의 죽은 상태로, 병들고, 고통당하고, 노예가 되고, 비난받고, 쇠사슬에 묶여 있는 죽음의 어두움과 그늘아래 있을 때, 예수는 나에게 나타나셨다.

나는 그분을 쳐다보았다. 병은 치유되었고, 고통은 사라졌으며, 사슬은 끊어졌고, 옥문이 열리니, 어둠은 빛에 밀려 나갔다. 기쁨이 나의 영혼에 채워졌다!  놀라운 환희였고 황홀함이었으며 천상을 향한 음악소리와 춤이었다! 높이와 깊이를 말할 수 없는 기쁨이었다! 그 이후로 그 처음 시간의 황홀함을 능가하는 즐거움을 가진 적이 전혀 없었다. - C.H.S.

소네트형식의 시들을 한 단어로 압축해보자. 여러 시간의 멜로디를 증류하여 한 음절로 소리내 보자. 여러 세대의 조화로움의 본질들을 한 글자로 말해보자; 왜냐하면 우리는 금이 찌꺼기와 구별되듯이 우리들의 생애의 다른 날들과 분명히 구별되는 한 때를 쓰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에서 유월절의 그 밤이 음류시인들의 테마로서, 그리고 감사 노래의 끊임없는 원천으로 기억되는 밤이듯이, 우리가 지금 말하고자 하는 때도 죄로부터 해방되고, 예수 안에서 의롭다함을 받은 영원히 잊지 못할 시간인 것이다. 다른 날들은 유통되고 닳아진 동전들처럼 그들의 이미지와 이름이 다 사라질 때까지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지내왔다. 그러나 이날은 마치 많은 시간들을 지나온 어제같이 모든 부분에서 구별되는 새롭고 신선하게 빛난 채로 남아있다.

기억이란 현재 그 가슴에 품고 있는 많은 추억들을 죽어가는 사람에게서 완전히 떼어놓을 것이다. 그러나 비록 비틀거리면서 무덤에 갈 때라도 그 가슴에 있는 우리들의 구속으로 인한 삼중 행복의 증거를 결코 내버리지 않을 것이다. 갤러선에서 노젓는 죄수로 일하다 해방된 사람은, 그의 풀어진 쇠사슬이 땅에 떨어져 덜거덩 거리는 소리가 들린 날을 잊어버릴지도 모른다. 용서받은 반역자는 두목의 도끼가 용서로 바뀌었을 때의 순간을 기억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오랫동안 절망 가운데 있던 선원이 어떤 친절한 사람이 배고픈 대양으로부터 그를 건져낸 순간을 회상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오, 우리들의 영혼은 죄를 용서받은 시간, 완전한 용서의 순간을 일생동안 불멸함을 발견하는 중에는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우리들 생애는 매일 매일 함께하는 한 천사와 동행한다. 그러나 우리들은 이날에 마하나임의 야곱처럼 수많은 천사들을 만날 것이다. 태양은 매일 아침 떠오르지만, 그 의미 있는 아침에 그것은 일곱 날의 빛을 가졌다. 땅위에서 천국의 날처럼, 불멸함의 년수처럼, 영광의 천사처럼, 하늘의 큰 축복처럼, 그렇게 그 엄청난 행복의 시간들이 있었다. 신적인 환희와 표현할 수 없는 황홀이 우리 영혼을 채웠다. 두려움과 고통, 그리고 슬픔들이 그것들로 인한 불행의 모든 흔적들과 함께 순식간에 달아나 버렸다. 그리고 그들의 자리를 셀 수 없는 기쁨이 들어와 차지했다.

내가 성령의 손안에 있을 때 죄의 확신아래 있었는데, 나는 하나님의 정의에 대한 분명하고 예민한 감각을 가졌다. 죄는 다른 사람들에게 대한 어떤 것이든지 간에 나에게는 견딜 수 없는 짐이 되었다. 나는 지옥을 두려워 했다기 보다는 죄를 두려워했다. 그리고 내내 나의 마음은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영예와 그의 도덕적 통치의 순결함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나는 내가 만일 정당하지 않게 용서받을 수 있었다면 그것은 내 양심을 만족하지 못할 것이라고 느꼈다.

그러나 그때 한 질문이 일어났다.  “그렇게 죄가 많은 나를 의롭다 하시고도 하나님께서 어떻게 의로운 자가 될 것인가?” 나는 걱정되었고 이 질문으로 힘들어했다. 그것에 대한 어떠한 대답도 생각할 수 없었다. 분명히 나는 나의 양심을 만족시킬 수 있는 어떤 대답을 결코 생각해 낼 수 없을 것 같았다. 내 마음에서 대속의 교리는 성경이 신적영감에 의한 것이라는 확실한 증거의 하나였다. 의로운 통치자가 의롭지 못한 반역자를 위해 죽어가는 것을 누가 생각이라도 할 수 있었겠는가?

이것은 인간 신화의 가르침이나 시적 상상의 꿈이 아니다. 이 속죄의 방법은 그것이 사실이기 때문에 사람들 사이에 단지 알려질 수 있었다. 하나님 자신이 그것을 제정했다. 그것은 상상해 질 수 있었던 문제가 아니다.

나는 젊었을 때부터 쭉 예수의 희생에 의한 구원의 계획에 대해 들어 왔다; 그러나 내 영혼 깊은 곳에서 그것에 대해 더 이상 몰랐던 것은 내가 만일 호텐토트사람(*남 아프리카의 미개 인종)으로 태어나 자라서 그것에 대해 모르는 것과 같았다.

빛은 그곳에 있었지만 나는 장님이었다: 주님 자신이 그 문제를 나에게 쉽게 이해하도록 해야만 했다. 그것은 내가 성경에서 예수로 죄를 위한 속제제물이 되도록 하셔서 하나님이 의롭게 된다는 내용을 한번도 읽어보지 않은 것처럼, 나에게는 하나의 새로운 계시로서 신선하게 다가왔다.

나는 하나님의 새로 거듭난 모든 자녀들이 그것을 읽자 마자 그들에게 하나의 계시로서 다가와야 할 것이라고 믿는다; 그것은 주 예수의 영광스런 대속의 교리를 말한다. 나는 대속을 통하여 구원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이해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섭리가 그 같은 한 대속을 위한 일들의 제정과 조정이 처음부터 이루어졌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다.

나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아버지 하나님과 동일하시고 영원한 그가 처음부터 선택된 백성들의 계약의 머리로 되어졌고, 그래서 그가 그 능력 안에서 그들을 위해 수난당하고 그들을 구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우리들의 타락이 처음부터 한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연대적 대표인 처음 아담 안에서 타락했기 때문이며, 우리가 두 번째 대표, 곧 그의 백성들의 계약적인 머리가 될 것을 받아들여 그들의 두 번째 아담이 될 수 있었던 그에 의해서도 회복되어 지는 것이 가능하게 되었다.

나는 내가 실제로 범죄하기 전에 나의 처음 아버지에 의해서 타락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므로 내가 두 번째 머리이며 대표자에 의해 일어설 수 있는 것이 법의 관점에서 가능해 졌다는 사실을 기뻐했다. 아담의 타락은 도망갈 길을 남겼다; 두번째 아담은 처음 아담에 의해 나타났던 황폐를 되돌려 놓을 수 있었다.

내가 의로운 하나님께서 나를 용서하시는 가능성에 관해 염려하고 있을 때,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었고 또 그 자신의 축복받은 인격 안에서 나무에 달린 그 자신의 몸 안으로 나의 죄를 짊어지셨다는 것을 이해했고 믿음으로 알았다.

나는 그가 징벌을 받으므로 내가 평화를 얻었고, 그기 채찍을 맞으므로 내가 나음을 입었다는 사실을 인식했다. 그것은 그의 비교할 수 없는 지극히 영광스런 인격이신 하나님의 아들이 나에게 가해져야할 정죄를 짊어지심에 의해 그 선고한 법을 변호하는 것을 떠 맡았기 때문이었고, 그러므로 하나님이 나의 죄를 간과하실수 있었기 것이었다.

천국을 향한 나의 유일한 소망은 불경건한 자를 위해 갈보리 십자가 위에서 이루어진 완전한 대속 안에 있는 것이다. 나는 그것을 분명히 의지한다. 나는 이밖의 어떤 곳에서도 희망의 그림자조차 가지지 않는다. 개인적으로 말하면 나는 내 자신의 죄됨을 결코 극복할 수 없었다.

나는 노력했지만 언제나 실패했다. 나의 악의 성향은 나에게 너무 벅찼다. 그러나 결국 그리스도가 나를 위해 죽으셨다는 믿음아래, 나는 나의 죄있는 영혼을 그에게 맡겼을 때 승리의 원리를 받았고, 그것에 의해 나의 죄있는 자아를 다스릴 수 있었다.

십자가의 교리는 마치 옛 전사들이 그들의 커다란 쌍칼을 사용하여 단번에 그들의 적들을 쓰러뜨리는 것처럼 죄를 죽이는데 사용될 수 있다. 그곳에는 죄인들의 친구에 대한 믿음 외에 아무것도 없다:

그것은 모든 악을 극복한다. 만일 그리스도가 나같이 불경건하고 힘없는 사람을 위해 죽으셨다면, 이제 나는 더 이상 죄 안에 살 수 없고, 나 자신이 스스로 일어나 나를 속량하신 그를 사랑하고 섬겨야만 한다. 나는 나의 최상의 친구를 살해한 악과 노닥거릴 수 없다. 나는 그를 위해 거룩해져야 한다. 그가 나를 그 악에서 구하기 위해 죽었는데 내가 어떻게 죄 가운데 살수 있는가?

어느 날 나는 해외여행을 갔었는데, 내 기억에 영원히 새겨진 한 장소를 어렵게 발견했다. 왜냐하면 그곳에서 나는 이 친구, 나의 최상이며 유일한 친구가 죽임을 당한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나는 슬픈 기색으로 허리를 굽혀 그를 바라보았다. 나는 그의 두 손이 거칠은 철 못에 박혀 있는 것을 보았고, 그리고 그의 두 발도 같은 방법으로 찢어져 있는 것을 보았다. 그의 죽어있는 얼굴에 보이는 비참함이 너무 심해 거의 그것을 바라볼수 없을 정도였다.

그의 몸은 배고픔으로 수척해졌고, 그의 등은 채찍을 맞은 핏자국으로 붉어 보였다. 그리고 그의 이마는 둥그렇게 상처가 나 있었다: 이것들은 가시에 의해 찔린 것임을 분명하게 알아 볼수 있었다. 나는 이 친구가 아주 건강한 것으로 알았기에 매우 놀랐다.

그는 결코 잘못이 없었다; 그는 순결한 자 중에 가장 순결한 자요, 거룩한 자 중에 가장 거룩한 자 였다. 누가 그를 해칠 수 있었는가? 왜냐하면 그는 결코 남을 해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의 모든 생애를 통해 그는 “선한 일만 하였다”;

그는 병자들을 고쳤고 배고픈 자를 먹였고, 죽은자를 일으켰다: 바로 이런 이유로 그들은 그를 죽였는가? 그는 사랑 이외는 아무것도 행하지 않았다; 그리고 내가 그 가난하고 슬픔에 찬 얼굴을 응시했을때, 너무 고뇌가 가득찼으나 사랑이 또한 충만했기에 누가 그와 같은 사람의 두 손을 못박을 만큼 흉악한 범죄자가 될수 있었는지 의아스러웠다.

나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이같은 흉악범들이 어디에서 살 수 있을까? 이와 같은 분을 폭행할 수 있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그들이 독재자를 살해했다면 우리는 그들을 용서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들이 악이나 악행에 빠져 있는 사람을 죽였다면 그럴만 하다고 여겨졌을 수도 있다; 그가 살인자나 반역자 이거나 혹은 치안을 방해하는 사람이었다면 우리는 “그의 시체를 묻어라: 정의는 결국 그가 행한대로 갚은 것이다.”라고 말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의 최상이며, 유일하게 사랑하는 당신이 죽임을 당했다면, 그 반역자들은 어디에 묵고 있는가? 내가 그들을 잡아서 사형에 처하도록 해야겠다. 만일 내가 생각해 낼 수 있는 어떤 고문이 있다면 그들은 필히 그것들을 모두 당하게 될 것이다. 오! 무슨 질투인가;

내가 느꼈던 복수는 무엇인가! 만일 내가 이 살인자들을 발견한다면, 내가 그들에게 무엇을 못하겠는가! 그리고 내가 이 시신을 쳐다보고 있을 때 어떤 발자국소리가 들렸는데 어디에서 나는지 알수 없었다. 귀를 기울렸더니 그 살인자가 가까이 있다는 것을 분명히 인식하였다. 날이 어두워서 나는 그를 더듬어 찾기 시작했다.

어쨋거나 내 손을 뻗치는 곳마다 그를 잡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왜냐하면 그는 내손이 뻗을 수 있는 곳보다 더 나에게 가까이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나는 나의 손을 내 가슴에 얹었다.

“내가 이제 당신을 잡았다,”라고 말했다; 오호라! 그는 내 자신의 가슴 안에 있었다; 그 살인자는 내 자신의 가슴바닥에 숨어 있었고, 나의 영혼 깊은 속에 은둔하고 있었다. 아! 그때 나는 진정으로 울었다.

그것은 나는 죽임을 당한 나의 주인의 바로 앞에서 그 살인자를 숨겨주어야만 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내가 그분의 시신을 머리숙여 보고 있는 동안에 내 자신이 가장 많은 죄책감을 느꼈고, 애처로운 찬송가를 불렀다, -




“바로 당신들과 나의 죄들, 나의 잔인한 죄들이,

그분을 주로 고문했던 자들이었네;

내 범죄의 하나하나가 못이 되었고,

나의 불신앙이 창이 되었네.“




구속자를 그의 정해진 길로 가도록 선동했던 무지한 군중들 중에는 은총을 입은 몇몇 영혼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심각한 고뇌로 비탄에 잠기고 애통해하면서도 도망갈 길을 찾았다. -비참함의 행진에 동행하도록 음악을 맞추어라.

내가 상상으로 그 구원주가 갈보리로 그의 십자가를 지고 갈때, 나는 경건한 여인들과 합세했고 그들과 함께 울었다; 왜냐하면 정말 슬퍼해야 할 진짜 이유가 슬퍼하는 여인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깊은 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슬퍼한 것은 죄 없는 자가 죄인으로 취급받고, 선이 박해를 받고, 사랑이 피 흘리고, 그리고 온유가 죽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의 마음은 슬퍼해야 할 더 깊고 더 절박한 이유를 가지고 있다.

나의 죄들이 그 축복받은 어깨를 상하게 하고, 가시관을 씌워 이마에 피흘리게 했던 채찍이었다: 내 죄들은 “그를 십자가에 못박아라! 십자가에 못박아라!”라고 외쳤고 그분의 자비로운 어깨위에 그 십자가를 올려놓았다.

그가 죽임을 당하도록 한 것은 영원만큼이나 충분한 슬픔이다; 그러나 내가 그를 죽인 것은 한 사람의 빈약한 눈물샘으로는 표현할 수 없는 더 영원한 비통함이다. 왜 이 여인들이 사랑했고 울었는지를 추측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러나 그들은 사랑과 비참함에 대해 나의 마음이 가지는 이유보다 더 크지 않다.

나인성의 과부는 그의 아들이 치유되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나 자신은 새로운 생명으로 거듭났다. 베드로의 장모는 열병을 치유받았다; 그러나 나는 죄라는 더 큰 역병으로부터 나음을 받았다. 막달라 마리아에게서 일곱귀신들이 쫓겨났다; 그러나 나에게는 전체 귀신들의 군대가 나갔다.

마리아와 마르다는 그 분의 방문을 받는 혜택을 받았다; 그러나 그 분은 나와 함께 거주하신다. 그 분의 어머니는 그 분의 몸을 잉태했다; 그러나 그 분은 내안에서 “영광의 희망”으로 형상되어졌다. 그들은 빚진 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으므로 감사와 슬픔에 있는 그들 뒤로 나를 세우지 말라.




“사랑과 슬픔이 내 마음을 찢어 놓을때

나의 눈물로 그분의 발을 적시네;

영원한 평안이 내 마음에 거할때

나를 구하려 죽으신 그분을 위해 눈물 흘리네.“




윌리암 헌팅톤은 그의 자서전에서 그가 신적인 은총에 의해 깨달음을 가진 후에 느낀 고통의 가장 예민한 감각중에 하나는 바로 연민으로 ”그는 하나님에 향한 연민을 느꼈다“라고 고백했다.

나는 다른 어느 곳에서 이러한 표현을 읽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매우 놀라운 표현이었다; 비록 나도 하나님에 대한 동정과 그가 그렇게 아프게 다루어졌어야 하는 슬픔을 느꼈다고 말하는 것을 좋아하지만 말이다.

아, 자신들의 동료들에 의해 잊어버려지고, 경멸당하고 또 짓밟혀버린 많은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영원한 하나님이 당한 것처럼 그렇게 경멸당한 사람은 결코 없었다! 많은 사람들이 훼손당하고 욕보임을 당하고 있지만, 그러나 하나님이 당하신 것처럼 그렇게 욕보임을 당한 사람은 결코 없었다.

많은 사람들이 잔인하게 취급되었고 배은망덕을 당했지만, 그러나 우리들의 하나님이 당한 것처럼 당하지는 않았다. 나 역시 그분을 경멸한 적이 있었다. 그분은 셀 수 없이 여러 번 밤낮으로 나에게로 왔었고 내 마음의 문을 두드렸지만 나는 열기를 거절했다;

그분은 나의 양심을 체크해서 성령으로 내게 말했으며, 그리고 결국 나의 양심은 율법의 비난에 휩싸이게 되었다. 나는 그리스도가 잔인했고 불친절했다고 생각했다. 오, 나는 그 분이 나빴다고 생각해야만 했던 나 자신을 결코 용서하지 못한다!

그러나 내가 그 분에게로 갔을때 이 얼마나 사랑스런 영접을 받았는가! 나는 그 분이 나를 때려 벌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 분의 두 손은 화가 나서 불끈 쥐지 않았고 오히려 자비로운 모습으로 넓게 열려 있었다.

그 분의 두 눈은 나에 대한 분노로 번개불 같이 쏘아대고 있으리라고 확신했지만, 오히려 눈물이 가득 차 있었다. 그 분은 나의 목을 끌어안고 나에게 입맞춤 했다; 그 분은 나의 누더기를 벗기고 그 분의 의로 나를 옷 입히셨으며, 나는 기쁨에 못이겨 큰소리로 노래했다;

내 마음의 집과 그 분의 교회안에 있는 동안에 그 곳에는 음악과 춤이 있었는데, 잃어버렸던 그의 아들을 찾았고 죽었던 그가 다시 살아났기 때문이었다.

하나님의 복음에는 모든 표현을 넘어선 한 능력이 있다. 전에 나는 메제빠(Mazeppa)같이 저항할 수 없도록 손발을 묶인채 내 욕망의 야생말에 끌려 다니면서, 나의 몸과 영혼이 그들의 정당하고 합법적인 먹이인양 내 등 뒤에서 쫓아오는 지옥의 늑대들로 계속 질주하고 있었다.

그곳에 한 강한 손이 나타나 그 야생말을 멈추게 하고 나를 내려 놓아 자유롭게 하였다. 복음에 그러한 능력이 있는가? 예, 있다! 그리고 그것을 느낀 사람이라면 그것을 인정할 것이다.

나는 내 죄들의 강하고 오래된 성안에서 살면서 내 자신의 행위 안에 안위했던 때가 있었다. 한 메신저가 문으로 다가와 나에게 문을 열도록 명령했다. 나는 화가 나서 현관에서 그를 나무랐고 다시 돌아오면 안된다고 말했다.

그때 사랑스런 용안을 가진 한 선한 분이 왔다; 그 분의 두 손은 흉터들이 있고 못들이 박힌 적이 있었고, 그 분의 발들도 역시 못자국들이 있었다. 그 분은 자신의 십자가를 들어 올려 햄머로 사용하였다;

처음 내려치셨을때 나의 편견의 문이 떨렸다; 두번째는 더욱 흔들렸다; 세번째는 문이 내려 앉았고 그분이 안으로 들어오셨다; 그리고 “일어나라, 기운을 회복하고 일어서라, 내가 너를 영원한 사랑으로 사랑하고 있었다”라고 말씀했다.

복음은 한 능력이다! 아! 바로 그것이다! 복음은 언제나 아침이슬 같은 젊음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아침의 신선함으로 빛나고 그 힘과 영광은 영원히 존재한다. 나는 내 자신의 마음으로 그 힘을 느꼈다; 나는 내 영 안에 성령의 증거를 가지고 있으며, 그 복음이 한 능력인 것을 아는 것은 그것이 나를 정복했고 또 나를 무릎굻게 했기 때문이다.




“그분의 자유로운 은총만이,

처음부터 끝까지,

나의 사랑을 사로잡고,

내 영혼을 끝까지 지킨다.“




나의 회심에서 중요한 점은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 외는 아무것도 할 일이 없다는 것과 내가 구원받아야만 한다는 것을 발견하는데 있다는 것이다.

나는 내가 매우 선량하고 주의깊은 청중이라고 믿었다; 나는 누구보다도 내가 더 잘 듣는다고 내 스스로 평가했다. 어릴 때 나는 수년 동안 구원의 방법에 대해 배울려고 시도했다;

하지만 나는 지금까지 그 경우라고 생각지는 않지만 선포한 구원의 방법을 듣지도 못했고, 또 영적으로 눈이 멀고 귀가 막혔으며, 그래서 구원의 방법을 볼 수도 들을 수도 없었다;

그러나 내가 죄인으로서 나 자신으로부터 그리스도에게로 눈을 돌려야 한다는 복음의 말씀은 너무 나를 놀라게 했고, 내 생애동안 들어왔던 어떤 소식보다 더 새롭게 내게 다가왔다.

내가 성경을 한번도 읽지 않았는가? 예, 나는 진지하게 성경을 읽었다. 내가 그리스도인으로 부터 배운적이 없는가? 예, 나는 어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다른 사람들로부터 배웠다.

나는 복음을 들은 적이 없는가? 예, 나는 들었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쨌튼, 그 복음은 내게 하나의 새로운 계시와 같아서 나는 “믿고 살아야”만 했다. 나는 경건한 분위기 속에 교육받아왔다고 고백할 수 있다. 나의 요람속에 기도하는 손이 들어왔고 예수에 관한 노래를 들려주면서 안심하고 잠자도록 해 주었다;

그러나 복음을 계속적으로 한 줄 한 줄, 한 말씀 한 말씀, 여기 저기서 충분히 들은 후였는데, 주의 말씀이 능력과 함께 내게 왔을때, 그것은 마치 가보지 못했던 중앙 아프리카의 종족들 가운데 내가 살은 것처럼, 그리고 구세주의 동맥으로 부터 끌어당기는, 보혈로 가득찬, 깨끗게 하는 샘물의 소식을 한번도 들어 본적이 없는 것처럼 내게 새로웠다.

내 영혼의 구원을 위해 처음으로 내가 복음을 받았을때, 나는 그것을 전에 정말 한번도 들어본적이 없다고 생각했고, 그리고 내가 그 전까지 귀를 기울린 그 설교가들은 복음을 진실로 전파하지 않았다고 여기기 시작했다.

그러나 과거를 회상하면서 전에 수백번이나 충분히 전파된 복음을 들었고, 그리고 이 경우는 달랐다고 믿어지는 것 같았다. - 그래서 그때 나는 복음을 한번도 들어보지 못한 것처럼 복음을 들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그 메세지를 들었을때 그것은 전에 들었던 것보다 그 자체가 더 분명하게 되어진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성령의 능력이 현존하여 나의 귀를 열었고, 내 마음에 그 메세지를 전달했다. 나는 다음과 같은 본문을 여러차레 들었던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

“믿고 세례를 받는자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땅끝의 모든 백성들아, 나를 앙망하라, 그러면 너희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었던 것 같이 인자도 들려질 것이다: 누구든지 그를 믿는자는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을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믿음이 무엇인지에 대해 지적인 개념도 없었다. 내가 처음 믿음이 무엇인지를 발견하고 그것을 발휘했을 때, - 왜냐하면 이 둘은 동시에 내게 왔다. 나는 믿는 것이 무엇인지 알자마자 믿었다. - 그때 그 전파된 진리는 내가 전에 결코 들은 적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 나는 종종 내 눈에 비치는 빛에 의해 설득당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장님이었고 그러므로 그 빛이 그곳에 한번도 오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 빛은 계속해서 비치고 있었지만 그것을 받을만한 능력이 없었다; 내 영혼의 안구는 신적인 광선에 예민하지 못했다.

나는 나의 죄가 용서받을 수 있다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믿지 못했다. 나는 그 이유를 알지 못했고, 단지 나는 이 세상에서 이상한 사람인것 같았다. 생명록이 작성되었을때, 어떤 이유로 인해 나는 제외되었음에 틀림없는 것 같았다. 만일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시고 세상을 구원하지 않았더라면, 난 정말 의아해 했었어야 했다;

그러나 만일 그 분이 나를 제외한 온 세상을 구원하셨다면, 그것은 그래도 나에게 옳은 듯 싶었다. 그러나 지금 은총으로 구원받았으니, “난 정말 불속에서 집어낸 타다 남은 나무인 것이다.”라고 말할 수 밖에 없다. 우리들 중 얼마는 그 분을 발견하기 전에 오랫동안 그분이 지켜왔던 사람들이다.

그래서 그분을 직접 받아들였을 때 그 분을 사랑했어야 하는 사람들보다 그 분을 더 사랑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더 낫게 설교할 수 있고, 그 분의 사랑과 부드러운 자비를 더 잘 말할수 있을 것이다.

죤 번연이 만일 수년동안 악마에 의해 질질 끌려다니지 않았더라면 그는 적힌 대로 쓸 수 없었을 것이다. 나는 사랑하는 옛 크리스챤의 그 묘사를 사랑한다. 내가 처음 “천로역정”을 읽는 중에 자신의 등에 짐을 지고 가는 크리스챤의 목판을 보았을때, 그 가난한 친구에 대해 너무 흥미를 느껴서, 그가 그 무거운 짐을 오랫동안 지고 가다가 결국 그것을 제거했을 때 기쁨을 가지고 뛰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내가 그렇게 오랫동안 짊어지고 있었던 죄의 짐이 나의 어깨와 마음으로 부터 영원히 떨어져 나갔을때 느꼈던 것이었다.

노아의 손에 날려 보내진 가난한 비둘기 처럼, 나는 바다의 넓은 표면을 날면서 나의 지친 날개를 쉬게 할 수 있는 곳을 발견하리라는 희망을 가진 때를 회상할 수 있다. 북쪽지방을 향하여 위로 날았다; 그리고 내 눈은 나의 영혼의 발걸음이 휴식할 수 있는 어떤 떠있는 물체라도 발견할지 모른다는 마음으로 안개와 어둠속을 세밀하게 찾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다. 다시 방향을 돌려 전처럼 그렇게 빠르게는 아니지만 날개를 치면서 해안이 보이지 않는 깊은 바다를 건넜다; 그러나 그곳에도 역시 어떤 휴식처가 없었다. 갈가마귀는 떠다니는 시체위에서 휴식처를 발견했고, 몇몇 익사한 사람의 시체들에서 썩은 고기를 먹으면서 연명하고 있었다;

그러나 가난한 나의 영혼은 휴식처를 발견 못했다. 나는 계속 날았다; 나는 바다에서 항해하고 있는 한 배를 발견했다고 상상했다; 그것은 율법의 배였다; 나는 율법의 갑판위에 다리를 내려놓거나, 혹은 당분간 스스로 그 밧줄을 붙잡아서 어떤 피난처를 발견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 그것은 공허한 환상이었고 그곳에서는 안식을 얻을수 없었다;

왜냐하면 나의 다리는 율법 위에서 휴식을 취할 권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것을 지키지 않았고 그것을 지키지 않은 영혼은 죽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마침내 나는 그리스도 예수라는 범선을 보았다, - 행복한 방주였다;

나는 그쪽으로 날아갈 수 있을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의 빈약한 날개는 지쳐있었고 더 이상 날지 못했으며, 아래로 가라앉고 말았다;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가 이끄는 대로, 나의 날개들이 힘이 빠지고 물 속으로 빠져 익사할 그때, 바로 내 아래에 방주의 지붕이 있었던 것이다. 나는 방주로부터 나오는 손을 보았으며 그분은 나를 꽉 붙잡고 말했다. “나는 너를 영원한 사랑으로 사랑하고 있다. 그러므로 내가 사랑하는 자의 영혼을 악한 자의 무리에게 넘겨주지 않았다; 들어와라, 어서 들어오너라!”

그때 나는 하나님과 또 사람과의 평화를 나타내는 올리브 잎이 예수의 강력한 능력으로부터 나와 내 입에 물려있는 것을 알았다.

한번은 겨울이 한창일 때에 하나님께서 비유로 내게 설교하신 적이 있었다. 땅은 어두워 검게 되었고 녹색 잎이나 꽃은 하나도 볼수 없었다. 내가 들판을 쭉 둘러봤을 때, 그곳엔 황무지 외는 아무것도 없었다,

- 발가벗은 산우리와 잎이 없는 나무들, 그리고 검고 검은 대지들 밖에 볼 수 없었다. 갑자기, 하나님은 말씀하셨고, 눈(雪)의 보물창고를 열어 검은 곳이 보이지 않을때까지 하얀 눈덩이를 땅에 내리셨다. 모든 것이 눈부시도록 하얀 하나의 시트가 되었다. 그때는 내가 구주를 찾고 있었는데 오래지 않아 그분을 발견했다;

나는 눈 속에서 내게 하셨던 설교를 잘 기억하고 있다: “지금 오라, 그리고 함께 생각해보자. 너의 죄들이 아무리 붉을 지라도 눈같이 하얗게 될 것이다. 진홍같이 붉을 지라도 양털 같이 될 것이다.”

개인적으로 나는 많은 휼륭한 책들을 알게 된 것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한다: 도트리지 박사의 ‘영혼안에서의 종교의 일어남과 진행’; 박스터의 ‘회개하지 않은 자에 대한 부름’; 알레이네의 ‘죄인들에 대한 경고’; 그리고 제임스의 ‘우려되는 질문’이다;

그러나 나의 감사는 책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 설교하신 그분의 말씀이다, - 그리고 그 말씀을 내게 전달한 사람은 가난하고 교육받지 못한 사람이다. 또 목회자의 훈련을 받아보지 못했거나 이 생애동안 아마 결코 들어보지 못했을 사람이며, 비천한 사람으로서 일주일내 생업에 종사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안식일에 “땅끝의 모든 백성들아, 나를 바라 보아라, 그러면 너희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은혜가 충만한 사람이었다. 책들도 좋지만 그 사람은 더 좋았다.

계시된 말씀은 나를 일깨워주었다; 그러나 그것은 설교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나를 구원하였다; 그래서 나는 진리를 경청하는 것에 특별한 가치를 부여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그것에 의해 내 영혼이 기뻐하는 희락과 평강을 얻었기 때문이다. 내 영혼을 걱정하고 있을 동안에 내가 살고 있는 마을의 모든 예배를 다 참석하려고 결심한 것은, 그 예배를 통해 혹 구원의 길을 발견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나의 죄를 용서하실 수만 있다면 나는 무슨 일이든 하고자 했고 무엇이든지 되고자 했다. 나는 모든 교회들을 돌아보았고, 모든 곳의 예배에 참석하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오랫동안 아무 효과도 없었다. 그러나 나는 그 목사들을 비난하지 않았다.

어떤 사람은 신적인 주권에 대해 설교했다; 나는 즐거움으로 그의 설교를 들었지만 무엇을 해야 구원받을 수 있는가를 알고 싶은 가난한 죄인에게 그러한 고상한 설교가 무슨 소용인가?

또 항상 율법에 대해 설교하는 존경할만한 사람이 있었다; 그러나 씨를 뿌릴 필요가 있는 땅을 경작하여 정돈하는 것이 무슨 소용인가? 또 다른 사람은 실용적인 설교가였다. 그를 경청했지만 그는 마치 발 없는 일련의 사람들에게 전쟁의 기동연습을 지휘하는 장교 같았다.

내가 무엇을 할수 있었던가? 모든 그의 권면들은 나에게는 헛된 것이었다. 나는 “주 예수를 믿으라, 그러면 당신은 구원받을 것이다.”라는 말씀을 듣고 알았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무엇인지 몰랐다. 이러한 좋은 설교가들은 모두 영적인 마음을 가진 그들의 회중들 중 많은 사람들에게 적당한 진리들을 설교했다;

그러나 내가 알기를 원했던 것은, - “어떻게 하면 나의 죄를 용서 받을 수 있는가“였는데; - 그들은 내게 그것을 말해 준 적이 없었다. 내가 듣기를 갈망한 것은 죄책감을 가지고 있는 가난한 죄인이 어떻게 하면 하나님과 평화를 발견할 수 있을까였다;

그리고 내가 어느 예배에 참석하여 ”속지마라, 하나님은 조롱받지 않으신다.“라는 설교를 들었을때, 그것은 나를 아프게 하여 더욱 악화시켰고, 안식으로 인도하지 않았다. 나는 다른 날 다시 갔는데 본문은 의인의 영광에 관한 어떤 것이었다;

가난한 나에게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나는 테이블 밑에 있는 개같이 아이들의 음식을 먹도록 허락되지 않은 것 같았다. 나는 계속 참석했고, 그리고 솔직히 언제나 하나님께 기도없이 가지 않았고, 모든 곳에서 나보다 더 주의 깊은 청중이 없었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나는 어떻게 구원 받을 것인가에 대해 이해하기를 너무나 갈망했고 원했기 때문이다.

나는 어느 주일 아침 어떤 곳의 예배에 참석하러 가는 중에 눈 폭풍을 보내주신 하나님의 선하심이 없었더라면 지금까지 어둠과 절망가운데 있었을 거라고 때때로 생각한다.

나는 앞으로 더 나아가서 옆길로 내려갔고 어떤 작은 원시 감리 교회(Primitive Methodist Chapel)에 가게 되었다. 그 교회당에는 아마 열 댓 명의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다. 나는 그 보수적인 원시 감리교도들로 부터 그들이 얼마나 크게 노래를 부르는지 사람들에게 두통을 일으킬 정도라고 들은 적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내게 상관 없없다. 나는 어떻게 구원받는가를 알기를 원했고, 그들이 만일 그것을 내게 말해줄 수 있다면, 그들이 내게 아무리 두통을 일으킨다 해도 상관없었다. 그날 아침 목사는 오지 않았다; 그는 눈에 갇혔을 거라 생각했다.

결국 매우 마르게 생긴 한 사람이 설교하러 강단에 올라왔는데, 그는 구두쟁이거나 아니면 양복쟁이, 아니면 그런 종류의 직업인이었다.* 요즘은 설교자들이 교육을 받아야만 한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이 사람은 정말 무식했다.

그는 그의 본문에 집착해야만 했던 단순한 이유는 그가 달리 말할 만한 다른 본문이 없었던 것이다. 그 본문은, -




“땅끝의 모든 백성들아, 나를 바라 보아라, 그러면 너희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그는 그 단어들을 바르게 발음하지도 않았지만 그것은 문제가 아니었다. 그 본문에는 내게 섬광과 같은 희망이 있었다고 생각했다.

그는 이렇게 시작했다: -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이것은 정말 아주 간단한 본문입니다. 본문은 ‘보라’고 말합니다. 지금 보는 것은 그리 많은 고통을 주지 않습니다. 그것은 여러분들을 일으키거나 손을 들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단지 ‘보라’는 것입니다. 자, 누구든지 보는 것을 배우기 위해 대학에 갈 필요는 없습니다. 여러분들은 아마 가장 무식할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볼 수는 있습니다. 누구든지 바라볼 능력을 위해 년간 수입이 많아야 될 필요도 없습니다. 누구든지 바라볼 수 있습니다; 어린아이 조차도 바라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본분은 ‘나를 바라 보아라’라고 말합니다. ‘예!’ 그는 완전한 남동부 잉글랜도 사투리로 계속해서 말했다.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바라보지만 소용없는 일입니다. 여러분들은 결코 자신 안에 편안함을 찾지 못할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 아버지를 바라봅니다. 아닙니다, 지금 예수를 바라보세요. 예수 그리스도는 ‘나를 바라보라’고 하십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우리는 성령의 역사를 기다려야 합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것과 상관이 없습니다. 그리스도를 바라보세요. 본문은 ‘나를 바라 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는 그 휼륭한 사람은 그의 본문을 다음과 같이 처리했다: - “나를 바라보라; 나는 많은 핏방울을 흘리고 있다. 나를 바라보라; 나는 십자가에 걸려있다. 나를 바라보라; 나는 죽었고 장사되었다. 나를 바라보라; 나는 다시 살았다. 나를 바라보라; 나는 하늘로 승천했다. 나를 바라보라; 나는 아버지의 우편에 앉아 있다. 오 가난한 죄인들이여, 나를 바라보라! 나를 바라보라!”

그가 그 쯤 말하고는 한 십여분쯤 더 끌고 나갔지만, 그의 한계에 다다렀다. 그 때 그는 강단아래 있는 나를 바라보았다; 아마 나는 얼마 안되는 사람들과 함께 그 곳에 않았을 것이고, 그는 내가 방문객인줄 알았다.

나에게 눈을 고정시키면서, 마치 나의 마음을 다 알고 있는 듯이, 그는 “젊은 친구여, 당신은 매우 불행하게 보인다네.”라고 말했다. 그래, 난 정말 그랬다; 그러나 전에는 강단으로부터 말하는 나의 개인적인 모습에 대해 잘 소화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그것은 내 마음을 강타한 강풍이었다. 그는 계속했다. “그리고 자네는 항상 불행할 것이야 - 이 땅에서나 죽고 난 뒤에도 말이야 - 만일 자네가 내 말을 순종하지 않는다면 말이야; 그러나 자네가 지금 바로 순종한다면, 이 순간 자네는 구원받을 것이네.” 그때 그는 그의 손을 들어서 원시 감리교도들만 할수 있는 말로 소리쳤다. “젊은 친구여,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라. 바라보라! 보라! 보라! 자네는 바라보고 사는 것외는 아무것도 할일이 없네.”

나는 그 순간 구원의 길을 보았다. 나는 그가 말한 것 중에 다른 것은 알지 못했고, - 나는 그의 말에 많은 주목을 하지 않았다. - 바로 그 한 생각에 깊이 사로잡혔었다. 구리뱀이 들렸을 때 사람들은 단지 쳐다보았고 그리고 치유되었을 때 처럼, 내가 바로 그랬다.

나는 수많은 일을 행하면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바로 “보라!”라는 이 말을 들었을때, 나에게는 얼마나 매력적인 말이었던가! 오! 나는 나의 눈들이 거의 튀어 나갈 뻔할 때까지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구름이 사라졌고, 어둠은 걷어졌으며, 그 순간 나는 태양을 보았다; 그 순간 나는 일어나 가장 정열적으로 그러한 사실들과 예수님의 그 귀중한 보혈과 그 분만을 바라보는 단순한 믿음에 대해 노래할 수 있었을 것이다.

오, 어떤 사람은 전에 이것을 내게 말한 적이 있다. “그리스도를 신뢰하라 그러면 당신은 구원받을 것이다.” 예, 틀림없이 그것이었고 그것은 지혜롭게 정돈되었고 지금 나는 말할 수 있다; -




“당신의 흘러내리는 상처의 샘을

믿음으로 본 이후로,

구속하시는 사랑은 나의 테마가 되었네,

내가 죽을 때까지.“




나는 그리스도에게 가기 전에 결코 만족하지 못했다고 내 영혼은 고백할 수 있다; 내가 아직 어린아이였을때, 나는 지금보다 더 비열했었다; 나는 지금 내가 아는 것보다 더 이상하고, 더 지치고, 더 염려하고, 더 머리가 아팠었다.

이 고백에서 내가 좀 특이할지 모르지만 사실 그랬고 그 고백이 사실인 것을 안다. 나의 영혼을 그대로 예수께 맡긴 그 사랑스런 시간 이후로 나는 확실한 기쁨과 평화를 발견했다;

이전의 청년초기에 있음직한 모든 유쾌함이나 소년시절에 상상되는 모든 유용함과 즐거움들이 나에게는 영적인 공허요 번뇌였다. 내가 구주를 발견하고 그분의 사랑하는 발을 꽉 붙잡았던 그 행복한 날은 결코 잊어버릴 수 없는 날이었다.

불확실하고 잘 알려지지 않았으며, 들은 바도 없었던 아이였던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다; 그 귀중한 본문은 나를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도했다. 나는 그날의 기쁨을 말로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을 증거할 수 있다. 나는 뛰어다닐 수 있었고, 춤을 출수도 있었다;

비록 열광적이지만 그 시간의 내 영의 기쁨을 보존하지 못할 것이라는 아무런 조짐도 없었다. 그 때 이후 많은 날들의 크리스챤 경험이 지나갔지만 그 첫날에 가졌던 불꽃 튀는 기쁨의 충만한 흥분을 가진 적은 없었다. 나는 앉았던 자리에서 박차고 일어나 함께 참석했던 감리교도 형제들의 세련되지 못한 모습으로. “나는 용서받았다! 나는 용서받았다! 기념할 만한 은혜의 순간! 한 죄인이 보혈로 구원받았다!”라고 외칠수도 있었다고 생각했다.

내 영을 묶고 있던 사슬이 산산조각 난 것을 보았고, 내가 해방된 영혼으로 하늘의 상속자이고, 더러운 진흙과 공포의 구덩이에서 건짐을 받아 그리스도안에 용납된 용서받은 자로서, 내 발이 바위 위에 서 있고 나의 앞길이 단단하다는 것을 느꼈다. 나는 집으로 가는 내내 춤을 출 수 있었다고 생각했다.

나는 죤 번연이 그의 회심에 관한 모든 것을 경작된 땅위에 있는 까마귀들에게 말하고 싶다고 토로할 때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할수 있었다. 그는 너무 충만하여 말하지 않을 수가 없었기에 누군가에게 말해야만 했던 것이었다.

모든 사람이 다 그의 해방의 날과 시간을 기억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리챠드 크닐이 “그 날의 그 시간에 하늘의 하아프가 모두 그 소리를 낸 것은 리챠드 크닐이 거듭났기 때문이다.” 라고 말한대로, 나에게도 그랬다. 하늘에서 자비의 시계가 나의 해방의 시간과 순간 - 스펄젼 목사가 회심한 날은 1850년 1월 6일 인것이 분명했다. 그는 1856년 1월 6일 주일날 아침 뉴파크 스트리트 교회에서 사45:22의 본문으로 설교할 때, 6년전 바로 이날, 바로 이 시각에 바로 이 본문에 의해 자신이 그리스도를 앙망하도록 인도되었다고 말했다. - 을 울렸는데 그 때가 온 것이다. 내가 교회당에 들어간 10시 30분과 집에 돌아온 12시 30분 사이에, 나에게 어떤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나는 어둠에서 경이로운 빛으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이동되었다.

단순히 예수를 바라봄으로서 나는 절망에서 해방되었고, 그와 같은 아음의 기쁜 상태로 인도되었다. 그들이 집에서 나를 보았을때, “무언인가 굉장한 일이 당신에게 일어났구나.”라고 말했고, 나는 그들에게 그 모든 것을 열심히 설명했다.

오! 집안 사람 모두가 장남이 구세주를 발견했고, 스스로 용서받았음을 알았다는 것을 들었을때 집안에서는 그날 기쁨이 있었다. - 땅 위의 모든 즐거움을 그 축복과 비교할때 그것들은 아무 것도 아니며 공허한 것이었다. 그렇다, 나는 내 처지 그대로 예수를 바라보았고 그 안에서 나의 구세주를 발견했다.

이 같이 여호와의 영원한 목적이 선포되었다; 전에는 나같이 곤고한 사람이 없었으므로 그 순간보다 더 즐거운 일이 없는 것이었다. 그것은 번개가 번쩍하는 순간이었다; 이제 이루어졌고, 계속해서 이루어진 상태로 가는 것이다. 나는 바라보았고 살았으며, 그리고 나의 죄가 위대한 대속위에 형벌을 받아 영원히 제거되었으므로 자유의 기쁨가운데 뛰었다.

그 분이 그 십자가 위에 피를 흘렸으며 나는 그 분을 바라보았다; 그 분은 말할 수 없는 사랑의 마음으로 나의 영을 쳐다보았고, 그 순간 나는 구원받았다.




스펄젼 선생께서 이렇게 그리스도를 발견하셨다




“나는 그분을 바라보았고;

그분은 나를 내려다 보셨다;

그리고 우리는 영원히 하나가 되었다.” - C.H.S.




“땅 끝의 모든 백성아 나를 앙망하라 그리하면 구원을 얻으리라; 왜냐하면 나는 하나님이고 나 이외는 아무도 없음이라.“ - 사45:22




그 분을 앙망하므로서 내 영혼의 고통받았던 상처가 치유되었고, 찢겨진 몸들이 나음을 입었고, 부러진 뼈들이 기뻐하였고, 나를 덮고 있던 누더기가 모두 벗겨지고 내 영은 북극에 있는 깨끗한 눈같이 하얗게 되었다;

내 영은 음악을 가졌는데, 나무에 달린 바로 그분을 통하여 내가 구원받고, 씻겨지고, 깨끗해지고, 용서받았기 때문이다. 나의 주여, 당신은 어떻게 당신의 장엄한 머리를 십자가의 죽음 같은 그런 죽음에 내어맡길 수 있었는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 어떻게 당신의 이마에서 영원 전부터 빛나는 별들의 보관(寶冠)들을 벗을 수 있었는지도 납득이 안갑니다;

그러나 어떻게 그 가시관으로 당신의 성전을 두르도록 허락했는지는 더욱 더 나를 놀라게 합니다. 당신의 영원한 왕국의 하늘빛이 감도는 영광의 망토를 벗어버려야만 했다는 것을 진정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잠시 동안 수치스러운 자주색 옷을 입으셔야 했으며, 그리고 당신에게 가짜 왕으로서 절을 했던 불경한 사람들로 부터 조롱을 당해야 했는지; 그리고 채찍을 맞고 실오라기 하나 걸침 없이 벗은 몸으로 수치를 당하고는 흉악범으로 죽어야한 했는지; - 이것들은 여전히 더욱 이해할수 없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나를 위해 이 모든 고난들을 당하셨다는 것은 더욱 놀라운 일입니다! 나에 대한 당신의 사랑은 여인의 사랑을 넘어선 경이로운 것입니다! 당신 같은 슬픔이 있었나요? 그와 같은 슬픔의 수문(水門)을 열 수 있는, 당신 같은 사랑이 있었나요? 슬픔의 바다를 가라 앉힐 수 있는 샘이 될만큼 강한 사랑이 있었나요?

나에게 피 흘리신 두손과 가시 면류관을 쓰신 머리와 같이 그렇게 진실된 것은 결코 없었다. 가정과 친구, 건강과 부, 그리고 위로들이 모두 그분이 나타나셨던 그날에, 마치 별들이 태양의 빛에 의해 가려지듯이 그 빛들을 잃었다.

그분은 유일한 주님이시고 생명의 가장 큰 축복을 주시는 분이시며, 영생하도록 솟아오르는 바로 그 생수의 샘이셨다. 십자가의 예수를 내 앞에서 보았고 그분의 수난과 죽음을 묵상할 때, 나는 그분이 나에게 사랑의 눈빛을 던져 주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나는 그분을 바라보고 소리쳤다.




“내 영혼의 사랑이신 예수여,

나로 당신의 가슴에 날아가게 하소서.“




그분은 “오라”고 했고 나는 날아가서 그분을 껴안았다; 그리고 그분이 나를 다시 놓아 주셨을때 나의 짐이 어디 있는지 알수 없었다. 그것은 가버렸다! 그것은 무덤 위에 놓여 있었고, 나는 공기처럼 가볍게 느껴졌다; 날개달린 요정처럼 나는 고뇌와 절망의 산 위로 날 수 있었다; 그리고 오! 내가 이렇게 자유와 기쁨을 가지다니!

황홀감으로 깡충 뛸 수 있었던 것은 내가 너무 많은 죄가 용서받았고 또 죄에서 자유했기 때문이다. 아가서의 여자 처럼 나는 “나는 그를 찾았다.”라고 말할 수 있었다; 젊은 사람으로서 나는 영광의 주를 발견했다;

죄에 대해 노예였던 나는 위대한 해방자를 찾았다; 어둠의 자식이었던 나는 생명의 빛을 발견했다; 잃어버린 자 중에 잃어버린 자였던 나는 나의 구주와 나의 하나님을 만났다; 홀로 되고 고독한 나는 나의 친구, 나의 사랑, 나의 남편을 발견했다.

오, 내가 용서받게 되었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가! 내가 더욱 놀란 것은 용서가 아니다; 놀라운 것은 그 용서가 내게 오게 되었다는 것이다. 나의 죄들 같은 죄들과 범죄들이 너무 많고 너무 진했는데도 그가 용서하실수 있었다는 것이 참으로 경이로왔다;

그리고 어떤 양심의 비난 뒤에 그는 내 영안에 있는 어떤 동요도 잠재울 수 있는 능력을 가졌고, 내 영혼을 여울도 없고 조용하고 편안한 강의 표면같이 만들었다는 것이 참으로 경이로왔다. 내가 그리스도를 발견했던 바로 그 날에 구름이 끼였는지 햇살이 났는지는 내게 상관없다;

그분을 발견했던 것으로 나는 충분했다. 그분은 나의 구주였고 나의 전부였다; 진심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은 죄를 용서받았던 그 한날로서 오년 동안의 죄확신에 대한 충분한 보상이 되었다는 것이다.

밤마다 나를 무섭게 했던 공포와 낮마다 나를 경고했던 끔직스러움에 대해 하나님을 감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 사실은 그 이후로 계속해서 나를 행복하게 했다. 지금 만일 내 영혼을 짓누르는 어떤 어려움이 있다면, 온갖 땅의 것에 고개를 숙이고 무거운 고뇌와 고통 때문에 짐승처럼 바닥을 기도록 하는 그런 짐이 이제는 아니다.

나는 이제 내가 고통받았던 그런 고통을 다시 당할 수 없다는 것을 안다; 내가 지옥으로 보내지는 것 이외에는 내가 알고 있었던 고뇌보다 더한 것을 결코 경험하지 않을 것이다; 나를 하나님의 자녀에 속하게 하는 “이제는 정죄함이 없는” 믿음 안에서의 그 편안함과 기쁨과 평화는, 지나간 날의 나의 고통과 고뇌를 회상하면 이제 갑절로 감미롭고 말할 수 없이 귀중한 것이 되었다.

음울한 겨울 같은 어두운 날들을 여름날과 같은 상쾌하고 감미롭게 하신 당신, 오, 하나님을 송축하나이다! 모든 그림자로 두려움에 가득차거나 내가 만난 사람들을 두려워하면서 땅위를 걸어다닐 필요가 없는 것은 내 죄가 씻김을 받았기 때문이다; 내 영은 더 이상 죄책을 가지지 않는다;

이제 순전해졌고 거룩해졌다. 하나님의 불쾌함이 더 이상 내게 있지 않다; 오히려 나의 아버지는 웃으시고 나는 그의 두 눈을 바라본다, - 그분의 두 눈은 사랑의 바라봄이다; 나는 그의 목소리를 듣는다, - 이것은 감미로움의 가득함이다. 나는 용서받았고, 나는 용서받았고, 나는 용서받았다!

내가 그것을 회상해 보면, 콜체스터에 있는 그 원시 감리교회에서 설교한 그 본문을 들었을때 그 말씀이 어떻게 나를 축복했는지의 그 이유를 하나 생각할 수 있다; 때마침 나는 축복을 얻기 위해 하나님을 향해 고조되었던 것이다. 구세주를 찾고 있을때, 한 청년으로서 나는 떠오르는 태양과 같은 정열을 가지곤 했다. 그래서 은혜로운 책들을 읽을 기회를 가져서 주를 찾고자 했다.

나는 나의 의문된 생각을 가지고 은혜의 보좌앞에 나와 탄원했던 것들을 기억할 수 있다: “주여, 나를 구해주소서; 나와 같은 죄인을 구하시면 당신의 은혜가 영광스럽게 될 것입니다! 주여, 나를 구해주소서, 아니면 나는 영원히 잃어버린 자가 됩니다; 멸망하도록 내버려 두지 마소서, 주여, 나를 구해주소서, 오 주여, 예수께서 죽으셨습니다! 그 분의 고뇌와 피같은 땀과, 십자가와 수난으로 나를 구해주소서!”

나는 이른 아침이 기도하기 가장 좋은 때라는 것을 종종 증명한다; 나는 시편기자가 기도했던 내용을 좋아한다; “아침에 나의 기도가 당신을 깨우나이다.”

나를 믿도록 하신 성령께서 믿음을 통해 나에게 평화를 주셨다. 나는 전에 정죄받은 것을 확실히 느낀 것 같이 내가 용서받았다는 것도 확실히 느꼈다. 나의 정죄됨이 확실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그것을 말했고, 나의 양심이 그것에 대한 증거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께서 나를 의롭다 하셨을때, 같은 증거에 의해 확실함을 가졌다. 성경에서 주의 말씀이, “나를 믿는 자는 정죄받지 않는다”고 했고, 또 내가 믿었다는 것과, 나를 용서하신 하나님께서 의로우시다는 것을 내 양심이 알았기 때문이다. 나는 이같이 성령의 증거와 내 자신의 양심의 증거를 가지고 있으며, 이 둘은 서로 일치했다.

저 위대하고 뛰어난 죤슨 박사는 아무도 자신이 용서받았다는 것을 알수 없으며, 믿음의 확신 같은 것은 없다는 의견을 종종 고수하곤 했다. 죤슨 박사가 조금만 더 성경을 연구하고, 조금만 더 성령의 조명을 받았더라면, 아마 그도 역시 그 자신이 용서받았음을 알았을 것이다.

확실히 그가 신학의 판단을 거의 의존하지 않는 것은 자기(porcelain)의 판단을 의존하지 않는 것과 같다. 이것은 그가 한번 시도했다가 성공하지 못했던 것이다. 내가 생각키는 신학이든 자기든 그의 의견은 별 가치가 없는 것이다.

사람이 어떻게 자신이 용서받았다는 것을 알수 있는가? 텍스트에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 그러면 구원을 받을 것이다.”라는 말이 있다. 나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다; 내가 구원받았다고 믿는 것이 합리적이 아닌가?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라고 그리스도는 요한복음에서 말씀하신다.

나는 그리스도를 믿었다; 내가 영생을 가졌다고 믿는 것이 어리석은가? 나는 사도 바울이 성령에 의해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정죄함이 없다.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은 우리는 하나님과 평화를 가진다.”라고 말하는 것을 발견한다.

만일 나의 신뢰가 예수에게만 고정되어 있고 내가 그를 믿는 믿음을 가지고 있음을 아는데도 불구하고, 내가 평화를 가지고 있지 않는 것은 내가 말할 수 없는 기쁨으로 가득차지 않았다는 것과 같은 것인데, 이것은 정말 굉장한 어리석은 일이 아니겠는가?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인데, 그때 그 영혼이 그 믿음의 필연적인 결과로서 구원받았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나는 예수를 나의 구주고 받아들이고 구원 받았다; 그리고 왜 그분을 나의 구주로 받아들였는가의 이유를 말할 수 있다.

겸손히 고백하자면, 나는 달리 어쩔수 없기 때문에 구주로 받아들였다고 말할 수 밖에 없다; 나는 그것에 대해 할 말이 없다. 만일 여러 명의 다른 구세주가 있었더라면, 그 엄격한 율법적 행위가 나를 몰아 그들을 생각할 수 없는 조건 속으로 나를 밀어 넣었을 것이다.

- 나는 이 한분에게 끌려갔다. 나는 신적인 구주를 원했고, 나의 죄를 속죄하기 위해 나 대신 저주받았던 분을 원했다. 나는 죽을 수 밖에 없었기에 죽음을 당하신 분을 원했다. 나는 다시 사신 분을 원했는데, 그분의 생명에 의해 나를 살릴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말씀 안에서 내 앞에 서시고 내 마음에 계시된 바로 그 구세주를 원했다; 나는 그분을 소유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그때 루더포드가 아버딘의 지하감옥에서 언젠가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으로 충만하여 말한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는 “오 나의 주여, 나와 당신 사이에 만일 어떤 넓은 지옥이 있다면, 그리고 그곳을 걸어서 통과하는 방법 외에 당신께 이르지 못한다면, 나는 두번 생각지 않을 것입니다. 단지 당신을 붙잡을 수만 있다면 그곳을 통과할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은 나의 것이라고 외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오, 나는 얼마나 그 분을 사랑했는가! 그 분의 사랑 외에 모든 사랑들을 넘어선 것 바로 내가 그 때 그분에게 느꼈던 사랑이었다. 만일 내가 그 분을 만났던 그 장소의 문 옆에 불타오르는 장작더미가 있었더라면, 나는 족쇄없이 그 위에 섰을 것이며, 기쁨으로 나의 몸과 피와 뼈가 재가 되도록 주었을 것이다.

그것은 그 분에 대한 나의 사랑을 증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분이 만일 그 때 나에게 나의 모든 것을 가난한 자에게 주라고 했다면 나는 그렇게 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분의 이름을 위해 나 자신이 거지가 되는 것은 놀라웁게도 내가 부유하게 된다고 생각했다. 만일 그 분이 그때 모든 그분의 적들 가운데서 설교하라고 명령했다면, 나는 이렇게 말할 수 있었다. -




“모든 당신의 무리가운데 내가 양육하기

꺼려할 양이 한마리도 없나이다

적들의 면전에서 변호하는 당신의 이유에 대해

내가 걱정할 적은 하나도 없나이다.“




예수께서 나를 구원하셨는가? 여기서 나는 감히 주저없이 말하고 싶다; 나는 그 분이 그렇게 하신 것을 안다. 그분의 말씀은 진실이고, 그러므로 나는 구원받았다. 내가 구원받았다는 나의 증거는 내가 설교하거나, 혹은 내가 이것을 하고 저것을 한 사실에 있지 않다.

모든 나의 희망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을 구하려 오셨다는 것에 있다. 나는 한 사람의 죄인이고, 그분을 신뢰하고, 그때 그 분은 나를 구원하러 오셨고, 나는 구원받았다; 나는 늘 이 축복스런 사실을 즐기면서 사는데, 내가 그 진리를 의심했던 이후로 쭉 그랬다. 왜냐하면 나는 그 분 자신의 말씀으로 나의 믿음을 붙잡도록 했기 때문이다. 그것을 즐기고 있는 대부분의 모든 사람에게는 참 놀라운 일이다.

그날에 대해서조차 나에게는 하나님이 나를 의롭다하셨다는 사실에 대해 가장 경이로운 것이다. 나 자신이 스스로 나는 가치없는 몸이며, 부패덩어리이며, 죄로 가득찼고, 그 분의 전능한 사랑에 멀리 떨어진 자로 느꼈다;

그럼에도 나는 충만한 확신으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에 의해 의롭다함을 받았으며, 내가 마치 완전히 의롭게 된 것 같이 대우받아,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그것을 공유하는 자인 것을 안다; 비록 본성으로는 가장 죄 많은 사람들 중에 내가 거해야하지만 말이다.

자격없는 내가 마치 자격있는 자처럼 대우받는 것이다. 비록 전에는 불경건한 자 였지만, 내가 마치 경건한 자처럼 많은 사랑으로 사랑받고 있는 것이다.

나는 항상 루터와 칼빈과 마찬가지로 복음의 총체와 실체는 바로 사람을 대신해서 서있는 그리스도의 ‘대속’이라는 말에 놓여있다고 생각해왔다. 내가 복음을 이해한다면 바로 이것이다:

나는 영원히 잃어버린 자의 자격이 된다; 내가 정죄받지 않을 수 있는 유일한 이유는 바로 그리스도가 내 대신 형벌을 받았기에 죄에 대해 두번씩 그 선고를 실행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반면에 내가 완전한 의가 없으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을 안다; 절대적으로 확신하는 것은 나는 매일 죄를 짓는 것을 알기 때문에 나 자신의 의는 하나도 가질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때 그리스도는 완벽한 의를 가지고 계셨는데, 그분은 “여기, 가난한 죄인들아, 내 옷을 집어 걸쳐라; 너희는 마치 그리스도처럼 하나님 앞에 설 것이고 나는 마치 죄인처럼 하나님 앞에 설 것이다; 나는 죄인을 대신해서 고난을 받을 것이고 너희는 행하지 않았지만 내가 행한 공적에 대한 보상을 받을 것이다.”말씀하셨다.

나는 죄인으로서 그리스도에게 매일 가는 것이 용이하다는 것을 발견했는데, 내가 처음으로 왔기 때문이다. “너는 성도가 아니다.”라고 악마는 말한다. 그래, 내가 성도가 아니라면 나는 죄인이고,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가 죄인들을 구하려 세상에 오셨다; 죽든지 살든지 나는 그분에게로 간다;

다른 희망은 내가 가지고 있지 않다. 그분을 바라봄으로서 나는 그분의 은총에 대해 확신을 가질 수 있도록 영감을 준 모든 믿음을 받았다; 처음 내 영혼을 이끈 - “나를 앙망하라,“ - 라는 말씀은 여전히 나의 귓전에 클라리언 악기 음으로 울린다. 한번 회심을 발견한 후 나는 계속해서 새로움과 새롭게 됨을 발견할 것이다.

내가 보았던 것, 내 자신의 귀로 들었고, 또 내 자신의 마음으로 느꼈던 것에 대한 개인적인 증거를 말하기를 원한다. 첫재, 그리스도는 아버지의 유일한 독생자이시다. 그 분은 나에게 하나님이신데, 만일 그분이 이 밖의 모든 세상에 대해 사람이셨다 하더라도, 그 분은 단지 한 분의 하나님이 하실 수 있는 것을 나를 위해 하셨다.

그분은 나의 고집센 의지를 꺽으셨고, 굳어있는 마음을 녹이셨고, 강철의 쇠사슬을 부수셨고, 놋쇠 문을 열었으며, 그리고 철 빗장을 제거하셨다. 그 분은 나의 슬픔을 기쁨으로 바꾸셨고, 절망을 즐거움으로 바꾸셨다;

그 분은 포로된 나를 포로로 잡으셔서, 말할 수 없는 기쁨과 충만한 영광으로 내 마음이 즐겁게 하셨다.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할 것이지만 나에게는 그 분이 하나님 아버지의 영원하고 유일한 독생자였음이 분명하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그 분의 거룩한 이름에 복 있을지어다!




“오, 내가 지금 그분을 경배할 수 있네,

위에 있는 천국의 무리들 처럼,

그들은 영원히 그분 앞에 고개 숙이고,

쉬지 않고 그분의 사랑을 노래하네!

행복한 합창단 들이여!

언제 내가 당신들의 합창에 함께 할려나?“




또 그 분은 은혜가 충만한 분이신 것을 증거하고 싶다. 아, 그 분이 그러지 않았더라면, 나는 결코 그 분의 영광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죄가 가득차서 넘쳐흘렀다.

나는 이미 정죄받았던 것은 내가 그 분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가 오기를 원치 않았을때 그 분은 나를 끌었고, 비록 내가 가지 않으려고 애를 썼지만 그 분은 계속해서 끌어당겼다; 결국 내가 그 분의 자비의 자리에 와서 선고받은 범죄자처럼 떨고 있는데, 그분은 “그 많은 너의 죄들이 다 용서받았다: 기뻐하라.”라고 말씀하셨다. 다른 사람들은 그 분을 경멸하고 있지만 나는 그 분이 은혜가 충만하다는 것을 증거하고 싶다.

마지막으로, 그 분은 진리가 충만한 분인 것을 증거하고 싶다. 그 분의 약속들은 진리였다; 아무도 실망하지 않았다. 나는 종종 그 분을 의심했는데, 그것에 대해 부끄러웠다;

그 분은 한번도 나를 실망시키지 않으셨는데 이것에 대해 나는 기뻐함이 틀림없다. 그 분의 약속들은 예요 아멘이었다. 나는 비록 이 증거를 개인적으로 이와 같이 힘있게 하는 것이지,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믿는 자들의 증거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어떤 종이라도 나와 같은 그런 주인을 모신 사람은 없다고 증거하고 싶다; 어떤 형제라도 그 분이 나하고 관계하는 것같은 그러한 혈육은 없다;

어떤 아내라도 그리스도가 나의 영혼에 관계하는 것같은 그런 남편을 가지지 못할 것이다; 더 나은 구세주를 얻은 죄인은 없다; 어떤 병사도 더 나은 중대장을 얻지 못할 것이다. 어떤 슬퍼하는 자라도 그리스도가 나의 영혼에 한 것같은 그런 위로자를 만나지 못할 것이다.

그 분 이외는 아무도 원치 않는다. 삶에서 그 분은 나의 생명이다; 죽음에서 그분은 그 죽음의 죽음이다; 가난에서 그리스도는 나의 부이다; 아픔에서 그는 나의 침상이 되신다; 어둠에서 그 분은 나의 별이다; 밝음에서 그 분은 나의 태양이다. 믿음으로 나는 복된 하나님의 아들이 그 분 자신의 심장의 피로 내 영혼을 속량하신 것을 이해한다;

감미로운 경험으로 그 분은 어두운 절망의 늪에서 나를 일으키시고, 나를 바위에서 서게 하셨음을 안다. 그 분은 나를 위해 돌아가셨다. 이것은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만족의 뿌리이다. 그 분은 나의 모든 허물을 지워버리셨다. 그 분은 당신의 귀중한 보혈로 나를 깨끗게 하셨다;

그 분은 당신의 완전한 의로 나를 보호하셨다; 그 분은 당신 자신의 덕들로 나를 옷 입히셨다. 그 분은 내가 이 땅에 있을 동안에 유혹과 덫으로 부터 나를 보호할 것을 약속하셨다; 내가 이 세상을 떠날 때, 그 분은 나를 위해 이미 시들지 않는 행복의 천국에 한 집과, 결코 사라지지 않는 영원한 기쁨의 면류관을 이미 준비하셨다. 그 때 나에게는 여러 날, 혹은 여러 해동안 이땅에서 인생의 체류가 단지 순간이 되는 것이다. 많은 의미를 가진 죽음의 방법도 아니다. 적군들이 나를 순교의 죽음으로 선고하거나, 혹은 내가 곧 이 생을 떠날 것이다라고 의사가 말했다면, 그것은 아래와 같은 것이다.




“불과 몇번만 태양이 돌아서 온다면

나는 아름다운 가나안의 해안에 다다를 것이다.“




이 땅에서 나의 짧은 시간이 계속되는 동안, 나는 나를 위해 종들의 종이 되신 그분의 종이 되어야 하는 것 외에 무엇을 더 바랄것인가? 나는 그리스도의 종교에 대해 말할 수 있다.

만일 내가 개처럼 죽게 되고 불멸에 관한 어떤 소망도 갖지 못하는 사정이라면, 그리고 내가 만일 어떤 행복한 삶을 영위하기를 바란다면, 온 마음을 다해 나의 하나님을 섬기게 해달라;

나로 예수의 제자가 되어서 그분의 발걸음과 동행하게 해 달라. 만일 그 이후에 아무것도 없다해도 나는 어떤 왕이나 황제가 되기 보다는, 역시 그리스챤이 되기를 원할 것이며, 가장 겸손한 기독교 목사가 되기를 원할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그리스도 안에 더 많은 기쁨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 이 매춘세계의 모든 찬양에서나 햇빛나고 밝은 날들에서 우리에게 제공할 수 있는 모든 기쁨에서 보다, 그 분의 얼굴에서 보는 한 섬광에서 더 많은 즐거움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분은 지금까지 계셨고, 그리고 끝까지 계실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 분이 한 선한 일을 시작하셨고, 또 계속하실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교에는, 땅위의 사람들에게 너무 무거워서 한 사람으로서는 지고갈 수 없는 것이다; 그곳에는 열매들이 너무 풍요하게 발견되고 있기에 천사들의 입술조차 더 달콤한 포도주로도 결코 감미롭게 해 줄수 없었다; 그곳에서 가질수 있는 즐거움은 너무 아름다워서, 낙원의 신성한 고양이들이나 즙이 많은 포도주들 조차 주님이 베푸신 땅 위의 연회에서 발견할 수 있는 감미로운 만족을 능가하지 못할 것이다.

나는 수백 수천의 사람들이 그들의 마음을 예수께 주었던 것을 보와왔지만, 그 분에 대해 실망하거나, 예수 그리스도가 선포되신 것보다 모자라다고 말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만나지 못했다.

처음 내가 그 분을 바라보았을때, 무거운 짐이 나의 어깨에서 미끄러져 나가고 정죄로 부터 자유했는데, 내가 들었왔던 모든 설교자들이 진리를 반쯤 설교했다고 생각지 않았다. 그들은 나의 구주와 주인의 아름다움에 대해 반쯤 말한 것이 아니었다.

얼마나 좋은가! 얼마나 너그러운가! 얼마나 은혜스러운가! 얼마나 용서하고자 하는 의지인가! 나에게는 그들이 그 분을 거의 살해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들은 그 분의 형상을 할 수 있는 한 의심없이 묘사했다.

그러나 그것은 비교할 수 없는 그 분의 얼굴의 아름다움에 비하면 단순한 윤곽일 뿐이었다. 그 분을 본 모든 사람들은 다 똑같이 말할 것이다. 내가 집으로 돌아가면서 여러번 슬퍼한 일은, 내 자신이 그 분을 알았을 때에도 나의 주를 설교할 수 없는 것과, 내가 그 분에 대해 아는 것은 그분의 은총에 무한함과 비교할 수 없다는 것이다. 내가 더 이상 그 분에 대해 알 수 있었을까? 그리고 그것을 더 낫게 말할 수 있었을까?




2. 회심후의 경험들

우리들의 믿음은 때때로 살아있도록 하기 위해 씨름해야한다. 우리 속에 있는 옛 아담은 힘있게 일어나고, 우리 속에 있는 새로운 영은 젊은 사자처럼 정복당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렇게 이 두 강한 마음은 서로 싸우고, 그동안 우리의 영은 고뇌로 가득찬다. 우리들의 몇몇은 우리가 다시는 감히 되풀이하지 않아야 할 불경죄로 시험받는 것이 무엇인지, 우리가 싸워서 극복해야 할 무서운 유혹으로 괴로워하는 것이 무엇인지 안다.

그러나 이것들은 우리가 죽을 때까지 저항해야 할 것들이다. 그와 같은 내적갈등 속에 성도들은 고독할 수 밖에 없다. 그들은 자신들의 느낌들을 다른 사람에게 말할 수 없다. 감히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다;

만일 그렇게 한다면 그들 자신의 형제들은 그들을 경멸하거나 비난한 것이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신앙고백자들을 그것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를 것이기 때문이다. 다른 불길을 진압했던 사람들 조차도 모든 사람들과 공감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비참하게 고통당하는 영혼에게 “이것들이 우리가 당신과 함께 가지 못하는 문제점들이다.”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리스도는 비록 죄가 없으시지만 우리와 같이 모든 점에서 홀로 시험을 당하셨다. 아무도 모든 점에서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시험받지 않는다. 그리고 각 사람은 그 전쟁의 불길속에 홀로 버텨야 할 어떤 시련들을 가지고 있다.

어떤 책조차도 그를 도울 수 없고, 어떤 자서전도 그를 조력할 수 없는 것은, 십자가에 못 박힌 발을 드러낸 시련을 가진 한 분 이외는 전에 아무도 그 시험을 당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분만이 홀로 모든 슬픔의 사악한 길을 알고 계신다. 더구나 그와 같은 겹길에서 조차 주님은 우리와 함께 계시고, 도우시며, 붙드시고, 그리고 끝내 승리하도록 은총을 허락하신다. C.H.S.

내가 처음 그리스도를 바라보았을때, 그 분은 나에게 바로 그리스도 그 분이셨다; 또 죄에 대한 나의 짐이 나의 어깨에서 내려놓아 졌을때, 그것은 나에게는 정말 죄로부터의 용서였고 해방이었다;

그리고 그 날 내가 처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는 나의 것이다.”라고 말했을때 그것은 나에게 그리스도를 정말 소유한 것이었다. 내가 이른 새벽과 같은 활기찬 경건함으로 성소에 올라갔을 때, 모든 노래들이 진정 하나의 시편이었다.

그곳에 기도가 있을때, 오, 난 정말 모든 말들을 쫓아갔다! 그것은 정말 기도였다! 또한 그곳은 조용한 평온이 감돌았고, 나는 하나님께 끌렸다. 그것은 모방이나 습관적이거나 의무같은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하늘에 계신 나의 아버지와의 실질적인 대화였다. 그리고, 오, 그때 나는 나의 구주 그리스도를 얼마나 사랑했는가! 나는 그 분을 위해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드리려고 했다! 그 날 죄인들에 대해 나는 어떻게 느꼈는가! 나는 젊었기에 설교하기를 원했다. 그리고 -




“주위의 죄인들에게

내가 발견했던 사랑하는 구주가 누구인지 말하고 싶었다“




내가 처음 주를 알았을때, 내가 가지고 있던 가장 큰 슬픔 중에 하나는 어떤 사람들에 관해 생각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내가 잘 알았고 나와 불경건한 대화를 나누었던 사람들이거나, 내가 죄짓도록 했던 그런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나 자신을 위해 기도할때, 내가 간구했던 기도들의 하나는 그들이 내가 유혹했던 죄들로 인해 잃어버린 자들이 되지 않게 해 달라는 것이었다. 죠지 화이트필드도 회심 전에 같이 카드놀이를 하곤 했던 사람들을 결코 잊지 않았으며, 그들을 구주에게로 하나씩 인도하는 즐거움을 가졌었다.

나는 그리스를 발견한 후 오일 간, 그리스도가 나의 것이라는 바로 그 기쁨의 생각에 춤을 출수 있었다는 즐거움이 계속되었는데, 갑자기 슬픈 경련과 같은 의기소침에 빠지고 말았다.

왜 내게 그런 일이 있었는지 지금 말할 수 있다. 내가 처음 그리스도를 믿었을 때, 악마가 죽었다는 확신은 가지지 않았지만 그는 분명히 치명적으로 부상을 입어서 나를 흐트리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는 내 본성의 부패함에 그 치명적인 타격이 적용되었다고 상상했다. 나는 카우퍼가 말한 것을 읽고, -




“나를 당신의 발아래 인도하여

모든 나의 적들을 그 뿌리채 뒤집어 놓은 그 아름다운 시간 이후에;“




그 시인은 그가 말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고 정말 생각했다; 그러나 카우퍼가 그렇게 말했을때 처럼 그런 큰 실수를 누구도 저지르지 않았다. 왜냐하면 내가 생각키는 아무도 모든 그의 적들을 그와 같이 뿌리채 뒤집어놓게 할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적들이 다시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설득당한 나의 느낌을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나는 온전하게 되고자 했지만, - 나는 그것을 충분히 숙고했다 - 보라, 내가 계산하지 않았던 침략자를 발견했는데, 살아계신 하나님으로부터 떠나게 하는 불신앙의 악한 마음이었다.

그래서 나는 말씀의 단순한 설교로 인해 하나님과 처음 화평을 가졌던 바로 그 원시 감리교회당에 갔다. 그 때 본문은 “오, 나는 곤고한 자로다: 누가 나를 이 죽음의 몸에서 건져낼꼬?” 였다. “맞어, 그것은 바로 나를 위한 본분이다.”고 나는 생각했다.

나는 그 주일동안 만큼은 별 문제가 없었다. 나는 그리스도에게 나를 의탁했다는 것을 알았고, 또 내가 기도의 집에 앉았을때 나의 믿음이 단순하게 오직 그 구세주의 대속에 고정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나의 마음이 개운치 않은 것은 내가 원하는 만큼 거룩해질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죄 없이는 살수 없었다. 아침에 일어날때, 나는 모든 어려운 말들이나 나쁜 생각이나 주목에서 절제할 수 있을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신음하면서 그 교회당에 당도했는데, 왜냐하면 “내가 선을 행하고자 할때, 악이 나와 함께 있었기 때문이다.” 그 목사는 “바울이 이 말을 할 때는 믿는자가 아니었다.”고 말하면서 설교를 시작했다. 자, 그런데 나는 내가 신자인 것을 알았고, 그 본문에 의하면 틀림없이 바울도 역시 신자이었음에 틀림없다. (지금도 나는 그렇게 확신한다.)

그 목사는 계속해서 하나님의 자녀들은 누구나 자신 안에 어떤 갈등도 느끼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래서 나는 모자를 집어들고 그 교회를 떠났으며, 그 이후로 그 곳에는 거의 참석하지 않았다.

그들은 회심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매우 유용하지만,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그렇지 않다. 그것은 감리교도에 대한 나의 견해이다. 방문객들을 데려오는 것은 귀중한 일이다; 그러나 이미 들어와 출석하여 양육이 필요한 사람들에게는 소름끼치는 일이다. 그것은 임시교구(parish pound)같은 곳이다.

길 잃은 양들을 보호하는 데는 좋은 곳이지만, 그 안에는 아무런 음식이 없다; 어떤 초장을 발견하기 위해 가능한 한 빨리 그들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는게 더 낫다. 나는 그 목사가 신적경험이나 실질적인 마음의 신학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다는 것을 알았다. 그렇지 않으면 그가 설교한대로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가 좋은 사람인 것을 나는 의심치 않는다. 그러나 나와 같은 경우를 처리하는 일에 있어서는 정말 무능한 것이다.

내가 내 영혼에 그 힘을 느낀 이후로 계속해서 죄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오 죄, 죄, 이제 정말 너에 대해 질색이다! 너는 그 순간의 즐거움으로 보이는 것 이상의 것을 나에게 가져다 주지 않았고, 그것으로 이 날까지 내 속에서 깊고 놀라운 쓴맛을 가지도록 했다!

나는 내가 지나치게 민감한 사람이었을 때를 회상한다.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병적인 감수성(morbid sensibility)“이라고 불렀다. 바로 그 죄에 대한 생각과 그것이 넘쳐서 죄가 많은 것으로 나타났을때 나는 얼마나 떨고 전율을 느꼈는지 모른다! 내가 하나님께 회심한 후 첫 주간동안, 나는 뭘 잘못하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 한 발자국 한 발자국 디디는데 얼마나 걱정했는지 모른다. 내가 하루를 뒤돌아 볼 때에, 만일 나의 기질에 어떤 잘못이 있거나 천박한 말을 했었다면, 혹은 잘못된 일을 저질렀다면, 나는 나 자신을 심하게 자책했다.

그 당시 나는 어떤 일이라도 주의 뜻으로 알았다면, 그것을 행하기를 절대로 주저하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것이 주의 뜻에 합당하다면 멋진 것이든 아니든 나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오, 주의 뜻을 행한다는 것! 그분이 나로 가기를 원하는 곳은 어디라도 그분을 쫓아 가는 일! 그때는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일에는 결단코, 결단코 주저하지 않을 것만 같았다.

다른 사람들의 경험이 나와 같은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내가 경험했거나 경험할 수 있는 가장 잘못된 어려움이 하나님을 향한 나의 회심후 오래지 않아 일어났다는 것을 말할 수 있다. 처음 내가 죄의 무게를 알았을때, 그것은 하나의 짐으로, 하나의 노동으로, 하나의 문제로 다가왔다; 그러나 두번째 알았을때, -




“나는 주께 믿음과 사랑, 그리고 모든 은총가운데

내가 자랄 수 있는지 물었다;

그분의 구원에 대해 더 알수 있는지,

그리고 그분의 얼굴을 더 신실하게 구할 수 있는지;“




그리고 그분이 나의 모든 죄들을 내게 풀어 놓는 것으로 응답하셨을때, 그 죄들은 전보다 더욱 힘있게 나타났다.

나는 이집트 안에 있는 이집트 사람들은 이집트 밖에 있는 이집트 사람들보다 그렇게 많이 나쁘지 않았다는 것을 생각했다; 내가 전에 알았던 죄들은, 비록 잔인한 공사감독 같았지만, 창과 도끼로 무장하고, 차륜 끝에 날카로운 톱날을 가진 철 전차를 타고 나를 죽이러 달려오는 병사와 같은 죄들에 비해 그렇게 죽을 만큼은 아니었다. 그들은 지금까지는 나에게 그렇게 가까이 다가오지 않았던 것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은 내가 전에 그들의 노예였을 때보다 더욱 더 나를 놀라게 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좋은 옷을 입고 질서있게 행진하면서 노래를 부르면서 올라간 것을 나는 의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매일의 일과 지독한 굴레에서 해방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행진하는 중에 갑자기 그들의 방향을 돌렸다.

왜냐하면 그들 뒤에서 무서운 소리를 들었기 때문인데, 그것은 전쟁을 위해 소리치는 전차와 사람들의 소리들이었다; 그리고 결국 그들이 실지로 두꺼운 구름같은 먼지를 일으키면서 뒤따라오는 이집트 군대들을 보았을 때, 그들은 그 때 이제 멸망 당할 수 밖에 없으며, 적의 손에 죽을 것이라고 말했다.

나의 회심 후에(그것은 모든 사람에게 일어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나에게는 일어났다), 그 적이 “내가 쫓아 미쳐 탈취물을 나누니라; 내가 그들로 인하여 내 마음을 채우리라; 내가 내 칼을 빼리니 내 손이 그들을 멸하리라.”(출15:9)라고 말했던 때가 있었던 것을 기억한다.

그렇게 사단은 한 영혼이 떠나는 것을 질색하여 황급히 쫓아간다. 그는 할 수만 있다면 되돌려 놓을 것이다; 그리고 종종, 회심 후 곧, 무서운 투쟁의 때가 오는데, 그 때 그 영혼은 살 수 없을 것 같이 되는 것이다. “

이집트에는 매장지가 없어서 주께서 우리들을 일시적인 자유의 상태로 인도하고는, 적들에 의해 더욱 더 괴롭움을 당하도록 하시나이까?” 불신자들은 그렇게 말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한번의 마지막 타격으로 그의 백성들을 올바르게 데리고 나오셨다. 미리암은 그것을 알았고, 탬버린을 손이 들고 여인들과 함께 앞으로 나와서 기쁨에 넘치는 노래로 그들에게 대답했다; “너희는 여호와를 찬송하라, 그느 높고 영화로우심이요; 말과 그 탄자를 바다에 던지셨음이로다.”(출15:21)

나는 모세가 노래했던 것중에, “바다가 그들을 덮었다.”(출15:10)를 최고의 귀절로 가장 사랑한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들의 적들이 다 사라졌을 때 마음 속의 즐거움이 얼마나 확실했는지! 나 역시 그랬다는 것을 확신한다; 왜냐하면 회심 후에 내가 죄에 의해 공격을 받았을때, 구속하시는 사랑의 강력한 물줄기가 모든 나의 죄들을 도말했기 때문이며, “바다가 그들을 덮었다.”는 나의 찬송이었다.

“누가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들에 대해 비난하겠는가? 하나님께서 그들을 의롭다 하셨다. 누가 정죄하겠는가? 그리스도가 죽으셨고, 예, 그리고는 다시 살아나셨다. 그리고 그 분은 하나님의 우편이 앉아 계시며, 우리를 위해 중보하고 계신다.”

나는 어린시절을 아주 작은 잘못이나 불경한 말들을 모르고, 또 사람이 맹세하는 것도 거의 듣지 못할 정도의 보살핌 속에 자라왔다. 지금도 나의 초기 그리스챤 시절을 기억하기는, 나의 마음에 그 같은 악한 생각이 들어왔을 때 나는 그것들이 말로 나타날까봐 두려운 나머지 내 손으로 입을 툭툭 쳤었다.

이것은 사단이 하나님께서 그의 손에서 해방시킨 사람들을 괴롭히는 한 방법이다. 많은 경건한 성도들이 이와 같이 괴롭힘을 당하고 있다. 한번은 내가 심각하게 유혹을 당하고 있을때, 내가 사랑하는 나이든 할아버지에게 갔었다. 나는 그에게 나의 무서운 경험을 말하고는, “할아버지, 난 정말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는 것 같아요. 그렇지 않다면 내가 그와 같은 나쁜 생각을 결코 가질 수 없었겠지요”라고 결론적으로 말했다.

“넌센스야, 찰스, 그 같이 유혹을 받는 다는 것은 바로 너가 그리스챤이기 때문이야.” 이같은 불경스러움은 세상의 아들들에게는 없단다; 그것들은 사단의 덫들로서 그가 그리스챤의 문 앞에 놓기를 좋아한단다. 그것들을 너 자신의 것으로 생각지 말고 그들에게 집안이나 마음의 방을 내어주지 말아라.“라고 그 좋은 할아버지는 대답했다.

나는 할아버지가 말한 것에 대해 매우 위로를 받았는데, 특히 그 대답은 내가 구주를 찾고 있을 동안에 비슷한 유혹들 받고 있었을때 나이든 한 성도가 나에게 말한 것과 일치했기 때문이다. 많은 위대한 사람들이 다음 귀절을 우스꽝스럽게 생각한다. -




“이것이 내가 알기 원했던 것으로

종종 그것은 걱정스런 질문을 불러 일으킨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가, 아닌가?

내가 그분의 것인가, 아닌가?




만일 그들이 스스로 어떤 사람들도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것을 안다면, 그들은 더 이상 그렇게 말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그것이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이 누구며, 어디에 와 있는가에 대해 확신을 가지도록 하는 가벼운 경험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가장 확신에 찬 하나님의 자녀도 자신이 책임질 일인지 혹은 쫓기고 있는 일인지 알기 못하는, 굉장히 힘든 때가 많기 때문이다. 그것은 큰 바다에서 일을 해왔던 선장이 일상적이지 않는 날씨와 폭풍을 만나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또 술 취한 사람처럼 비틀거리면서 달리 어쩔수 없는 지경에 있는 것과 같다.

그와 같은 때에, 만일 예수께서 내가 그로다라고 속삭였다면, 그때 그 문제는 영원히 해답을 얻은 것이다. 나의 영혼은 그것이 사단의 얼굴에서의 파도라는 증거를 가질 것이고, 그래서 그는 사라지고 나는 계속해서 기쁨으로 항해할 수 있다.

나의 영적인 생활에서 내가 발견한 것은 나 자신을 위해 규칙을 많이 세울수록 더 죄를 많이 짓는 다는 것이다. 아침 저녁에 규칙적으로 기도하는 습관은 믿는자의 생활에 꼭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기도시간의 길이를 미리 정하거나, 많은 사람들가 기도제목을 무리하게 기억하는 것은 굴레에 얽매이게 되고 기도로 돕기보다는 기도를 숨막히게 한다.

그와 같은 때에 내 자신을 겸손케 하고 다른 때는 기뻐할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설교자가 설교문의 여백에 “여기서 울어라,” “여기서 웃으라”라고 적을 때 처럼 거의 가식적인 것이 되는 것이다. 왜? 만일 그 사람이 그의 마음으로 부터 설교한다면 그는 적절한 곳에서 울것이고 알맞은 순간에 웃을 것이기 때문이다;

영적생활이 건전하다면, 기도할 때에 기도하게 되고 영혼의 겸손과 비밀한 즐거움이 규칙들이나 맹세들과 상관없이 자연적으로 솟아오른다. 유럽왕족에 의해 자체적으로 지시하도록 만든 종교 같은 것은 기계로 부터 찍어나오는 벽돌과 같은 정서를 표현하게 한다. 성 금요일에 울고 이틀 후에 즐거워하는 등, 달에 의해 그 감정을 조절하는 것이다. 이것은 너무 인위적이라 모방할 가치조차 없다.

자기검증은 매우 우대한 축복이다. 그러나 나는 가장 불신앙적이고 율법적이고 또 자기의(義)의 자세로 자기검정이 이루어지는 것으로 알고 있다; 실지로 나는 내 자신의 힘으로 그것을 수행했다. 그 시기는 내가 더 많은 표시와 사인이나 증거들을 내가 지금 행하기 보다 내 자신의 편안함을 위해 생각하곤 했던 때였다. 왜냐하면 내가 이러한 것들을 행하기 시작할 때는 사단과 경쟁할 수 없다는 것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나는 매일 매일 이렇게 부르짖으면서 나아가야 한다. -




“내가 죄인 중에 괴수로다

예수께서 나를 위해 죽으셨다.“




내가 하나님의 약속을 믿을 수 있는 것은, 그것이 그분의 약속이기 때문이고, 또 그분이 나의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또 나의 구주를 신뢰할 수 있는 것은 그분이 하나님이시므로 능력으로 구원하시기 때문이다.

구주를 믿고 신뢰하는 동안에는 나의 모든 일이 다 형통하게 된다; 그러나 스스로 이런 저런 복잡한 문제에 대해 의문을 가지기 시작했을 때, 나의 눈은 그리스도로 부터 멀어져 가고, 모든 내 삶의 덕들이 모든 땀구멍으로 빠져 나가는 듯이 보였다. 믿음으로 부터 떨어진 어떤 실행도 악한 것이다. 특히 자기검증과 같은 것은 우리를 십자가의 기반에서 떼어놓게 하고 잘못된 방향으로 끌고가는 것이다.

내가 처음 구세주를 알았을때, 어떤 한 방법으로 나 자신을 시험해 보곤 했는데, 종종 그것으로 인해 나의 신앙생활에 장애물을 놓게 되었다. 그러므로 나는 같은 방법을 취하고 있는 사람을 권면할 수 있다. 때때로 나는 내 방으로 올라가서 자기검정의 방법으로 내 자신에게 묻곤 했다.

“내가 죽기를 두려워 하는가? 만일 내 방에서 내가 쓰러져 죽어야만 한다면, 나는 기쁘게 눈을 감을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그러나 종종 나는 그렇게 말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죽음은 매우 엄숙한 일이라는 것을 느끼곤 했다.

“아, 그러므로,” 나는 “나는 그리스도를 믿고 있지 않고 있구나. 왜냐하면 내가 만일 그리스도에게 나를 맡겼다면 나는 죽기를 두려워 하지 않고 오히려 확신에 차 있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나는 많은 사람들이 “나는 그리스도를 쫓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죽기를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가 나를 구해줄 것을 나는 믿을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 죽음의 생각은 나를 전율하게 했기 때문이다.“라고 말하는 것을 그대로 믿었다.

아, 가난한 영혼이여,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수많은 사람들이 있는데, 그 들은 생의 많은 시간동안을 죽음의 공포에 매여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존경할만한 하나님의 자녀들이다: 나는 그들이 죽을 때 승리롭게 죽을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죽음에 대한 생각은 결코 그들을 유쾌하게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런 자연적인 법을 시행하시기 때문에, 그것은 생명과 자기보존에 대한 사랑으로 간주된다. 그리고 친척들과 가족들이 있는 사람이 사랑하는 그들을 두고 떠나고 싶지 않을 것이라는 것은 극히 자연스러운 것이다. 나는 그가 더 많은 은혜를 입었을때, 그는 죽음의 생각에서 기뻐할 것이라는 것을 안다; 그러나 나는 또 아주 안정된 사람들이 있음을 아는데, 그들은 그리스도안에서 즐겁게 죽을 것이지만, 지금은 죽음을 예견하면서 그것에 대해 두려움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나이든 나의 할아버지는 내가 결코 잊어버릴 수 없었던 어떤 설교를 한번 한 적이 있다. 그는 ”모든 은총의 하나님“이라는 제목으로 설교했다. 그는 하나님이 주시는 서로 다른 은총에 대해 말하고는 각 주제의 끝에 ”그러나 여기에는 여러분들이 원치 않는 한가지 종류의 은총이 있다.“고 말해 어쨋튼 그 청중들의 관심을 이끌어냈다.

그는 결론 짓기를, ”여러분들은 살아있는 동안에는 죽게하는 은총을 원치 않는다. 그러나 여러분들은 그것이 필요할 때 죽게하는 은총을 가질 것이다. 여러분들이 그것을 요구하는 상태에 이르렀을때, 그리스도에게 여러분을 온전히 맡긴다면 그 은총을 충분히 가질 것이다.“라고 말했다. 친구들의 그룹모임에서 우리들은 만일 순교의 날들이 와야 한다면 죽을 준비를 해야하는지의 문제에 대해 토의했다.

나는 ”오늘날 까지 내가 느낀대로 솔직하게 말하면, 나는 죽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나는 만일 내가 스미스필드(*Smithfield, 런던시의 한 지구로서 식육시장으로 유명함)에서 위기에 놓여있었고, 그리고 한 시에 그곳에서 묻히게 된다는 것을 알았다면, 한 시가 왔을때 내가 죽을 수 있는 충분한 은총을 가졌을 것이라고 참으로 믿는다“라고 말했다.

나의 젊은 시절에 나는 나이들어 눈이 멀고, 성찬대(communion table)에서 말하는 한 목회자의 말을 듣고 매우 감명을 받았었다. 그는 그 교회에 바로 가입한 우리들에게 간증했고, 신실한 하나님께 우리들의 신뢰를 두게 된 것은 우리들에게 참 좋은 일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매우 연약하지만 매우 신실한 그 사람은 우리들에게, 젊었을 때 그리스도에게 자신을 드린 것에 대해 결코 후회한 적이 없었다고 말해, 나는 그와 같은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이 된 것에 대해 기쁜 마음이 차 올랐다.

그의 간증은 젊은 사람으로서는 가질 수 없는 것이었다: 그는 더 유창하게 말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그러나 80년의 년륜이 회상하는 무게는 그 늙은 사람으로 하여금 나의 마음을 감동하게 만들었다. 20년 동안 그는 태양의 빛을 보지 못했다. 눈같이 하얀 머래채가 그의 이마로 부터 흘러 내려 그의 어깨 위에 걸쳐 있었다. 그는 주님의 강단에 서서 우리에게 이같이 설교했다: - “형제 자매 여러분, 나는 곧 여러분들을 떠날 것입니다;

불과 몇달 안에 나의 발은 나의 관에서 더 오그라 들고 나의 조상들과 함께 자게 될 것입니다. 나는 학식있는 사람이거나 웅변가도 아닙니다; 그러나 내가 가기전에 나의 하나님에 대해 한 공적인 증거를 지니고 싶습니다. 5-60년 동안 그 분을 섬겼는데, 그분이 신실하지 못한 때를 한번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나는 말할 수 있습니다. ‘그 분의 선함과 자비가 나의 모든 생애동안 확실히 나타났고, 그 분이 약속하신 좋은 일들은 하나도 실패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스런 노인은 일어나, 자연적으로 하늘의 햇빛을 빼앗긴 그의 무덤과 같은 어두움 속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그러나 그는 그의 영혼 안에 비추는 천국의 빛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비록 우리들을 보지 못했지만, 우리들을 향해 돌아보면서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젊은이들이여, 이땅에서 하나님을 신뢰하라. 나는 그분을 그렇게 빨리 구했다는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 단지 나의 많은 날들을 낭비하며 살았다는 것을 슬퍼할 뿐이다.“ 그 주인의 섬김은 행복한 봉사이고, 또 만일 그가 다른 주인을 섬길 수 있었다면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것인데, 왜냐하면 그 분의 섬김은 즐겁고, 그 분의 보상은 영원한 기쁨이기 때문이다는 그런 간증을, 전쟁에서 상흔을 가진 그 베테랑 그리스챤에게 듣는 것보다 젊은 그리스챤들의 믿음을 더 강건하게 하는 것은 없다.

나의 초기 시절에 지금은 죽은 한 훌륭한 사람을 알았는데, 그는 하나님에 의해 유용한 삶의 문고를 생산하는 역활을 했었다. 내가 말하는 것은 종이로 된 책이 아니라, 부츠의 책들이다! 많은 젊은이들이 그의 사역에 의해 주를 위해 결심하게 되어 설교자, 교사, 집사, 그리고 다른 일꾼들이 되었다;

그리고 그들을 훈련시킨 그 사람을 알았다면 아무도 그렇게 된 것을 이상하게 생각지 않을 것이다. 그는 모든 선한 말과 일을 위해 준비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의 성경반에 특별한 주의를 기울렸는데, 그 곳에서 그는 분명함과 열심을 가지고 복음을 설명했다. 그의 젊은 제자들이 누구라도 그가 사는 시골 마을을 떠날때 마다, 그는 일종의 작별 면접을 분명히 준비하기를 원했다. 들판에는 오크나무가 넓게 퍼져있는 언덕이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는 죤, 혹은 토마스, 혹은 윌리암등 이런 저런 제자들과 이른 아침에 만남을 가지곤 했다;

그 만남에는 대도시에 가서 젊은이들이 죄로 부터 물들지 않고 유익한 사람이 되도록 주님께 신실하게 간구하는 것이 많이 포함되어 있다. 그 나무 아래에서 많은 사람들이 주를 위해 결심했다. 그것은 하나의 인상 깊은 행위로서 그들에게 그 영향을 주었다; 그래서 수 년 후에 많은 사람들이 그들 선생의 기도들에 의해 거룩하게 된 그 장소를 보러 찾아왔다.

오! 한번은 소년시절에 나의 젊은 가슴이 얼마나 아팠는지, 그 때 나는 처음으로 구주를 사랑했다! 나는 부모님과 내가 사랑하는 모든 것으로 부터 떨어져 있었기에 나의 마음이 타버릴 것이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나는 어떤 학교의 안내원 이었는데, 그곳에서는 동정심이나 도움을 경험할수 없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내 방으로 올라가서 나의 작은 고통을 예수님께 은밀히 아뢰었다.

비록 지금은 그것들이 아무것도 아니었지만 그때는 나에게 매우 큰 슬픔이었다. 무릎을 굵고 나를 영원한 사랑으로 사랑하셨던 그 분에게 속살일 그 순간은, 정말 너무나 감미로왔다! 만일 그것들을 다른 사람에게 말했다면, 그들은 그것들을 다시 다른이에게 말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분은 나를 축복하는 친한 친구로서 나의 모든 비밀을 알고 있으며, 결코 다른이에게 말하지 않는다.

젊은 성도로서 내가 종종 언급하는 성경귀절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나에게 매우 사랑스러운 것이었다; 이것은 “그 희생제물을 밧줄로 매어 제단의 뿔에 함께 묶어라." 나는 그때 내가 온전히 그리스도의 것이라는 것을 느꼈다. 주께서 말씀하시는 결혼서약에 있어서, 신랑이 그분의 신부의 손에 반지를 끼워줄 때, 그분은 신부에게, ”당신은 이제 내 것이 되었다.“라고 말했다.

나는 나의 손가락에 영원의 반지가 끼워진 것을 느꼈을 때를 기억하는데,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그곳에서 영원한 계약의 사랑을 주신 것이다. 오, 그것은 기쁨이 가득찬 날이며 축복된 날이었다! 행복한 날, 행복한 날에 그분의 선택을 나는 알았고, 그분은 나의 선택을 그분에게 고정시키셨다! 그리스도의 확실한 소유로부터 오는 그 축복된 영혼의 안식은 모방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고, 너무나 소망했던 것이었다. 나는 몇몇 훌륭한 사람들이, 내가 믿기에는 구원 받을 것으로 여기지만, 여전히 그 감미로운 안식을 얻지 못한 사실을 안다.

그들은 그것이 아주 늙었을 때나, 혹은 죽기 직전에 얻을 수 있는 어떤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확실한 믿음의 확신과 그리스도의 개인적인 붙잡음을 소망하고, ”내가 사랑하는 자는 내것이다“를 매우 위험스런 어떤 것처럼 말하고 있다. 나는 나의 그리스챤 생활을 15살의 소년으로서 이러한 행복한 구조에서 시작하였다; 나는 온전히 주저함 없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다;

그리고 내가 어떤 훌륭한 그리스챤 여인을 보러 갔을때, 그녀에게 나는 그리스도를 믿었고 그분은 나의 것이며 그분은 나를 구원하셨다고 말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단순하였다. 나는 하나님께서 그 분의 백성들을 결코 버리지 않으시고, 또 그 분의 사역을 중도에 포기하지 않으신다는 위대한 진리에 관한 내 생각을 매우 자신있게 표현했다. 내가 어린아이 일때는 그렇게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위치가 못되었다고 말했다. 왜냐하면 그것은 주제넘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 휼륭한 여자는 나에게 ”아! 나는 그 같은 확신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당신이 그리스도를 믿고 있는 것을 신뢰한다, - 내가 그렇게 희망한다; - 그러나 나는 희망이나 신뢰 이상의 것을 가져보지 못했다. 그리고 나는 좀 늙은 여자이다.“라고 말했다. 그 나이든 여자를 축복하라, 그 여자는 우리가 믿고 있는 분이 누구인지 아는 사람들에게는 표준이 아니었다;

우리는 이 땅에 집착하는 삶보다 더 위로 올라가야만 한다. 제대로 시작한 어른들과 아이들은 이렇게 말하면서 시작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말씀하셨다; ‘그 분을 믿는 자는 정죄함이 없다.’ 나는 그분을 믿는다. 그러므로 나는 정죄받지 않는다; 그리스도는 나의 것이다.“

회심전에 나는 성경을 읽는 일에 익숙했는데, 그들의 장엄함을 숭배했고, 그들의 역사에 대한 매력과 언어의 위엄에 대해 경이로움을 느꼈다; 그러나 나는 그 안에 있는 주의 의도를 전혀 읽지 못했다. 그러나 성령께서 신적인 생명으로 오셔서 새로이 조명된 나의 영혼에 모든 성경을 밝혀 보여주셨을 때, 그 내적 의미는 경이로운 영광으로 드러났다.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판단하는 마음의 구조를 가지지 않았고, 오히려 이의 없이 모든 것을 받아들였다;

나는 나의 심판자에 대해 판단하는 자리에 대담하게 서지 않았고 실수없으신 하나님에 대해 복습하는 자가 되었다. 그 분의 말씀에서 무엇을 발견하든지 간에 나는 열정적인 기쁨을 가지고 받아들였다. 그 시간이후로 나는 하나님을 송축했다. 비록 곤란으로 부터 완전히 면제된 것도, 내가 항상 가지고 있는 낙심의 성품으로 부터 자유한것도 아니지만, 그래도 예수 그리스도안에 쉼을 얻고 있으므로 나는 기뻐하고 또 기뻐할 것이며, 그리고 행복하고 또 말할 수 없이 행복한 것이다.

그리고 가장 약했던 내 성격의 그러한 면들이 강건해 지고 있는 반면 강한 열정들은 절제되어 갔고, 악한 성향들은 다스려졌으며, 그리고 새로운 원리들이 심어지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나는 변화되었다; 한 사람이 없어지고 새로이 만들어 질 수 있는 것처럼 나는 이전의 나로부터 달라진 것이다. 이 변화에 대해 그것으로 부터 멀리 떨어진 어떤 도움도 요구되지 않는다.

하나님은 나를 위해 위대한 일을 하셨고, 또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도 같은 일을 하셨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분의 얼굴과 그분의 위대한 대속의 은혜를 구하는 영혼에게는 누구나 그렇게 하실 것이다.

나는 어떤 사람들을 알고 있었는데, 그들이 회심 전에는 거의 저능아였었는데, 그 이후로 그들의 기능이 놀라웁게도 개발되었었다. 또 얼마전에 한사람이 알았는데, 그는 너무 무식해서 글을 읽을 수 없었고, 또 그의 생애에서 실수가 아니고는 문법에 맞게 말하지 않았다; 더구나 그는 그의 이웃들이 얼간이라고 불리울 정도가 되었다. 그러나 그가 회심했을 때, 그는 제일 먼저 한 것은 기도였다. 그는 몇 마디를 더듬거리다가 곧 그의 말하는 능력이 저절로 개발되었다.

그때 그는 성경을 읽고 싶다고 생각했고, 여러달의 노력끝에 그는 읽을 수 있게 되었다. 다음엔 무슨 일이 있었는가? 그는 설교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는 그의 집에서 그 자신의 편안한 방법으로 설교를 조금했다. 그때 그는, “몇 권의 책을 더 읽어야 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그의 마음은 넓어졌고, 시골 마을에 정착하여 하나님을 위해 사역하고 있다. 나는 그가 지금 유익한 목사라고 믿어진다.

하나의 관념이 대중의 마음을 오랫동안 사로잡고 있기 때문에 어떤 종교적인 사람이 현명한 사람이 될 수는 없다. 깊은 생각과 포괄적인 지성을 가진 사람이 이교도나, 무신론자, 그리고 자연신론자들에 관해 이야기 하는 것은 일반적인 습관이었다; 그리스챤 논변가가 그들의 적들의 변론을 확실이 이기지 못한다면 두려운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순전히 잘못된 것이다; 왜냐하면 복음은 지혜의 총체요, 지식의 요약이요, 진리의 보고요, 그리고 신비로운 비밀의 계시이기 때문이다.

그 안에서 우리는 공의와 자비가 어떻게 조화될수 있는지를 안다; 여기서 우리는 전적으로 만족된 율법과 죄인을 승리로 이끄는 주권적인 사랑을 본다. 복음에 대한 묵상은 우리의 마음을 넓힌다; 그리고 계속적인 영광의 빛으로 우리의 영혼을 열 때, 그 안에 나타나는 심오한 지혜 앞에 놀라움을 가지고 서는 것이다. 나는 내가 복음을 알기 전에 여기저기 혹은 모든 곳에서 이질적인 합산이 된 모든 종류의 지식을 끌어 모았다고 종종 말했다. - 약간의 화학, 약간의 식물학, 약간의 천문학, 그리고 여기서 조금 저기서 조금 이런 식이었다.

나는 그들을 모두 함께 하나의 거대한 혼란된 혼돈속에 집어넣었다; 그러나 내가 복음을 배웠을때, 모든 것을 그것이 있어야할 바로 그 자리에 넣을 수 있는 어떤 선반을 내 머리 속에 얻었다. 나에게 그것은, 내가 그리스도와 십자가에 못박힌 그분을 발견했었을때 체제의 중심을 발견한 것같이 되었고, 그래서 나는 적절한 질서를 가지고 회전하고 있는 모든 다른 과학을 볼 수 있었다.

지구로 부터 혹성들은 매우 불규칙한 방법으로 움직이는 듯 보인다, - 그것들은 앞으로 가기도 하고 뒤로 가기도 하고, 또 정지하기도 한다; 그러나 태양을 중심으로 본다면, 그것들은 계속적이고, 변하지 않고, 회전하는 동작으로 행진하는 것을 볼수 있다. 그래서 그것은 지식에 의해서이다. 여러분들이 좋아하는 다른 과학으로 시작해보라, 그러면 진리는 잘못 된 것처럼 보일 것이다.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의 과학으로 시작해보라, 그러면 여러분들은 태양으로 시작하게 될것이고, 모든 다른 과학이 완전한 조화를 가지고 그것을 돌고 있는 것을 볼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마음은 올바른 목적에 의해 시작함으로서 발전될 것이다. 옛말에 “자연으로 부터 하나님의 자연으로 올라가라”라는 말이 있다; 그러나 언덕으로 오르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최상의 길은 자연의 하나님으로 부터 자연으로 내려가는 것이다; 그리고 여러분이 일단 자연의 하나님께 도달한다면, 그리고 그분을 믿고 사랑한다면, 파도속에서 음악이나, 바람의 자연스런 속삭임 속에서 노래를 듣는 일이나, 돌이나 바위, 물결을 일으키는 시내, 모든 곳에서 하나님을 발견하는 일이나, 그리고 소의 울음소리나 천둥의 울림, 또는 폭풍의 분노함 속에서 그분의 목소리를 듣는 일이 놀라웁게도 얼마나 쉬운지 모른다. 나에게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지혜이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의 과학을 앎으로서 이제 나는 모든 것을 배울 수 있다.


출처:
예기치못한기쁨
http://blog.naver.com/eldewy/100034070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