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박진호컬럼

정당한 요구도 거절하는 예수님 (눅12:13-15)

새벽지기1 2016. 3. 26. 22:23

“무리 중에 한 사람이 이르되 선생님 내 형을 명하여 유업을 나와 나누게 하소서 하니 이르시되 이 사람이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 하시고 저희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하시고”(눅12:13-15)


기독교 신자의 기도는 항상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렸습니다”는 말로 마치게 되어 있습니다. 종교적 격식을 갖추라는 뜻이 아닙니다. 본질상 진노의 자녀로 정말 죽을 수밖에 없었던 한 죄인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고백입니다. 하나님께 기도드릴 수 있고 또 하나님이 그 기도에 응답을 하실 수 있는 모든 근거가 오직 예수님이라는 뜻입니다. 흑암에서 빛으로 나와 십자가 은혜 안에 들어온 신자로서의 바뀐 신분, 소속, 위치, 특권에 의지해서 기도드리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신자의 모든 기도가 예수님이 십자가 사역으로 이루고자 하신 뜻과 계획에 맞는 내용이 되어야 함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역으로 말해 기도의 그 마침 말은 주님이 세상에 오신 목적과 다른 내용의 기도는 응답이 안 될 수 있다는 것을 겸손하게 인정하는 의미도 포함됩니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신자가 “예수님의 이름으로”라는 문구를 마치 만병통치약이나 도깨비 방망이처럼 오해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본문에 따르면 어떤 사람이 요청한 도움을 예수님은 바로 거절했는데 요즘으로 치면 기도했는데도 응답이 안 된 셈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요구가 정당한 것이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우리도 아주 정당한 간구를 하는데도 응답이 안 되는 경우가 있듯이 말입니다.


상속에 대한 규례는 율법에 명시(민27:1-11, 신21:15) 되어 있습니다. 만약 그 법규에 따라 정당하게 분배되지 않으면 랍비에게 소송을 제기할 수 있고 랍비는 재판관 역할을 해주었습니다. 본문에서 형이 재산 분배를 아예 하지 않으려는지 아니면 규정보다 더 많이 차지하려는지 또 그 이유에 대한 설명은 없습니다. 그러나 동생이 소송을 제기할 정도면 형이 잘못을 범했고 형에게 여러 번 시정하라고 요구했음에도 들어주지 않았던 것은 분명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에게 율법대로 정당하게 분배하도록 도와달라는 정당한 요청을 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이 그 요청을 거절하신 일차적인 이유는 당신의 말씀대로 다른 랍비처럼 단순히 물건을 나누는 재판관의 역할은 맡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당신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현실의 온갖 고난과 질병 같은 문제를 해결해주려는 뜻이 아니라 영생을 주러 오셨기 때문입니다. 다른 말로 재산을 공평하게 나누어 주는 것이 죄와 사단과 사망의 멍에 아래 있는 인류에게 영혼 구원을 주는 문제와는 하등 연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그렇다 해도 또 하나 이상한 것은 그 요구를 예수님은 ‘탐심’이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그것도 ‘더 많다’는 뜻과 ‘소유하다’는 뜻의 두 단어가 합성된 단어를 사용해 “만족할 줄 모르는 욕심(탐욕)”이라는 의미로 말했습니다. 아무리 예수님이지만 부모의 재산을 당시 사회에 통용되는 대로 아니 하나님이 정해주신 율법대로 나누겠다는 것을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어떻게 ‘탐욕’이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까?


예수님은 랍비에게 재판을 청구해서라도 유산을 나누려다 보면 반드시 분쟁이 생기게 되고 결국에는 형제간에 원수 사이가 되는 것을 감안한 것입니다. 율법마저 무시하는 그 형의 탐욕스런 성격으로 봐서는 절대로 온당히 수긍하지 않을 것이며 온갖 핑계와 음해를 동생에게 덮어씌울 것이 빤하지 않습니까? 사람이 원수가 아니라 돈이 원수가 되어 반드시 사람 사이도 원수가 됩니다. 예수님의 뜻은 재산보다 형제간의 우의를 먼저 생각하되 만약 그 우의에 금이 갈 정도라면 심지어 형제가 잘못해도 따지지 말라는 것입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유산을 독차지하겠다는 형의 욕심이나 형제간에 재판을 해서라도 자기 몫은 반드시 찾고야 말겠다는 동생의 심보나 사실은 오십보백보라는 것입니다. 즉 둘 다 하늘의 보화보다는 이 땅의 재물에만 목표를 둔 인생을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만약 동생이 재판을 해서 정당한 몫을 되돌려 받는다 해도 그 인생 목표를 바꾸지 않는 한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단순히 형제니까 송사 같은 것은 하지 말고 무조건 좋은 것이 좋다는 식으로 지내라는 뜻이 아닙니다. 형제를 떠나서 각자의 인생과 삶을 사는 근본적인 가치관과 태도를 문제 삼은 것입니다. 나아가 잘못한 형에게 재판을 걸지 말라는 것이 무조건 손해 보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그 형에게 회개의 기회를 주라는 것입니다. 최악의 경우에 형이 회개를 하지 않더라도 신자는 그렇게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예수님을 따르는 삶이 반드시 고생을 자초해야만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주님이 신자를 통해 하늘의 보화를 땅에 펼치고 있기 때문에 빛은 우리를 통해 드러나지만 땅의 더러움은 반드시 우리에게 묻게 마련인 것입니다. 따라서 이 땅에서 주님의 사랑과 공의를 증거 하기위해 당하는 손해는 신자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다른 말로 신자가 걸어가는 인생 길 앞에는 항상 두 가지 선택의 가능성만 놓여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을 증거하기 위해 세상을 포기하느냐?”, 아니면 “세상을 택하기 위해 주님을 증거하지 않느냐?”입니다. 그리고 그 선택에 따라오는 현실적인 풍요나 궁핍은 각 개별적 경우에 맞추어 하나님이 전적으로 주관할 사항입니다. 다른 말로 신자의 현실적 형편은 그리스도 십자가를 증거 하기 위한 무대장치로서 그것은 그때마다 하나님이 가장 적합하게 배열하고 꾸미실 뿐입니다. 


신자는 그 무대에 선 주연배우에 불과합니다. 배우가 배경의 무대장치가 마음에 안 든다고 그 맡은 역할을 그만 둘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차라리 관객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세상 불신자도 사실은 하나님을 알고 싶어 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갈망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예수님이 꾸민 연극에 신자가 과연 얼마나 맡은 역할을 잘 소화하는지 그래서 그 연극에 자기도 동참하고 싶은지는 우선 관객의 입장에서 지켜본 후 결정하려고 합니다. 


신자가 무대가 마음에 안 든다고 감독에게 대들거나 그 역할을 거부하면 극단에서 쫓겨나기 밖에 더하겠습니까? 또 퇴짜 맞은 배우는 아무 데서도 받아주지 않는 처량한 신세가 되지 않겠습니까?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아무 쓸데없이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입니다. 배우의 보상은 관객의 갈채와 감독의 칭찬이지 무대 장치가 결코 아니지 않습니까?


나아가 신자에게 보내는 불신자의 갈채는 단순히 그 사람을 두고 칭찬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저렇게 맡은 역할을 잘 하는 것을 보니까 그 감독이 아주 훌륭한가보다는 칭찬을 들어야 합니다. 그래서 관객인 불신자도 그 연극에 참여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대신에 신자 자신이 받을 칭찬은 불신자로선 받을 수 없는 천국 면류관으로 따로 예비 되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형을 고소하러 온 자에게 단순히 돈을 밝히는 탐심 때문에 야단치지 않았습니다.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에 있지 않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생명’은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 곧 영생(헬라어로 ‘조에’)을 가리킵니다.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은 영생을 얻는 것인데 돈이 많고 적음이 그 목적을 달성하는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참 생명에 영향을 끼치지 못하는 일로 시간과 노력을 허비하는 것은 탐심입니다. 또 그 가운데는 사회적, 법률적, 도덕적, 종교적으로 정당한 일도 얼마든지 포함됩니다. 또 그런 정당한 요구를 하는 기도가 만약 신자나 신자 주위의 사람이 하나님의 참 생명을 얻는 것과 아무 상관이 없다면 응답이 안 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건대 어떤 기도가 응답을 잘 받느냐에 관해 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신자라면 이 땅에서 과연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근본적인 인생관과 가치관을 자기를 통한 십자가 복음의 확장에 두느냐 아니면 자기의 소유를 쌓아서 자기를 증명하는 데에 두느냐의 문제입니다. 전자의 기도를 할 때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라는 말이 그 권능을 제대로 발휘하지만 후자의 경우는 결코 그렇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보기에 정당해 보이는 것도 하나님 보시기에 정당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땅을, 특별히 신자를 예수님의 십자가에 드러난 사랑과 공의를 동시에 만족시키는 기준으로만 다스리십니다. 그분에게는 그 기준에 합당하면 정당한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세상에서 아무리 정당해도 정당하지 않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를 위해 살고 죽는 기도만이 여러분의 모든 기도가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