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박진호컬럼

사단왕국 확장에 동역하는 목사와 신자들

새벽지기1 2016. 3. 2. 06:30

“나귀 새끼를 예수께로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걸쳐두매 예수께서 타시니 많은 사람은 자기 겉옷과 다른 이들은 밭에서 벤 나뭇가지를 길에 펴며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자들이 소리 지르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막11:7-10)


흔히들 “교회 따로 삶 따로”라고 표현하듯이 예수를 믿고도 그 삶에 전혀 변화가 없는 신자들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목사가 성경공부 참석을 독려하며 또 개인적으로 만나 여러 권면을 합니다. 그 성의를 무시할 수 없고 사람들 이목도 있어서인지 잠시 겉으로는 바뀌는 척 하다가도 얼마 안 가서 옛날 모습으로 되돌아가버리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거의 모든 목사들이 목회의 가장 큰 고민거리의 하나로 이런 사람들을 꼽는데 주저하지 않습니다. 그만큼 성경공부 시키고 함께 기도했으면 변화될 때도 되었는데 안 된다는 것입니다. 변화가 안 되면 조용히 있어 주면 좋겠는데 오히려 문제만 일으키니 미칠 노릇입니다.


이는 엄밀히 따지면 그 사람보다는 목사의 잘못입니다. 목사의 인격적, 금전적, 성적인 어떤 결함 때문에 그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목사 스스로 성경공부가 만능일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주 큰 착각입니다. 물론 성경말씀은 좌우에 날선 칼 같이 예리하여 사람의 심령을 찌르는 능력이 있습니다. 성경을 전혀 교리적으로 깊이 공부하지 않고 단순히 쓰인 말씀만 보고도 변화 받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은 성경을 정말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순전히 믿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성경공부를 아무리 해도 변화되지 않는 사람은 단순히 성경을 공부한 것뿐입니다. 목사가 성경공부하자고 하니까 자기도 공부만 한 것입니다. 성경을 기독교의 경전이라고 생각했지 하나님의 말씀으로 생각한 적이 없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성경에 대한 근본 생각이 바뀌지 않고는 말씀이 아무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는데도 목사는 성경 공부하고 기도만 하면 변화될 줄 믿은 것이 잘못인 것입니다.


본문은 예수님이 종려주일에 예루살렘으로 입성하는 유명한 장면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야로서 이제 곧 새로운 다윗 왕국을 강력하게 세워줄 것을 기대하고 열광했습니다. 사람들은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눅19:38)라고 찬양하면서 정말로 왕의 입성절차에 준하는 의식으로 예수님을 맞아들였습니다.


그런 그들이 며칠도 안 가서 그 왕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태도가 돌변했습니다. 최상의 찬양이 최대의 저주로 바뀌는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상황이 발생한 것입니다. 성경공부를 열심히 시켜 조금 변화되는 것 같더니 다시 되돌아가는 것과는 도저히 비교가 안 될 정도입니다. 물론 잘 알다시피 사람들은 죄에서 구원해주는 수난 받는 종보다는 로마제국을 물리치고 강력한 유대왕국을 건설해줄 메시야를 기대했기 때문입니다.


만약 예수님이 힘센 말을 타고 입성했더라면 상황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제자들도 칼과 창으로 무장하여 따랐다면 아마 십자가 처형 사건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 후 상황이 어떤 식으로 전개되었더라도 예수님이 자기들이 기대한 대로 행동해주었기 때문에 절대로 저주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모두가 칼을 들고 입성 때의 그 열성으로 끝까지 따랐을 것입니다. 


대신에 예수님은 나귀 그것도 새끼를 타고 입성했습니다. 왕의 입성식치고는 너무 초라해 보이지 않습니까? 그러나 고대 근동에선 왕이 평화의 메시지를 전할 때는 나귀를, 전쟁을 칠 때는 말을 타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말하자면 예수님은 평화의 메시지를 전하러 예루살렘에 입성한 것입니다. 로마와 결전하지 않고 다만 죄에 빠진 인간을 하나님과 화목시켜 구원으로 인도하겠다는 당신의 뜻을 이미 그 입성하는 모습으로 사람들에게 드러낸 것입니다.


다른 말로 예수님은 정확하게 가르쳤는데도 사람들이 그 가르침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않았고 그 이유는 사람들의 잘못된 기대 때문이었습니다. 아무 무장도 없이 새끼 나귀를 탔는데도 사람들은 깊이 생각하지 않고 그저 자기들 소원 달성에 목을 매달며 흥분했던 것입니다.  왕도 나귀를 탈 때가 있으니 문제 삼지 않았고 어쩌면 그런 비무장도 로마 당국을 속이려는 예수님의 계책일 수 있다고 지레짐작하여 더 열광했을지(?) 모릅니다. 


요컨대 분명한 하나님의 징조와 경고, 심지어 하나님 당신이 직접 와서 보여준 것도 인간은 자기 정욕에 부합되지 않으면 얼마든지 걷어찬다는 것입니다. 바로 선악과 사건이 그렇지 않습니까?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상한 것이 아니라 원죄 하에 있는 모든 인간은 다 그렇습니다. 아니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도 인정했듯이 사단에 묶여서 자기들이 하는 짓이 무엇인지 몰랐습니다. 사람들이 제대로 알아먹을 수준이라면 예수님이 단순히 말로서 가르쳤지 구태여 십자가에 갔을 리가 만무하지 않습니까?


오늘날의 신자도 동일합니다. 아무리 성경공부해도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먼저 받아들여지지 않고는 절대 변화가 없습니다. 다른 말로 자신이 신앙을 가지는 이유와 목적이 먼저 바뀌어야 합니다. 잘 믿어서 병을 고치고, 돈을 벌며,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자는 모든 관심을 그 목적 달성에 쏟고 그 일을 위해 기도하지 자기가 변화되는 데는 별반 신경 쓰지 않습니다. 그러다 목적이 달성되면 다시 원래 모습으로 되돌아가버립니다. 그 동안에는 체면 때문에 조금 바뀐 척 하거나 바뀌어야 문제 해결된다고 하니까 바뀌려고 노력한 것뿐입니다.


심지어 도덕적으로 선해지겠다는 마음으로 믿는 자도 성경이 성경으로서 역할을 하지 못합니다. 예수님이 유일한 구원의 길이라는 것을 교회에서 하도 들었으니 그냥 수긍하는 척만 하지 속으로는 다른 종교도 다 인정해 주고 있습니다. 술 담배와 제사 허용하는 카토릭이 더 좋아 보이고 실제로 자기도 그런 문제를 관용하고 지냅니다. 그러니 교회 출석한지 십   년이 지난 집사, 장로가 그런 문제도 해결하지 못한다는 지적을 받고 있지 않습니까?


그럼 이제 도무지 변화가 안 되는 교인들을 바로 잡을 수 있는 해결책이 나타났습니다. 예수를 믿기 전의 모든 자연인의 영적 상태는 그를 못 박은 이스라엘 사람과 동일합니다. 모든 세대의 모든 사람이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기대를 갖고 있으며 또 그런 기대를 채우려고 교회를 나옵니다. 그럼 교회가 할 일은 무엇입니까? 당연히 그 잘못된 기대를 깨트려주어야 합니다. 신앙을 가지려는 목적이 잘못되었으므로 그것부터 바로 잡아주면 자연히 그 뒤는 해결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많은 목사들이 당장에 교인이 줄 것이라는 한 가지 염려 때문에 신자들의 그 잘못된 기대를 깨트릴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기대에 부화뇌동하거나 먼저 조장하는 경우마저 있습니다. 말하자면 목사가 신자들에게 잘못된 기대를 직간접으로 주입시켜 놓고 신자더러 선하게 변화되지 않는다고 야단치면 이런 모순이 없습니다. 또 그래서 어떻게 하든 계명을 가르쳐서 변화시키는 것이 급선무라고 생각한다면 이만한 오산도 없습니다.


목사는 잘못된 기대를 주입하는 일부터 당장 그만 두어야 합니다.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뜻을 분명히 드러내고 스스로 십자가에 죽는 자리에 올라가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목사 혼자만의 잘못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전체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막는 것입니다. 소경된 인도자가 같이 소경된 교인들을 이끌고 낭떠러지로 향하는 꼴입니다. 그래서 거꾸로 사단의 나라를 교회를 통해 확장시키는 너무나도 무시무시하고 엄청난 죄를 짓고 있는 셈입니다.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은 성경공부나 기도모임이 아니며, 목사도 심지어 성경 말씀도 아닙니다. 인생을 살아가는 근본적인 가치관과 목적이 바뀌어야만 그 사람이 바뀝니다. 그리고 그것은 오직 성령이 그 죄인의 영에 간섭하여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로 더럽고 추한 한 영혼을 새롭게 하는 사역을 통해서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따라서 교회의 모든 사역은 신자로 언제 어디서든 십자가 예수님 앞에 엎드리도록 하는 일에 집중 되어져야만 합니다. 


목사가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함이 없는 말은 “사람이 근본적으로 변화 받으려면 예수님의 십자가 아래 자신의 전부가 발가벗겨져 항복하는 길 외에 없다”는 것입니다. 다른 모든 종교가 사람들의 기대대로 채워주는 일을 한다면 오직 개신교만은 그 기대를 부수는 일을 해야만 합니다. 실제로 예수님이 그랬고 또 그래서 그 분만이 유일한 구원의 길인 것입니다.

사람을 목사가 나서서 변화시키려 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만 증거 하면 됩니다. 모든 메시지, 성경공부, 기도모임에 오직 예수만 강조해야 합니다. 신자가  변화되는 것은 하나님과 본인의 책임입니다. 만약 자기 기대대로 교회가 채워주지 않는 것이 싫다면 그 사람은 교회를 떠나게 될 것입니다. 그래도 목사는 십자가 예수만 전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나라를 사람 숫자 늘려서 확장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직 십자가 복음 안에 바로 선 한 명의 남은 자만으로라도 이끌어 가시기를 원하십니다.


당신은 예수님을 어떤 목적으로 믿으며 교회에 어떤 기대를 갖고 출석하고 있습니까? 또 그 기대가 현재 출석하고 있는 교회로부터 충족해집니까? 혹시라도 사단의 나라 확장에 서로 동역하고 있지 않는지 정말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되돌아 보셔야 합니다. 예수님을 말을 탄 왕으로 모시는지, 새끼 나귀 탄 수난 받는 종으로 모시는지 따져보라는 뜻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