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조나단에드워즈

하나님의 진리를 철저하게 아는 것의 중요성과 유익

새벽지기1 2016. 3. 18. 07:08

(청교도 도서관)

사고의 중요성’란 글을 읽고, 조나단 에드워즈 목사님의 ‘하나님의 진리를 철저하게 아는 것의 중요성과 유익’(The Importance and Advantage of a Through Knowledge of Divine Truth)이라는 설교가 생각났다. 설교를 묵상하고 나니 마음이 얼마나 시원한지 모르겠다.

 

이 설교에서 조나단 에드워즈 목사님은 모든 성도가 신학자가 되어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하셨다. 하나님께서 이성을 주신 이유는 세상적인 것을 생각하라고 주신 것이 아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성으로 철학도 하고 학문도 연구하며, 장사도 하고, 맡은 일을 하는데 적극적으로 사용한다. 이를 일머리라고 한다. 일머리가 있는 사람이 세상에서는 성공하고 유능한 사람이라고 인정받는다. 크리스천도 하나님의 명예를 손상시키지 않으려면 일머리가 좋아야 함은 물론이다. 크리스천이 일머리를 높이는 방법은, 내 경우에 의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생각하는 것이다. 내가 일처리를 제대로 하지 못하면 하나님의 명예가 실추된다는 생각만 해도 나는 거의 'out of mind'가 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명예를 실추하지 않으려면 하나님의 뜻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하나님의 뜻을 알려면 성경을 공부해야 한다. 이때 이성이 역할을 한다. 하지만 이성 그 자체가 하나님 말씀을 계시하는 것이 아니라, 매개체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인간의 본성상 하나님을 계시를 받기 위해서는 먼저 이성적으로 하나님을 아는 과정이 있다. 그후 계시의 역사가 있다. 이 과정은 평생 계속 된다. 따라서 은혜를 받은 사람은 더욱 더 하나님의 알고 싶어 하게 된다. 그러니 주야로 말씀을 묵상한다. 그리고 어느 순간 또한 계시를 받아 묵상한 말씀이 깨달아지며, 거기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의지가 발동하여 말씀을 실천한다. 실천할 때 말씀이 완성되며, 이때 더 많은 지식을 얻게 되므로, 성도는 계속해서 말씀을 묵상하고(이성)-계시를 받고-실천한다.

하지 말라고 백방으로 막아도, 늘 하나님 말씀을 갈급한다. 하나님 말씀을 알면 알수록 더욱 말씀에 거지가 되어 하나님께 말씀을 계속 간구한다.

조다단 에드워즈는 말한다. 하나님 말씀을 철저하게 알려고 하지 않는 자는 동물과 다를 바가 없다고.

 

말세에 사는 축복 중의 하나는, 바로 말씀의 계시의 측면에서 보자면, 그 어느 때보다 말씀의 비밀이 열리는 데 있다. 따라서 그 말씀을 깨닫고 실천할 때 누리는 기쁨은 정신 못차릴 정도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말세를 사는 성도에게 베푸시는 최대의 위로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랑이 많으시고 공변되신다.

 

 


하나님의 진리를 철저하게 아는 것의 중요성과 유익

The Importance and Advantage of a Through Knowledge of Divine Truth

 

제1부 본문

“때가 오래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될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가 무엇인지 누구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할 것이니 젖이나 먹고 단단한 식물을 못 먹을 자가 되었도다”(히 5:12).

본문은 사도가 히브리서를 받는 성도들 안에 있는 어떤 결함에 대해 불평하는 말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관찰할 수 있습니다.

 

교리적 지식의 부족을 책망함


첫째, 사도는 히브리서의 수신자들에게 마땅히 있어야 할 기독교의 교리와 신앙의 비밀을 아는 지식이 결핍되어 있다는 것을 책망합니다. 사도는 그들이 마땅히 알고 있어야 할 신학 또는 하나님의 말씀에 담긴 진리를 배우는 데 있어 진보를 나타내지 못했다는 것에 대해 불만을 토합니다. 또한 사도가 그들을 책망하는 것이 단순히 그들이 영적(spiritual)이고 체험적(experimental) 지식이 부족하다는 것이 아니라 신앙의 원리와 신학적 진리에 대한 교리적(doctrinal)지식이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여러 가지 점에서 증명됩니다.


먼저 이것은 사도가 불평 혹은 책망을 시작하는 방식에서 잘 드러납니다. 사도는 이렇게 불평을 시작합니다. 즉 사도는 본문 앞에 나오는 히브리서 5장 10절에서 그리스도가 멜기세덱의 질서를 따른 대제사장이심을 말합니다. “하나님께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대제사장이라 칭하심을 받았느니라.” 이 멜기세덱은 구약성경에서 그리스도의 탁월한 모형으로 제시됩니다. 또한 멜기세덱 이야기 안에는 많은 복음적 비밀이 담겨 있습니다. 사도는 이런 것들을 히브리서를 받는 성도들에게 가르쳐 주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사도는 그들이 복음의 비밀을 아는 지식이 부족해서 멜기세덱에 대한 진리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사도는 멜기세덱에 대해 더 이상 말하지 않습니다. 이것을 히브리서 5장 11절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멜기세덱에 관하여는 우리가 할 말이 많으나 너희의 듣는 것이 둔하므로 해석하기 어려우니라.”


이 말을 풀어서 설명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멜기세덱 이야기 안에는 놀라운 복음적 비밀을 담고 있는 내용들이 많다. 나는 이것을 너희에게 알려 주고 싶다. 그러나 너희가 이런 것을 이해하는 데 둔하고 미련하기 때문에 내 설교를 통해 혼란으로 느끼고 어리둥절할 것이며, 그래서 아무 유익을 얻지 못할 것이다. 또한 그것은 어린아이에게 고기가 너무 딱딱한 것처럼 너희에게 어렵게 느껴질 것이다. 그래서 나는 너희에게 이 진리를 말해 주고 싶지만 말해 줄 수 없다.’

그런 다음 본문이 나옵니다. “때가 오래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될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가 무엇인지 누구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할 것이니 젖이나 먹고 단단한 식물을 못 먹을 자가 되었도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뜻입니다. ‘너희는 이런 비밀을 이해하고 소화할 수 있을 만큼의 충분한 신학과 성경에 대한 지식이 있어야만 했다. 그러나 너희에게는 지금 이런 지식이 없다.’


사도가 말하고 있는 것은 “때가 오래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될 터인데”와 같은 표현에 나타난 것처럼 사람의 가르침으로 전달되고 수용되는 종류의 지식에 대한 능숙함입니다. 이 지식은 실천적이고 체험적인 지식만이 아니라 신앙의 진리와 비밀에 대한 교리적 지식을 포함합니다.

사도가 말하는 지식은 성도들이 단단한 고기를 소화시킬 수 있는 지식 즉 가장 심오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신학지식을 이해하는 것을 말하며 이런 지식을 얻는 데는 많은 노력이 요구됩니다. 다음 두 절에 이것이 더 충분히 언급됩니다. “대저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단단한 식물을 장성한 자의 것이니 저희는 지각을 사용하므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변하는 자들이니라.”

또한 사람들이 신학지식에 능숙하게 되면 신앙의 초보를 벗어나게 됩니다. 이것은 “너희는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가 무엇인지 누구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할 것이니”하고 말하는 데서 잘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사도는 다음 장을 시작하면서 그들에게 “그리스도의 초보를 버리고 완전한 데 나아가라”고 권면합니다.

교리적 지식에 있어 선생이 되어야 할 시점에 아직도 어린 아이 상태에 머물러 있는 것을 책망함


둘째, 우리는 이들의 결함이 무엇인지를 보게 됩니다. 즉 그들은 시간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숙달되지 못했습니다. 그 때에 그들은 마땅히 선생이 되어 있어야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들의 임무는 기독교적인 지식을 배우고 얻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학교에서 학생들이었습니다. 만일 그들이 마땅히 해야 할 말 만큼 배움에 정진했다면, 사도가 이 편지를 썼을 때쯤 그들은 그리스도의 학교에서 선생들이 되었을 것입니다. 성도들이 종사하는 일이 무엇이든지 간에 성도들이 배우고 자신을 온전하게 해야 할 시점에는 성도들이 기독교적인 지식에서 온전해져야 합니다. 성도들은 언제나 어린아이로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되며 기독교적 지식으로 자라가야 합니다. 그리고 어린아이의 음식을 젖을 버리고 단단한 고기를 먹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교리적 지식에 있어 선생이 되어야 할 시점에 아직도 어린 아이 상태에 머물러 있는 것을 책망함

많은 사람들이 신학공부는 신학자나 목회자들이 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즉 지식을 얻기 위해 성경을 공부하고 다른 교훈적인 책들을 읽는 것은 신학자나 목회자의 일이지 성도들이 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만일 사도가 이런 생각을 가졌다면 히브리서를 받는 성도들이 선생이 될 만한 충분한 지식을 가지지 못했다고 해서 그들을 비난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즉 사도가 성도들이 일반적으로 신학 공부하는 것을 부수적인 것으로 여겨도 되거나 신학공부를 하는 데 그렇게 많은 시간을 사용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다면, 사도는 히브리서를 받는 성도들을 그렇게 많이 비난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제 이 주제에 대해 ‘첫째, 신학이란 무엇인가? 둘째, 신학이란 어떤 종류의 지식인가? 셋째, 왜 신학지식이 필요한가? 넷째, 왜 모든 성도들이 신학 지식을 증가시키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가?’를 차례로 말씀드리겠습니다.

 

 

1. 신학이란 무엇인가?

 

신학의 정의

먼저 신학이 무엇인가를 간략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동안 신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이 신학에 대한 다양한 정의를 내린 바 있습니다. 지금 나는 이 가운데 어느 것이 가장 정확한 정의인지를 가리는 것보다 내가 생각하기에 여러분에게 신학에 대한 생각을 가장 잘 전달해 줄 수 있는 정의 또는 묘사를 하려고 합니다.

신학은 신앙이라고 하는 가장 큰 일과 관련된 모든 진리와 법칙을 포함하는 학문 또는 교리입니다. 학교에서 가르치거나 배우는 다양한 기술과 학문이 있습니다. 학문은 다양한 대상을 다룹니다.

즉 철학은 일반적인 자연의 본질을, 천문학은 눈에 보이는 하늘, 해양학은 바다, 지리학은 땅, 물리나 화학은 인간의 몸, 논리학과 심리학은 사람의 영혼을, 정치학과 법학은 인간의 정부를 다룹니다. 그러나 나머지 모든 것보다 뛰어난 한 가지 학문 또는 한 가지 특별한 지식과 교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종교라고 하는 위대한 일을 연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학입니다.


신학은 다른 학문처럼 단지 인간의 자연적 이성을 계발함으로써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신학은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실 목적으로, 교훈으로 가득 찬 어떤 특정한 책을 통해 하나님이 친히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이 책은 신학 지식을 얻는 데 있어 길잡이를 삼도록 세상에 주신 법칙이며, 우리가 알아야 할 필요가 있는 본질적인 것에 대한 요약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신학을 기술이나 학문이라고 하지 않고 교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신학의 계시 의존성

소위 자연 종교 혹은 자연 신학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본성의 빛으로 알 수 있는 하나님에 대한 많은 진리와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의무가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 신학은 본성의 빛으로 분명히 알 수 없습니다. 신학은 계시의 의존합니다. 지금 우리의 타락한 상태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알아야 할 필요가 있는 어떤 것도 본성의 빛으로는 전혀 알 수가 없습니다. 어떠한 신학적 진리에 대한 지식도 어떤 방식으로든지 복음적 체계 또는 중보자와 관련이 된지 않으면 우리에게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나 본성의 빛은 우리에게 신학에 대한 진리를 이런 방식으로 가르쳐 주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본성의 빛으로 기독교 신학의 어떤 부분을 알 수는 없습니다. 본성의 빛은 예수님에 대한 어떤 진리도 가르쳐 주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신학을 가르쳐 주는 것은 오직 구약과 신약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말씀뿐입니다.

 

신학의 내용

신학은 성경이 가르쳐 주는 모든 것을 포함합니다. 즉 신학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의무와 하나님을 우리가 즐거워하는 것 등 우리가 알 필요가 있거나 우리에게 알려진 모든 것을 포함합니다. 일반적으로 신학 ‘하나님과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 삶에 대한 교리(the doctrine of living to God)’라고 정의됩니다.

어떤 사람은 더 정확하게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과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 삶에 대한 교리’라고 말합니다. 신학은 예수 안에 있는 모든 기독교 교리와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을 향해 살도록 만들어 주는 모든 기독교 법칙을 포함합니다. 어떤 방식으로든지 그리스도인의 삶 즉 우리가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과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 삶과 관계가 없는 교리나 약속이나 법칙은 신학과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신학은 모두 이 두 가지 즉 여기 이 세상에서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믿음을 갖고 거룩하게 살도록 촉진시켜 주며, 또한 저 세상에서 완전히 거룩하게 되어 즐거움으로 하나님을 온전히 기뻐하도록 해 주는 것과 관계있습니다.

 

2. 두 종류의 신학 지식

 

이론적 지식과 실천적 지식

이제 두 번째로 신학이라 어떤 종류의 지식인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 두 종류의 신학지식 즉 이론적(speculative) 지식과 실천적(practical) 지식, 또는 다른 말로 자연적(natural) 지식과 영적(spiritual) 지식이 있습니다. 전자의 이론적 지식 또는 자연적 지식은 머리만의 지식입니다. 이 지식은 이해하는 것 외의 다른 기능이 관련되지 않습니다. 이 지식은 신앙에 대한 자연적 혹은 이성적 지식이며, 어떤 특별한 하나님의 성령의 조명 없이도 우리 기능을 자연적으로 사용할 때 얻어질 수 있는 지식입니다. 후자의 실천적 혹은 영적 지식은 전적으로 머리나 이론에만 달여 있지 않고 마음에 관련되어 있습니다.

이 지식은 주로 마음의 감각에 달려 있습니다. 마음이나 의지나 성향 없는 순수한 지성은 이 지식의 자리가 아닙니다. 또한 이 지식은 보는 것만이 아니라 느끼는 것, 맛보는 것이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 안에 담겨 있는 교리에 대한 바른 이론적인 지식과 마음으로 교리를 적절하게 느끼는 것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전자는 신학에 대한 이론적 또는 자연적 지식을 구성하고 후자는 신학의 영적 또는 실천적 지식을 구성합니다.

 

두 종류의 신학 지식은 모두 중요하다

둘째, 두 종류의 신학지식 중에 어느 것도 전적으로 다른 것을 배제하지 않습니다. 반대로 우리는 영적 혹은 실천적 지식을 얻으려면 이론적 혹은 자연적 지식을 추구해야 합니다. 신학의 영적. 실천적 지식은 가장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영적 지식 없는 신학의 이론적 지식은 아무 소용이 없고 , 우리의 정죄만 더 증가시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론적 지식 없이 우리는 영적 또는 실천적 지식을 얻을 수 없다는 점에서 이론적 지식 또한 무한히 중요합니다. 이것을 조금씩 말씀드리겠습니다.


본문이 우선적으로 다루는 것은 이론적 신학지식이다

나는 이미 사도가 영적 지식만이 아니라 한 사람에게서 다른 사람에게로 전달되고 획득될 수 있는 지식을 말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사도가 영적인 지식은 배제하고 있다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사도는 히브리서를 수신하는 성도들이 영적 지식을 얻으려면 이론적인 지식을 추구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론적인 지식을 먼저 그리고 가장 직접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이것은 성도들이 읽는 것과 다른 합당한 수단을 사용하여 신학에 대한 훌륭한 이성적 지식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영적 지식은 더 간접적으로 언급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영적 지식은 이성적 지식의 목적으로서 이성적 지식으로 추구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3. 신학 공부의 필요성과 중요성

이제 신학지식의 필요성과 중요성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지식 없이 은혜 없다

첫째, 어떤 은혜의 수단이라도 지식 없이는 유익을 끼칠 수 없습니다. 모든 가르침은 배움이 없다면 허사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설교하는 것이 만일 듣는 사람의 지성 속에 아무 지식도 전달해 줄 수 없다면 완전히 목적달성에 실패한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교회에 교사로 임명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교사들은 신학을 가르쳐야 합니다. 그러나 교사들의 가르침을 받아도 아무 지식이 생겨나지 않는다면 교사들의 가르침은 헛된 것입니다. 만일 청중들의 이해에 도움이 되는 아무 지식이 없다면 교사들의 가르침과 설교가 은혜의 수단이 될 수 없을 뿐 아니라 청중들은 아무 유익을 얻지 못할 것입니다. 만일 알고 있는 방언으로 설교하면 지성에 어떤 것을 전달해 주지만, 알지 못하는 방언으로 설교하면 지성에 아무것도 전달해 주지 못합니다.

이런 점에서 알지 못하는 방언으로 설교하는 것은 아무 유익을 줄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할 때, 아무것도 얻을 수 없습니다. 또한 사람들은 어떤 지식을 얻지 못하면, 전혀 영적으로 성장할 수 없습니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전서 14장 2~6절에서 이 점을 잘 논증하고 있습니다.


지식을 전달해 주지 못하는 어떤 말도 은혜의 수단이 될 수는 없습니다. 고린도전서 14장 6~10절에 나오는 것처럼 지식을 전해 주지 못하는 말은 허공에다 말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믿음을 가질 수 없고, 은혜를 받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람을 이성적인 피조물로 다루시기 때문입니다. 믿음을 가진다는 것은 모르는 것에 대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로마서 10장 14절“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료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라고 기록된 것처럼 믿음을 가지는 데 있어 듣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이유는 들음이 이해에 필수적이기 때문입니다.

 

지식 없이 사랑 없다

또한 지식 없는 사랑은 있을 수 없습니다. 전혀 알지 못하는 대상을 사랑하는 것은 인간 영혼의 본성에 맞지 않습니다.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대상에 마음을 기울일 수는 없습니다. 사랑해야 할 이유가 먼저 이해되어야 마음에 합리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성경은 가르침으로 가득한 책입니다. 그러나 마음에 어떤 지식을 제공해 주지 못한다면 성경도 우리에게 아무 유익을 끼칠 수 없습니다. 만일 성경이 우리가 전혀 모르는 언어로 기록되었다면 우리에게 아무 유익을 줄 수 없을 것입니다.

 

지식 없이 성례전의 효과 없다

마찬가지로 복음의 성례전도 지식 전달 없이는 합당한 효과를 거둘 수 없습니다. 성례전은 눈에 보이는 표지로 어떤 것을 표현합니다. 그런데 표지가 지시해 주는 대상에 대해 아무 지식도 제공해 주지 못한다면 그 표지가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이해의 문을 통하지 않고는 어떤 것도 마음에 도달하지 못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입니다.

먼저 이성적인 지식이 없이는 영적인 지식도 없습니다. 교리가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는 사람은 진리 또는 복음 교리의 어떤 탁월함을 볼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죄인을 위해 어떻게 행하셨는지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그리스도께서 죄인을 위해 행하신 일에서 그리스도의 놀라운 탁월하심과 사랑을 볼 수 없습니다. 먼저 신학 속에 담기 내용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신학 속에 담긴 내용의 달콤함과 신적 탁월성을 맛볼 수 없습니다.

 

신학 지식이 없는 사람은 무지한 이교도와 다를 바 없다

둘째, 신학지식이 없는 사람은 가장 무지하고 야만적인 이교도와 다를 바 없습니다. 이교도들이 깊은 흑암 가운데 머물러 있는 것은 신학적 진리를 배우지 못해서 신학적 진리를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만일 우리가 복음 설교를 듣고 살아가고 있다면 복음 설교가 우리에게 신학을 더 많이 알게 해 줌으로써 우리를 이교도와 드리게 만들어 줄 것입니다.

 

신학 지식이 없는 사람은 짐승과 다를 바 없다

셋째, 만일 사람들에게 이런 지식이 없다면, 사람 안에 있는 이성적 기능은 전적으로 아무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이성과 지성의 기능은 실제적인 이해와 지식을 위해 주어진 것입니다. 만일 어떤 사람에게 실제적 지식이 없다면, 인식 기능 혹은 능력은 그에게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리고 만일 어떤 사람이 실제적인 지식이 있다 할지라도 자신의 존재에 대한 궁극적인 목적을 알지 못한다면 그에게 있는 이성의 기능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이런 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과 비교해 볼 때, 그는 짐승과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신학은 우리에게 주어진 이성으로써 우리가 알아야 할 내용입니다. 신학은 우리 존재의 목적에 관련된 것이며, 우리가 창조된 목적에 관련된 가장 위대한 일에 대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에게 지성이 주어진 것은 다른 어떤 목적보다도 신학 지식을 얻기 위한 것입니다.

 

신학 지식은 다른 어떤 분야의 지식보다 더욱 유익하며 중요하다

그러므로 신학 지식은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다른 종류의 지식도 아주 유용합니다. 어떤 다른 학문들 즉 천문학이나 자연철학이나 지리학에 대한 지식도 아주 탁월한 지식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학지식은 다른 어떤 학문 분야의 지식보다 무한히 더욱 유익하며 중요합니다.

 

4. 모든 그리스도인이 신학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하는 이유

이제 교리에서 제안된 네 번째의 중요한 원리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이것은 ‘왜 모든 그리스도인이 신학지식의 증가를 위해 열심히 공부해야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첫째, 그리스도인은 이미 가지고 있는 신학지식에 만족해서는 안 됩니다. 신자들이 구원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만큼의 지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그리스도인을 만족시켜서는 안 되며, 그리스도인은 더욱 지식 향상을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둘째, 신학지식 향상을 위해 노력하는 것이 부수적인 일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신학공부를 가장 중요한 일러 삼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신학공부를 매일 일과의 한 부분으로 삼아야 하며, 일과의 어떤 작은 부분으로 여겨서는 안 됩니다.

신학 지식을 쌓아 가는 것을 그리스도인의 소명 가운데 아주 중요한 일로 생각해야 합니다. 이 두 가지 이유 때문에 다음과 같은 것들이 생겨납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이성을 주신 것은 신학 공부를 하기 위함이다

첫째, 우리의 임무는 의심할 여지없이 우리를 짐승과 구별되게 해 주는 기능들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짐승보다 더 뛰어난 기능이 있는 이유는 짐승보다 더 뛰어난 임무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짐승보다 더 뛰어난 어떤 목적이 있기 때문에 짐승보다 더 뛰어난 능력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의심할 여지없이 이런 뛰어난 기능을 계발하는 것이 우리 인간의 주요 임무 가운데 하나입니다. 우리 인간이 짐승과 구별되는 가장 중요한 특징은 지성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성을 계발하는 것이 우리의 가장 중요한 일이 되어야 하며, 부수적인 일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지성을 계발하는 일을 부수적인 일로 여긴다면 이는 우리가 지성 자체를 부수적인 기능 즉 다른 기능보다 덜 중요한 기능으로 여기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사실 지성은 우리 인간이 가진 가장 높은 지능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실제적인 이해와 지식을 추구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우리의 지성을 계발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성 계발을 자신의 가장 중요한 일로 여기지 않고, 자신의 지성을 지식을 얻는데 사용하지 않는 자들은 주로 자신의 낮은 기능을 사용하는 일에 몰두하는 자로서 자기 감각을 만족시키려 하고, 자신의 동물적 본능을 만족시키려 하는 자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더 낮은 기능이 지성에 종노릇 하게 하는 대신에 자신의 지성을 더 낮은 기능에 종노릇 하게 하는 자들입니다. 또한 이런 사람들은 그리스도인답게 행동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지성을 주심으로써 짐승보다 뛰어난 인간으로 만들어 주셨다는 것조차 망각하며 행동하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짐승과 공통된 어떤 것을 주셨습니다. 즉 인간의 외적 감각, 몸의 욕구, 즐거움과 아픔을 느끼는 신체적 감각과 기타 다른 동물적 기능들입니다. 또한 하나님은 인간에게 짐승보다 뛰어난 어떤 것을 주셨는데, 이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지성과 이성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짐승보다 뛰어난 기능을 종속시키라는 것이 아닙니다. 만일 인간에게만 있는 지성을 짐승에게도 있는 더 열등한 기능에 종속시킨다면 큰 혼란이 일어날 것이고 이는 사람을 짐승의 종으로 만드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반대로 다른 열등한 기능을 인간의 지성에 종속시켜야 합니다.

그러므로 지식을 얻음으로써 지성을 계발하는 것은 인간의 가장 중요한 과업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렇다면 지성을 계발하여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나 신학적인 지식을 얻는 것은 사람의 가장 중요한 본분입니다. 왜냐하면 이런 지식을 얻는 것이 지성의 가장 중요한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지성을 주신 가장 중요한 이유는 하나님을 알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지혜로운 이교도들은 사람의 중요한 임무가 자신의 지성을 계발하고 활용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압니다. 그러나 그들은 어두움 속에 있기 때문에 지성이 탐구해야 할 가장 중요한 대상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지성을 주로 사용해야 한다고 생각한 학문은 철학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철학 연구를 가장 주된 임무로 삼았습니다. 그러나 복음의 빛 가운데 있는 우리는 아주 행복한 자들입니다.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해 어둠 속에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지성을 사용하여 우리가 주로 연구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가르침으로 충만한 책을 주셨으며, 모든 이성적인 피조물이 지성을 가지고 주로 연구해야 할 많은 영광스러운 대상에 대해 가르쳐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가르침은 조건과 상황에 관계없이 모든 사람에게 적용됩니다. 또한 학식 있는 사람만이 아니라 남자와 여자, 늙은이와 젊은이, 학식이 있는 자와 없는 자 모두가 하나님의 가르침을 공부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신학지식을 쌓아 가는 것은 성경을 가진 모든 사람의 가장 중요한 임무입니다.

 

신학 지식은 최고의 보물이다

둘째, 신학이 탐구하는 대상은 최고로 탁월한 대상이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신학지식을 얻기 위해 노력할 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신학이 다루는 대상보다 더 가치 있는 대상은 없습니다. 하늘이 땅보다 높은 것처럼 신학이 다루는 대상은 다른 학문이 다루는 대상보다 탁월합니다. 하나님 자신, 즉 영원하신 삼위일체 하나님이 신학의 가장 중요한 대상입니다. 다음에는 신인(God-man)이시자,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예수 그리스도가 행하신 가장 영광스러운 일인 영광스러운 구속입니다. 그 다음은 복음 안에서 약속되고 그리스도께서 구속하신 영광스럽고 영원한 기업인 하늘나라에 속한 위대한 것들입니다. 또한 사람의 마음속에서 역사하시는 성령의 사역, 하나님께 대한우리의 의무, 우리가 하나님처럼 되며, 천사처럼 되는 방법 등입니다. 이 모든 것이 바로 신학의 대상입니다.


이런 것이 거룩한 족장들, 선지자들, 사도들 그리고 일찍이 이 세상에서 살았던 가장 탁월한 자들의 가장 중요한 연구 대상이었습니다. 이는 또한 베드로전서 1장 10~12절이 보여 주는 것처럼 하늘에 있는 천사들의 연구 주제이기도 합니다.

이런 신학의 연구 대상은 아주 탁월하고 알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므로 신학지식은 이런 지식을 얻기 위한 우리의 수고와 노력에 대한 풍성한 대가가 될 것입니다. 만일 금이나 진주 같은 값진 보배가 있다면 누구든지 이 보배를 주워 모으는 것은 가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할 수 있는 만큼 누구나 할 수 있도록 제공된 성경 안에 담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라는 보배는 금이나 진주보다 훨씬 더 값진 보배입니다. 전세계의 모든 사람들은 부를 얻기 위해 얼마나 부지런히 노력하는지요! 그러나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사람들이 그렇게 부지런히 추구하는 부보다 훨씬 더 뛰어난 부요함입니다.

 

신학 공부는 모든 성도들이 해야 하는 것이다

셋째, 신학지식은 목회자만이 아니라 모든 성도에게 무한히 중요한 것입니다. 신학적 교리는 철학이나 다른 학문의 원리와는 다릅니다. 철학은 일반적으로 사색을 통해 진리를 탐구하는 것이며, 인간의 삶과 별로 관련이 없습니다. 즉 우리가 그것을 알든지 모르든지 그것은 우리의 세상적인 일이나 영적인 이해에 그렇게 큰 차이가 없습니다. 철학자들은 이런 문제에 대해 서로 의견이 다릅니다. 어떤 사람의 의견은 이렇고, 또 다른 사람의 의견은 저렇습니다.

철학자들이 어떤 문제에 대해 뜨거운 논쟁을 벌이고 있는 동안 다른 사람은 자기 머리를 아프게 만들 필요 없이 그들이 논쟁을 하도록 내벼려 둡니다. 어떤 주장이 옳든지 그들에게 별로 중요하지 않게 때문입니다.

그러나 신학적인 문제는 다릅니다. 신학 교리는 모든 사람과 관련이 있습니다. 신학 교리는 모든 사람의 영원한 구원과 행복에 관련된 것입니다. 일반 사람들이 ‘이런 문제는 신학자나 목회자에게 맡기자. 신학 문제는 그들이 논쟁하도록 내버려 두자. 우리와는 아무 관계도 없는 것이다’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신학 문제는 모든 사람에게 무한히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본질이나 성품에 대한 교리는 모든 사람과 관련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아는 것은 목회자만이 아니라 일반 사람에게도 무한히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 모든 사람의 창조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힘입어 살며, 움직이며, 존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만물의 주인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존재의 궁극적 목적이시며 우리 행복의 유일한 원천이십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중보, 예수의 성육신, 생애, 죽으심, 부활, 승천, 아버지 보좌 우편에 앉으심, 중보기도를 하심 등의 교리들은 신학자만이 아니라 일반 성도들과도 무한한 관계가 있습니다. 일반 성도들도 신학자나 목회자만큼 그리스도의 구주되심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 그리스도께서 행하시고 고난 받으신 것과 관계있습니다.

죄인들이 의롭다 함을 받는 방식이나 그리스도의 중보사역의 혜택을 받는 방식 등의 교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교리들은 모두에게 똑같이 관계있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똑같이 의롭다 하심을 받을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든 사람이 태어나면서부터 받게 되어 있는 영원한 형벌도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치명적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마음에서 역사하는 성령의 사역에 대한 교리 즉 우리에게 구속을 적용하는 효과적인 부르심이나 성화와 같은 교리도 마찬가지고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관련 있습니다.

모든 신학 교리는 어떤 방식 혹은 어떤 측면에서 모든 성도들의 영원한 삶과 관계있습니다. 하나님이 성경 안에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모든 것 가운데 우리와 관련이 없거나 사소한 문제는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신 모든 것은 모두 다 중요한 문제입니다.

 

신학 공부는 하나님의 특별 계시를 공부하는 것이다

넷째, 이모든 것들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기 위한 것입니다. 다른 학문의 경우에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이성의 빛에 따라 공부하도록 우리에게 일임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무한히 중요한 신학의 경우에는 우리가 불확실한 안내자를 따르도록 우리를 내버려 두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우리에게 신학적 진리를 계시해 주시고, 우리에게 이런 계시를 확증시켜 주기 위해 위대한 일을 행하셨습니다. 즉 여러 시대에 걸쳐 선지자들을 일으키셔서 성령으로 직접 그들에게 영감을 주시고, 그들이 전하는 교리를 자연법칙을 초월하는 여러 가지 기적을 통해 확증해 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 세대에 계속해서 선지자들을 일으키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놀라운 방식으로 다른 민족과 분리시키고, 그들을 보존하시며,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맡기시며, 하나님의 말씀을 세상에 전하게 하신 것은 바로 이런 목적 때문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보통 천사들을 사람에게 보내어 하나님을 말씀을 전하게 하셨습니다. 때로는 하나님이 친히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거나 대표하는 여러 가지 방식으로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히브리서 1장의 서두에 나오는 것처럼, 이 마지막 날에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을 가장 위대한 선지자로 이 세상에 보내어 우리에게 하나님의 진리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이 모든 방식을 통해 신학의 모든 내용을 담고 있는 하나님의 계시의 책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모든 일을 행하신 것은 목회자나 학식 있는 사람만을 가르치시기 위한 것이 아니라 남녀노소, 유․무식한 사람 등 모든 사람을 가르치시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가르치시기 위해 이렇게 큰일을 해하셨다면 우리는 모두 배우는 데 큰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신학을 가르치시는 것을 부수적인 일로 삼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큰 관심을 가지시고, 여러 시대에 놀라운 방식으로 지속적으로 진행하셨습니다. 때로 성경은 하나님께서 일찍 일어나셔서 우리를 가르치시며, 선지자와 교사를 우리에게 보내시는 분으로 묘사합니다. 예레미야 7장 25절“너희 열조가 애굽 땅에서 나온 날부터 오늘까지 내가 내 종 선지자들을 너희에게 보내었으되 부지런히 보내었으나”라고 말합니다. 또한 13절에서는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제 너희가 그 모든 일을 행하였으며 내가 너희에게 말하되 새벽부터 부지런히 말하여도 듣지 아니하였고” 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상징적인 화법으로써 하나님이 가르치시는 일을 부수적인 일로 하시는 것이 아니라 크게 관심을 가지시고 마음을 쏟는 아주 중요한 일임을 의미합니다. 사람들이 열심히 하고자 하는 일을 할 때 일찍 일어나서 그런 일을 하기 때문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가르치시는 일에 이처럼 열심을 내신다면, 우리는 성경을 배우는 것을 소홀히 하거나 부수적인 일로 생각해서는 안 되며 우리의 삶에 가장 중요한 일로 여겨야 합니다.

 

신학 공부의 교과서인 성경은 풍성함과 위대함과 다양함이 특징이다

다섯째, 성경은 모든 사람이 읽도록 씌어졌습니다. 모든 사람은 성경을 연구해야 합니다. 요한복음 5장 39절“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라고 말씀합니다. 또한 이사야 34장 16절“너희는 여호와의 책을 자세히 읽어 보라”고 합니다. 또한 성경을 읽고 이해하는 자들은 복이 있는 자라는 것을 요한계시록 1장 3절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만약 특별히 요한계시록을 읽는 것이 복이 있는 것이라면 성경 전체를 읽는 것은 더욱 그러합니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가 가르침 받는 것을 부수적인 것으로 의도하셨다면 이처럼 풍성한 가르침을 주지는 않으셨을 것입니다.


성경에 있는 풍성한 교훈들은 이해할 수 있게 기록되었습니다. 이해되지도 못할 것이면 교훈이 주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학습자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은 학습자를 교육하기 위해 제공된 것이 아닙니다. 만일 우리가 신학지식을 더 많이 얻으려고 노력하지 않는다면 성경이 주는 가르침의 대부분이 우리에게는 아무 쓸모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성경에서 우리가 이해하는 만큼만 유익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성경이 우리가 알 수 없는 언어로 기록되어 있다면 우리는 성경에서 아무 유익도 얻지 못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그처럼 다양하고 풍성한 교훈을 주셨으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성경의 가르침 가운데 아주 작은 것으로만 만족한다면 우리는 외식자일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필요를 채워 주시기 위해 아주 큰 보물창고를 우리에게 열어 주셨을 때, 이렇게 풍성하게 주심에 대해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하고서, 동시에 우리가 너무 게을러서 보물을 모으지 않고, 계속해서 이런 보물을 거의 갖지 못한 채로 있다면, 이것은 우리의 감사가 진실하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구약시대에 살던 하나님의 백성들에 비해 신학지식을 얻기에 훨씬 더 유리한 입장에 있습니다. 왜냐하면 구약시대 이후로 성경의 정경이 더 많이 추가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게을러서 우리의 이점을 살리지 못한다면 그들보다 더 나을 것이 없고 그들처럼 여전히 빈약한 지식에 머물러 있게 될 것입니다.

 

신학 공부는 영원히 졸업이 없다

여섯째, 우리가 아무리 부지런히 신학 공부를 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진리를 아는 지식에 있어 결코 완전함에 이르지는 못할 것입니다.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신학 지식을 얻기 위해 더 이상 부지런히 노력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또한 계시된 지식을 알기 위해 부지런히 신학공부를 할 필요가 없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완전히 적용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얻기 위해 항상 노력해야 합니다. 신학을 가장 많이 공부하고, 가장 오래 공부하고, 가장 철저하게 적용한 사람도 알아야 할 지식 가운데 적은 것 밖에는 모르는 것입니다. 신학의 주제는 무한합니다. 신학의 가장 중요한 주제인 하나님은 무한하시며, 하나님의 완전한 영광에는 끝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역 또한 놀랍고, 그 완전한 의미를 다 헤아리기란 불가능합니다. 특히 신학의 가장 중요한 관심 분야인 하나님의 구속사역은 측량할 수 없는 신비함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우리의 신학 공부를 위해 주신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평생 공부해도 다 마칠 수 없는 풍성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또한 가장 뛰어난 신학자들의 머리로 세상 끝 날까지 연구해도 다 헤아릴 수 없는 풍성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시편 기자는 인간적인 것에는 끝이 있어도 하나님의 말씀에 담긴 내용은 끝이 없다는 것을 알고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보니 모든 완전한 것이 다 끝이 있어도 주의 계명은 심히 넓으니이다”(시 119:96). 신학은 성도들과 천사들이 영원히 탐구해도 끝이 없습니다.


신학 공부는 성도의 주업이요, 전공이다

일곱째, 의심할 여지없이 모든 사람은 자신의 직업 곧 자신의 기본적인 소명을 이루는 데 필요한 지식을 얻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만일 어떤 사람의 직업이나 사역이 사람에 관련된 일이라면 그는 사람에 대한 어떤 지식이나 지혜를 얻으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나 든 성도의 소명과 사역은 하나님을 위해 살아가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3장 14절은 이것이 성도의 최고의 소명이라고 말합니다. 말하자면 이것이 성도의 직업이요, 사업이며, 가장 중요한 일이며, 참으로 그의 유일한 일입니다. 성도들은 하나님의 영광과 관계없는 일이면 어떤 일이든지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충만해야 하며, 그렇게 되면 하나님을 위해 사는 자신의 삶의 소명을 잘 이루며, 철저하게 사명을 완수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모든 성도들은 신학 공부를 해야 하는 신학생이다

여덟째, 우리는 이 사실에서 사람들이 신학지식을 얻도록 돕기 위해 하나님이 사람들 사이에 어떤 질서를 세우셨다는 것을 논증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교사를 주셨습니다. 고린도전서 12장 28절에는 “하나님과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셋째는 교사요”라고 말합니다. 또한 에베소서 4장 11~12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롤 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교사를 세우셨다면 지식을 나누어 주는 교사의 일이 필수적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렇다면 교사들이 나누어 주는 지식은 어떤 종류의 지식입니까? 이것은 철학이나 법률 또는 기술에 대한 지식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신학지식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에게 교사의 직무를 주셨다면 이는 다른 사람에게는 배우는 의무를 주셨다면 것입니다. 교사와 학생은 상호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교사 없이는 학생이 있을 수 없고 학생 없이는 교사가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배우려는 수고를 하지 않는 자들을 가르칠 목적으로 교사를 세우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배운 지식을 적용하려고 노력하지 않는 자들을 위해 지식을 나누어 주라고 사역자들을 세우신 것이 아닙니다.

흔히 신약성경에서 그리스도인을 부르는 명칭은 제자입니다. 제자라는 말은 학생 또는 배우는 자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학교에 입학한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그리스도인의 일은 주인이요 선생이신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가르치도록 임명받은 2차적 교사들에게서 배우고 지식을 얻는 것입니다.

 

신학 공부는 하나님의 뜻이다

아홉째, 모든 성도가 신학지식을 증진시키기 위해 부지런히 노력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하나님은 성경에서 분명하게 보여 주셨습니다. 성도들이 이런 약간의 지식을 가지는 것만이 아니라 모든 지식으로 충만해지는 것이 계시된 하나님의 뜻입니다. 고린도전서 1장 4~5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인하여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이는 너희가 그의 안에서 모든 일 곧 모든 구변과 모든 지식에 풍족하므로 그리스도의 증거가 너희 중에 견고케 되어”하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바울 사도는 빌립보 성도들이 사랑만이 아니라 지식에 있어서도 더욱 풍성해지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빌 1:9). 그러므로 베드로 사도는 베드로후서 1장 5절에서 “이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이라고 권면했던 것입니다. 또한 바울 사도는 히브리서 6장의 앞부분에서 히브리 성도들이 기독교의 초보적 지식에서 벗어나 완전한 지식에 나아가라고 말합니다.

사도는 그들이 기독교에 처음 입문하여 사도에게 안수를 받으며 처음 세례 받을 때 그들에게 있던 교리적인 지식 즉 회개, 믿음, 죽은 자의 부활, 영원한 심판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에만 언제나 머물러 있기를 원치 않습니다.

 

제3부 적용

이제 지금까지 살펴본 교리를 적용해 봅시다. 여러분은 이런 신학지식을 얻기 위해 아주 부지런히 노력해야 합니다.

여러분 자신을 그리스도의 학교에 입학한 학생이나 제자로 생각하십시오. 그리고 신학지식에 능숙하게 되기 위해 부지런히 노력하십시오. 어릴 때 배운 교리문답이나 구원에 필요한 신앙의 기초 지식으로 만족해서는 안 됩니다.

만일 이런 지식에만 만족하면 사도가 말하고 있는 죄 즉 죽은 행실을 회개하는 것 정도의 기초만 놓고, 더 이상 완전한 데 나아가지 않는 잘못을 범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인으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으로 부름 받은 이것은 바로 여러분이 본업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본업을 충실하게 감당할 수 있는 지식을 얻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여러분에게 지식을 나누어 주기 위해 시간을 보내고 있는 여러분의 선생님들이 여러분이 배우는 데 아무 열의가 없다고 불평하지 않도록 하십시오. 교사에게는 부지런히 배우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학생을 만나는 것이 큰 힘이 됩니다. 학생이 부지런히 공부하면 가르치는 것이 즐거움이 되지만, 그렇지 않으면 가르치는 것이 무거운 부담과 짐이 됩니다.

여러분이 성경을 가지고 있는 것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큰 보물창고를 가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보물을 조금 가진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성경에서 여러분에게 많은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가능한 한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많이 이해하려고 노력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 모두를 이성적인 존재로 만드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성이나 이해의 고상한 기능을 방치해서는 안 됩니다. 성경에 대한 지식을 고작 오다가다 얻어들은 지식 정도로 만족해서는 안 됩니다. 즉 의무적으로 예배에 참석하여 설교를 듣다가 아무 생각 없이 얻게 되는 지식이나, 우연히 대화하다가 알게 된 지식 정도로 만족해서는 안 됩니다. 성경지식을 얻기 위해 아주 열심히 노력해야 합니다. 광산에서 금과 은을 캐는 사람들처럼 말입니다.

특히 젊은이들이 이렇게 열심히 공부하기를 권면합니다. 늙었다고 해서 공부하지 못하는 법은 없습니다. 그러나 젊음의 때는 특히 공부해야 하는 때입니다. 지식을 얻고, 지식을 쌓기에 아주 좋은 때입니다. 그러나 젊든지 늙었든지 간에 여러분 모두는 신학지식을 얻기 위해 열심히 공부해야 합니다. 왜 여러분이 나이에 상관없이 열심히 신학공부를 해야 하는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1. 신학 공부를 해야 하는 이유

 

신학 공부는 시간을 가장 유익하게 보내는 방법이다

첫째, 여러분이 신학공부를 열심히 한다면, 일상적인 업무에서 벗어나 여가 시간이 생겼을 때, 시간을 낭비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긴 겨울밤을 유익하게 보낼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한가하게 이 집 저 집 다니면서 쓸데없는 대화를 나누는데 시간을 낭비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또한 겨울 밤 다른 집을 방문해서 보내는 대부분의 시간이 훨씬 더 나쁜 목적으로 사용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솔로몬은 잠언 10장 19절에서 “말이 많으면 허물을 면키 어려우니”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은 겨울의 대부분의 시간을 다른 집에 가서 쓸데없는 잡담을 하며, 다른 사람의 험담이나 하는 사람들에게 잘 적용됩니다.

물론 어떤 기분전환은 합법적입니다. 그러나 성도들이 그렇게 많은 시간, 그렇게 많은 저녁 시간을 기분전환이나 심심풀이를 위한 대화에 시간을 보낸다면 이것은 최악의 나쁜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시간을 나쁜 방식으로 보내는 것입니다. 이것은 물질적인 가난은 아니지만 적어도 영혼의 가난을 초래하게 됩니다. 잠언 14장 23절에서는 이를 “모든 수고에는 이익이 있어도 입술의 말은 궁핍을 이룰 뿐이니라”고 말합니다. 더구나 할 일 없이 앉아 노닥거리게 되면 어리석고 죄악적인 대화에 빠지게 되고, 자신의 부패한 본성이 자극되어 다른 사람을 비난하거나 시기하거나 악평하게 됩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마태복음 12장 36절에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라고 말씀하신 것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이 진리를 실천하려고 한다면, 여러분의 시간을 논쟁을 불러일으키는 정치적인 대화를 하는 것 이상의 더 좋은 곳에 사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젊은이들은 친구들과 함께 무익한 데 시간을 보내는 대신 훨씬 더 유익한 곳에 시간을 보내어 실제로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즉 젊은이들은 마귀의 길, 유혹의 길에서 벗어나 반드시 가야 할 길, 하나님이 복 주시는 길을 걷게 될 것입니다. 나이 든 사람들이 더 이상 육체적인 노동을 할 수 없게 된 후에도 할 수 있는 일이 있습니다. 노인들이 성경을 연구하고, 성경에서 발견한 여러 진리를 비교하고 묵상하며 시간을 보낸다면 유익과 즐거움을 얻을 것입니다.

 

신학 공부는 시간을 가장 고상하게 보내는 방법이다

둘째, 신학공부를 하는 것은 여러분의 시간을 가장 고상하게 보내는 방법이 될 것입니다. 베뢰아 사람들이 부지런히 성경을 공부했기 때문에 성령서(사도행전-역주)는 베뢰아 사람들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베뢰아 사람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보다 더 신사적이어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행 17:11). 이것은 하늘에 있는 존재들이 하는 일과 아주 비슷합니다. 하늘에 있는 자들은 그들의 시간을 대부분 하나님께 속한 신령한 일을 탐구하며, 그러한 지식을 얻기 위해 보냅니다. 우리는 베드로전서 1장 12절에서 천사들이 하는 일에 대해 “천사들도 살펴보기를 원하는 것”이라는 말을 듣게 됩니다.

여러분이 빛의 천사와 함께 같은 일을 하기 원하듯이, 이것은 여러분이 영원히 하기 원하는 일일 것입니다. 솔로몬은 잠언 25장 2절에서 “일을 살피는 것”이 왕의 일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분명 다른 무엇보다 하나님의 일을 살피는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의 일을 살피는 것이 왕의 영화라면, 이것은 여러분에게도 더 큰 영광이 아니겠습니까?

 

신학 공부는 시간을 가장 재미있게 보내는 방법이다

셋째, 신학공부는 시간을 가장 즐겁게 보내는 방법입니다. 지식은 지적인 피조물에게 기쁨과 즐거움을 줍니다. 무엇보다 신학적인 지식은 더욱 그렇습니다. 신학적인 지식에는 가장 탁원한 진리와 우리가 보아야 할 가장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대상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신학을 공부하는 데 들어가는 노력이 아무리 힘겹더라도 일단 지식을 얻게 되면 공부하면서 들어간 고생이 충분히 보상을 받게 됩니다. 잠언 2장 10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곧 지혜가 네 마음에 들어가며 지식이 네 영혼에 즐겁게 될 것이요”

 

신학 공부는 성도의 삶에 가장 큰 유익을 준다

넷째, 신학지식은 성도들이 살아가는 데 있어 아주 큰 유익을 줍니다. 신학지식이 많은 사람은 영적이고 구원 얻기 위해 필요한 지식을 얻는 데 있어 좋은 수단과 큰 이점을 가진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어떤 은혜의 수단도 지식이 없이는 마음에 구원을 주는 영향을 미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복음에 대한 이성적인 지식이 있으면 있을수록, 성령이 여러분의 마음을 감동시킬 때 복음의 탁월함을 보고, 복음의 달콤함을 맛볼 기회를 더욱 많이 얻게 될 것입니다. 이방인들은 복음에 대한 이성적인 지식이 없기 때문에 복음의 대한 이성적인 지식이 많으면 많을수록 하나님의 탁월하심과 복음의 영광을 볼 기회를 더욱 많이 갖게 될 것입니다.

또한 신학지식이 많을수록 여러분이 해야 할 의무에 대해서도 더 잘 알게 될 것입니다. 신학지식은 여러분이 구체적인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아는 데도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또한 여러분은 마귀의 유혹에 대해서도 더 잘 방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마귀는 종종 사람들의 무지를 이용해서 사람들을 미혹하기 때문입니다

신학지식이 많으면 여러분은 신중하고 분별력 있게 성도의 삶을 살아가며, 하나님의 영광과 복음을 위해 살아가는 데 큰 유익을 얻을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호의적이고 착한 심성을 갖고 있지만 신중함이 부족해서 잘못된 신앙으로 빠집니다. 많은 사람이 하나님에 대한 열심히 있으면서도 선보다 해를 끼치게 되는 것은 로마서 10장 2절에 따르면 “지식이 없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 선한 사람이 대부분의 경우에 선하게 행동하지 못하는 것은 은혜는 원하면서도 지식은 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외에도 신학지식이 많으면 유익한 대화를 하는 데도 큰 도움이 됩니다. 신학지식은 함께 모이거나 이웃을 방문할 때, 여러분에게 대화의 소재를 제공해 줍니다. 그래서 여러분 자신이나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대화를 하는 데 시간을 보내지 않도록 여러분에게 도움을 줍니다.

 

지금 우리는 신학공부를 하는 데 아주 유리한 입장에 있다

다섯째, 여러분은 지금 신학지식을 얻는 데 아주 유리한 입장에 있음을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지금 많은 신학지식을 얻는 데 있어 구약시대 성도보다 훨씬 더 큰 이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경이 구약시대 이후 더 많이 기록되었고, 복음적인 진리가 지금 더 많이 분명하게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일반 성도들이 어떤 점에서는 구약 시대의 선지자보다 신학을 더 많이 알고 있는 이점이 있습니다.

누가복음 10장 23~24절에 있는 그리스도의 말씀이 우리에게 적용됩니다. “너희의 보는 것을 보는 눈은 복이 있도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많은 선지자와 임금이 너희 보는 바를 보고자 하였으되 보지 못하였으며 너희 듣는 바를 듣고자 하였으되 듣지 못하였느니라.” 과거에 살았던 그리스도인보다 현재 교회의 마지막 시대를 사는 우리들은 어떤 점에서 신학지식을 얻는 데 있어 훨씬 더 유리한 입장에 있습니다. 특히 인쇄술의 발달로 성경과 다른 신학 서적들이 엄청나게 많이 발간되어 이전 보다 훨씬 더 쉽고 저렴하게 책을 구입해 기독교 지식을 얻을 수 있습니다.

 

신학 공부는 기독교 진리를 변호하는 최선의 방법이다

여섯째, 우리가 믿고 있는 신학 원리에 대해 어떤 반대에 직면할지 모릅니다. 복음과 진리에 대한 많은 적들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리를 고수한다면 우리는 반드시 적들의 공격을 받을 것을 예상해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신학지식을 제대로 알지 못하다면 어떻게 그런 공격을 방어할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사도 베드로는 베드로전서 3장 15절에서 우리에게 소망에 대한 이유를 묻는 자들에게 대답할 말을 항상 준비라고 있으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상당한 신학지식이 없다면 우리는 이렇게 할 수 없을 것입니다.

 

 

2. 신학 공부 방법에 대한 지침

이제 결론적으로 신학지식을 얻기 위한 몇 가지 지침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성경을 열심히 읽어라

첫째, 성경을 열심히 읽으십시오. 성경은 모든 신학지식이 흘러나오는 원천입니다. 그러므로 이 보물을 무시하지 마십시오. 글을 읽을 수 있는 보통 정도의 이해력이 있는 모든 사람은 마음만 먹으면 성경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을 잘 알게 되면 놀라운 것을 얻게 됩니다.

 

성경의 의미를 파악하며 읽어라

둘째, 피상적으로 읽는 데 만족하지 말고 의미를 파악하며 읽으려고 노력하십시오. 성경을 읽을 때, 내용을 관찰하고 내용이 어떻게 전개되는지를 관찰하십시오. 내용의 핵심을 파악하십시오. 또한 성경을 성경과 비교하십시오.

성경의 여러 부분은 서로 조화를 이루며 서로 많은 빛을 비추어 줍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성경을 상고하라’고 분명하게 지시하셨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호기심을 가지고 성경을 읽는 것 이상입니다. 성경의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방법을 사용하십시오. 목회자들이 설교하면서 성경을 설명해 줄 때, 잘 귀담아 두십시오. 언제든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던 성경이 분명하게 깨달아지면 그 깨달은 내용을 표시해 두고 모아두고, 가능하다면 기억하십시오.

 

신앙 서적을 많이 읽어라

셋째, 신학지식을 자라게 해 줄 책들을 사서 부지런히 읽으십시오. 여러분의 신학지식을 증가시켜 줄 좋은 책들이 많이 있습니다.

여가 시간에 이런 책들을 읽으면 많은 유익과 큰 기쁨을 얻게 될 것입니다. 독서를 싫어하여 책을 사거나 책을 읽는데 시간을 거의 투자하지 않는 사람은 분명 문제 있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책읽기를 통한 유익을 거의 얻지 못합니다. 실제로 이런 사람들은 책도 몇 권 밖에는 없으며, 이따금씩 주일에만 책을 읽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기에게 있는 책이 너무 오래되고, 또 여러 번 본 것이기 때문에 책에 싫증을 내게 됩니다. 그런 책이 나오는 내용은 아주 따분한 이야기가 되어 버리고, 책읽기는 시시한 일이 되고 맙니다.

 

지식을 함께 나누어라

넷째, 신학지식을 얻기 위한 목적으로 다른 사람과 많은 대화를 나누십시오. 만일 할 수 있는 한 이런 대화를 풍성하게 나눈다면 참으로 서로 많은 신학적인 지식을 증가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신학지식이 없는 사람은 그것을 부끄러워하지 말고 기꺼이 다른 사람에게 배워야 합니다. 또한 지식이 있는 사람은 교만하거나 오만하지 않은 자세로 다른 사람에게 지식을 나누어 주어야 합니다. 모든 사람이 이런 신학적인 대화를 더욱 많이 나눈다면 서로 유익이 되고, 서로 가르침을 주고받게 될 것입니다.


자기 영혼의 유익을 위해 공부하라

다섯째, 다른 사람에게 칭찬받거나 논쟁에 이기기 위해 지식을 얻으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 자신의 영혼의 유익과 실천을 위해 지식을 추구해야 합니다. 만일 칭찬받는 것이 목적이 되면, 여러분은 진리를 아는 지식에 이르지 못할 것이며, 자기 지식을 자랑하는 사람들의 경우처럼 오류에 빠져 파멸하게 될 것입니다. 만일 많은 합리적인 지식을 얻는 것만이 여러분의 목적이 되면, 그런 지식은 여러분에게 유익이 되기보다 여러분을 교만하게 만들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8장 1절“지식은 교만하게 하며”라고 말합니다.

 

기도하며 공부하라

여섯째, 여러분이 이런 지식을 추구하는 데 있어 하나님이 여러분을 인도해 주고, 여러분에게 복을 주시기를 기도하십시오. 야고보 사도는 야고보서 1장 5절에서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거룩한 지식의 원천입니다.

잠언 2장 6절“대저 여호와는 지혜를 주시며 지식과 명철을 그 입에서 내심이여”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자신이 눈이 멀었고 무지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하다는 것을 잘 알면, 오류에 빠지지 않고 참된 지식을 얻을 수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3장 18절“너희 중에 누구든지 이 세상에서 지혜 있는 줄로 생각하거든 미련한 자가 되어라”고 말합니다.

 

실천하며 공부하라

일곱째, 여러분이 가진 지식을 실천하십시오. 배운 것을 실천하는 것이 더 많은 지식을 얻는 방법이 될 것입니다. 시편 기자는 자신의 경험을 통해 하나님의 진리를 공부하는 데 있어 이런 방법을 사용하도록 권면하고 있습니다. 시편 119장 100절에 이것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주의 법도를 지키므로 나의 명철함이 노인보다 승하니이다.” 또한 그리스도께서도 요한복음 7장 17절에서도 똑같은 방법을 이렇게 권면합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