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김기석목사

오늘의 사도신경 10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을 믿습니다'

새벽지기1 2015. 12. 6. 09:42


며칠 전 한 어여쁜 청년이 허브 화분을 하나 가져왔다. 나는 그것을 책상 위에 올려놓고 가끔 물도 주고, 대화도 하면서 지냈다. 그런데 햇살 좋은 어느 날 오후 말끄러미 그 화분을 바라보다가 깜짝 놀랐다. '골든레몬타임'(허브의 이름이다)은 햇빛을 향해 일제히 고개를 돌리고 있었던 것이다. 햇빛을 향한 이 간절한 몸짓을 보면서 나는 24년 전 어느 날을 떠올렸다. 1976년 2월의 어느 늦은 오후, 흑석동의 유수지 강물에 해그림자가 붉게 물들고 있었다. 난간에 기대선 채 그 평화롭고도 고적한 광경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나는 불현 듯 '죽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일터에서 겪었던 비인간적인 대우, 직장을 그만 두고 나와 입시에 매달렸던 날들, 그리고 실패, 중첩되는 가정적인 어려움, 전망조차 없는 삶은 너절하기 이를 데 없었다. 나의 설 땅은 아무 데도 없었다. 죽음만이 출구가 아닐까? 어쩌겠는가? 낭만과 감상이 구별되지 않고, 세상의 눈물보다는 나의 눈물에 더 민감한 나이였으니. 비극으로 각색된 내 감정이 유수지 강물에 사선으로 흐르는 햇살에 두둥실 떠다니고 있을 때, 나는 들었다. 뎅∼뎅∼뎅∼. 리듬을 타고 들려오는 소리는 교회 종소리였다. 이상하게 눈물이 났다. 한번도 가본 적이 없고, 가볼 생각도 없었던 그곳, 그 낯선 곳, 내게는 이방이나 다름없는 그곳에서 울려오는 소리가 왜 내 가슴을 그리도 사로잡았는지 지금도 나는 알지 못한다. 그때 마침 어머니가 내 곁을 지나가고 계셨다. 어머니는 언제나 예배 시작 한 시간 쯤 전에 교회에 가시곤 했던 것이다. 나는 그때 한번도 생각해보지 않은 말을 했다. "어머니, 저도 교회 한번 가볼까요?" 어머니는 내 기색을 가만히 살피시다가 심상하게 말씀하셨다. "그러려므나." 그래서 나는 교회에 갔다. 그리고 교회는 나의 집이 되었다.

문 밖에서 떠돌던 나, 설 땅이 없어서 죽음을 생각하던 나에게 교회는 '문 안'이었고, '설 땅'이었다. 그 땅에서 나는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언제나 선선한 웃음으로 고달픈 이들의 마음을 어루만지던 이, 세속적인 성공과 관계없이 자유롭기 그지없는 실존의 모습을 보여준 이, 배우지 못했으나 한없이 고요했던 이…그들이 살아가는 모습은 내게는 그저 선경(仙境)이었다. 젊은 날의 치기 속에서도 나는 나의 설 땅이 되어준 그 사람들의 내면을 살폈다. '저들 속에 무엇이 있기에 저토록 넉넉하고 자유롭고 고요한가?' 예수, 바로 그분이었다. 김기창 화백의 그림 '해를 삼킨 닭'처럼 그들은 가슴에 예수를 품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들을 통해 예수와 만났다. 그래서 나는 힘주어서 고백한다. "거룩한 공회를 믿습니다."

어른들이 "우리를 죄악된 저 세상에서 부르셔서 구원의 방주에 들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하고 기도할 때도 그 낯선 표현이 일으키는 정서적 이물감에 울렁이면서도 나는 '아멘'으로 화답하는 데 인색하지 않았다. '나'도 그 '우리' 속에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첫사랑의 안개가 걷힌 후 내가 본 교회의 현실은 처참했다. 사람들이 입고 있는 경건의 의상을 한 겹만 벗겨보면 후줄근한 인간의 이기와 탐욕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관광지의 이면 도로를 걷는 것처럼, 아니 서울의 새벽 거리를 걷는 것처럼 욕지기가 났다. '거룩함의 열망', 그것이 과연 교회에 있는가? 물론 '거룩함'은 교회가 추구하는 방향이지 실체가 아님을 안다. 하지만 교회는 적어도 '거룩함에 대한 열망' 시간적 가시태여야 하지 않을까? 하지만 사람들은 오늘의 교회에서 생명의 향기보다는 부패의 악취를 맡는다. 우리는 그렇지 않다고, 다 그런 것은 아니라고 항변해 보아야 소용없다. 옷 로비 사건에 연루된 여인들이 저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자신들의 결백을 주장하더니, 백두사업에 연루된 전직 장관은 모 수도원에서 기자들과 만나 로비스트인 미모의 여성과 '부적절한 관계'가 있었다고 시인했다. 어느 큰 교회에서는 아들을 후계자로 세우는 문제 때문에 해결사까지 동원되었고, 매스컴의 집중 조명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일은 과거사가 아니다. 현재진행형이다. 높은 자리에 올라서기 위해 다른 이를 모함하고 헐뜯는 일은 다반사이고, 돈으로 표를 사는 일도 있다 하니 이게 과연 거룩한 교회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인가? 분명히 말해두자. 그것은 인간의 교회일는지는 몰라도 '거룩한 교회'는 아니다.

1983년 부활절을 앞둔 어느 날 성공회 대강당은 한 신학자의 열정적인 강연으로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그런데 높은 톤으로 원고를 읽어 나가던 그는 갑자기 말을 뚝 끊고 청중들을 바라보았다. 이 느닷없는 포즈에 청중들은 긴장한 채 그를 바라보았고, 잠시 후 그는 스타카토 식으로 단호하게 말했다. "나는 한국 교회를 증오합니다." 청중들은 그 뜻밖의 말에 놀라 깊은 침묵에 빠졌다. 얼마 후 그는 한숨을 내쉬듯 말을 이었다. "그것은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증오할 수밖에 없는 이 기가 막힌, 그리고 심란한 애증(愛憎)의 표현에서 나는 "너희는 내 아버지의 집을 강도의 굴혈로 만들었다"고 외쳤던 예수님의 음성을 들었다. 그리고 그 외침 속에 담겨있는 눈물도 보았다. 불의에 대해 침묵하고, 약자의 신음에 귀를 막고 사는 교회, 신음하는 나사로를 하나의 풍경인 양 문가에 방치하고 부자가 되어가고 있는 교회, 하나님을 사랑하고 인간을 사랑했기에 흘릴 수밖에 없었던 예수의 뜨거운 피가 딱딱한 교리의 화석이 되어버린 교회, 하나님에 대해서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더 많음을 인정하지 못하는 교회에 대한 착잡한 애증이 그의 외침 속에 담겨 있었던 것이다.

증거궤 앞의 휘장 밖에 켜두는 등불이 꺼져서는 안 되는 것처럼(출27:20-21) '거룩에 대한 열망'은 한 순간도 포기할 수 없는 교회의 본질이다. 그런데 '거룩의 길'은 덧보탬의 길이 아니라 덜어냄의 길이다. 자꾸자꾸 덜어내 가난해지고 소박해지고 하나에 가까워질 때 교회는 산 위에 있는 동네처럼 빛을 발하게 된다. 값진 진주를 발견한 상인이 자신의 모든 것을 팔아 그 진주를 사는 것처럼, 하나를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을 때 교회는 비로소 거룩한 그리스도의 교회가 된다. 크기에 대한 열망이 거룩에의 표지가 되려는 열망을 압도할 때, 그래서 자본주의적 논리가 고스란히 교회를 지배할 때 하나님은 눈물을 머금고 촛대를 다른 곳으로 옮기시지 않을까?

거룩에 대한 열망이 깊을수록 사람들은 자기들의 무능을 아파한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7:24) 바울의 이 고백을 거룩에 대한 열망이 없는 사람은 이해할 수 없다. 교회는 성령의 능력 안에서 예수님이 보여주신 사랑과 이해와 조화의 삶을 배우고 익히는 도량이다. 그 속에서 우리는 개별적 자아의 한계를 넘어 더 큰 진리의 세계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러기에 교회는 길 위에 있다. 거듭거듭 자아를 부정하고 더 큰 생명을 입으려는 열망이 교회를 앞으로 나아가게 한다. 세상에는 참 많은 교회가 있다. 하지만 교회는 '하나'(One)이다.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엡4:4) 교회는 하나의 소명이다. 부족한 부분은 서로 채워주고, 진리의 숫돌이 되어 서로의 군더더기를 깎아내라는. 본회퍼의 말처럼 우리는 "구원의 말씀의 담지자와 선포자로서의 동료들을 필요로 한다".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성도의 사귐은 예수 그리스도를 매개로 한 사귐이어야 한다. 일등이 아니면 살아남을 수 없다는 살벌한 구호가 우리의 의식을 옭죄는 이 무한 경쟁 시대에 서로의 허물과 부족함을 사랑으로 덮어주고, 진리 안에서 살아가도록 용기를 북돋워주는 공동체가 있다는 사실은 얼마나 큰 축복인가. 그것이 설사 인간적인 욕망에 의해 얼룩졌다 해도 말이다. 하지만 서두를 필요는 없다. 하나님은 모순 투성이인 현실의 교회를 통해서도 당신의 일을 하고 계시니 말이다. 물론 하나님께는 우리 말고도 다른 종들이 있다는 사실을 항상 인정해야 하지만.

이십여 년 전 나는 문 밖에서 문 안으로 들어온 것에 감격했었고, 지금까지도 나는 여전히 문 안에 머물고 있다.

하지만 하나님이 우리들의 문밖에서 서성거리고 계신 것은 아닌지 두려울 뿐이다. 교회가 거룩을 지향하는 공동체로, 상처 입은 존재를 감싸안는 품으로, 사랑과 이해와 조화로운 삶의 모델로, 그리고 하나님의 싸움에 동참하는 전위대로 날마다 탈바꿈하기를 바라는 것은 우리만의 희망 사항일까?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을 믿습니다."