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조나단에드워즈

조나단 에드워즈의 회심기(1)

새벽지기1 2016. 3. 23. 06:57

<개인적인 이야기Personal Narrative> / 조나단 에드워즈

                            An account of his early years and testimony to his own saving faith in Christ.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 얻은 믿음에 대한 간증과 그의 어린 시절 이야기

   

나는 어린 시절부터 영혼(soul)과 그 활동에 관해 관심이 많았다. 그러나 두 번의 각성의 시기보다도 더 크게 변화되는 새로운 경험을 했던 적은 없었다.

그 첫 번째는 아직 대학에 입학하기 전인 소년 시절에 아버지의 교인들과 함께 각성하는 경험이었다. 나는 그때 매우 감격하여, 여러 달 동안 신앙과 내 영혼의 구원문제에 관해 생각했다. 그래서 구원에 요구되는 일에 충실했다. 하루에도 다섯 번 골방기도를 드렸고, 친구들과 신앙적인 대화를 나누면서 많은 시간을 그들과 함께 기도로 보냈다. 그때 나는 신앙에 어떤 기쁨 같은 것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음을 깨달았다.

그 후 나는 신앙에 경도되어 의로운 기쁨을 느꼈다. 그리고 신앙적인 의무를 충분히 하는 것이 나의 기쁨이 된다는 것을 알았다. 학교 친구들과 함께 개울가의 한적한 곳에 오두막을 만들어 놓고, 그곳을 기도처로 삼았다. 나는 그 옆의 숲 속에 나만의 기도처를 만들어놓고 기도하였다. 그렇게 기도할 때 나는 때때로 큰 감동을 받았다. 나의 감정은 매우 고무되었으며, 쉽게 감동받았고, 신앙적인 의무를 충실히 이행하는 것이 내게 큰 기쁨을 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나는 그런 감정과 만족감을 진정한 신앙적인 기쁨이며, 은혜라고 착각했다는 것을 후에 알았다.

 

사실 시간이 어느 정도 흐르자 전에 느꼈던 죄의 뉘우침이 사라졌고, 그로 인한 감정과 기쁨을 잃어버렸으며, 지속적으로 해오던 골방기도도 하지 않게 되었다. 그런데 대학 후반기에 들어서 조금씩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그런 뉘우침을 기쁘게 여기셨는지 하나님은 나에게 늑막염에 걸리게 하시어, 나는 매일 밤 지옥에 있는 무덤 구렁텅이까지 갔다 와야 했다. 그러나 얼마 후 회복되었고, 그 후 다시 예전의 죄악의 생활로 돌아갔다.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더 이상 고통을 허락하시지도 않으셨고, 한동안 침묵하셨다. 나는 많은 사악한 습성으로 인해 내적으로 괴로웠으며, 반복적으로 하나님께 맹세하고 죄 문제를 해결하려 했지만 다시 똑같은 문제에 봉착하곤 했다.

 

얼마 후 나는 전처럼 사악하게 살던 생활방식과 외적인 죄(outward sin)를 다 버렸다. 그리고 구원받기를 간구하면서 종교적 의무를 다했다. 그러나 첫 번째 각성 때처럼 기쁨이나 즐거움을 경험하지는 못했다. 당시 나의 관심은 내적인(inward) 생활이었는데, 그것에 관해 생각할 때마다 갈등이 점점 커져갔다. 그러나 나에게 구원의 길은 끔찍하게 고통스러운 것으로 보여서 때때로 구원받는 것에 관해 의문이 일어났다. 게다가 그런 고통스러운 과정이 계속 되는 것은 아닌지 의심이 됐다. 하지만 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구원의 길을 찾았다. 나의 관심은 내적인 생각과 투쟁으로 가득 찼으나, 그것이 꼭 공포스러운(fear) 것으로만 표현하기에는 적당하지 않은 것 같았다.

 

어렸을 때부터 나에게는, 하나님께서 택한 사람에게 영생을 주시고, 버리운 바 된 사람에게 영원한 지옥을 준비한다는 선택론의 교리를 믿음으로 받아들이지 못해 영적으로 성숙하는 데 큰 장애가 되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끔찍한 교리로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두 번째 각성의 시기에는 선택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이 아주 만족스러웠고, 그의 기뻐하시는 뜻에 따라 인간들의 길이 정해졌다는 것에 큰 확신이 들었고 그래서 전적으로 믿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이 어떻게, 어떤 수단으로 그렇게 됐는지는 당시에도, 그리고 그 후 긴 시간이 지난 후에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런데 성령님이 오셔서 특별한 감화를 주셨을 때 그것이 옳다는 것을 온전히 깨달았다. 그래서 나의 마음은 선택론에 관한 신앙의 장애물과 흠집에 종지부를 찍었다. 그 결과 내 마음에 하나님의 주권에 관해서, 바로 그때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고 지금까지 그 확신에는 변함이 없다.

  

하나님께서 자비를 베푸실 자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강퍅하게 할 자를 강퍅하게 하신다는 교리에 대해서 절대적으로 믿게 된 후부터, 신앙의 걸림돌이 제거되었다. 또한 내 마음속에서는 구원과 저주의 면에서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공의를 때때로 눈으로 보는 것만큼이나 확신하게 되었다. 첫 각성 때와는 달리 나는 종종 전에 알았던 것과는 또 다른 주님의 주권에 관해서도 깨닫게 되었다. 나는 자주 '죄의 회개'만이 아니라 '기쁨의 확신'도 경험했다. 그 교리는 매우 기쁘고 즐겁고, 달콤하게 느껴졌다. 비로소 나는 절대주권이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전적으로 믿게 되었다. 그러나 첫 번째 뉘우침 때는 그렇지 못했다.

 

내가 하나님과 하나님께 속한 것들에 대해서 내적인 달콤한 즐거움을 처음으로 경험한 것은 디모데전서 117을 읽었을 때였다. 만세의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내가 그 말씀을 읽고 있었을 때, 내 영혼 속으로 하나님의 영광에 관한 느낌이, 내가 이전에 경험했던 어떤 것과도 완전히 다른 새로운 느낌이 내 영혼으로 들어왔다. 아니 영혼 속에 퍼져 들어갔다는(diffused through) 표현이 적절할 것이다. 성경의 다른 어떤 구절도 그와 같이 보인 적이 없었다. 나는 하나님께서는 얼마나 훌륭하시고 아름다우신 분이신가, 그리고 만일 내가 천국에서 그러하신 하나님과 더불어 즐거이 교제할 수 있다면, 하나님께만 온통 빠져 있을 수 있다면,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영원토록 그분 안에 삼키어진다면 그 얼마나 행복할 것인가를 혼자 생각했다. 나는 계속해서 찬송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주님께 기도하러 갔는데, 전과는 완전히 다르게 그 시간이 무척 새로운 즐거운 류의 감격으로 다가왔다. 그러나 이때 영적으로 온전히 구원이 임했다고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나는 계속해서 무엇인가를 말했는데, 말하자면 그러한 성경말씀을 혼자 노래하고 있었다. 기도하러 갔는데, 전과는 완전히 다르게 그를 즐거워하며 기도했다. 그러나 이러한 경험이 어떤 영적이거나 또는 구원에 이르는 것이었다고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그때부터 나는 그리스도와 그의 속죄의 사역과 그에 의한 구원의 은혜에 대해서 새롭게 알게 되었다. 항상 내적인 달콤함이 마음속으로 스며들어 와서 그에 대한 아름다움을 본 나는 찬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 나의 이성은 온통 그리스도께 사로잡혀 주님에 대한 묵상과 말씀을 읽는 데 시간을 다 보냈다. 그의 인성의 아름다움과 완전함, 그분에게 있는 자유를 주시는 사랑스러운 은혜로 충만하게 되었다. 나는 그런 고상한 주제에 대해서 그렇게 기쁨을 주는 책은 읽어 본 적이 없다. 아가서 21 말씀에서 나는 샤론의 꽃이요, 골짜기의 백합화라는 구절이 무척 감격스럽게 다가왔다. 그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아름다움과 사랑의 대명사처럼 달콤하게 여겨졌기 때문이다. 아가서나에게 무척 기쁨으로 다가왔는데, 그 당시 이 말씀을 읽으면 내적인 달콤함으로 인해 찬양을 멈출 수가 없었다. 굳이 침묵하지 않고 표현해야 한다면 비록 어떻게 표현하지 알 수 없으나, 어쨌든 그 느낌은 이 세상의 모든 것으로부터 달콤함만을 추출해 낸 것 같았다. 때때로 어떤 영상과 고정된 생각 또는 상상에 사로잡혔는데, 마치 내가 산속에 혼자 있는 것 같았고, 세속에서 떨어져 고요한 광야에 있다고 생각되었다. 하나님께서 나를 감싸고 있고, 예수님께서 나와 달콤한 대화를 나누는 것 같았다. 신성한 감격이 갑작스럽게 불붙어, 말하자면 달콤함의 불이 내 마음에 비추었다. 영혼의 격정이랄까, 그러나 그것을 표현할 길은 없다.

 

나는 처음으로 그런 것을 경험한 지 오래지 않아, 내 마음에 일어났던 것들을 아버지께 설명해드렸다. 대화가 끝났을 때 나는 정말 많은 감동을 받았고, 혼자서 아버지의 조용한 목초지로 찬양하기 위해 걸어갔다. 걷는 동안 하늘의 구름을 쳐다보았을 때 나는 하나님의 은혜와 영광이 너무나 달콤하여 그것을 어떻게 말로 표현해야 할지 알지 못했다. 그 광경은 두 가지의 달콤한 것으로 연합된 것처럼 보였다. 장엄하면서 온유하고, 달콤하고 부드러우면서 거룩하고, 아주 부드러우면서 달콤하고, 매우 높고 웅장하면서도 아주 부드러웠다.

 

이런 신성한 감격에 사로잡히면서 점점 더 나는 활동적이 되었고, 내적인 달콤함을 맛보게 되었다. 사물의 모습이 모두 달라 보였다. 모든 사물 속에 하나님의 영광의 고요함과 달콤함이 나타나 보이는 듯했다.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지혜와 순결과 사랑이 만물 안에 나타나 보이는 듯했다. 해와 달과 별들 안에, 구름과 푸른 하늘 안에, 풀 포기와 꽃들과 나무 안에, 그리고 물들과 모든 자연 안에 하나님의 아름다우심이 나타나 보이는 듯했다. 나는 종종 앉아서 한참동안 달을 쳐다보곤 했다. 낮에는 하늘에 떠다니는 구름을 바라보면서, 그 속에 거하시는 하나님의 달콤한 영광을 보았다. 그때 창조주이시며 구원자이신 주님에 대한 찬양이 조용히 찬양 드렸다.

 

그리고 특이하게도 전에는 내게 무척 무섭게 보였던 천둥과 번개가 그때는 무척 아름답게 느껴졌다. 에 나는 천둥치며 폭풍우가 불 때는 몹시 두려워했었는데, 이제는 반대로 그것이 나를 즐겁게 했다. 이제는 천둥을 동반한 폭풍이 막 일어나는 것을 보면 그 속에서 하나님을 느꼈다. 그리고 이제는 그럴 때면 구름을 관찰하고, 번개가 치는 것을 유심히 보고, 하나님께서 보내시는 천둥의 장엄하고 두려움을 자아내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기회로 삼는다. 그것은 종종 넘치도록 즐거운 일이었으며, 나로 하여금 위대하시고 영광스러운 나의 하나님을 달콤히 묵상하도록 해 주었다.

 

그런 상태를 만족감을 느꼈지만, 완전히 소망을 이루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또한 나는 더욱 맹렬히 주님을 찾았으며, 더욱더 거룩해지기 위해서 노력했다. 내 마음은 그런 생각들로 가득 차서, 깨어질 준비가 되어 있었다. 시편 11928의 말씀이 종종 내 마음에 떠올랐다.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망하나이다.” 나는 자주 더 빨리 하나님을 찾지 못하고 은혜 안에서 더 성장하지 못한 것 때문에 통곡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내 마음이 매우 신적인 것에 고정되어 있어서 찬양이 절로 솟아났다. 그래서 대부분의 시간을 신성에 관한 것들을 묵상하면서 보냈다. 자주 숲을 걸으며 조용한 곳에서 묵상을 하거나, 혼잣말을 하듯이 주님과 대화하며 기도했다. 당시에 나는 그런 식으로 주님께 찬양을 돌려 드렸으며 기도할 때마다 거의 절규하듯이 어디서나 기도했다. 기도는 나에게 너무나 자연스러웠는데, 기도할 때면 마치 마음속에 뜨거운 불을 내뿜는 듯 했다.

 

그때 내가 신앙 안에서 느끼게 된 즐거움은 그 전에, 즉 내가 소년이었을 때 느꼈던 것과는 너무나도 다른 것이었다. 그때에 내가 느꼈던 것을 지금과 비교하자면 정상인과 나면서부터 맹인인 사람이 유쾌하고 아름다운 색깔에 대해 가지는 느낌의 차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시 누리게 된 즐거움은 더욱 내적이고, 순수하고, 영혼을 살리고, 영혼을 새롭게 하는 그런 즐거움이었다. 이에 비하여 이전의 즐거움들은 결코 가슴 깊숙이 도달하지 못했었고, 하나님께 속한 것들의 탁월함을 보았기 때문에 생긴 것이 아니었다. 또는 영혼을 만족케 하고 생명을 주는 선한 것을 맛봄으로써 생긴 것도 아니었다.

 

그런 신성에 대한 느낌은 뉴욕에서 설교할 때까지 커져갔다. 그때는 회심하고 1년 반이 지난 후였다. 나는 전보다 더욱 신적인 것에 민감해졌다. 하나님과 거룩에 대한 열망은 더욱 증가했다. 순결, 겸손, 거룩, 천국의 신앙이 더욱 나를 온화하게 했다. 나는 모든 방면에서 진실한 크리스천이 되려는 마음으로 불타올랐다. 축복하시는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려고 했으며, 모든 것에서 순결과 기쁨 그리고 복음의 축복된 법칙에 따라 살아가려고 노력했다.

나는 그러한 법칙을 더욱더 갈급하였고, 더욱더 그러한 법칙을 추구하며 살아가기 위해 열심을 내었다.

 

그렇게 해서 나는 계속적으로 밤낮으로 투쟁했으며 어떻게 해야 내가 더욱 거룩해지는지, 더욱 더 거룩하게 살 수 있는지, 더욱 하나님의 참 자녀가 될 수 있는지, 하나님의 제자가 될 수 있는지 지속적으로 의문을 제기했다. 그때 나는 전보다 더욱 거룩하고 진실하고, 은혜로운 생활을 추구했다. 나는 전에 내 인생에서 추구해 온 것보다 더욱 계속해서 나 자신을 살폈고, 좀 더 좋은 길과 수단을 연구하고 찾았으며, 어떻게 하면 거룩하게 살지, 더욱 부지런하고, 진실하게 살 수 있는지를 깊이 생각했다.

 

그러나 여전히 나의 힘에 의지하고 있어, 후에 그런 태도가 나에게 큰 상처를 주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전에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내 경험은 나를 가르치지 않고, 매사에 극도의 무기력에 휩싸이게 했다. 내 마음 바닥에는 깊고 비밀스러운 부패와 기만이 있었다. 그러나 나는 더욱더 경건해지기를 추구했고,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도록 노력했다. 내가 바랐던 천국은 거룩한 천국이었다. 하나님과 함께 거하며, 신성한 사랑을 영원히 누리면서 거룩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꿈꾸었다. 내 마음은 하늘에 대한 기쁨과 찬양으로 가득 찼으며 완전한 거룩과 겸손과 사랑으로 충만했다. 천국에서 성도들은 자신의 사랑을 그리스도에게 표현할 수 있는 커다란 행복으로 가득 차리라고 생각되었다. 그 심정을 원하는 대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 큰 짐이자 장애였다. 영혼의 내적인 열심이 방해를 받아, 막힌 것 같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없었다. 나는 종종 천국에서는 자유롭고 완전하게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을 완전하고도 자유롭게 표출하고 표현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곤 했다. 천국은 기쁨으로 가득한 사랑의 세계로서, 생생하고 순전하며 겸손함과 천국의 신성한 사랑으로 이루진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거룩에 대한 생각에 잠겨, 자주 혼잣말을 했다.

복음이 말한 것처럼 나는 거룩을 확실히 사랑해.’ 황홀한 기쁨과, 지극한 아름다움과 온화함신성한 아름다운 것 외에 천국에는 아무것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그곳은 이 땅의 모든 진흙탕과 더러운 것과 심히 비교가 되었다.

 

그 당시 나는 거룩함에 대해 묵상하면서 글을 기록하곤 했는데, 거룩함은 달콤하고, 평화롭고, 매혹적이며, 진지하고, 고요함이라고 생각되었다. 그것은 표현할 수 없는 순수하고, 빛나며, 평화롭고, 활기찬 것이었다. , 거룩은 하나님의 뜰이나 정원 같았고, 모든 아름다운 꽃들이 가득 찬 곳 같았다. 모든 기쁨, 즐거움, 평화로움이 있는 곳. 달콤한 고요를 즐길 수 있고, 부드럽고 생생한 햇빛을 감상할 수 있는 곳 이었다.

 

당시 나는 묵상 노트에 이렇게 기록했다.

진실한 크리스천의 영혼은 우리가 봄에 보게 되는 순백의 작은 꽃과 같다. 땅 위에 핀 작고 조그마한 그 꽃은 영광스런 태양의 유쾌한 빛을 받아 그 빛을 속으로 품고 평온한 황홀감을 즐기면서 주위에 달콤한 향기를 퍼트린다. 그 꽃은 주위의 다른 꽃들 사이에서 평화스럽고 사랑스럽게 있다가 태양의 빛을 머금기 위해 꽃잎을 활짝 편다.”

 

나는 겸손하고 가난한 영혼을 마음을 찢을 만큼 사랑해서 거룩을 추구하는 것 외에 다른 곳에 마음을 조금도 두지 않았다. 오직 그것만을 갈구했다. 내 마음은 이것을 철저히 구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먼지처럼 낮아졌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고, 하나님이 모든 것이 되시며 나는 단지 어린아이와 같았다.

 

뉴욕에 있었을 때 참된 신앙을 갖기 전에 얼마나 많은 시간을 헛되이 보냈는가를 생각하면서 과거의 삶에 대해서 많은 반성을 하게 되었다. 그때 얼마나 내가 악했는지 생각하니 한동안 쉬지 않고 눈물이 솟구쳐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