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이 땅에 진행된 부흥은 하나님의 일이지 사람의 일이 아닙니다. 부흥의 시작이 사람의 힘이나 재간에서 비롯된 것도 아니고 부흥의 진행이 우리 자신의 능력이나 지혜에 의존한 것도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부흥을 진흥시키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경주하며 부흥에 마음을 열중하며, 부흥을 위해 애쓸 것을 기대하십니다. 그러므로 이 위대한 부흥을 진흥시키기 위한 우리의 노력에 있어 우리는 최대의 주의와 성실함과 재간을 사용해서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들을 채택해야 합니다. 위대한 일은 신중하게 다루어야 합니다.
열 가지 비평에 대한 답변
⑴ 목사들이 청중의 지성보다 감정에 호소하여 그들의 감정을 최고도로 끌어올리기 위해 애쓴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대부분 오해거나 감정의 본질과 원인을 잘못 알고 있는 데서 비롯되거나 그들이 지나치게 지성에 의지하기 때문에 생기는 일이라고 믿습니다. 모든 감정은 지성에 어떤 빛이 비췰 때나 어떤 실수와 망상 때문에 생깁니다. 모든 감정은 지성이 어떤 것을 이해했을 때 생기는 것이 분명합니다. 빛을 풍부하게 가지고 있으면서도 열이 전혀 없을 수 있습니다. 우리 교인들은 머리에 지식을 채우는 것보다 마음에 감동을 받는 것이 더 필요합니다. 그들은 마음에 감동을 주는 설교를 더 필요로 합니다.
⑵ 목사들이 이미 큰 공포를 느끼고 있는 자들에게 위로가 아니라 두려움을 설교한다는 것입니다. 목사들이 두렵게 하는 것이, 단지 그들에게 더 많은 빛을 제공함으로써 그들이 자신들의 상태를 바로 알 수 있게 할 목적이라면 전적으로 정당화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은 죄인들의 양심에 빛을 비추어 주심으로써 그들의 양심을 크게 각성시키십니다. 우리가 죄인들을 빛으로 더 많이 인도하면 할수록, 그들이 비참한 상태에 처해 있고 그 빛이 그들에게 두려운 것인 한, 그 빛은 그들에게 점점 더 기쁜 것이 될 가능성이 많습니다. 각성하고 있는 자들에게 즉시 위로를 베풀지 않고 이처럼 진리를 선포한다고 해서 목사들을 비난하는 것은 마치 외과의사가 수술 칼을 들이대기 시작하여 환자가 이미 큰 고통을 느끼면서 움츠러들고 아파 소리 지를 때 그 의사가 멈추지 않고 칼을 더 깊이 들이밀어 환부의 뿌리까지 댄다고 해서 그를 잔인하다고 비난하는 것과 같습니다. 보류해야만 하는 한 가지 경우가 있는데 우울증의 경우입니다.
⑶ 설교자들이 가련하고 순진한 어린이들을 지옥불 이야기와 영원한 저주에 대한 말로 놀라게 만든다는 점입니다. 비록 어린이들이 우리가 보기에는 순진해 보일지라도 그들이 그리스도 밖에 있으면 하나님 보시기에는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독사 새끼이며 독사보다 무한히 더 가증스러우며 아주 비참한 상태에 놓여 있다는 점이 성인들과 다를 바 없습니다. 어린이들의 영혼의 문제에 있어 적당히 넘어가지 않고 그들을 단순하고 철저하게 다룸으로써 복된 결과가 이루어지는 것을 저는 많이 보아 왔습니다. 그렇게 해서 나쁜 결과가 나오는 것을 저는 한 번도 보지 못했습니다.
⑷ 신앙 집회를 너무 자주 가지면서 신앙 문제에 너무 많은 시간을 할애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신앙의 외형적인 일들 가운데서 과도해질 수 없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가 세상 일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세상일에 조금도 차질이 없을 정도로만 신앙적인 일을 해야 한다는 주장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훨씬 더 중요한 세상적인 일 때문에 다른 세상 일에 차질이 빗어지는 것에 대해 반대하는 이는 아무도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만일 영원한 일들이 세상일들만큼이나 생생하고, 사실은 무한히 더 중요한 것이라면 영원한 부요와 불명의 영광을 찾기 위해 일시적인 관심사를 어느 정도 희생시키는 일을 왜 기꺼이 할 수 없다는 말입니까? 왜 우리는 전능하신 하나님에 대해서만 그처럼 인색해야 합니까? 그분에게 영광을 돌리고 우리 자신의 영원한 행복을 찾기 위해 지상의 이익에 차질을 빚는 것이 마치 무슨 범죄나 되는 듯이 말입니다. 최근의 비상한 신앙 활동 때문에 사용한 시간보다 웃고 떠들며 술집에 출입하고 빈둥거리며 쓸데없이 남의 집을 찾아다니며 실없는 잡담을 하며 비생산적인 소일거리와 불필요한 기분 전환을 하는 등의 일들을 끊음으로써 절약하게 된 시간이 더 많습니다. 아마 술집과 사치스러운 의상을 끊음으로써 절약하게 된 돈이 신앙 집회를 위해 사용한 돈의 다섯 배는 될 것입니다.
⑸ 잦은 설교가 무익하고 해로운 것이라는 반대를 특히 많이 받습니다. 설교를 너무 자주 들으면 한 설교가 다른 설교를 밀어내는 경향이 있다는 것입니다. 설교를 통해 얻게 되는 주된 유익은, 설교를 들을 때 마음에 새겨지는 인상 때문이지 후에 그것을 기억함으로써 일어나는 효과 때문이 아닙니다. 기억이 유익을 끼치는 것은 그것이 그 인상을 새삼스럽게 하고 강하게 할 때입니다. 설교할 때 신앙에 있어 더 중요한 것들을 자주 가르친다고 해서 그런 인상들이 잘려 나가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오히려 그 인상들을 강하게 하며 마음에 더욱 깊이 고정시킵니다. 우리의 경험이 그것을 확인해 줍니다.
⑹ 목사들이 고함이나 기절과 같은 육체적 현상을 너무 많이 일으킨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그러한 현상들을 하나님이 임재하셨다는 증거요 설교가 성공했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한 것으로 주장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중요한 진리들을 설교한 결과로서 그러한 현상들이 일어나고, 그런 현상에 대해 적절히 논증할 수 있고 합당한 동기가 있었다면 혹은 선한 다른 수단들을 사용한 결과로서 그러한 현상들이 일어나는 것을 볼 때 저는 주저하지 않고 그런 현상들에 대해 말하며 그런 현상들을 기뻐하며 그런 현상들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제가 발견한 것은 이러한 현상들이 나타나는 사람들이 성령의 영향을 받고 있다는 증거가 충분하다는 것입니다.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모인 곳에 성령의 아주 강한 역사가 임할 때는 어떤 식으로든 눈에 띄는 큰 소동이 있게 마련입니다.
⑺ 어떤 목사들은 아주 특별한 외적 현상 때문에 감동을 체험한 사람들을 함께 모아 둔다고 비난을 받았습니다. 많은 사람은 그렇게 하는 것이 혼란을 조장한다고 생각합니다. 불가피하게 강한 신앙 감정을 표현하는 것은, 그것을 보는 자들의 마음에 복된 영향을 갖다 주는 경향이 있으며 경험적으로 볼 때도 그것은 탁월하고 지속적인 효과를 갖다 줍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들이 그것들을 관찰할 기회를 얻어서 유익을 얻도록 신경 쓰고 조정하는 것은 하나님의 일을 진작시키는 커다란 수단으로서 복을 받았습니다. 스가랴 9:15-16은 말일에 성령의 충만함을 비상한 방식으로 받아서 신체적인 체험을 하며 소란을 일으키는 사람들을 하나님이 그 비상한 상황 속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깃발이나 푯대로 제시하는 자들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⑻ 사람들이 큰 감동을 받았을 때 말을 너무 많이 하고 그것도 열렬하고 격렬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이 신적이고 영원한 일들의 위대함을 경이로움과 중요성을 역설하고 또 다른 사람들을 열정적으로 경고하고 초청하며 간청한다는 것입니다. 신앙적인 일들의 중요성과 죄인들이 처해 있는 위험에 대한 아주 큰 깨달음은 때로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고 경고하고 싶은 거의 억제할 수 없는 성향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은 예레미야 6:10-11과 부합됩니다. “내가 누구에게 말하며 누구에게 경책하여 듣게 할꼬 그 귀가 할례를 받지 못하였으므로 듣지 못하는 도다 보라 여호와의 말씀을 자기에게 욕으로 여기고 이를 즐겨 아니하니 그러므로 여호와의 분노가 내게 가득하여 참기 어렵도다 그것을 거리에 있는 아이들과 모인 청년들에게 부으리니 지아비와 지어미와 노인과 늙은이가 다 잡히리로다.”
⑼ 집회에서 노래를 너무 많이 부른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부흥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참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비상한 정도로 체험하여 하나님 안에서 천국의 기쁨을 누리고 있다고 생각했더라면 찬양을 많이 하고 싶어하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을 것입니다. 많은 성경 본문이 시사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가오는 영광스러운 시대에 하나님의 교회에는 말로나 노래로나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이 풍성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⑽ 어린이들이 집회를 가지면서 자기들끼리 성경을 읽고 기도하며 종교적 행위를 하는 것입니다.
어린이들도 인간의 본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사회성이 있습니다. 그리고 서로서로 사교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자들은 그 행하는 열매들에 있어 성령의 영향을 받을 수 있습니다. 만일 그들이 성령에게서 받은 신앙심을 신앙적인 방식으로 그리고 신앙적인 목적을 위해 서로 교제를 증진시키고 싶어한다면 누가 그것을 말릴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 보시기에 성인인 우리 안에는 기도할 때 아이들보다 천 배나 더 나쁜 결함이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어린이와 어른 사이에 우리가 상상하는 만큼의 큰 차이가 없습니다. 이 부흥에서 하나님은 어린 아이들에 대한 놀라운 생각을 보여 주셨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무지하고 어리석은 어린 아이들은 다름 아닌 세상의 크고 학식 있는 자들입니다. 그들과 비교할 때 이 소자들은 어른이며 백 세나 된 사람들입니다.
- 조나단 에드워즈, 『부흥론』(전집7권), 균형잡힌 부흥론, 제3부, pp 505-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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