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드워즈, 종교적 정서론(신앙감정론)
에드워즈의 가장 중요한 기여는 부흥신학을 정립한 것이다. 에드워즈의 진정한 위대성은 성경적 신학자로서 그의 성취에서 발견해야 한다. 에드워즈를 일차적으로 철학적 신학자로 보는 것은 지난 세기가 빚은 거대한 오해다.
에드워즈의 저술들 중 가장 중요한 것들은 하나님의 역사로서의 부흥에 대한 것이다. 1735년 “코네티컷골짜기 부흥”에 대한 기록인 「놀라운 회심의 이야기」 대각성을 전후해 집필된「성령의 역사의 구별되는 표지들」 뉴잉글랜드의 현재 종교 부흥에 대한 소고」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으로「종교적 정서(신앙감정론, 전집7권)」이다.
제 1 장 「종교적 정서」의 배경
종교에 있어 “이성”과 “감정”의 기능에 대한 견해 차이가 촌시와 에드워즈를 갈라 놓았다. 촌시는 “사탄이 감정을 통해 이성에 역사한다. 성령은 이성을 통해 감정에 역사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종교에 있어 감정의 표출에 대해서는 지극히 회의적이었다. 종교는 지각 있는 일이므로 감정적 무질서는 절대 피해야 했다. 그 때문에 그는 부흥적 종교를 가짜라고 볼 수 밖에 없었다.
한편 에드워즈는 인간을 재창조되어야 하는 죄인으로 보았다. 재창조가 가능해지는 것은 오직 하나님이 인간에게 “마음의 새 감각”을 주실 때였다. 새 감각은 인간 존재의 중심에 있는 거룩한 정서로서, 전인을 통해 그 변화의 능력을 발산한다. 그러므로 그에게 있어 부흥은 단지 일회적인 경이가 아니었다. 그것은 말세의 죄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은혜로운 선물을 찾도록 촉구하는 수단이었다. 부흥이 전파됨에 따라 종국적으로는 하나님의 선하신 때에 하나님의 왕국의 충만함이 도래할 것이다. 이러한 견해 차이가 대각성 기간 중에 복음주의자들과 합리주의자들 사이를 양측으로 갈라놓았다.
촌시를 비롯한 반부흥주의자들이 합리주의의 성향을 노출하고 있었다면 반대편 극단에는 다소 광신적인 그룹이 있었다. 감정이 지나쳐서 열광적 내지 광신적인 수준에 이른 사람들이었다. 에드워즈는 참된 종교적 정서의 표지들과 거짓된 종교적 정서의 표지들을 구별해 줄 필요를 느꼈던 것이다. 그가 보기에 이들의 종교적 감정들 중에는 가짜도 많았는데, 그들 자신은 단지 자기들이 종교와 관련해서 풍부한 감정을 체험한다는 이유로 스스로 은혜의 상태에 있다고 주장했다.
그리하여 에드워즈는 참된 종교적 정서의 표지들과 거짓된 종교적 정서의 표지들을 구별해 줄 필요를 느꼈다. 즉, 거짓된 종교적 감정 상태 속에서 스스로 속고 있는 자들을 깨우치기 위해 그는 1742년과 1743년 초에 그 문제에 대한 설교를 이어갔다. 이 설교들이 나중에 1746년 출판된 「종교적 정서(신앙감정론)」의 일부를 이룬다.
제1차 대각성 기간 중에 신앙고백을 한 사람들을 에드워즈는 “봄에 개화한 꽃망울”에 비유했다. “나무 위에는 그러한 꽃망울들이 수없이 많이 맺혔다. 그것들은 모두 아름답고 소망스러웠다. 그러나 그것들 중 다수는 아무런 열매도 맺지 못하고 끝나버렸다.” 에드워즈는 어떤 사람이 참으로 회심되었는지 즉 그가 진정한 은혜를 체험했는지 아닌지를 판단할 수 있는 근거는 “꽃의 아름다운 색깔과 냄새가 아니라 그 후에 오는 잘 익은 열매들”이라고 확신했다. 그리하여 그는 「종교적 정서」에서 진정한 종교의 본질을 규명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하나님 보시기에 참된 신앙의 속성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었다. 사실, 에드워즈가 평생 동안 가장 깊은 관심을 가졌던 주제는 바로 이것이었다. 어떤 사람이 참된 그리스도인이며 회심의 본질이 무엇인가? 한마디로, 그것은 “무엇이 진정한 신앙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복음주의의 고전적 해답이었다.
이 책은 3부로 나누어진다. 1부는 종교에 있어 정서의 중요성과 절대필요성에 관한 변증이요, 2부는 참된 종교적 정서의 표지가 될 수도 있고 되지 않을 수도 있는, 그러나 종종 참된 표지로 받아들여지는 열두 가지요, 3부는 참된 종교적 정서의 열두 가지 표지에 대한 해설이다.
제 2 장 종교에서 정서의 위치
제1부에서 에드워즈가 제시하는 주제는 “참된 신앙은 대체로 정서에 있다”는 것이다. 그는 정서를 “영혼의 성향과 의지의 보다 왕성하고 감지될 수 있는 활동들”로 정의한다. 사람을 중립 상태로부터 혹은 단순한 동의로부터 움직여 그의 마음이 어떤 것을 소유하거나 거부하게 만드는 것이다. 성경은 도처에서 많은 부분이 감정으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보여준다고 그는 주장한다. 성경은 동정, 혹은 자비를 자주 참 신앙의 아주 위대하고 본질적인 요소로 언급한다고 지적한다. 성경은 참된 신앙을 “사랑”으로 요약할 수 있다고 말한다.
사랑은 하나님, 그리스도, 하나님의 백성, 그리고 인류에 대한 것이다. 그것은 감정들의 으뜸이요 모든 다른 종교적 정서들의 원천이다. 하나님에 대한 강렬하고 열렬하고 감동적인 사랑에서 필연적으로 모든 다른 종교적 정서들이 우러나온다. 에드워즈는 거룩한 정서가 없으면 참 신앙도 없다고 단정한다. 마음에 거룩한 정서를 낳지 않는 어떤 이성의 빛도 선한 것이 아니라고 단정한다. 은혜로운 정서를 낳지 않는 “어떤 마음의 습관이나 원리도 선하지 않으며 그러한 정서들로부터 나오지 않는 어떤 외적 열매도 선하지 않다.” “왜 그처럼 많은 꽃송이들이 아무런 영속적인 열매를 맺지 못했는가”를 제2부에서 다룬다.
제 3 장 종교적 정서의 시금석이 될 수 없는 표지들
1. 단지 종교적 감정을 강하게 표출하는 것이다. “종교적 정서가 대단히 크고 아주 높이 고양된다고 해서 그것이 참된 것이라거나 거짓된 것이라는 표지는 못 된다.” 참된 종교는 많은 부분이 종교적 감정으로 이루어진다. 진정한 신앙이 크면 클수록 종교적 감정도 커진다. 사랑은 감정이다.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강하게 사랑해서는 안 된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또 하나님과 거룩에 대한 아주 크고 강한 욕망을 가지지 말아야 하는가? 그렇지 않다. 성도들은 하나님에 대한 영적 기갈을 노래했다.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나이다.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생존하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이이다”(시42:1).
벧전1:7은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는 것”에 대해 말하고 있다. 성도들은 높은 정도의 기쁨을 드러내라는 요청을 받고 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라”(마5:12). “기뻐하고 뛰놀라”(눅6:23). “의인은 기뻐하여 하나님 앞에서 뛰놀며 기뻐하고 즐거워할지어다”(시68:3).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슥9:9).
한편, 단지 크다고 해서 그 종교적 감정이 정말 은혜롭고 신령한 것이라는 증거도 아니라고 에드워즈는 반대편 측면을 지적한다. 갈라디아 교인들은 한때 바울을 위해서 눈이라도 빼어주려 했을 것이라고 바울은 회고한다. 그러나 얼마 후 바울은 그들을 위한 수고가 헛된 것이 아니었던가 하는 염려를 표한다(갈4;11).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도 마찬가지였다고 에드워즈는 지적한다. 그들은 홍해 바다에서 하나님이 행하신 구원을 보고 하나님을 찬양했다. 언약을 제시했을 때 그들은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하겠나이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그들은 얼마나 신속히 다른 신에게로 향했는가? 불과 얼마 후 그들은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주위를 돌면서 춤추고 즐거워하지 않았는가? 예수 시대의 유대인들도 마찬가지였다고 에드워즈는 지적한다. 호산나를 외치던 그들이 얼마 후 “십자가에 못박으소서”라고 외치는 폭도들로 변했다. 에드워즈는, 종교적 감정이 고조된 경우라 할지라도 참된 신앙은 전혀 없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이 모든 “정통 신학자들”의 일치된 견해라고 결론 짓는다.
2. 종교적 감정들이 신체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고 해서 그것이 참된 종교의 본질을 소유한 것이라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도 아니요 반증하는 것도 아니다. 경련을 일으킨다든지 까무러친다든지 소리를 지른다든지 하는 신체적 반응이 꼭 은혜 받은 증거인 것은 아니라고 못을 박았다. 그러나 에드워즈는 집회 중에 육체적 반응을 나타내는 사람들 중에도 참 은혜를 체험한 자들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모든 감정은 어떤 식으로든, 어떤 면으로든 신체에 영향을 미친다”고 그는 지적한다. 마음이 “활발하고 왕성하게 작동할”때는 예외 없이 신체가 영향을 받는다. 그 영향은 지각되는 종류의 것이다. 그러나 어떤 감정이 신체에 커다란 영향을 준다고 해서 그것이 영적이라는 확증은 전혀 아니다.
은혜롭고 거룩한 감정들도 마찬가지다. 영적 감정들에는 커다란 능력이 있다. 반면, 인간은 연약하다. 혈과 육은 성경에서 아주 약한 것으로 나타난다. 특히, 위대한 영적, 천상적 작용들에 대해서는 더욱 그러하다(고전15:43, 50;마26:41). 성경에서 분명히 나타나는 사실은, 말할 수 없는 기쁨과 영광은 먼지와 재 같은 존재인 연약한 인간이 감당하기에는 너무 크고 강하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영적인 깨달음이 강하게 주어질 때 마음에 미치는 영향은 육체를 압도하게 만든다.
선지자 하박국은 하나님의 엄위하심에 대한 인식으로 자신의 육체가 받은 영향을 언급한다. “내가 들었으므로 내 창자가 흔들렸고, 그 목소리로 인하여 내 입술이 떨렸도다. 내 뼈에 썩이는 것이 들어왔으며 내 몸은 내 처소에서 떨리는도다”(합3:16). 시편 기자는 강렬한 감정이 신체에 미치는 영향을 언급한다. “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 내 마음과 육체가 생존하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시84:2).
3. 누가 종교적인 길들에 대해 유창하게 열렬히 그리고 많이 말한다고 해서 그의 정서가 참 은혜의 결과인지 아니면 거짓인지 판단할 수는 없다. 특별히 그들의 말이 감동적이고 진지하면 그들이 구원을 얻었다고 “성령의 구원하시는 영향력” 아래 있는 자로 판정해 버린다.
입술과 말뿐인 신앙은 성경에서 “잎만 무성한 나무”로 묘사된다. “잎사귀가 지나치게 많은 나무치고 열매를 많이 맺는 경우는 드물다”고 그는 꼬집는다. 자기의 종교적 체험에 대해 말을 많이 하는 사람에 대해 부정적이다. “어디에서건, 누구와 함께 하건 자기 체험을 늘어놓는” 것은 “차라리 나쁜 신호”라는 것이다.
사람이 종교적 일에 관해 많은 말을 하는 것은 분명히 마음이 그것에 의해 감동을 받았다는 의미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그가 은혜를 받았는지 받지 않았는지 판단할 근거가 못 된다. 거룩하지 않은 종교적 정서가 충만한 경우에도 종교에 대해 많을 말을 할 수 있다. 유대인들은 세례 요한에 대해 그리스도에 대해서도 종종 대단한 열심과 굉장한 열의를 보여 주었다. 그러나 “결국 그들 대부분은 어떻게 되었던가”
보통 사람들은 흔히 말을 번드르르하게 하는 사람들에게 쉽게 현혹되는 경향이 있다. 20세기 초에는 가짜 부흥사들이 말재주와 언변만 가지고 부흥회를 인도해도 수많은 회중들로부터 열광적인 반응을 불러 일으켰다. 어떤 설교자가 설교를 잘 한다고 할 때 그것이 단지 입담과 쇼맨쉽이 뛰어난 것인지 아니면 참으로 영성과 경건의 능력이 있기 때문인지 보통 사람들이 판단하기는 쉽지 않다. 에드워즈는 종교적 주제에 대해 단지 말을 많이 하고 또 잘하는 것이 참으로 은혜 받은 자라는 증거는 아니라고 판단했다.
4. 자기 힘으로 혹은 자기 노력으로 어떤 종교적 정서들을 불러 일으킨 것이 아니고 그것들이 저절로 떠올랐다고 해도 그것이 참된 정서라는 보장은 없다. 지정된 은혜의 수단을 소홀히 하면서 성령의 구원하시는 영향을 기대하는 것은 불합리한 주제 넘음이요 광신임을 인정했다. 그리고 어떤 경우에는 성령께서 보다 은밀하고 점진적으로 역사하신다는 것도 인정했다. 그러나 사람의 심령에 구원의 은혜를 낳기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한 능력으로서, 인간의 능력과는 전혀 다르고 자연적 능력을 완전히 초월하는 어떤 능력이 존재한다면 그것이 아주 “분명하고 명백하며 감지되는 방식으로” 나타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전혀 불합리한 일이 아니라고 그는 주장한다.
은혜란 “외적 작동자의 강력하고 효과적인 작용에 기인”하는 것이라면 그 은혜를 체험하는 자들이 그것을 “느끼고 분별하며 의식하는 것” 즉 “지각되는 방식으로 구별하는”것이 왜 불가능한 일이겠는가 하는 것이다. 결국, 그러한 체험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주위 사람들에 의해 부당하게도 망상가 취급을 받고 있다는 것이 에드워즈의 판단이었다. 한편, 감정이 본인도 설명할 수 없는 방식으로 일어났다고 해서 은혜로운 정서라는 주장도 성립되지 않는다. 억지로 일으킨 감정이 아니라고 해서 모두 참된 종교적 정서는 아니다. “다른 영”에 의한 것일 수도 있다.
성경은 우리에게 “영들을 다 믿지 말고 그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인지 시험하라!”고 명한다. 에드워즈는 많은 거짓 영들이 아주 다양하게 인간에게 역사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것들은 때로 광명의 천사들로 위장하여 아주 교묘하게, 그리고 아주 큰 능력으로 성령의 역사를 모방한다. 또 사탄의 역사도 다양하다. 사탄의 능력은 단지 공포와 무서운 암시들에서 뿐만 아니라 거짓 “위로와 기쁨”으로 나타날 때도 역시 “직접적이고 뚜렷하다”. 사람들의 마음에 새겨진 인상이 자가 발전의 결과도 아니고 악령으로부터 온 것도 아니며 성령으로부터 온 것이기는 하나 참된 종교적 정서가 아닌 거짓 것이 있다고 에드워즈는 경고한다. 그것은 성령의 구원하시는 영향이 아니라 일반적 영향의 결과다.
성령의 영향의 결과로 생긴 감정들이라 하더라도 그것을 무조건 참된 것으로 받지 않고 구원에 관계된 것과 일반적인 것 두 가지로 분류하는 데서 우리는 에드워즈의 영적 감수성이 얼마나 민감하여 그의 영적 분별이 얼마나 섬세한지를 잘 느낄 수 있다. 역시 악령이나 선한 영과 상관 없이, 약한 신체와 약한 두뇌의 소유자들로서 특별히 예민한 자들은 이유를 알 수 없는 “이상한 상상이나 생각, 그리고 강한 감정”이 자기들의 의지와 무관하게 떠오르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고 에드워즈는 지적한다.
5 성경 본문과 함께 어떤 종교적 정서가 생겨났다고 해서 그것이 참된 은혜의 결과거나 그것이 아니라는 증거는 될 수 없다. 즉, 어떤 성경 구절이 놀라운 방식으로 갑자기 마음에 떠오르는 것이 참 은혜의 임재의 결과일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얼마든지 있다는 것이다. 떠오른 성경의 내용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것이 떠오른 방식이 놀랍고 희귀한 것이라는 이유로 생겨난 감정은 참된 은혜의 체험이 아니라는 것이다.
성경의 참 열매로서, 성경 자체로부터, 성경을 바로 사용해서 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오용하여 생길 수 있다. 마귀가 성경 본문을 마음으로 끌어와서 그것을 잘못 적용하여 사람들을 속일 수 없다는 증거가 어디 있는가? 마귀는 예수를 시험할 때도 말씀을 이용했다. 기쁜 감정이 성구와 함께 온 정도가 아니라 성구로부터 온 것이라 하더라도 그 안에 구원을 주는 참 신앙이 없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 돌밭에 떨어진 씨는 말씀을 들을 때 커다란 기쁨을 얻었다. 그것은 말씀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6 종교적 정서 안에 사랑의 외양이 있다는 것은 그가 구원받았다는 증거가 될 수도 있고 되지 못할 수도 있다. 사랑이 가장 소중한 것이긴 하나 모조품이 있을 수 있다. 가만히 보면 어떤 것이 탁월한 것일수록 모조품이 더 많다. 철이나 구리보다 은의 모조품이 더 많은 이유가 그것이다. 다이아몬드나 루비도 모조품이 많다.
사랑과 겸손만큼 많은 모조품을 가진 은혜는 없다. 사람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을 가진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이 아주 격렬한 감정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은혜를 전혀 갖지 못했을 수 있다. 저 은혜 없는 유대인들이 바로 그러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먹지도 마시지도 자지도 않고 밤낮 예수를 따라다니면서 예수를 높이는 외침을 외쳤다. “당신이 어디로 가든지 저는 따르겠나이다!” 혹은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외쳤다.
7 여러 종류의 종교적 정서가 한꺼번에 나타난다고 해서 그것이 은혜로운 정서의 결과인지 아닌지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은 못 된다. 여러 가지의 거짓 감정들이 다양하게 나타날 수 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나 형제들에 대한 사랑에 있어서와 같이 모든 종류의 은혜로운 감정들에도 모조품이 있을 수 있다. 죄에 대한 경건한 슬픔도 모조품이 있다. 바로, 사울 왕, 아합 왕,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러한 경우였다.
자연인들도 모든 종류의 종교적 정서들을 흉내낼 수 있다고 에드워즈는 지적한다. 감정들의 속성을 볼 때 왜 한 감정이 고조되면 다른 감정들도 덩달아 자극을 받는지 이유를 설명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에드워즈가 누누이 강조하는 것처럼, 사랑은 모든 감정들 중 으뜸이며 그것들의 원천이다. 여기서 에드워즈는 한 가지 생생한 예를 제시한다.
한동안 지옥에 대한 공포로 인해 크게 질려 있었던 어떤 사람이 있었다 하자. 고민과 무시무시한 생각들로 인해 그는 거의 절망할 지경에 가까워졌다. 그러다가 사탄이준 어떤 망상에 의해 하나님이 그를 용서하셨으며, 그를 그 분의 극진한 사랑의 대상으로 받아 주셨으며, 그에게 영생을 약속하신다고 굳게 믿게 됨으로써 갑자기 구조되었다. 이를 테면, 환한 얼굴로 그에게 미소를 지으며 두 손을 활짝 펴고 피를 흘리는 사람에 대한 어떤 환상, 혹은 강한 상상이 갑자기 그 속에 일어날 때 그는 그 인물을 그리스도라 생각한다. 그리스도와 그의 충만하심 및 복음에 나타난 구원의 길의 탁월성에 대한 이해력이 밝아진 것은 아니면서도, 마치 이런 음성이나 말이 자신에게 들려오는 것 같다. “소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혹은 “두려워 말라. 네게 나를 주는 것이 아버지의 기쁘신 뜻이니라.” 전에 그리스도를 영접하거나 그와 연합된 적이 없으면서도 그는 그것을 하나님이 그에게 직접 주신 말씀으로 받는다.
이런 경우, 여러 종류의 종교적 감정들이 그의 마음속에 연이어 몰려들리라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의 마음은 기쁨으로 하늘까지 솟아오를 것이며, 그 가상의 하나님과 구속자에 대한 열렬한 감정으로 충만해질 것이다. 그는 자기가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을 입은 자라는 생각으로 경탄과 감사로 가득해질 것이며, 자신이 체험한 것에 대한 이야기를 신나게 늘어놓을 것이다. 그는 자신의 무가치함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순종할 것이며, 하나님 앞에 아주 겸손해질 것이다. 이처럼 에드워즈는 참 체험과 거짓 체험 사이에는 그 외양에 있어, 그리고 당사자가 그것을 말하고 표현하는 데 있어 아주 커다란 유사성이 있다고 주장한다.
8. 위로와 기쁨이 양심의 각성과 죄에 대한 깨달음 뒤에 오는 것이 종교적 감정의 성격을 확정할 수 있는 기준은 전혀 아니라고 에드워즈는 주장한다.
청교도들(윌리엄 퍼킨스, 토마스 셰퍼드, 토머스 후커)의 회심론에 의하면, 회심은 먼저 각성, 공포, 그리고 끔직한 불안 후에 전적 죄성과 무력함에 대한 인식 속에서 율법적 겸비가 따르고 그 다음에 이러저러한 빛과 위로가 오는 순서를 따른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한 반론은 ‘인간의 고안’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에드워즈는 그러한 순서대로 회심을 체험하는 것이 꼭 그 체험이 가짜라는 증거는 아니라는 것이었다. 즉 그러한 순서대로 체험한 정서가 참된 회심의 표지일 수 있다는 것이었다.
에드워즈는 구원이 감지되는 것이어야 한다고 확신했다. 그는 “하나님의 사람을 죄와 영원한 멸망으로부터 구원하시기 전에 그들에게 악에 대한 어떤 상당한 감각을 주셔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전혀 터무니 없는 주장이 아니라고 말한다.
구원을 얻는 사람들은 두 개의 극도로 다른 상태들을 거친다. 첫째는 정죄의 상태요 다음은 칭의와 축복의 상태다. 그러므로 구원받는 인간들이 이 두 상태 속에 느껴지는 방식으로 있어야만 한다는 것은 합리적이며 하나님의 지혜에도 부합되는 일이다.
에드워즈는 이 점을 거듭거듭 강조한다. 회심되기 원하는 자들은 먼저 “비통한 재앙과 무서운 비참”의 상태에 있어야 한다. 그 후에 “느껴지는 방식으로” 구원과 행복의 상태에 있어야 한다. 그들은 먼저 그들의 “절대적 극도의 필요”를 느낀 후 “그리스도의 충족성과 그를 통한 하나님의 자비”를 느껴야 한다는 것이다.
에드워즈는 어떤 의미에서 칼빈의 “죽임”과 “살림”에 해당하는 이 두 단계의 체험을 회심의 거의 필수적 요소로 본다. 그에 의하면 하나님의 “통상적” 구원 방식은 사람으로 하여금 먼저 “광야”의 체험을 거치게 한 후 “위로”하는 것이었다. 즉 먼저 인간의 무력과 비참을 깨닫게 한 후 죄인들의 심령에 은혜를 베푸시는 것이 하나님의 일반적 구원 순서라는 것이었다.
에드워즈는 이러한 일종의 “낮아짐”과 “높아짐”의 이중적 단계를 거치는 것이 성경적 구원 방법이라고 주장한다. 성경에는 그러한 예들이 얼마든지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하기 전에 그들은 그것을 위한 준비의 단계를 거쳤다. 자신들의 비참한 처지를 보고 중한 멍에로 인해 하나님께 부르짖었다는 것이다. 홍해에서 구원받기 전에도 그들은 큰 고민에 빠졌었다. 뒤에는 추적해 오는 애굽 군대, 앞에는 홍해로 인해 진퇴양난에 빠져 있었다. 스스로 아무 것도 할 수없는 무력함을 발견했다는 것이다.
가나안 안식에 들어가 젖과 꿀을 즐기기 전에도 마찬가지였다. 하나님은 그들을 인도해서 크고도 무서운 광야를 통과하게 하셨다. 그리하여 그들을 낮추시고 그들의 마음에 무엇이 있는지를 보게 하셨다. 결국 그들에게 선을 행하셨다(신8:2,16).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인 요셉도 그러했다. 그는 자기 형들을 먼저 큰 당황과 고민 속에 빠뜨렸다. 그리하여 그들이 자신들의 죄를 반성하고 큰 죄를 지었다고 말하면서 자신들을 전적으로 그의 처분에 맡기게 한 후 그들에게 자신이 동생 요셉임을 드러낸다.
신약성경에서도 12년간 혈루병 앓던 여인이 치료받기 전에 어떠했는가? 자신의 모든 것을 지상의 의사들로부터 치료받는 데 다 써 버렸다. 그런 다음, 그녀는 아무 돈도 값도 없이 위대한 의원이신 예수께 왔다. 그녀의 요구를 완전히 거부하고 그녀를 처참하게 낮추셨다. 스스로 개라고 불리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게 하신 다음 그녀에게 자비를 베푸셨다.
사도 바울은 아시아에서 놀라운 구조를 받기 전에 감당키 어려운 정도의 고난을 받았다. 그리하여 그는 살 소망이 끊어졌다고 생각했다. 그런 다음, 그는 자신을 의뢰하지 않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되었다. 예수의 제자들도 폭풍이 와서 배가 가라앉으려 했을 때 그들은 “주여 우리를 건지소서, 우리가 죽겠나이다”고 소리쳤다.
그리하여 에드워즈는 하나님의 통상적 자기 현현 방법이 처음에는 “무섭게” 그리고 다음에는 “자비롭게”라고 주장한다. 하나님은 “대개 먼저 자신을 무서운 방식으로 드러내신 후 위로”를 주신다.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나타나시기 전에도 먼저 커다란 어두움의 공포가 있었다. 시내 산의 모세에게도 먼저 하나님의 두려운 위엄의 공포가 있었다. 엘리야에게는 폭풍, 지진, 불 다음에 고요하고 작고 달콤한 음성이 들려왔다. 다니엘은 먼저 그를 두렵게 한 번개 같은 그리스도의 얼굴을 보았다. 일만 달란트 빚진 종에게 왕은 먼저 정죄를 선언하고 그 식솔들을 모두 노예로 처분하라고 한 후 그 빚을 탕감했다. 돌아온 탕자는 극단적 상황에서 자신의 무가치함을 인정했다. 아담과 하와는 먼저 하나님의 위엄에 질린 후 여인의 씨에 대한 약속으로 위로를 받았다.
다른 한편, 기쁨과 위로가 커다란 공포와 지옥에 대한 엄청난 두려움 뒤에 따라온다고 해서 그 기쁨과 위로가 올바른 것이라는 증거도 아니라고 에드워즈는 주장한다. 비록 “양심이 죄를 깨닫는” 단계가 회심의 전 경험으로 필요하며, 그러한 죄에 대한 양심적 확신이 종종 공포를 야기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공포가 죄에 대한 깨달음의 본질은 아니다. 공포는 종종 다른 요인들에 기인할 수 있다. 성령의 영향에 의한 죄의 확신의 본질은 다음 몇 가지에 대한 확신이다. 즉, “마음과 삶의 죄악됨”, “가공할 엄위와 무한한 거룩의 하나님을 대항해 지은 죄의 무서움”, “죄에 대한 증오” 그리고 “하나님이 그것을 벌하시는 것은 아주 정의롭다”는 확신이 그것들이다.
그러나 유사한 감정과 체험을 하면서도 자신들의 마음과 삶의 죄악됨을 참으로 확신시켜 주는 밝은 양심은 거의 가지지 못하고 있는 경우들이 있다고 했다. 마귀도 사람을 공포에 빠뜨릴 수는 있으므로 공포 후에 어떤 긍정적인 감정이 온다고 해서 그것이 다 참된 은혜는 아니다. 에드워즈는 은혜의 모조품이 얼마나 정교할 수 있는지 그 가능성을 열거했다.
예를 들면, 마귀는 은혜의 준비 단계마저도 모조할 수 있다고 보았다. 심지어, 죄에 대한 커다란 확신과 그로 인해 겸비해진 마음도 모양만 모방할 수 있다. 죄에 대한 깨달음 뒤에 위로가 따르는 그 순서도 흉내낼 수 있다. “회심에 있어 성령의 역사의 순서라고 일반적으로 주장되는 그러한 순서와 방법을 정확하고 분명히 밟은” 자들, 즉 “죄에 대한 깨달음 후 감정을 체험하는 식의 규칙대로 회심한 것처럼 보이고 자신들의 그러한 체험을 멋있게 진술한” 자들이 결국은 참 회심자가 아닌 것으로 드러나는 일들이 종종 있다는 것이다.
나아가서 에드워즈는 당시의 청교도 전통 속에서는 아주 급진적인 주장을 제시한다. 그는 그 죄의 각성과 위로의 “분명한” 체험이 없다고 해서 회심되지 않았다고 말할 수는 없다는 다소 기존의 자기 주장과 상반되는 듯한 주장을 내어 놓는다.
“단계와 방법에 관한 이 명료성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어떤 사람이 회심했다는 분명한 표지는 아니듯이 그것이 없다고 해서 어떤 사람이 회심되지 않았다는 증거도 전혀 아니다”.
에드워즈가 왔다 갔다 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에드워즈는 깨달음의 필요성에 관한 자신의 강조를 고수하고 있다. “자기의 죄의 비참, 그리고 자기 자신의 공허함과 무력함 또한 자신이 영원히 정죄되기에 합당하다는 사실을 확실히 깨닫지 못한 죄인은 진심으로 그리스도를 자기의 구주로 영접할 수 없으며 따라서 그러한 확실한 깨달음이 어떤 식으로든 자기 영혼에 일어난 역사 속에 포함되어야 한다는 것이 명백한 성경적 원리로 증명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므로 에드워즈가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다음의 것이다. 즉, 참된 회심자라 할지라도 그가 회심에 이르는 은혜를 받는 과정에,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의 행위에 포함된, 혹은 신앙의 행위에 전제된 그 요소들이 때로는 희미하게 나타나 마치 어떤 것들이 생략된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는 청교도들의 회심의 정형화, 획일화하는 것에 반발하고 있는 것이다. 바람이 분다는 것은 그 소리를 들어 혹은 그 영향을 보고 알 수 있지만 그것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는 알 수 없는 것처럼 회심에 있어서 성령의 역사도 신비하고 다양해서 인간이 측량하기 어렵다는 일반적 진리를 에드워즈가 여기서 다시금 확신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결국 누군가가 정말 회심의 은혜를 체험했는지를 판단할 수 있는 최종적 시금석은 “열매” 즉 영혼에 일어난 “결과의 성격”이라고 에드워즈는 주장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주 성경에서 “열매의 성격”에 의해 자신들을 시험해 보라는 권고를 받고 있다. 그러나 그것들을 생산하는 성령의 “방법”에 의해 그렇게 해보라는 권고는 아무 데도 없다. 결국, 한 사람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인지 아닌지는 그의 삶과 인격을 보고 판단하는 것이 가장 정확하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참된 중생의 체험 없이 단지 도덕적 수양과 훈련에 의해 남들 보기에 훌륭하고 도덕적인 삶을 사는 사람들은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하는 질문이 나올 수 있다.
9 교회에서 살다시피 하는 것이 참 회심의 증거는 아니다. 한국교회가 귀담아 들어야 할 점이다. “종교적인 문제에 많은 시간을 사용하고 예배와 외적 의무들에 열심히 참여하는 것”이 “참 신앙의 본질”을 소유하고 있다는 확실한 표지는 아니라는 것이다. 참된 은혜는 사람으로 하여금 성경 읽고 기도하고 찬송하고 설교를 듣는 등의 종교적 활동들을 즐거워하게 만드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예배는 하나님께 가증한 것들이었다. 그들은 월삭, 안식일, 대회 등의 절기가 아주 많았다. 손을 펴고 많이 기도했다(사 1:2-15).
구원 얻는 신앙이 없는 자들도 종교적 의무와 규례를 각근히 준수할 수 있다. 돌 밭같은 마음을 가진 청중들도 기쁨으로 말씀을 들었다. 바리새인들도 그러했다. 그들은 길게 기도하고 이레에 두 번씩 금식했다. 단지 교회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고 각종 교회 집회나 모임에 부지런히 참석하는 것이 참 은혜를 받았다는 증거는 못 된다는 것이다. 물론, 그것이 구원받지 못했다는 증거도 아니다.
10 입에 “할렐루야”,“아멘”을 달고 다니는 것이 참 은혜의 증거는 아니다.
한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의 소위 “은혜 충만한" 사람들, 특히 일부 은사주의자들이 귀담아 들어야 할 내용이다. 그것은 “입으로 하나님을 많이 찬양하고 영화롭게 하는 것으로는 종교적 정서의 본질에 대해 어떤 것도 확실히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그것이 참 회심의 표지가 될 수 없으며 또 거짓 은혜의 증거도 아니다. 에드워즈는 그러한 것이 꼭 그가 남들보다 더 은혜가 충만하다거나 참된 종교적 정서를 소유했다는 증거가 아니라고 지적하고 있다.
“죽지 않은 교만”과 “하나님에 대한 적대감”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런 말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에드워즈는 사울을 그러한 예로 제시한다. 사울은 굴복되지 않은 교만과 다윗에 대한 적대감을 그대로 가지고 있으면서도 자신의 무가치함을 인정하고 다윗의 전례 없는 자비를 높이면서 외쳤다. “내가 어리석은 일을 하였으니 대단히 잘못되었도다”(삼사 26:21).
11 구원의 확신이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하는 것도 그 정서가 참된 것이거나 거짓된 것이라는 표지가 못된다고 에드워즈는 지적한다. 이것은 한국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의미심장한 경고가 된다. 특히 복음주의적 신자들 사이에서는 구원의 확신을 너무 쉽게 말하는 경우들이 발견되기 때문이다. 신자가 구원의 확신이 없다는 것은 책망 받을 일이라고 그는 주장한다. “그리스도가 그들 안에 있는지 없는지 알지 못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에게 아주 합당치 않은 일이며 또 크게 비난받을 만한 일(고후13:5)”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에드워즈는 본인들 스스로 표명하는 자신감이 구원의 확실성의 근거가 될 수는 없다고 본다. “그것이 얼마나 크고 강한가의 여부와 상관 없이 그들의 자신감만 보고서는 어떤 확실한 단정도 내릴 수 없다.” 바리새인들은 자기가 성도이며 “가장 휼륭한 성도”임을 결코 의심하지 않았다. 오히려, 참 성도들이 가끔 자신의 구원에 대해 의심을 한다.
에드워즈는 위선적 확신의 몇 가지 특징을 제시한다. 첫째, 위선자들은 신중한 정신이 결여되어 있다. 그러나 참 은혜 받은 사람들은 각성과 신중함이 점점 더해 간다. 둘째, 위선자들은 자기의 영적 소경 상태, 자기 마음의 거짓됨, 자기의 낮은 이해력에 대한 인식이 없다. 셋째, 마귀는 위선자들의 소망은 건드리지 않는다. 넷째, 거짓 소망을 가진 자들은 자기 부패에 대한 인식이 결여되어 있다.
믿음의 전제조건으로서의 “영적 빛”- 에드워즈는 여기서 “사람이 어떻게 믿음을 가질 수 있게 되는가?”의 문제를 다룬다. 그는 복음의 빛이 비취어야 믿을 수 있다고 본다. 억지로 믿거나 믿기로 결단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성령의 조명 없이 자기 의지만으로 믿음을 가질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현대에 유행하는 일반적 복음전도 방식에 중대한 도전이 되는 주장이다. 현대에 유행하는 복음 전도자들은 청중들이 자기 의지를 발동해서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는 것을 강조한다. 즉, 영적 조명에 대한 언급은 없이 단지 누구나 지금 이 자리에서 복음을 믿기만 하면, 혹은 받아들이기로 결단만 하면 구원받는다는 것이 현대 복음 전도의 핵심이다. 그러나 에드워즈는 “아무 영적 빛이나 조명 없이 사람들에게 밀어붙이거나 촉구하는것은 흑암의 왕자의 기만을 크게 도와 주는 경향이 있다”고 주장한다.
참된 믿음을 얻기 위해서는 신령한 조명이 꼭 필요하며 그것이 없는 믿음은 거짓 믿음이라고 확신했다. “영적 빛이 없는 믿음은 빛의 자녀들의 믿음이 아니라 어두움의 자녀들의 주제넘은 상상이다.” 소위 무조건 믿으면 구원받는다는 “싸구려 믿음주의”에 대한 정면 공격인 것이다. 에드워즈가 우리 시대에 살았더라면 현대의 기독교가 그처럼 피상적이고 그리스도인들이 그처럼 무력하며 불신자들과 큰 차이가 없는 삶을 사는 이유는 신령한 조명 없이 구원의 확신이 있다고 자처하는 데 있다고 진단했을지 모른다.
에드워즈는, 우리가 조명 받은 만큼만 믿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인간은 어떤 영적 빛이 없이는 믿음을 구사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영적 빛을 가진 꼭 그 정도만 믿음을 구사할 수 있다.” 에드워즈에게 있어 믿음은 신령한 지식과 거의 동의어였다. 알지 못하고는 믿을 수 없었고 빛을 받지 못하고는 알 수 없었다. “인간은 하나님을 아는 만큼만 그를 신뢰할 것이다. 그리고 인간은 하나님의 충만하심과 신실하심을 본 것 이상으로 한 치도 더 그분에 대한 믿음을 구사할 수 없다.”
체험과 은혜와 믿음의 상관관계- 에드워즈는 “생생한 은혜의 역사” 혹은 “감지되는 기독교적 체험” 없이 하나님을 굳게 신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여기서 은혜의 체험이란 바로 신령한 빛을 비췸 받아 하나님과 그의 진리를 보게 되는 것과 동의어이다. 그러므로 영적 조명을 통해 하나님과 그의 말씀에 대한 지식이 생기기 전에는 하나님과 그의 말씀에 대한 믿음 내지 신뢰를 가지는 것이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이었다.
체험, 즉 영적 조명 없이 “믿음으로 산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믿음에 대한 터무니없는 개념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구원받았다고 믿는 것을 믿음이라고 생각한다. 만일 그런 것이 믿음이라면 바리새인들도 굉장한 믿음을 가졌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그들 중 일부는 사죄 받을 수 없는 죄를 지었다고 그리스도는 가르쳤다.
성경에 의하면 믿음은 그것에 의해 구원으로 인도되는 것이지 자기가 이미 구원받았다고 믿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자기가 믿음을 가졌다고 믿는 것”이거나 “자기가 믿는다고 믿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요즘처럼 전도를 통해 그 자리에서 예수를 영접하고 믿게 되었다고 생각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중요한 도전이 되는 주장이다.
에드워즈는 체험 외에는 은혜의 다른 증거가 없다고 보았다. “대단한 체험을 하는 것은, 만일 그 체험들이 참된 것이고 언급할 가치가 있는 것이라면, 대단한 은혜를 받는 것과 동일한 일이다.” 참 체험이 있으면 반드시 은혜가 따른다. “참 체험들치고 은혜의 역사가 없는 것은 없다. 그리고 은혜와 성결의 정도는 참 체험의 정도에 정확히 비례한다.
”체험을 파먹고 사는 경우들이 있다. 그것은 자기 체험을 의로 삼고서 그리스도의 탁월성과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지 않는 경우다. 즉, 그들은 자기에게로 눈을 돌려 자기 성취와 자기의 높은 체험, 그리고 자기들이 만났던 위대한 일들만 바라보면서 즐거워한다. 그것들이 그들의 눈에는 너무나 찬란하고 아름다워 보인다. 그래서 하나님도 자기들의 그러한 체험들에 대해 자기들만큼이나 대단한 평가를 하고 계시리라 생각한다.
에드워즈는 이러한 태도가 하나님 보시기에 불신자의 엄청난 부도덕보다 더 가증한 것이라고 비난한다. 과거의 어떤 체험을 의지하여 하나님과 자신의 관계를 낙관하는 이들이 귀담아 들어야 할 지적일 것이다. “이것은 자기 자신의 체험을 먹고 사는 아주 심한 경우다. 그러한 자들은 지옥으로 가는 고속도로 상에 있다.”
에드워즈에 의하면, 옛날에 받은 은혜가 있다고 하더라도 현재 “정욕과 부패”가 영혼을 지배하고 있어 영적으로 어두워져 있으면 “은혜로운 자신감과 확신”을 가질 수 없다. 영적으로 죽어 있는 사람들에게, 어둠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신뢰해야 하며, 그리스도를 의지해야지 체험을 의지하면 안 된다고 타이르고, 믿음으로 살아야지 보는 것으로 행하면 안 된다는 성구를 인용하면서 구원을 확신하라고 권고하는 것은 “하나님이 세우신 지혜롭고 은혜로운 질서에 반하는 일”이다.
성도의 상황이 불투명해 보일 때도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것과 영적 조명 없이 자신의 구원을 확신하는 것은 전혀 다른 것이다.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신뢰해야 한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신령한 빛이 비취는 체험 없이 자신의 구원을 직관하는 것과는 상관 없는 일이다.
12 외적 모습과 자기 자신에 대해 하는 말이 경건한 자들이 듣기에 아주 감동적이고 유쾌하여 그들의 호의를 얻고 마음을 사로잡는 것도 참된 종교적 정서의 표지로 단정할 수 없다. 위선자들도 많은 종류의 종교적 정서를 소유할 수 있다. 그들도 하나님에 대한 지극한 사랑과 아주 비슷한 일종의 하나님에 대한 애정을 가질 수 있으며 형제들에 대한 일종의 사랑을 가질 수 있다. 나아가서, 하나님의 완전하심과 사역에 대한 경탄, 죄에 대한 슬픔, 순종, 자기 비하, 감사, 기쁨, 종교적 갈망, 하나님의 나라와 영혼들의 구원을 위한 열심 등의 외양을 다 가질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감정들이 커다란 각성과 양심의 가책 후에 올 수 있다.
모조품 사랑과 기쁨이 참된 회심자들이 경험한 것과 같은 순서로 올 수도 있다. 실로, “성도들 속에 있는 모든 구원 얻게 하는 은혜는 그 모조품들이 위선자들 속에 존재한다. 영적이고 아주 현명한 사람들조차도 성령의 참된 구원의 역사로 쉽게 착각할 수 있는 유사품들이 위선자들에게 있다.”
우리는 에드워즈가 참과 거짓을 구별하는 데 얼마나 엄격한지를 본다. 그리고 참 회심과 거짓 회심, 참 구원의 은혜와 거짓 은혜가 외양에 있어서 얼마나 비슷할 수 있는지를 본다. 염소들도 양들과 얼마나 비슷할 수 있는지를 본다. 한편, 한국 교회는 이런 참 신앙과 거짓 신앙의 구분에 얼마나 무관심하며 무능력한지를 느낀다. 얼마나 쉽게 번쩍이는 것은 모두 금이라 간주하는가?
어쩌면 한국 교회는 그러한 구분을 하고 싶지 않은지 모른다. 지금 한 사람이라도 교인으로 더 받아들여 교인 수를 늘리고 싶은 판에 언제 진짜와 거짓을 구분한다는 것인가? 이러한 현상은 에드워즈 식으로 옥석을 가리다가는 교회에 한 사람도 남아 있지 않게 될 것이라는 두려움과 반발심 때문일 수도 있다.
- 양낙홍, 『체험과 부흥의 신학자 조나단 에드워즈의 생애와 사상』,제5부 종교적 정서(요약1)(pp 439-5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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