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김기석목사

오늘의 사도신경9 '나는 성령을 믿습니다'

새벽지기1 2015. 12. 4. 12:56


세기말에서 세기초로 이어지는 이 전환기의 화두는 '영성'이다. 바야흐로 '영'의 전성시대라는 말이다.

영성에 관해 말하지 않으면 왠지 시대에 뒤진 것 같은 분위기이다. 서점이나 전철역에서 서성거리다가 느닷없이 다가와 "도를 아십니까?" 하고 말을 건네는 수상한 젊은이들뿐만 아니라, 최고의 지성을 자랑하는 학자들과 대중예술인들도 영성에 대해 한 두마디쯤 할 줄 알아야 명함이라도 내놓을 수 있게 되었다. 인도와 티베트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노자 강의에 사람들이 열광하는 것은 역설적으로 이 시대가 감성적으로, 영적으로 메마르고 척박하고 천박하다는 사실을 증언하고 있다. 사람들은 목이 마르다.

 

기독교는 지금까지 영의 세계에 관해 아는 것은 오직 '우리'뿐이라고 생각해왔다.

서구의 신학이 기독론에 집중됨으로써 '영'이 망각되었다는 자기 반성을 하고 있을 때, 이땅의 많은 부흥사들은 영의 세계를 모르는 신학자들이 한국의 신학을 망치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성령운동에 열중했다. 불고 싶은 곳으로 불어가는 성령의 바람이 하나님의 '큰 종'(?)들이 파놓은 골로만 불어가는지는 모르겠거니와, 나는 솔직히 말해 성령을 받았다는 사람들이 무섭다. 어떤 때는 싫기까지 하다. 성령의 임재 속에 살아가는 사람이 무섭다는 말은 아니다. 자신이 성령을 받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독선과 배타성과 교만과 위선이 무섭다는 말이다. 나는 고개를 빳빳이 치켜들고 '당신이 영에 관해 무엇을 알겠느냐?'는 투로 사람들을 바라보는 그들의 눈빛을 볼 때마다 섬뜩함을 느낀다.

 

성령을 받는다는 말은 오해의 소지가 많다. 성령이 야구공도 아닌데 누가 던지고 누가 받는다는 말인가? 하긴 어떤 이들은 소맷자락을 휘날리며 '성령 받으라'고 교인들을 향해 악을 쓰기도 한다. 성령은 어떤 경우에도 인위적인 노력으로 누군가에게 부여될 수도 없고, 조작될 수도 없다. 성령은 '바람'(pneuma)이어서 불고 싶은 데로 불뿐이다. 바람의 실체를 가늠하기 어렵듯이 성령은 실체론적으로 규정하기 어렵다. 사람들은 흔히 성령을 '은사'와 동일시한다. 방언, 예언, 병고침, 통역, 영의 분별, 입신…. 이런 은사들은 말 그대로 은혜받은 이들에게 주어진 선물이지 성령 그 자체는 아니다. 우리는 바람이 불 때 흔들리는 나뭇잎과 자욱히 일어나는 먼지를 보고, 혹은 뺨을 어루만지는 차가운 기운을 느끼면서 바람의 존재를 가늠하지 않던가. 근원적으로 '바람'의 속성으로 인식되는 성령은 명사라기보다는 동사이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이름인 야웨가 '그는 ∼을 하신다'를 뜻하듯이, 성령도 무언가를 하거나 하게 하신다.

 

그러면 성령이 하는 일은 무엇인가? 성령은 우리 가운데 임하셔서 그리스도의 현존을 경험하게 한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요14:26) 성령은 우리를 진리의 세계로 이끈다. 현실의 고단함에 짓눌려 가물거리고 있는 진리의 불꽃에 기름을 공급한다. 우리 눈과 귀, 그리고 마음을 뒤덮고있는 욕망의 비늘을 벗겨내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게 한다. 두려움과 절망과 슬픔의 너울을 벗겨 살아있는 존재가 되게 한다. 한마디로 성령은 우리 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불러일으킨다. 성령이 임한 곳에는 그리스도 사건이 현재화된다. 그래서 무기력한 생명을 일으켜 세우고, 인위적으로 나뉘었던 것을 하나되게 한다. 영들을 분별하는 시금석은 바로 그리스도의 영이다. 성령의 임재 속에 있는 사람은 예수와 닮은 사람이다. 그의 눈빛이, 말씨가, 몸가짐이, 마음가짐이, 다른 이들을 대하는 태도가 예수와 닮았다면 그는 영의 임재 속에 사는 사람이다. 하지만 많은 은사를 받았다 해도 그에게서 예수를 느낄 수 없다면 그는 '유사품'이지 '정품'은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기'(氣)와 성령의 유사점에 주목한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 '기'는 '성령'이 아니다. 물론 나는 '기'에 대해 말할 자격이 없다. 기 수련을 해본 적도 없고, 체계적인 공부를 해본 적도 없으니까. 그러나 한가지는 안다. 우리가 믿는 것은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 속에 드러난 바로 그 영이지, '기'는 아니다.

 

여러 해 전 나는 어느 학교의 교목으로 일하고 있었다. 늦은 봄날 오후의 혼곤함에 겨워 연신 하품을 하며 앉아있는데 나지막한 노크 소리가 들렸다. 문을 열고 들어선 것은 낯선 얼굴의 학생이었다. 주저하는듯한 아이의 눈에는 벌써 눈물이 서려있었다. 심상치 않음을 느낀 나는 학생에게 자리를 권하고 커피물을 올렸다. 마음을 가다듬을 여유를 주기 위해서였다. 커피잔을 사이에 놓고 둘은 마주 앉았지만 그의 입은 열리지 않았다. 대신 하염없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무슨 어려운 일이 있나?" 그 말에 학생은 어렵게 말문을 열었다. '고등학교 3학년인 지금 나는 무엇을 하고 싶은지 비로소 발견했다. 나는 교사가 되고 싶다. 하지만 나는 교사가 될 자격이 없다.' 무슨 소린가 싶어 물끄러미 바라보았더니, 그 학생은 비교적 또렷한 목소리로 자기의 죄를 고백했다. 초등학교 4학년이었던 8년 전 그 학생은 친구 집에 갔다. 그 집은 자그마한 구멍가게를 하고 있었는데, 친구의 어머니가 잠깐 자리를 비우면서 가게를 봐달라고 했다. 물건을 팔고 거스름 돈을 주기 위해 금고를 열었다가 아이는 그 속에 들어있는 동전에 마음이 끌렸다. 소용 때문이 아니라 탐심 때문이었다. 그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켜가며 동전 몇 개를 숨겼다. 이런 일이 몇 차례 반복되었다. 훔친 백원 짜리 동전을 '안경집' 속에 숨겨놓았는데, 학교에 가서도 불안하기만 했다. 엄마가 방을 치우러 방에 들어갔다가 혹시라도 안경집에 손이 간다면 자기의 도둑질이 발각되리라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그는 어느 날 집에 돌아오자마자 안경집을 들고 밖으로 나가 인적이 없는 골목길을 돌아다니면서 동전을 다 버렸다. 그리고는 홀가분해졌다. 자기의 죄를 다 잊었다. 그런데 교사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하는 순간 8년 전 자기의 '도둑질'이 비수가 되어 그에게 날아온 것이다.


나는 학생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이상한 감동에 전율했다. 마치 하나님이 내 죄를 고백하라고 그 학생을 보낸 것 같았다. 나는 그 학생에게 이런 취지의 말을 했다. '네가 나를 만나러 온 것은 성령께서 시키신 일이다. 너를 치료하고, 나의 허물을 용서하시기 위해서 말이다. 나도 또한 어린 시절 만화가게에 갈 생각으로 아버지의 주머니를 턴 적이 있다. 그뿐 아니라 살아오면서 얼마나 많은 죄를 저질렀는지 모른다. 미워하고, 속이고, 상처를 입히고, 모독하고…. 그런데도 나는 지금 목사로 그분의 일을 하고 있다. 주님께서 나를 받아주신 것처럼 너도 이미 받아주셨다. 정히 죄책을 털어버릴 수 없거든 친구의 어머니께 용서를 비는 편지를 보내라.' 우리는 함께 울었고, 함께 기도했다. 며칠 후 그 학생은 친구의 어머니로부터 '네가 내 딸의 친구라는 사실이 참 고맙다.'는 답장을 받았다. 나는 그 학생과 나, 그리고 친구의 어머니의 마음을 하나로 이어준 것이 성령의 역사이고, 우리가 경험한 것이야말로 그리스도 사건이라고 확신한다.

 

성령은 포근한 미풍처럼 불어와 우리 속에 진리의 꽃망울을 맺게도 하지만, 때로는 태풍처럼 불어와 우리의 나른한 일상을 뒤엎기도 한다. 그러나 성령은 못난 자아를 꺾기 위해 우리를 세차게 몰아붙이지도 하지만 결코 짓누르지는 않는다. 바울은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다"(고후3:17) 했다. 성령은 우리를 자유케 한다. 우리를 짓누르고, 압도하는 모든 무거운 짐들을 벗겨낸다. "우리는 성령을 믿습니다."

즐거움에 찬 젊은이여, 이리로 오라
그리하여 열리는 아침을
새로 태어나는 진리의 이미지를 보라.
의심은 달아났다. 이성의 구름도
어두운 논쟁도, 간계한 속임도 달아났다
어리석음이란 하나의 끊임없는 미로,
얽힌 뿌리들이 길을 어지럽힌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거기에 빠졌던가!
그들은 한 밤내 죽은 자들의 뼈 위에 걸려 넘어져,
근심밖에 아무 것도 모르면서,
다른 사람들을 인도하려고 한다, 그들이야말로
인도를 받아야 할 것이면서도.
-윌리엄 블레이크, "옛 시인의 목소리" 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